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데리고 왔는데 어디서 미사를 드려야 하나요? 유아방이 없네요."
"성당 뒤쪽에 따로 놓은 의자 보이시지요? 거기서 아기와 함께 미사를 드리면 돼요. 아기가 울면 잠깐 밖에 나갔다오세요."
무악재본당 신자들이 흔히 주고받는 대화다. 왜 무악재성당에는 유아방이 없을까.
필자가 교구 청소년국에서 사목할 당시 여러 본당 미사를 참례하며 느낀 점이 있다. 유리벽 안에 갇힌 아기들과 그들의 엄마들이 참 안됐다는 것이다.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얌전하던 아기들도 소리를 지르는 통에 엄마들의 혼은 반 정도 나가 버린다. 조용할 때조차도 엄마들은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느라 도무지 미사에 집중할 수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이런 유아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왜 유아방을 만들었을까. 전례는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러야 한다는 유교 정신과 아이들 때문에 어른들 기도가 방해를 받으면 안 된다는 어른 중심의 사고가 빚어낸 결과물은 아닐까. 또 아기 부모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고민한 사목적 배려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기와 부모를 미사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복음적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필자가 필리핀과 미국에서 조사해 본 결과,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미사를 본 아기들 태도는 다른 사람을 방해할 만큼 시끄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존 웨스트 호프라는 종교학자가 있다. 그는 신앙을 나무에 비유했는데, 어른의 신앙이 큰 나무라면 아기의 신앙은 작은 묘목이라는 것이다. 사실 신앙이라고 이름 짓기도 애매할 정도로 유치한 형태이지만 그것 역시 신앙이다. 작은 묘목이 좋은 환경에서 큰 나무로 자라듯이 아기들 신앙도 그가 만나는 환경에 따라 성장 정도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은 무엇일까.
아동심리학자들은 아무리 어린 아기라고 해도 기쁨과 절망 등 일련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한다고 한다. 아기들은 저마다의 시선에서 듣고, 보고, 옹알이를 통해 교감하려고 애쓴다. 때문에 총체적 정서를 풍성하게 경험해야 좋은 나무로 성장하는데 그것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은 바로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본당 공동체는 아기들이 신앙의 여러 요소를 듣고, 보고, 경험하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생각에서 유아방을 없애며 아기들은 우리 공동체가 함께 돌봐야 할 모두의 자녀라는 이야기를 신자들에게 되풀이했다. 대신 성전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아기와 부모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기가 약간 소란스럽게 굴더라도 다른 신자들이 그 부모에게 불편한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신자들에게 3주만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시간이면 아이들이 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3주차가 되자 아이들의 칭얼거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영성체 후 묵상시간의 고요한 침묵은 아기들이 정말 이 자리에 함께 있는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아기들이 성당이란 공간에 적응을 했고, 성가와 기도 소리를 정서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또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아기엄마는 출산 직후에는 성당에 가도 기도와 전례에 참례하는 느낌이 없었는데, 요즘은 아기와 함께 기도하게 되면서 미사의 은총을 체험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부모의 기쁨만큼 아기도 미사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유아방을 없앤 지도 벌써 2년이 돼 간다. 이따금 조용한 가운데 아기들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신자들은 '옹알이는 아기들의 기도'라는 생각으로 그 작은 소란스러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