논평문: 장승구의 “동서사상의 만남과 정약용 인간관의 쟁점”을 읽고
이을상(동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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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장승구)는 이 논문에서 다산의 인간관을 동서사상의 만남이란 관점에서 해석하려 했다. 이런 관점을 머리말에서 “해석학적 위치”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이름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읽는이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멋진 수사학(rhetoric)이라 생각된다.
글쓴이의 눈은 다산의 인간관이 동서사상이 만나는 접점에서 창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산의 창조성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서 다산 인간관 내의 서학적 요소와 비서학적 요소를 분석하여 양자간의 (변증법적) 지양과 조화를 모색한다(2장). 『천주실의』에서 마태오리치가 내린 원시유교에 경도된 기독교 해석을 다산은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태신앙인 유교의 전통을 모두 버릴 수도 없었다. 이런 지적 갈등을 통해 다산은 인간의 본질이 “작위성”에 있음을 찾아낸다(3장). 작위란 ―글쓴이의 해석에 따르면― 근대적 의미의 노동을 포함한 “실천적 활동”이다. 이와 같은 실천적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다산은 종래의 성리학(주자학)이 고수해 온 “향내적 관념적 인간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에 다산의 창조성이 있다고 글쓴이는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다산의 인간관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다산 인간관의 한계와 쟁점을 글쓴이는 4장에서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런 연후에 “맺음말”에서 글쓴이는 다산의 인간관이 “동서사상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서 성리학적 인간이해와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새로운 인간관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다산의 개방적 학문자세는 (구한말) 위정척사론의 배척론에 비해 진보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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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다산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나는 이 논문을 정말로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소감은 다산에 대한 나의 이해가 너무나 일천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학”을 주자학의 바탕 위에 기껏해야 주기론적 관점에서 이해해 왔으며, 다산을 “관념론자”로 치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하에서 내가 제기하는 몇 개의 문제의식 역시 일정부분 이런 나의 편협한 시각에 기인한 것이란 점을 인정하면서 보다 향상된 다산 사상과 인간관의 이해를 위해 하나의 반론과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이 논문 말미의 글쓴이 평가부분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문장, “다산과 같이 서학에 대해 합리적 중도자세를 취하는 학자들이 보다 많이 있어서 중도파가 대세를 이루었다면, 서학에 대한 탄압도 완화되고 서구문물에 대한 개방도 보다 빨리 이뤄질 수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의 가정법은 올바른 역사이해를 위해 적절하지 못한 표현법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하는 가정법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E. H. Carr). 역사의 흐름은 필연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연구자가 역사적 흐름의 변경을 의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을 의도하여 역사이해의 혼란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탄압이 없었던 시대가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단적으로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보자. 정치적 탄압이 없는 소크라테스를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를 더욱 빛나게 해 준 것도 바로 정치적 탄압 아니던가? 그렇다면 다산은? 우리는 정치적 탄압이 없는 온실 속의 다산을 의욕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이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승화시켰듯이, 연구자라면 정치적 탄압에 굴하지 않는 다산의 위대함을 읽어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문장 바로 앞의 문장에 나오는 말, “이러한 해석학적으로 열린 태도가 정치적 이유로 인해 탄압받고 억압받음으로써 조선 후기 사상은 창조적 발전의 계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하지만 안타까워하고만 있으면 무엇하나. 다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상상이 안 된다. 플라톤이 그랬듯이, 연구자라면 누구나 독수리의 눈을 가지고 저 역사적으로 생겨난 안타까움의 원인과 이유를 찬찬히 밝혀주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읽는이들이 알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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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물음을 제기하는 까닭은 4장에서 글쓴이의 논의가 정말로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었나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4장의 세분화된 물음의 내용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이다. 다산이 “인간론”에서 진정으로 고민한 것들이 과연 “심신일원론/이원론”, “선악의 문제”, “욕망의 문제”, “종교와의 조화” 문제 등이었을까? 내가 이해하는 유교는 궁극적으로 “위국치민”(爲國治民)의 학이다. 실학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실학이란 용어가 허례허식의 “허”(虛)와 공리공담의 “공”(空)을 배제한 “이용후생”, “실사구시”에서 유래한 것이니, 다산의 진지한 인간학적 고민도 그의 경세론(經世論, 一表二書: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에서 읽어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글쓴이는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3장에서 다산의 인간론을 탈중세와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3장 말미에서 글쓴이는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빌려 “이는 다산의 인간관과도 통하는 언명이다”고 하여 다산을 근대적 사상가로 자리매김한다. 과연 그럴까? 한나 아렌트가 근대인을 “활동적인 삶”으로 규정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 즉 서양의 근대가 관조적 삶에서 활동적 삶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흥이 있었고, 이것은 모두 “혁명”(revolution)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 근대의 사상가들은 모두 암암리에 이 두 혁명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파악하듯이 “천주교의 신 개념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을 현세보다도 피안의 세계로 돌리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부추겼고(M. Weber, J. Sombart), 존 로크, 루소 등이 시민혁명을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근대의 과학자들은 모두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산업혁명에로 관련된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활동적 삶도 이런 혁명(사회주의의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도 포함한)을 전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혁명은 근본적으로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reform)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다산도 이런 혁명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오히려 다산의 태도는 혁명보다 개혁에 가깝지 않을까? 이 점, 즉 다산의 개혁사상을 글쓴이는 “융합적 특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탈중세를 표방하는 서양의 근대는 결코 이런 융합적 인간관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양의 근대는 탈중세이고, 탈중세는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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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글쓴이의 전제형성의 맹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2장의 다산 인간관에서 서학적 요소와 비서학적 요소의 구분에서의 문제점 말이다. 두 요소의 구분에는 이의가 없으나, 두 요소간의 갈등과 지양을 설명하는 부문에서 환경적 요소에 대한 고찰이 없다. 이런 환경적 요소의 결여는 다산의 태도를 옹졸하게 만들 소지를 다분히 가진다. 이 점을 우리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다산은 유교적 세계관이 허용하는 범위의 최대치 내에서 서학을 수용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해석이 필요하지? 왜? 유대의 기독교가 서양으로 전도될 때 그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 사상을 활용했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교부철학자들은 플라톤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교리를 현실에 적용시켰다. 이 기술적 방법을 마테오리치도 『천주실의』에서 십분 활용한다. 즉 원시유교사상을 이용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다산은 왜 서학을 수용했을까? 그것도 정치적 탄압을 감수하면서. 이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교적 세계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서학을 수용했다는 해석은 좀 거시기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글쓴이가 다산의 인간관을 모색하면서 시대적 절박성(역사적 지평)을 간과했음을 질책하고 싶다. 이런 시대적 절박성이 간과되었기에 3장에서 다산 인간관을 서양의 근대적 인간관과 단순 비교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결과가 4장에 이어져 논의의 진부함을 낳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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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처음 논의에서 시작해 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묻노니, 머리말에서 말하는 “해석학적 지위”란 무엇인가? 글쓴이가 밝힌 “다산의 사상 특히 인간관이 동서사상의 만남이라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고 또한 어떤 쟁점을 안고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과 “동서사상의 충돌이 다산 인간관에서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지 그것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과연 “해석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을까? 해석학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지평”이다. 나는 이런 역사적 지평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였거니와, 그 결과 서학(천주실의)과 유교(주자학)간의 평면비교로 이어지고 만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의구심이 글쓴이의 노력과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논쟁하자”는 것일 뿐이다. 논쟁은 학문을 낳는다. 동서를 막론하고 학문의 발생이 논어(論語)이고, dialogos임은 자명하지 않은가? 논쟁은 다만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