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대망 제1부 갈대의 싹2
부처인가 사람인가
1
에이로쿠 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친 미카와 잇코 종도의 반란처럼 이에야스를 놀라게
한 것은 없었다.
13년간의 인질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무쇠와 같은 단결력을 과시하며 어떤 일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오카자키 일족. 가신이나 백성들의 폭동 같은 것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
다. 그런데 사자키에 있는 죠구 사에서 약간의 벼를 빌린 것이 계기가 되어 잇코 종도의 반
란은 미카와 전역에 걸친 큰 소란으로 번졌다. 더구나 이에야스가 폭동을 하루빨리 종식시
키려 했을 때 그들 중에는 마츠다이라 가문의 중신이 다수 섞여 있었다.
현재 동 미카와에서 이마가와의 세력 아래 남아있는 것은 요시다, 우시쿠보, 타와라 등 세 개
의 성밖에 없었다. 그가운데에서도 우시쿠보의 마키노 신지로 나리사다는 은밀히 이에야스
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요시다 성의 오하라 히젠노카미와 타와라 성의 아사히나 히고노카미에게만 항복을 받으면
미카와 일대가 완전히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오게 될 중요한 시기였다.
세나히메와 일말의 불화를 남기고 있다고는 하나 생모 오다이를 오카자키 성에 맞아들였고,
그 남편 히사마츠 사도나카미 토시카츠에게 오카자키를 맡긴 뒤 자기 자신은 성밖으로 나가
종횡무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사찰에 대해 특히 조심하라. 카카, 노토, 에치젠에서는 모두 선동자들 때문에 심각한 소동
이 벌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사자키 성을 쌓으면서 이에야스는 장수들에게 엄하게 지시했다. 그런데 정식으로 계약을 맺
기 전에 약간의 벼를 가져갔다고 하여 승도들이 이를 도로 빼았았을 뿐만아니라, 사카이 우
타노시케가 설득하려고 보낸 사자를 절에 끌어다 죽이기까지 했다.
"노데라의 혼쇼사, 하리사키의 쇼만사, 사자키의 죠구사, 이 세 절은 창건이래 수호불입의 신
성한 곳, 애송이에 불과한 이에야스가 감히 난입하여 벼를 약탈해가다니 이게 될 말인가?"
사자를 죽인 뒤 이런 말까지 했다. 그래서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은 선동자가 부추긴 것이었다. 그들은 혈기왕성한 스물 두 살의 이에야스를 노하게 해,
일제히 잇코 종의 깃발을 들고 폭력혁명을 일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와같은 전국적인 조직의 손길이 은밀히 뻗치고 있을 때, 이에야스에 대한 불평분자들이
이마가와 쪽의 달콤한 미끼에 걸렸다.
"조금은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에서 쿠마의 도령 나미타로와 같은 잠재 세력자까지도 불을 끄는 역할 대신 도리
어 부채질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불평분자의 선봉에 나선 것은 사카이 쇼겐 타다히사, 아라카와 카이노카미 요시히로, 마츠다
이라 시치로 마사히사 등으로 그들은 토죠의 키라 요시아키를 총대장으로 삼아 궐기했다.
"종문의 위기가 닥쳤다. 부처님의 적 마츠다이라 이에야스를 타도하라!"
젊은 이에야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종문을 위해 잇코 종이 미카와 일대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더구나 가신의 대부분이 잇코
종 신자였다. 그들의 자식은 몰라도 노인들은 두 가지 과제가 제기되자 거취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미타여래냐? 성주냐?"
이것은 이마가와냐 오다냐 하는 비교와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현세냐 내세냐의 비교이고,
부처가 위대하냐 이에야스가 위대하냐 하는 비교이며, 또 어느쪽의 보복이 더 무서워냐 하는
비교이기도 했다.
그결과 아미타여래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자가 며칠 지나지 않아 미카와를 가득 메우게 되
었다.
2
그들은 손에 든 창의 손잡이와 머리띠에 각각 글을 써넣은 천을 매달고 있었다.
"부처의 적을 무찌르는 군사. 전진하면 극락정토, 물러서면 무간지옥"
어느 시대나 선동자에게 휘둘리는 군중의 모습은 슬프다. 그들은 이같은 맹랑한 기치에 현
혹되어 어제까지 명군이라 믿었던 이에야스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
총대장 키라 요시아키의 토죠 성, 사카이 쇼겐 타다히사의 우에노 성을 비롯하여 노데라의 아
라카와 카이노카이, 오쿠사의 마츠다이라 마사히사, 아다치 우마노스케, 아다치 야이치로, 토
리이 시로자에몬, 토리이 킨고로 등 약 700명.
혼쇼사에 웅거한 것은 한에몬, 이누즈카 진자에몬, 이누즈카 하치베에외에 이시카와 일당,
카토일당, 나카시마 일당, 혼다 일당등 약 150명.
문제를 일으킨 죠구사에는 쿠라치 에이에몬, 오타 야다유, 오타 야로쿠로를 위시하여 카토무
테노스케, 토리이 마타에몬, 야다 사쿠쥬로등 마츠다이라 가문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자
들이 230명.
도로의 혼슈사에는 오하시 덴쥬로, 이시카와 한사부로 일족 10명외에 오미 토로쿠로, 혼다
진시치로, 나루세 신조, 야마모토 사이조 등 140명.
쇼만사에는 하치야 한노죠, 와타나베 한조, 카토 지로자에몬 일족을 비롯하여 아사오카 신쥬
로, 쿠제 헤이시로, 카케히 스케다유 이하 150명.
그밖에 각지에서 궐기한 농부와 기타 폭도를 합하면 그 총수는 3000명이 넘었다.
이들이 저마다 아미타불이냐 이에야스냐, 극락이냐 지옥이냐 외치면서 오카자키성으로 난입
하여 했다.
물론 모두가 다 폭동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니시오 성에 진을 치고
혼쇼사의 폭도와 아라카와 카이의 군대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혼다 분고노카미 히로타카는
도이 성에서 하리사키 및 키라 요시아키와 대적하고 있으며, 마츠다이라 치카히사는 오시카
모에 있으면서 사카이 쇼겐의 군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번의 적은 제멋대로인 점이 여느 경우와는 달랐다.
카미와다의 오쿠보 타다토시 노인은 일족을 이끌고 도로, 하리사키의 반란군과 싸우고 있었
다. 그들이 오카자키에 돌입하려 할 때면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 백발을 휘날리면서 대나무
고둥을 불었다. 그 고둥소리가 나면 전령은 곧장 오카자키까지 달려갔다.
"폭도가 들이닥쳤다."
성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말을 달려 토벌에 나섰다. 그 순간 폭도들은 와아하고 후
퇴했다가 다시 밀려들어왔다. 마치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니 씹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어지럽
고 초조감만이 쌓였다.
'설마 그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자가 반란군 쪽에 가담하여 이에야스를 정말 부처의 적으로 알고 쳐들
어오고는 했다.
붙들어서 타이르고 꾸짖으려 해도 손이 닿지 않고, 증오하려 해도 할수 없는 안타까움. 밤에
도 낮에도 무장을 하지 않고는 쉴 수가 없었다. 9월에 접어들어 가을이 깊어지고, 다시 정월
을 맞이할 무렵에는 이에야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신년 축하연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태라면 모처럼 풍족해지기 시작하던
백성들은 다시 기아에 쫓기게 된다. 아마 봄이 되어 농사철이 다가와도 아미타불이냐 성주
냐 하는 마술에 걸려 현실을 외면한 꿈과 같은 전쟁이 계속될 것이다.
'도리가 없다. 도당들의 본거지를 불살라 버려야겠다.'
2월초 드디어 이에야스는 결심했다.
3
그날 밤도 폭동을 일으킨 폭도들은 이에야스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밤중에 한번 밀어닥쳤다가 새벽에 다시 대나무고둥을 부는 소리가 울려퍼지곤 했다.
이에야스는 신경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성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만약 쳐들어온다
면 퇴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메이다이 사에 복병을 잠복시킨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폭
도들은 즈이넨 사 옆 민가에 불을 질렀다.
서리로 얼어붙은 새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겨우 살림이 편해지기 시작한 백성들의 집
이 불타는 것을 보면 말로 다 할수 없는 분노가 온몸에 끓어올랐다.
신앙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관념에 현혹되어 자기네 생활을 파괴해나가는 어리석음. 이마가
와 지배 때보다 더 가혹한 공납을 징수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은 정반대였다.
이마가와가 지배하고 있을 때는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폭동을 일으킬 용기는
커녕 곁눈질할 틈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인정이라 믿고 편 시책 때문에 겨우 집집
마다 벼를 저축하며 살게 되었는가 싶은 그 즈음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힘을 준 이에야스에
게 발톱을 세워 덤벼들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그쪽에서 불태울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웅거한 사원, 성채를 모두 불살라 초토
위에 선 인간의 고통을 다시 맛보게 하겠다. 이에야스는 이제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날이 밝으면 공격하겠다. 히코에몬, 장수들에게 이 뜻을 전하여라."
이 폭동은 이에야스 휘하 장수들의 나이를 훨씬 젊게 만들어놓았다. 피차간에 서로 얼굴을
잘 알고 의리가 있는 노인들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물네 살인 토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를 최연장자로 하여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그리고 이번 가을에 관례를 올린 사카키바라 코헤이타 야스마사
등 모두 슨푸 이래 또는 그 후에 발탁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뿐이었다.
불타던 민가의 불이 꺼질 무렵 스고가와에는 이미 새벽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진격의 분위
기를 느꼈는지 말 울음소리마저 우렁찼다.
이때 망루 아래의 장막으로 이에야스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둘째 성을 지키는 대장의 아
내로 이곳에 와 있는 생모 오다이였다.
"히사마츠 마님께서 급히 뵙겠다고 지금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카키바라 코헤이타가 고했다. 이에야스는 쓰려던 투구를 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때 찾아오시다니 무슨일입니까? 어서 모셔라."
오다이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흔이 지나 한결 더 분별의 무게를 더한
차분한 모습이 강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를 연상케했다.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는 것 잘 알아요."
이곳으로 온 이후에는 이에야스의 어머니가 아니라 언제나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의 아내로서
의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오다이였다.
"계속 깨어 계셨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그만......"
오다이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혹시 성밖에 나가 단번에 일을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에야스는 약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록 생모라 해도 전투의 전략까지 간섭하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4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자코 있는 이에야스를 건너다보면서 오다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엇 때문에 대답을 안 하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
고 있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단을 내린 듯한 이에야스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오다이였다.
"만일에 서둘러 이번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먼저 사원을 불살라야 할 거예요."
오다이는 바닥에 눈길을 떨어뜨리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사원이 불타는 것이야말고 그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지요."
이에야스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어머니의 조심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젊음과 분노가 이미 상대의 폭력에 대항
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태까지 와버렸다.
"가령......"
오다이는 다시 말했다.
"사원을 불태우고 가담했던 자들은 남김없이 처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폭동은 그것으로
수습되겠지만 마츠다이라의 힘은 반으로 줄고,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원하는 바
라면 어떻게 하겠나요?"
"아니, 적이 원하는 바라니......?"
"그래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노리는 목적은 마츠다이라의 힘을 둘로 갈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으음."
이에야스도 그 말에 무언가 와닿는 것이 있었다. 우선 둘로 갈라져 싸우게 하면 어느 쪽이
이기건 전체의 힘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런 뒤 약해진 나머지 반을 공격한다.
"어머니......"
이에야스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일 어머니가 이 이에야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둘로 갈라지기를 바라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하나로 뭉치도록 해야지요."
"물론 이 이에야스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워낙 간교한 자들이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올해에는 기근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봄까지 진압해야만......."
말하다 말고 아직 오다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에이타, 걸상을 가져오너라."
오다이는 사카키바라 코헤이타가 가져온 걸상에 앉지 않았다. 축축하고 싸늘한 땅에 무릎을
짚고 앉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요?"
"올해 농사를 못 지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요."
오다이는 딱 잘라 말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주가 몇 년이 걸리더라도 가신들이 생각을 고칠 때까지 설득하고
또 설득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래요. 그대들이 있기에 마츠다이라 가문이 있다. 나는 자신의 수족을 죽일 수 없다.......벌
할 수 없다.......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모르느냐고 싸울 때마다 가신들에게 고하여 깨끗이 철수
하게 되면......"
"으음."
"성주!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가신들과 성주의 마음은 다시 연결되는 거예요. 성주
님과 우리는 조상 때부터 하나였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보이지 않는 적, 뒤에서 선동하는
자들이 저절로 밝혀지게 되어 어떤 일도 꾀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어느 틈에 오다이는 목소리와 눈빛에 뜨거운 정열을 떠올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5
이에야스는 똑바로 어머니를 바라본 채 가슴속에 흐르는 싸늘한 물결이 심하게 소용돌이 치
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말이 수긍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전략으로도 그것은 분명히 탁월했다. 몇 년이 지
나도 이에야스는 칠 수도 없고 굴복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 아무리 얼빠지 가신이라고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굶어 죽는다.'
스스로의 깨달음 속에 반성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기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젊은 성주라하여 무시하고, 선동을
당해 자기한테 활을 겨눈 가신들. 무시당했다는 분노는 그런 뜨뜻미지근한 결정으로는 지워
질 수 없었다.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패기가 가슴에 꽉 들어차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나요?"
오다이는 채근하듯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지금이 중대한 기로이니 잘 생각하세요."
"어머니! 그렇게 해서 상대가 굴복했을 때...... 그때는 제 생각대로 처단해도 되겠습니까?"
이에야스가 강한 어조로 물었다.
"절대로 안됩니다."
오다이는 무릎을 탁치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 하면 가신들을 속인 것이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적이라고 매도하며 저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들을......"
"그래도 용서하는 것이 부처님의 마음, 부처님의 적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성주가 나타내 보
이는 것, 그것이 제일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그러면 저의 감정을 억제하고 평생 참고 살라는 말씀입니까?"
"성주."
오다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느 틈에 자기 아들을 설득하는 태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도리, 말하자면 작은 깨달음이에
요."
이에야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주는 부처님이 무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큰 힘 자체가 부처님이라
고 생각해요. 성주를 낳게 한 것도 부처님, 폭동을 일으킨 무리를 낳게 한 것도 부처님......
아니, 낮과 밤의 구별도, 새와 짐승과 초목도, 천지도 물도 불도 모두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
는 것. 부처님의 힘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고, 그 부처님의 길을 걷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하
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시 말을 끊고 미소를 떠올렸다.
"이겨야 합니다. 폭동을 일으킨 무리나 승려들보다 흔들림없이 부처님의 길을 걸어 이기도
록 하세요."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에야스가 무릎을 쳤다.
"그렇습니다. 저 이외에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가신들도 모두 부처님 안
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말씀을 따라 부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운 말이에요. 이것으로 승리는 틀림없어요."
어느 틈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동시에 점점 안개가 짙어져 젖 속에 떠오른 것처럼 사람
도 나무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때 그 안개속에서 다시 부우, 부우하고 대나무 고둥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야스는 벌떡 일어나 와아하는 함성에 귀를 기울였다.
6
이번의 함성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아마도 안개속에 숨어 성문 근처까지 접근해
온 것 같았다.
"어머니, 그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이에야스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오다이에게 말하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코헤이타, 성문을 열어라.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격해나갈 것이다. 몇 번이든 몇십 번
이든, 몇 년이 걸리더라도 끈기있게 대처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헤이하치로, 말을 이리 끌어오너라."
용기백배한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언제나 불길처럼 가슴을 태우던 분노가 지금은 왠지 웃음이 되어 터져나올 것 같은 마음으
로 바뀌어 있었다. 다같이 부처라는 큰 진리의 태내에 있으면서도 이것저것 망설이며 싸우
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것도 다 어머니의 은덕......'
"헤이하치로, 너무 서두르지 마라. 안개속에서 그대 모습을 잃게 될 것 같다."
"성주님! 적은 성문까지 육박해왔습니다."
안개속에서 들리는 폭도들의 함성에 호응하여 이쪽 망루에서 일제히 활을 쏘아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화살소리를 들으며 최선봉인 토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달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가루가 열 명씩 언제나 성문을 열 수 있도록 좌우의 문에 개미처럼 바싹 달라붙어 있었
다.
"열어라!"
이에야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먼저 도착해 있던 사카키바라 코헤이타가 호령했다.
와아하고 창과 말이 허공에서 춤추고, 500관이 넘는 육중한 철문이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였다.
"내 뒤를 따르라!"
이에야스, 모토타다, 헤이하치로, 코헤이타의 순으로 안개속에서 말을 달렸다.
부하 병졸들도 앞을 다투어 쏟아져나갔다.
"부처님의 적을 쳐부수어라!"
"물러가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전진하여 정토에 성불하라."
순식간에 여러 외침소리들은 격렬한 칼과칼이 부딪는 소리속에 녹아들었다.
폭도들은 입으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성안에서 공격해 나오면 썰물처럼 물러갔다. 그들 역
시 이에야스와 맞서는 것은 괴로운 일인 모양이었다.
어젯밤부터 세 번째, 이번에는 하리사키의 쇼만사 부대가 혼다 분고 노카미의 눈을 속이고
기습해온 모양이었다.
"이봐라, 한조!"
이에야스는 폭도들의 지휘자 중에서 와타타베 한조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 위에서 소리쳤다.
"방자한 놈, 이 이에야스가 상대해 주겠다. 덤벼라!"
와타나베 한조는 그가 자랑하는 넉자 가까이 되는 큰 칼을 어깨에 매고 있었다.
"전진하면 정토, 물러서면 지옥......"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슬금슬금 안개속으로 사라져갔다.
"섰거라, 서지 못하겠느냐!"
이에야스는 창을 꼬나들고 쫓아갔다. 이때 버드나무 그늘에서 달려나와 이에야스 앞에 창을
겨누는 자가 있었다.
"부처님의 적, 내가 상대하겠다."
"오, 네놈이 하치야 한노죠로구나."
"듣기싫다. 너는 코헤이타냐 헤이하치냐!"
한노죠는 창을 바싹 앞으로 당겨 찌를 자세를 취했다.
7
하치야 한노죠는 키가 6척에 가까웠다. 6척의 그는 세 간짜리 가시나무 자루가 달린 창을 꼬
나들고 적을 찔러 전공을 세웠다. 사람의 기름으로 창이 한번도 녹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창에 붉은 칠을 한 낙사카 치야리쿠로와 함께 마츠다이라 가문에서는 창의 쌍
두마차였다.
그 세 간자리 창이 말 위의 이에야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질러졌다. 이에야스는 안장에
납작 엎드리며 자기 창으로 그것을 막았다.
"아니, 제법인 걸, 너는 헤이하치로구나."
한노죠는 창을 다시 꼬나들며 비웃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덤비다니 가상하구나. 덤비겠느냐, 도망치겠느냐? 이번에야말로 지옥
행이다."
이에야스는 온몸의 피가 확 끓어올랐다. 상대가 이에야스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혼다 헤이하
치로의 이름을 대며 조롱한다고 생각하니 이성도 분별도 순식간에 분노의 그늘에 가려지고
말았다.
"한노죠!"
"뭐냐, 헤이하치로."
"음, 계속 날 조롱하는구나, 더는 용서치 못하겠다."
외치는 것과 동시에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젖과도 같은 안개속에서 흥하고 비웃으며 창
을 꼬나드는 한노죠. 언제나 용맹스럽고 믿음직하여 미소를 짓게 하던 그 모습이 지금처럼
가증스럽고 하찮게 보인 적이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토록 심한 분노로 잠시 이성을 잃었다. 말에서 뛰어내려 자세를 취하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앗!"
한노죠는 뒤로 물러섰다.
헤이하치로나 코헤이티의 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너는 헤이하치로가 아니구나......?"
"아직도 닥치지 못하겠느냐. 소중한 나의 가신, 잘못을 깨달으면 용서해주려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참겠다."
"큰소리 치지 마라. 누구냐, 이름을 대라."
"얏!"
이에야스는 고함을 지르며 대지를 찼다. 두 간짜리 창과 세 간짜리 창이므로 가까이 접근하여
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창끝을 허공으로 퉁기고 가슴을 향해 공격했다.
"이거 안되겠군."
한노죠는 다시 물러섰다.
"성주로군, 잘못 건드렸어."
"멈춰라!"
"싫소."
"달아날 생각이냐.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기분이 내키지 않습니다. 다음에 만납시다."
한노죠는 부리나케 네댓 걸음 물러나 창을 어깨에 메었다.
"실례!"
그대로 달려가는 것을 이에야스는 미친듯이 쫓아갔다.
이에야스는 창을 머리 위에 높이들고 쫓아가면서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순간 오다이의 모
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죽이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적이 바라는
것이라고 한 어머니의 모습이.
이에야스는 걸음을 멈췄다.
"한노죠, 적에게 등을 보이느냐. 그러고도 너는 마츠다이라의 가신이냐?"
"뭐......뭐......뭣이."
뜻하지 않은 말이었다. 마츠다이라의 가신이란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뜨끔하여 안개속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말을 들으니 달아날 수 없군."
입을 꾹 다물고 창을 겨누며 돌아섰다.
8
이에야스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자기한테 창을 들이댈 수 없어 도망치는 자를 다시
적으로 맞이했다.
"과연 한노죠답다."
왠지 후회 비슷한 것을 느꼈을 때 이번에는 한노죠가 구름이라도 찌를 듯한 사나이로 보였
다. 그 주위에 감도는 살기는 이에야스의 입을 막아 숨을 멎게 할 것 같았다.
"성주!"
한노죠는 살기속에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부처님을 당할 수 없다."
"닥쳐라!"
이에야스도 창을 겨누었다. 일단 크게 보였던 한노죠가 다시 작아 보일 때까지 창으로 찔러
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단전에 힘을 주었다. 말에서 내려 이곳으로 올 때까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
던 칼 부딪히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통해 전군의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후퇴한 듯했다. 아군은 오늘도 우세했다. 그것을 안 순간부터 이에야스
의 온몸이 훈훈하게 더워왔다.
투지라기보다도 그것은 무의 신이 자신에게 들어와 공포를 몰아내고 용기가 대신해나가는
열기였다. 다시 한노죠의 모습이 한치, 두치 줄어들었다.
"한노죠!"
"뭐......뭐야?"
"너의 그 떨리는 창이 내 몸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부처님의 창이니 뚫을 수 있을 거다."
"닥쳐라!"
이에야스는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에 한걸음 다가섰다.
한노죠는 겁에 질린 듯 뒤로 물러섰다.
"너 같은 멍청이에게 부처님이 힘을 줄 것 같으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부처님은 내
뒤에 계시다."
"뭐......뭐......뭐라구?"
"한노죠!"
이에야스는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곳은 이미 오카자키의 영내를 벗어나 카미와다로
통하는 길에 있는 농부의 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찌르지 못하느냐, 갑자기 겁이 나느냐?"
"아니, 겁이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서 덤벼라!"
"먼저 덤벼라."
"한노죠!"
"왜.......왜?"
"내가 찌르지 않는 이유를 너는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
"너는 나의 가신이다. 가신을 찌를 수는 없다. 사소한 잘못은 용서해 주어라. 거짓 부처에게
선동을 당했을 뿐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음성이 너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뭣이......? 성주의 귀에는 들린다는 말인가?"
"그럼, 들리지 않고. 그러니까 네가 먼저 덤빌 때까지 찌르지 않는다. 자 어서 덤벼라."
"으음."
한노죠는 신음했다.
"내가 거짓 부처에게 선동당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멍청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모처럼 편히 살게 된 민가와 농부들의 집을 불사르고,
이대로 폭동이 계속된다면 한노죠, 올 겨울에는 모두 굶어죽게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으음."
어느 틈에 한노죠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안개에 섞여 납덩어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9
"한노죠!"
"뭔가?"
"너, 떨고 있구나."
"아니다."
"그렇다면 어서 찔러라! 네 뒤에 부처님이 찌를 수 있을 것 아니냐."
"암, 찌르고 말고."
대답하기는 했으나, 하치야 한노죠는 눈에 보일 정도로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말한 대로였다. 소요가 계속된다면 올해 겨울에는 모두 굶어죽게 된다는 한마디
에 3년 전의 고생스러웠던 생활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전쟁. 그것은 단지 전쟁터에서 목숨만 앗아갈 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노죠는 이번 싸움을 전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부처가 부처의 적을 응징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차츰 동요하고 있었다. 전지전능한 힘을 지녔을 부처인데도 전혀 이
에야스를 징계하지 못하고, 공격할 때마다 오히려 부처의 편이 패배해 물러나고는 했다.
'왜 그럴까?'
문득 이런 의혹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또 이에야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폭동을 일으킨 무리들은 거짓 부처에게 선동을 받은 것이고, 이에야스의 뒤에는 진짜 부처
가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자신이 그렇
게 자랑하던 창이 이에야스의 피를 빨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성주......"
한뇨죠의 이마에서 뺨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성주는 진짜 부처님의 명으로 나를, 나를 찌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말이 많구나!"
"부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네가 생각을 고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진짜 부처...... 가짜 부처......"
한노죠는 창을 겨눈 채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싸워도 이에야스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가짜 부처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상대가 생각을 바꿀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한노죠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눈이 빙빙돌고 심한 갈증이 엄습해왔다.
"성주! 난 도망을 칠 것이다. 역시......"
한노죠는 또다시 소리쳤으나 이번에는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한노죠는 얼마쯤 가다가 창을 어깨에 매었다. 안개가 더욱 짙어져 온몸에 가느다란 빗줄기
처럼 쏟아져내렸다. 한노죠는 마구 달렸다. 달려가면서도 왠지 모르게 처량한 생각이 들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성주는 바보......"
한노죠는 달려가면서 중얼거렸다.
"가짜 부처의 선동으로 배신한 나를 왜 죽이지 않는 것일까......"
달려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패주해오는 동료들의 모습이 흘끗흘끗 보였다.
"물러나면 지옥, 쳐들어가면 정토."
입으로는 저마다 외치면서 카미와다로 통하는 길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었다. 한노죠는 넙죽 땅에 엎드렸다.
"성주! 난 물을 마신다! 물을 마신다......"
이렇게 말하고 한노죠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10
폭도의 무리는 카미와다로 물러났다. 그곳에서는 오쿠보 일족이 타다토시 노인을 중심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따. 다른 때는 폭도들이 성에서 멀어지면 추격을 중
단하고 성으로 돌아갔던 이에야스가 이날은 웬일인지 계속 쫓아왔다.
한노죠는 카미와다 마을로 가는 풀밭에서 찐밥을 말린 비상용 식량을 먹고 있는 와타나베
한죠를 만났다.
한조는 자신의 칼을 마른풀에 내던지고 아삭아삭 마른밥을 씹고 있다가 한노죠의 모습을 보
았다.
"아, 한노죠로군."
안개속을 뚫고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 창에 달았던 헝겊은 어떻게 했나?"
자기 칼집에 매단 '물러서면 지옥, 쳐들어가면 정토......"라고 쓰인 헝겊을 가리켰다.
"한조."
"왜, 그러나?"
"나는 조금 전에 성주를 만났네."
"만났으면 찌르지 그랬나?"
한조는 자기가 칼을 둘러메고 도망쳐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한조."
한노죠는 몸을 내던지듯 풀밭에 앉았다.
"도무지 창이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거야, 참 이상한 일도 다 보았다."
"하하하...... 그것은 자네의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나 같았으면 대번에 찔렀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해. 손이 마비되고 또 눈이 빙빙 도는 것야, 성주 뒤에서 번쩍하고 아미타여래
의 후광이 빛나는 것이야."
"거짓말 말게. 아미타여래는 우리 편이야."
"한조!"
"왜그래. 그런 묘한 표정으로?"
"자네는 아미타여래가 언제 성주를 벌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봄이 와도 밭을 갈지 못하고 여
름에도 승부를 내지 못하면 가을부터 겨울 동안은 내내 굶어야 하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벌은 누가 받겠나? 백성들과 우리한테 벌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한노죠!"
와타나베 한조는 기세좋게 무어라고 하려다 말고 그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자네, 그래서 창에 매달았던 헝겊을 떼어버렸군."
"나는 아미타여래 님을 배신하기는 싫어."
"아미타여래 님은 우리편이라고 했지 않나."
"우리편인 아미타여래 님이 이쪽에 벌을 내리려 하고 있네. 나는 성주 뒤에서 분명히 번쩍
빛나는 것을 보았어."
"한노죠, 그......그게 사실인가?"
이때 염불 도량의 법사가 역시 헝겊을 매단 6척이나 되는 막대를 들고 나타났다.
"오, 한조님도 한노죠님도 여기 계셨군요. 드디어 좋은 기회가 왔소! 부처님의 적 이에야스
가 카미와다까지 추격해와서 방금 오쿠보 타다요의 저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야말로 독안
에 든 쥐, 두분께서 처치하십시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말했다.
"뭐, 타다요의 집에?"
한조는 재빨리 밥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칼을 집어들었다. 한노죠가 묘한 말을 하는데, 과연
이에야스 뒤에서 아미타여래의 후광이 빛나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좋아! 이번에는 내가 가서 보겠어.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11
한조가 기세 좋게 일어서는 것을 보고, 법사는 손에 침을 바르고 막대를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하오. 이것은 아미타여래 님의 명령이오."
그리고는 한노죠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가지 않나요? 정말로 좋은 기회요."
"나는 배가 고픕니다. 아미타여래 님의 명령이라 해도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소."
이말을 들은 법사는 혀를 차고 한조의 뒤를 따랐다.
한조는 칼을 들고 오쿠보 타다요의 저택으로 달려가면서, 머릿속 큰 사마귀가 들어와 돌아
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아미타여래의 가호가 있다 해도 갈지 않은 논밭에서는
쌀을 거둘 수 없다. 쌀을 거둘 수 없다면 기근이 닥칠 것이다.
'하늘에서 연꽃이 떨어졌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쌀이 내려왔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아니, 그 연꽃 이야기조차 한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노죠가 보았다는 이에야스의 후광을 허튼 소리라며 전적으로 부정할 수 만은 없었
다.
어느 틈에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 일대에 많은 잡목림과 밭 여기저기에 아미타여래의 깃발과 접시 꽃 깃발이 나부끼고 있
었다. 양쪽 모두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서로 견제만 하고 있었다.
한조는 몸을 낮추고 노송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말똥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은 여기
가 마구간 뒤쪽이기 때문인데,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있는 안채의 부엌앞에 말의
다리가 보였다.
한조는 그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눈길을 위쪽으로 옮겨갔다.
등자가 보이고 그 위에 얹힌 털신이 보였다. 이어서 낯이 익은 쿠사즈리가 눈에 들어왔다.
"성주다!"
이에야스는 타다요의 집 부엌에서 말을 탄 채 더운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 밑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의 흰 얼굴이 보였다. 타다요의 아내였다.
"부인."
"예."
"이 볶은 된장의 맛이 아주 좋군요."
이에야스가 말 위에서 칭찬했다.
"아침부터 말을 달려서 시장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된장을 잘 담그는 여자는 살림을 잘 하는 법이오. 부인은 훌륭한 아내인 것 같소."
"황송합니다. 좀더 드시겠습니까?"
"아니, 배는 고프지만...... 그만두겠소. 그대들이 애써 아낀 쌀인데 내가 너무 많이 먹어대면
미안한 일이지요."
"당치도 않습니다. 성주님이 시장하실 때 드시는 쌀이므로, 쌀도 기뻐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으니 좀 더 드십시오."
"하하하......"
이에야스는 웃었다.
"가난한 생활을 꾸려나가다 보면 즐거운 거짓말도 하게 되나 보오. 부인, 폭동에 가담한 가신
들도 어리석은 자들만은 아닐 것이오. 곧 잘못을 깨달을 겁니다. 뉘우치면 용서하겠소. 조금
만 더 참으시오."
"예, 황송합니다."
"안색만 보아도 고생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소. 나에게 주려던 밥이 있거든 그대가 먹도
록 하시오. 젖이 안나오면 곤란할 테니 부인이 먹어야 할것이오."
한조는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울상을 지었다.
12
어째서 울상을 지었는지 몰랐다. 폭동을 주도한 중들은 여러 가지 이상을 내걸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고 했다. 농부도 무사도 상인도.
한조도 물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귀로 들은 이에야스의 말도 역
시 심금을 울렸다. 이대로 전쟁이 계속되면 미카와 일대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결국 높
은 이상을 갖고도 유랑민이 되거나 아니면 강도질과 도둑질로 연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는 될 수 없을 테니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길거리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죽으면 정토에 가기는 하겠으나......'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왠지 힘이 빠졌다.
한노죠 녀석이 공연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은 가짜 아미타불이고 이에야스 뒤에는 후광이 비친다고.
한조가 보는 한에서는 이에야스에게 후광 같은 것은 비치지 않았다. 여전히 목이 짧고, 몇
공기째인지 몰라도 물에 말아주는 밥을 사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젖은 충분히 나오고 있습니다."
타다요의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미는 밥.
"몸을 소홀히 해서는안됩니다. 부인 혼자의 목숨이 아니오.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지 않소?"
타이르고 나서 이에야스는 홱 말머리를 돌렸다.
한쪽에서는 부처를 위해 죽으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몸을 아껴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
고 있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참마음일까.
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마음일까.
'그렇다!'
한조는 자신의 자랑스런 칼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진짜 부처라면 자기 칼 따위로는 벨 수
없을 것. 정말로 이에야스에게 덤벼보고 나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숨어 있는 마구간 옆으로 이에야스가 지나가려 했을 때.
"거기 서라, 성주!"
한조는 큰 소리로 외치며 뛰어나갔다.
"한조냐!"
이에야스는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창을 꼬나들었다.
"어서 덤벼라."
유유히 말 위에서 한조를 상대했다.
한조는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후광이 비친 게 아니야. 투구에 햇빛이 닿은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겨우 안개가 걷힌 하늘에서 아침 햇빛이 찬란하게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무엇을 중얼거리느냐, 사리도 분별할 줄 모르는 멍청이 같은 녀석이!"
"성주! 정말로 베겠다."
"그 흐느적거리는 칼로 벨수 있으면 어서 베어보아라."
히잉하고 말이 앞발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한조는 정신없이 칼을 옆으로 휘둘렀으나 칼끝
은 일어선 말의 다리 밑에서 허공을 가르고, 말이 다시 발을 내렸을 때에는 이에야스의 군
사들이 한조를 에워싸고 있었다.
"불충한 놈! 꼼짝마라!"
맨 먼저 튀어나온 것은 큰 언월도를 든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이어서 창을 꼬나든 토
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 이에야스 앞에는 사카키바라가 불퇴전의 자세로 두 발을 벌리고
떡 버티고 있었다.
'이거, 안되겠다.'
한조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들과 싸우는 것을 자신의 칼이 싫어했다.
한조는 혀를 차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13
"이놈, 또 도망치느냐!"
이에야스의 목소리가 울렸으나 그때 이미 한조는 몸을 날려 노송나무 울타리 밖에 있는 겨
울 시냇물을 건너 밭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쫓지마라."
사카키바라 코헤이타가 혼다 헤이하치로를 불러 세웠다.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 성주님 곁을 떠나면 안돼."
그동안 와타나베 한조는 길을 빙 돌아 칼을 어깨에 맨 채 아까 그 풀밭으로 돌아왔다.
하치야 한노죠는 한조의 칼을 흘끗 바라보고 거기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마른
풀밭으로 일어나 앉았다. 아마도 한잠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때, 벨 수 없었지?"
"음."
"성주에게 후광이 비치지 않던가?"
한조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고 두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벌을 받아 마땅해."
그리고는 내뱉듯이 말했다.
"비록 성주가 가짜 아미타불이고 절 쪽이 진짜 아미타불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건 또 무슨소린가?"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는 말일세. 나는 이제부터 오쿠보의 저택으로 갈 생각이야."
"항복하려고 그러나, 자네는?"
"아니, 귀순하려고 해,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하고."
한조는 다시 한번 칼을 내던지듯이 마른 풀위에 놓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한노죠는 대답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한조의 아내와 오쿠보 일가의 주인 신파치로 타다키츠
의 아내는 자매였다. 타다토시 노인은 은퇴하여 죠겐이란 아호로 불리고 있었다.
"자네는 신파치로와 인척이라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 연고도 없네."
"한노죠!"
"왜 그러나?"
"둘이서 신파치로를 찾아가보세. 성주님도 곧 성으로 돌아기실 거야. 신파치로의 말이 신통
치 않으면 다시 반란군 쪽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나?"
"하긴 그렇군."
"나는 자네가 보았다는 성주님의 후광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노죠는 창자루를 부여잡고 어느 틈에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막상 남을 통해 사죄한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분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폭동에 가담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더 이상
성주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한조."
"응."
"나는 따라는 가지만 잠자코 있겠네. 신파치로에게는 자네가 말해주게."
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아무리 단순한 그들의 두뇌라 해도, 죽으라는 말과 살라는 말은 어느쪽이 더 자기들을 사랑
해서 하는 말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생각났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날씨가 좋아졌어."
"지금부터 밭갈이를 시작해도 올핸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야."
두 사람 모두 부끄러운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만히 웃었다.
봄날의 바람
1
폭동은 오쿠보 타다카츠의 주선으로 하치야 한노죠와 와타나베 한조가 항복함으로써 대번에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물론 한노죠 등은 처벌받지 않았다. 앞으로 항복하는 자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자
잇따라 혼다 야하치로가 항복했다. 소동을 일삼고 있던 떠돌이 중들은 사태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2월 28일, 카미와다 죠쥬인에서 신불에 서약하는 글을 작성하여 이에야스에게 제출했다. 원
래부터 미카와에 있던 승려들의 이번 폭동으로 인한 모든 죄는 용서하기로 하고, 3월부터
농부들은 다시 열심히 농사일을 시작했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데 뒤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에야스의 생모 오다이와 오다이의
동생이며, 이시카와 이에나리의 어머니 묘사이니였다.
오다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신들이 무사할 수 있도록 설득했고, 신앙심이 깊은 묘사이니는
어느 사원이라도 폐쇄하는 일이 없기를 거듭 거듭 이에야스에게 탄원했다. 그리고 사건을
직접 무마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오쿠보 교겐 타다토시와 신파치로 타다카츠였
다.
오쿠보 일족은 니치렌 종 신자였으나 신앙을 초월하여 모두를 위해 용서를 빌었다. 성질이
급해 번개 노인으로 알려진 죠겐은 성급한 기질을 누르고 이에야스에게 청했다.
"이 노인을 보아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청한 이면에는 폭동의 선동자 뒤에 이마가와, 타케다 양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
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상대가 우리를 둘로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그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폭도 쪽에서는 니치렌 종의 오쿠보 일족이 잇코 종의 신도를 위해 힘써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죠겐의 성의가 뜨겁게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양분되어서는 안된다. 갈라지면 양쪽 모두 약해진다."
이번 사건이 이들의 단결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마츠다이라 쪽에는 전
화위복의 결과 되었다. 아니, 그보다도 이번 폭동을 통해 이에야스가 심신 양면에 걸쳐 크
게 성장했다는 것이 최대 수확이었다.
이에야스는 비로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가신의 반역이라는 안타까운 감정의 파도를 헤치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수단을 가슴에 새겼
다.
'인간은 어디까지 약해질 수 있는 것일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가신 앞에서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과 비슷한 것을 남에게서 발견하면, 이것을 인간미라 부르고 기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한 것이라 생각하여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
고 그때부터 마음의 유량을 시작한다.
'나도 어딘가에는 그런 점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깊이 반성했다.
이 난세에 하나의 영지를 다스리며 일어서려는 자는, 그에 걸맞는 강인함을 연마하지않으면
안된다. 그 강인함을 바로 지도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28일에 서약서를 받았고, 3월 1일 그것을 가지고 둘째 성으로 생모 오다이를 찾
아갔다. 원만하게 해결된 사건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감사드리기 위해서였다.
2
오다이는 둘째 성을 관리하고 있었으나 성주의 거실은 예의상 사용을 금하고 있었다.
사카타니로 이어지는 둑 밑으로 푸른 해자가 바라다 보이고, 그 넘실거리는 물에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오다이는 이에야스로부터 통지를 받고 거실의 청소를 명하고 나서 문을 나와 그 둑까지 마
중을 나갔다.
이에야스는 사카키바라 코헤이타 한사람만을 데리고 홀가분하게 찾아왔다. 이에야스에게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오다이로서는 이 부근이 그립기 짝이 없는 추억의 장소였다.
이 성에서 열다섯이 되던 봄, 카리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이 일대에 심도록 했다. 지금도
그때와 흙냄새는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남편 히로타다는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그 아들 이에야스가 미카와 일대의 총대장으로 자기 앞에 서 있었다.
"어려운 걸음을 했군요."
감개무량함을 누르고 고개를 숙이는데, 인생의 불가사의함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여자로서의
오다이는 약했다. 시집을 갈 때나 헤어질 때도 자신의 의사와 감정은 전혀 개입시킬 수 없는
비참함이 있었다.
오다이는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대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빛으로 향
하게 하려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은......
히로타다는 이미 지하에서 흙으로 화했을 텐데도, 오다이는 늠름한 부장으로 성장한 자기 아
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자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것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님, 덕택으로 모든 일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이 년이고 삼 년이
고 기다리겠다고 결심한 날이 바로 사태해결의 첫날이었습니다."
거실로 안내된 이에야스는 기뻐하기보다도 오히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부처님께서 성주의 곧은 마음을 가상히 여기셨기 때문이겠지요."
오다이는 술 대신 자기가 손수 만든 팥떡을 대접했다. 팥에 귀중한 흑설탕을 넣은 것인데
이 설탕에도 추억이 담겨 있었다. 시코쿠의 요소카베가 관할하는 영지에서 산출되는 이 설탕
을 오다이는 열 네 살때 처음으로 이 성에서 맛보았다.
그후에도 설탕은 여전히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쿠마의 도령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도 일
부러 오다이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이에야스는 맛이 있다면서 세 개를 먹었다.
오다이는 그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모자간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도 어머님과 이모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겁을 먹고 도망친 자들도 언젠가
는 찾아내겠습니다."
이에야스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영내 밖으로 도주 한자가 4,5명 있었다. 어
쩔 수 없이 그들을 가신에서 제외시키기는 했으나, 기회가 오면 그들도 용서하겠다는 의미였
다.
"그 따뜻한 마음이 빨리 통하도록 기도하겠어요."
이에야스가 오다이와 헤어진 것은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문까지 나와 배웅하는 오다이와 작별하고 코헤이타와 같이 사카타니의 둑에 이르렀을 때 벚
나무 그늘에서 종종걸음으로 달려나와 앞을 가로막고 엎드리는 여자가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누구냐!"
코헤이타가 두 손을 벌리고 이에야스와 여자 사이를 막았다.
3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자는 다시 말했다.
"코헤이타, 이름을 물어보아라."
코헤이타는 조심스럽게 꿇어앉은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츠키야마 마님을 모시는 오만입니다."
"뭐, 오만?"
이에야스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과연 그렇군, 오만...... 무슨 일이냐?"
말하다 말고 코헤이타가 옆에 있는 것이 거북했던 듯.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걱정할 것 없다.."
코헤이타로부터 칼을 받아들였다.
코헤이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 자리에서 떠났다. 설마 이에야스가 이런 소녀에게 손을
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지금 이런 곳에서 무엇 때문에 성주님을 찾는 것일까. 젊
은이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코헤이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이에야스는 말했다.
"오만, 일어나거라. 너는 이번에도 츠키야마에게 무슨 명령을 받고 온 것이냐?"
오만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성주님, 제발 마님에게로 돌아가십시오."
"응, 언젠가는 돌아가겠다. 염려하지 마라."
"아닙니다. 그런 막연한 말씀은 곤란합니다. 오늘 밤에 꼭!"
에에야스는 와락 불쾌감이 치밀었다.
"오늘 밤에 데려오라고 하더냐?"
"아닙니다! 마님이......그런 말씀은......"
"그렇다면 네 생각이란 말이냐?"
"예......저는 미칠 것만 같습니다. 성주님! 이렇게......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에야스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오만의 필사적인 동작을 지켜보았다.
분명히 예사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풍만한 가슴이 파도처럼 출렁거리
고 있었다.
'설마 미친 것은......'
이에야스는 온몸이 오싹했다.
"미칠 것 같다니 무슨 까닭이냐?"
애써 냉정하게 묻는데 상대는 겁낼 것 없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소리를 낮추고 울기 시작
했다.
"울고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생각하는 바를 말해보아라."
"예......"
오만은 전과 같은 거센 기질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어리광과 두려움이 섞인 모습으로 이
에야스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성주님의......사랑 받은 것을 마님이 아셨습니다."
"으음."
"그 후부터는 매일 밤마다 고문......그것도 보통 고문이 아닙니다."
"어떻게 고문하더냐?"
"예......아니......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죽기보다도 괴롭고 부끄러운......성주님!"
"죽기보다 괴롭다니......?"
"부탁입니다. 마님께 돌아가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아니......그 이상의 고통을 당합니다. 네가 나쁜 것이 아니다. 네 속에 있는 음탕한 벌레가
나쁘다고 하시며......그것은, 그것은......"
이에야스는 옷자락에 매달려 흐느끼는 오만의 목덜미에 가만히 눈길을 떨어뜨렸다.
4
오만과의 순간적인 정사를 세나가 알았다...... 이에야스로서도 마음에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세나는 보통 신경을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질투하기 시작하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었다.
순간적인 일이라면서 웃고 마는 여자도 아니거니와 용서하려 노력하거나 다시 그런 일이 되
풀이되지 않도록 자기쪽에서 머리를 쓰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때그때 감정 여하에 따라 무
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여자였다.
이에야스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오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불안이 후회가 되고 분노
가 되었으며 혐오가 되었다.
"죽기보다 두렵다는 게 무슨 말이냐? 여기에는 아무도 없으니 말해보아라."
"아니, 아닙니다......그것은......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을 해야 알 것 아니냐? 어서 말하여라."
오만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사실 열여섯의 오만으로서는 세나의 고문은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
다.
"네가 나쁜 것이 아니야, 네 몸에 달라붙어 있는 음란한 것이."
이렇게 말하면서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로 누르고 온몸을 변태적으로 주무르는 것만이
아니었다.
반라의 오만을 곳간 뒤에 끌어다놓고, 이와츠에서 성안으로 거름을 푸러 오는 젊은 농부들
에게 말했다.
"이 계집애는 남자가 그리위 못 견디겠다는구나. 자, 너희들에게 줄 테니 마음껏 희롱해도 좋
다 .그것이 이 계집의 희망이니 전혀 사양할 것 없다."
그리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그때 젊은 농부들이 나눈 대화는 아직도 오만의 귀에 뚜렷한 공포로 새겨져 있었다.
마님의 분부이므로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자와, 그것은 너무 잔인하다고 하며 주저하는 자
가 반반이었다. 오만은 눈물이 마르도록 애원했다. 가까이 오면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도 했
다.
젊은이들은 상의를 거듭한 결과, 겉으로는 마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하고 오만에게는 손을
대지 않은 채 물러가기로 했다. 그래서 겨우 무사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돌아가자 세나는 입
술을 일그러뜨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이제야 겨우 만족하게 된 모양이로구나. 앞으로도 그들이 올 때마다 너에게 똥내
를 맡을 수 있게 해주겠다. 호호호......"
그런 짓을 하고 나서, 성주가 자기한테 오지 않는 것은 너 때문이라고 넋두리를 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도 세나의 탓이 아니라, 기질이 강한 그런 여성이 난세의 폭풍에
휘말려 삐뚤어진 결과로 생긴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만으로서는, 이에야스가 세나를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기
를 원했다.
"성주님! 부탁드립니다. 만일 제가 성주님을 모시고 가지 못하면 오늘 밤 저는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에야스는 이런저런 고문의 내용을 상상하고 분노와 연민으로 가슴속이 복잡하게 뒤얽혔
다.
"오만, 오늘은 그대로 돌아가서 휴가를 청하도록 하여라. 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면 저는 충성스럽지 못한 자가 될 뿐입니다. 부탁입니다. 마님을 사랑해 주십시오."
오만은 이렇게 말하고 세차게 옷자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5
"아니, 네가 불충한 자가 된다고?"
"예, 저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주님과 마님이 화목하여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두려 생각합니다. 성주님, 제발 오늘밤에는......"
이에야스는 오만을 빤히 바라보며 소녀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자기를 억지로 세나에게 데
려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천진스러운 이면에는 주종간의 의리만은 잃지 않겠다는 갸륵한
마음도 들어있었다.
"오만......"
"마님에게 가시겠습니까? 성주님."
"너는 두 사람이 화목해지면 이성을 떠날 생각이냐?"
"예, 그때까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아 있겠습니다. 잘못은 저에게 있으니까요."
"그만두고는 무엇을 하겠느냐?"
"저어......"
오만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살그머니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둔 뒤 자결하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오만은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에야스는 그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다시 가슴이 섬뜩해졌다. 가련하다. 이렇게 가련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남자라 할 수 있었다.
"성주님! 저는......저는 죽어서 성주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뭐, 내곁으로?"
"예......저는......성주님을 사모합니다."
이에야스는 휘청 쓰러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가누었다.
후회라는 가벼운 느낌은 아니었다. 이 처녀가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성격과 기질을 이해하고 나서의 사랑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
연히 날개가 닿은 나비에 대한 본능적인 꽃가루의 매달림이었다.
'내가 죄를 지었구나......'
순결한 동정녀의 마음은 그렇게 닿은 것의 빛깔에 물들어 그 하나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인
지도 몰랐다. 그런 예민한 면을 알았다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 한번 손을 댄 것
이 이 소녀에게는 이미 마음에서 씻어버릴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다.
이에야스는 마음이 아팠다. 눈앞의 처녀에 대한 책임감이 양심을 찔러왔다.
"음, 그만두고 나서 죽을 생각이란 말이지."
"예.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영혼으로 변하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알겠다. 오만, 알겠으니......"
"예."
"오늘밤에는 혼자 돌아가거라. 아니, 절대로 너를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겠다. 내가 잘 생각
해보겠다. 잠시만 더 참도록 해라. 알겠느냐?"
오만은 당황하며 다시 옷자락에 매달렸으나 이번에는 흔들지 않았다. 불안한 눈길로 이에야
스를 똑바로 쳐다본 채 이에야스가 한 말의 뜻을 새기려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시 손을
놓았다.
"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주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봄날의 밤바람에 스며드는 가녀린 목소리가 천진난만했다 .
"그럼......"
이에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본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6
이에야스의 다정한 한마디는 오만의 마음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오만은 멍하니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츠키야마가 이에야스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을 리는 없었다. 오늘 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오만 자신의 의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에야스를 데려갈 수 없
다면 그길로 성에서 나갈 각오였으나 이에야스의 말 한마디로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츠키야마 마님을 위해서라고 믿으면서도, 오만은 이에야스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이 보고 싶
어 자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순박하고 강렬한 오만의
사랑이었다.
오만은 조용히 일어났다.
'성주님이 절대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
오만의 공상은 츠키야마 저택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부신 꿈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님이나 카네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이에야스의 마음을 붙들고 함께 잠자리에서 밤을 보내
는 환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성주님이 싫어하는 마님.
셋째 성의 하녀에 지나지 않은 카네.
이에 비해 오만은 이에야스의 마음을 붙든 츠보네.
'그렇다. 코고의 츠보네가 되자.'
오만은 생각했다.
코고의 츠보네는 남다르게 영리하고 젊음과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마님처럼 스스로
성주의 발길이 멀어지게는 절대로 하지않을 것이고, 겸손과 정숙으로 상대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되면 많은 가신들도 츠보네를 소홀히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듯 오만이 이런 공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구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이미 츠키야마 저택 담
장 밖이었다."
"뭐, 츠키야마 마님의 시녀? 등불도 없이 무얼하고 있느냐?"
성큼성큼 다가와 등불을 들이댄 것은 성을 순찰하던 혼다 사쿠자에몬이었다.
"좋다, 들어가라."
"수고가 많으시군요."
안도의 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오만은 아직 공상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
다.
저택 안은 싸늘한 분위기와 함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오만은 넓은 부엌을 지나 조그마한
자기 방으로 갔다. 어느틈에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가볍게 뛰고 있었다. 작은 등잔 밑에
앉아 가슴을 눌러보았다. 이때 입구의 장지문이 열리고 거기게 창백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
났다.
"오만!"
"예."
"또 성주한테 불려갔구나?"
오만은 깜짝놀라 상체를 뒤로 젖히고 분노에 불타는 세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7
"오만......"
세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오만은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왠지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토록 세나의 얼굴은 창백하고
험상궃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는 예사 몸이 아니야. 이와츠의 농부들에게 희롱당해 더러워진 몸으로 다시 성주 곁에
갔다는 말이냐?"
세나가 한걸음 더 다가오자 오만은 겁을 먹고 한손을 쳐든 채 뒤로 물러났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성주가 너를 품었지?"
"마......마......마님!"
"음탕한 여자가 더 좋다고 하더냐? 바람난 여자에게서 더러운 냄새가 난다고는 하지 않더
냐?"
"너무......너무......지나치십니다."
"나는 말이다. 초저녁부터 어깨가 걸려서 너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었다. 그때도 너는 방에
있지 않았어. 그로부터 2시간 이상 지났어. 오늘은 그냥 두지 않겠다. 도대체 어디서 성주를
만났느냐?"
세나의 손에는 타케치요가 목마를 탈 때 쓰는 대나무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마님, 저를......믿어 주십시오."
"그래, 믿겠다. 믿을 테니 숨김없이 대답하여라."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오만은 채찍이 무서웠다. 아니, 채찍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후려치며 미쳐
날뛸 세나의 성질이 더 무서웠다.
"저는 성주님이 부르셔서 갔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먼저 찾아갔단 말이냐?"
"예...... 아니, 성주님께서 너무 마님곁에 오시지 않아 부탁드리려고 갔습니다."
"누구 명으로?"
"예......저 혼자의 생각으로."
"건방진 것."
드디서 철썩하고 채찍이 울었다. 등줄기를 따끔한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때의 아픔과는 달랐다. 전 같으며 이 한번의 채찍으로 오만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오늘의 오만은 도리어 마음이 침착해졌다.
그 침착한 모습을 당연히 세나의 눈에도 이상하게 비쳤다.
"너는 나한테 대들 생각이구나. 그 발칙한 눈빛은 무어냐!"
"......"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이미 나하고는 주종관계를 떠났다는 말이로구나!"
"마님."
"뭐냐, 시치미를 떼고."
"그런 지레짐작은 성주님을 위해서라도 삼가시기 바랍니다."
"아니, 나에게 훈계를 하려는 게냐?"
"그러시면 성주님은 점점 더 멀어지십니다. 저는 그것이 슬픕니다."
세나는 채찍을 쳐든 채 비틀거렸다. 그런 건방진 소리를 이 어린 것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
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까지는 세나의 채찍에 벌벌 떨 뿐인 시녀였으나 오늘은 대등한 여
자로서 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발칙한 년!"
세나는 또 한번 미친 듯이 채찍을 휘둘렀다 .
8
두 번째 채찍은 오만의 목에 휘감겼다. 목덜미에서부터 어깨에 걸쳐 빨간 줄이 생겼으나 오
만은 꼼짝도 않고 세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나는 다시 비틀거렸다.
주종의 울타리를 넘어 여자와 여자로 상대하면 이 소녀가 세나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을 가지
고 있었다. 세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기질도 남자보다 활달하다는 것을 알고 시녀로 채용
했고, 젊음과 미모는 세나를 훨씬 더 능가했다.
훌륭한 가문에서 자란 세나에게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않는 오만함이 있었다. 오만 역시
그런 세나에 못지 않게 자기가 생각하는 바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오늘 그녀가 스스로 이에야스를 찾아간 것도 그러한 기질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자기편으로
만들기도 어렵고, 적으로 돌리면 무서운 존재였다.
세나는 세 번째 채찍을 쳐들었으나 이번에는 때리지 않았다.
'결국 오만을 적으로 만들고 말았구나......'
두려움과 후회가 세나의 광포한 질투심에 쐐기를 박았다.
"오만! 너는 모르느냐?"
"......"
"주종간에 미워할 까닭이 없는 너와 내가 굳이 싸워야 할 일이 있겠느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싸우고 있어. 이것은 모두 네게 원인이 있는 거야. 너는......성주가 무어라 하건 어째서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느냐."
오만은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성주님을 좋아하고 있다.'
어째서 나는 성주님을 좋아해서는 안되는가, 왜 마님은 성주님을 독차지해야만 하는가, 반발
심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이에야스 정도되는 대장이 여자가 하나밖에 없는 예는 없었
다.
"오만, 나는 여간 분하지 않아."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분하지 않은 줄 아십니까?"
"나는 성주가 미카와의고아라고 불릴 때부터 모셔왔어. 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로 태
어나 가장 비참할 때의 성주를 모셨어."
"그러한 성주님도 현재는 미카와의 총대장이십니다."
"그러기에 분하다. 가난하고 자유롭지 못할 무렵에는 첫째도 세나이고 둘째도 세나였어. 그
런데 지금은 낡은 헌신짝처럼 돌아보지도 않는거야. 아니,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카네
따위의 천한 계집과 너 같은 것에게까지 손을 대고 있어. 나에게도 여자의 고집이 있다. 그
때문에 비록 몸을 망치는 한이 있어도 기어코 내 고집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
전 같으면 눈물을 흘렸을 오만이 정면으로 반발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성주님은 점점 더 멀어지실 거예요."
"뭣이!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너는 나에게 맞설 생각이냐?"
"아닙니다. 마님이 성주님과 맞서시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세나는 결국 세 번째 채찍을 후려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후려치는 순간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슬픈 광기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9
채찍소리가 계속 오만의 어깨에서 울렸다. 오만은 이를 악물고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이
런 소녀의 어디에 그렇게 강한 반항심이 깃들여 있었을까.
때리고 다시 때릴 때마다 세나의분노는 더욱 궤도를 벗어났다. 왼손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는 또 때렸다.
"이래도 빌지 않겠느냐? 빌지 않으면 용서치 않겠다."
오만은 세나가 하는 대로 매를 맞고 짓밟히면서도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
런 마음이 들었을까? 반항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었으나, 지금 같
아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사죄할 마음이 없었다.
"빌지 않겠느냐? 그 눈이......그 눈이 뭐냐!"
"......"
"그것이 주인을 보는 눈이냐? 이 못된 년!"
철썩하고 내려친 채찍이 검은 머리에 얽혔다. 그것이 뚝 소리를 내고 부러지자 세나는 채찍
을 버리고 이번에는 두손으로 때렸다.
이미 세나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멱살을 잡
고 허리띠를 움켜잡았다. 휙하고 오만의 몸이 몇바퀴 돌더니 반라가 되었다. 하얀 살에 몇줄
기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풍만하게 솟아오른 유방이 자못 조용했다.
"이년, 이 몸뚱이로 성주를 유혹하여......"
세나가 오른발을 들어 치려고 하자, 오만은 그 밑에 몸을 엎드렸다.
세나는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엎드린 게 더욱 그녀의 광기를 부추겼다.
때리는 자도 맞는 자도 꼴사나운 모습으로 뒤얽혔다. 한쪽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다른쪽은
입을 꼭 다문 채였으나, 움켜진 손은 떨어지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살덩어리로 보였다.
하녀들이 깜짝놀라 달려왔으나 아무도 세나를 떼어놓지 못했다.
"용서해 주십시오......마님."
잔뜩 겁을 먹고 두 사람은 주위를 맴돌 뿐, 결국 양쪽이 모두 지쳐버릴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 체력에 한계가 왔다. 덮어씌우듯이 오만을 누르고 있던 세나의 손이 오만의 허리
띠에 닿는가 싶더니 세나는 그녀의 손을 뒤로 돌려 결박지었다. 오만은 축 늘어진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년을 밖으로 끌어내다 벚나무에 묶어놓아라."
털썩 주저앉으면서 세나가 소리질렀다.
"어서 하지 못하겠느냐!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도 똑같이 벌하겠다."
"예......예. 하지만......그것은."
"안돼! 안돼! 안돼!"
마지막 기력을 다해 소리지르는 바람에 두 여자가 마지못해 오만을 일으켜세웠다. 오만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정원으로 끌려나갔다.
벚꽃 봉오리가 희미한 달빛을 받아 무겁게 떠오르고 밤의 냉기가 살갗을 찔렀다.
"마님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참으세요, 오만."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만은 벚나무 밑동에 주저앉았다.
10
상반신은 속옷까지 찢겨 있었다. 피가 밴 둥근 무릎은 땅바닥에 나란히 놓여 있었따. 그러나
이상하게도 수치심도 분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반항을 자기
의사에 따라 밖으로 드러낸 불가사의한 일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나의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하녀가 마루의 문을 안으로 닫았다. 아마도 세나는 자기 거실
로 돌아갔을 것이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벌레소리가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셔 아무것도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세나의 감정이 가
라앉을 까닭이 없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멀리 어디로 쫓아낼 것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에야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 츠키야마
저택에는 이에야스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온몸으로 항거한 그동안의 피로가 으스스한 추위에서 차차 나른한 졸음으로 바뀌어갔다. 잠
이 든 채 이대로 죽으면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바삭바삭하고 뒤에서 무엇이 움직이는 기
척이 있었으나, 그것이 자기와 관계 있는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퍼뜩 따스한 공기가 움직이고 상반신에 남자 냄새가 잔뜩 밴 하오리가 걸쳐졌다.
"움직이면 안돼."
사나이가 말했다.
"소리내면 안돼."
"예......예......그런데, 댁은?"
"성을 순찰하고 있는 혼다 사쿠자에몬이다."
"아......아까 만났던......"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지금 풀어줄 테니까."
사쿠자에몬은 초롱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예삿일이 아니야, 미친 년 같으니라구."
사쿠자에몬도 세나에게 호의를 갖지 않은 듯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창피한 줄을 모른다니까. 자, 소매에 팔을 꿰도록 해."
"예."
"일어설 수 있겠어, 그대로 걸을 수 있을까?"
"이대로 내가 가고 싶은데로 가도 좋을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이대로 가면 죽게 돼. 자, 일어서 봐 . 일어서지도 못하는군. 내가
부축해주지."
비틀거리는 몸을 새쿠자에몬은 건강한 몸으로 부축해주었다.
"성주님도 나빠."
"예......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성주님도 나쁘다고 했어. 콩을 따려면 제대로 따야해. 살금살금 들쥐 흉내를 내니까 이런
소란이 벌어지는 거야."
"들쥐가......어떻게 했다는 말인가요?"
"아가씨는 잘 모를 거야, 자 단단히 나를 붙들어. 문을 나설 때는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
심하고."
사쿠자에몬은 웃어본 일이 없는 얼굴로 희미한 달을 쳐다보았다.
"춥군, 오늘 밤은."
코를 흘쩍 들어마시고 아무렇게나 오만을 등에 업었다.
11
혼다 사쿠자에몬은 오만을 등에 업고 그대로 날아갈 듯이 나무 사이를 걸었다.
오만은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때때로 성안을 순찰하는 아시가루를 만났다.
"게 누구냐?"
그럴 때면 사쿠자에몬은 자기 쪽에서 먼저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사쿠자에몬이다. 수고가 많다."
사쿠자에몬은 언제부터인지 젊은 무사들로부터 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에야
스보다 열세 살이 많은 서른 여섯으로 한창 분별을 알 나이였다.
그런 사쿠자에몬이 반라의 여자를 등에 없고 봄날 밤 성안을 뛰어들어 가는 줄은 아무도 상
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각 남짓하여 별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성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고가 많다."
사쿠자에몬은 큰 소리로 말하고 작은 사잇문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검문소의 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관절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점점 의식이
멀어졌다.
다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기 몸은 이미 어느 집에 내려져 있었다.
'아아, 혼다 한에몬의 집......'
오만의 이모는 사쿠자에몬의 일족인 혼다 한에몬의 집에 출가해 있었다. 이모가 허둥지둥
오만에게 옷을 입혀주고 있는 옆에서, 한에몬과 사쿠자에몬의 나직하면서도 다투는 듯한 소
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야?"
이렇게 말한 것은 퉁명스러운 사쿠자에몬이고, 한에몬의 목소리는 그보다 좀 부드러웠다 .
"츠키야마 마님에게 무례한 짓을 한 자를 이 밤중에, 더구나 벌거벗은 여자를 받아들일 수는
없어."
"한에몬!"
"왜, 그래."
"자네는 여간 멍청이가 아니로군."
"멍청이는 바로 자네야, 사쿠자에몬. 생각해보게, 사람이 하나 사라졌는데 그대로 내버려둘
츠키야마 마님일 것 같은가? 풀뿌리를 헤치고라도 찾아내려고 할 것이 분명해. 그때 자네가 업
고 와서 내가 숨겨줬다는 것이 발각되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될 것도 없고. 원래 이것은 성주님이 잘못 처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야. 우리는 성주님의 바보 같은 처사를 자랑삼을 것은 없잖아, 한에몬?"
"그럼, 끝까지 숨겨둘 수 있다는 말인가?"
"숨겨두고 말고 할것도 없어. 자네나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모르는 일......? 사쿠자에몬, 자네는 그 여자를 직접 업어오고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생각
인가? 아니, 자네는 그럴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당사자가 현재 내 집에 있는 이상 내 변명은
통하지 않아."
"한에몬, 자네는 점점 더 멍청이가 되어가는군."
사쿠자에몬은 화가 난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것 봐, 나는 모르는 일인데 본인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찾아왔다는 거
야,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 하면 되지 않아?"
"자네는 그것으로 끝날 테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해."
"침착하게. 자네는 그런 것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 다음 일은 성주님께 맡기면
돼."
"성주님께......? 그것으로 가신의 의무가 끝난다고 생각하나?"
"암, 끝나고 말고!"
사쿠자에몬은 소리치듯이 대답했다.
"나는 성주님의 여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녹봉을 받고 있지는 않아. 자기 불알의 때를 자
기가 직접 씻으라고 성주님께 말해줘."
12
"사쿠자에몬, 너무 대담한 말을 하는군."
"나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일세. 잘 기억해 두게, 한에몬."
"뒷일을 성주님께 맡기다니......어떻게 될 것 같나?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츠키야마 마님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분이야."
"바보 같은 소리! 여자 하나 다루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좋은 기회일세. 한번
혼쭐이 나야 해."
사쿠자에몬이 전혀 데리고 갈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에몬은 잠시 숨을 죽이고 오만과 그
오만을 안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오만은 축 늘어져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사쿠자에몬, 그럼 자네에게 지혜를 좀 빌려야겠어."
"암, 얼마든지 빌려주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성주님이 혹시 마님의 분노가 두려워, 어째서 집에 들여놓았느냐, 고약한놈...... 이라고 꾸짖
으시면 어떻게 하지?"
"모른다, 오만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럼...... 오만은 무슨 말을 하며 나를 찾아왔다고 할까?"
"글쎄."
사쿠자에몬은 자못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성주님의 씨를 베었으니 정양을 하겠다고 찾아왔다......나 같으면 그렇게 말하고 깜짝 놀라
게 해주겠어."
"......그......그것이 사실이야?"
"모르겠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으음."
한에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당돌한 말을 하는 사람이로군. 그랬다가 배안에 아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떻
게 하지?"
"유산했다고 하면 되지 무얼 그러나, 아기는 생길 때도 유산될 때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가 없는 거야."
"그렇다면......참고로 한 가지 더 묻겠는데......"
한에몬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긴장시켰다.
"그런 뒤 오만은 어떻게 하지?"
"몰래 숨어서 그런 일을 하니까 소동이 벌어지는 거야. 정식으로 소실을 삼으시라고...... 이
말을 내가 성주님께 하겠어."
"음......"
"성주님께 잘못이 있다고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거야. 이처럼 몰래 만난다고 해서 아기가
안 생긴다는 보장은 없어. 만일 생기게 되면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 아닌가. 츠
키야마 마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나. 집안의 풍파를 피하기 위해서 일 테지. 그것
이 두렵다고 해서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서자만 낳아놓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풍파가
일어날 것이 두렵다면 무엇 하러 함부로 여자에게 손을 대느냐 말이야. 나는 그렇게 소심한
성주님이 못마땅해. 알겠나? 알았으면 나는 이만 돌아가겠어."
이렇게 말하고는 문앞에서 다시 한번 한에몬을 돌아보았다.
"이 모든 것은 다 성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 아무에게도 상처가 돌아가지 않도록 성주
님의 배에 큰 바람을 불어넣도록 하게. 큰 바람만이 큰 나무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약이
되는 것일세. 그런 바람을 불어넣지 못하면 자네는 형편 없는 겁쟁이야."
마지막 말은 탁하고 닫힌 문밖에서 들렸다.
사쿠자에몬의 발소리는 그대로 한에몬의 집에서 멀어졌다.
13
성주의 정사
이런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쓴웃음과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예사이고, 그것이 또 가신의 마음
가짐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한에몬의 마음에 사쿠자에몬은 무서운 돌풍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되면 꽃도 질 것이고 열매도 맺지 않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를 꼬투리로 삼
아 주군인 이에야스를 협박하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혹시 임신 같은 것은 하지 않았겠지?"
한에몬이 넌지시 아내에게 묻자 그녀는 굳은 표정인채 눈으로 부정했다.
그런데도 임신했다고 속여서, 과연 이에야스가 눈치채지 않도록 할 방법이 있을까. 한에몬은
츠키야마의 문제만 생각했지 그 반대의 경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쿠자에몬의 말처럼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그것 잘 됐구나. 그럼 곧 내 곁으로 데려오너라."
이에야스가 말한다면 대관절 어떻게 될 것인가.
'잠깐!'
한에몬은 다시 한번 사쿠자에몬의 찌푸린 얼굴을 떠올리고 오만을 보았다.
사쿠자에몬은 오만을 소실로 들여놓으라는 말은 자기가 하겠노라고 했고, 그 정도의 바람도
불어넣지 못한다면 너 또한 바보......라며 큰 소리를 치고 돌아갔다.
'그렇다면 어딘가 바람을 불어넣을 급소가 있을 텐데......'
"우선 방에 데려가 쉬도록 해줘야 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한에몬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기다려."
여자의 일로 이에야스를 정신차리게 해주고 싶은 생각은 한에몬에게도 있었다. 셋째 성의
시녀 방으로 출입하는 것도, 이번 오만에 관한 일도 분명히 볼꼴 사나온 모습이었다. 그러
나 젊음이 넘치는 이에야스. 츠키야마와는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 이에야스......
"아, 그렇다!"
한에몬은 무릎을 탁 치고 아내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아내가 거의 죽은 것처럼 늘어
져 있는 오만을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심술궂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웃었
다.
"후후후."
이대로 오만을 일족의 원로인 혼다 분고노카미 히로타가에게 데려갈 결심을 했다 .히로타카
라면 이에야스도 츠키야마 마님도 드러내놓고는 꾸짖지 못할 것이다.
"임신한 오만이 츠키야마 마님의 분노를 사고 찾아왔기 때문에 잠시 맡아놓고 있습니다."
히로타카가 이렇게 말하면, 이에야스도 오만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고, 츠키야마 역시 오만을
죽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분명 이에야스의 뱃속에 봄날의 바람이 무섭게 불어닥쳐 여자에 대해 새삼스럽
게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한에몬은 부하를 먼저 보내놓고 자기 손으로 문단속을 하면서 몇번이나 그 절차와 이야기
할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과연 사쿠자에몬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는 하지 않는 사나이야......'
사쿠자에몬이 아니었다면 오만은 죽었을지도 모른다......이런 생각을 하자 이번에는 오만의
일이 걱정되어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아내의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새어나간 물
1
오만이 혼다 분고노카미 히로타카의 집으로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이에야스는 별로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혼다 한에몬이 우려했듯이 임신에 대한 것은 묻지도 않고 세나의 질투에 대
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음, 그래?"
다만 가볍게 대꾸했을 뿐, 그 일에 대해서는 잊은 듯이 보였다.
물론 내심으로는 심한 바람은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표면으로는 어디까지나 무
관심을 가장하고, 때때로 셋째 성으로 카네를 찾아가거나 본성으로 불러 목물을 끼얹게 하
고는 했다.
폭동이 가라앉은 뒤 곧 동 미카와 평정에 나설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이에야스의
느긋한 거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다음에 함락시켜야 할 곳은 요시다성. 이와 맞설 성은 이미 카스즈카와 키미데라로 정해졌
는데도 이에야스는 3월과 4월을 거의 허송했다.
점점 밤이 짧아졌다. 폭동을 평정한 뒤 서둘러 경작한 논은 모내기를 앞두고 있었다. 성안의
망루에서 바라보면 싱그러운 못자리가 그림으로 그린 듯이 파랗게 보였다.
그날 성안을 직접 순찰한 사쿠자에몬은 새벽이 가까워지자 씁쓸한 표정으로 셋째 성으
로 가서 카네의 방 뒷문 부근에 가만히 앉았다. 이에야스가 몰래 방에서 나오면, 그가 깨닫
지 못하도록 멀찍이 따라가며 호위를 하는 사쿠자에몬이었으나 오늘 새벽에는 앉아있는 장
소가 다른 때와 달랐다.
안에서 열도록 되어 있는 문을 등지고 털썩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점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아침 이슬의 한 방울이 되어 녹아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카네의 방 덧문이 열렸다
하늘은 이미 밝았으나 발 밑은 아직 어두웠다. 사람의 그림자 둘이 나란히 정원으로 나와
잠시 동안 다시 하나가 되었다. 잠자리의 여운을 아쉬워하는 카네와 , 카네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이에야스,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에야스의 발소리가 문으로 다가오자 졸고 있던 사쿠자에몬은 천천히 일어나 그 앞을 막아
섰다. 안에서 문이 열리고 이에야스의 이마가 사쿠자에몬의 어깨에 탁 부딪혔다.
"무례한 놈! 누구냐?"
소리친 것은 이에야스가 아니라 사쿠자에몬이었다.
"쉿."
이에야스는 당황하며 상대의 입을 막으려 했다 .
"나일세, 떠들지 말게."
"닥쳐라."
사쿠자에몬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혼다 사쿠자에몬이 성주님의 명으로 물 샐 틈없이 성내를 경호하고 있다. 이런 곳에 들어
와 어슬렁거리는 괴한을 잡지 않고 그냥 놓아줄 것 같으냐?"
"사쿠자에몬...... 나라고 하지 않느냐, 목소리가 너무 크구나."
"목소리가 큰 것은 천성이다. 순순히 항복해라."
"무엄하구나. 어서 비켜라."
"못 비키겠다. 이놈!"
일부러 크게 호통을 쳤다.
"아니, 성주님이 아니십니까?"
그제서야 사쿠자에몬은 진지한 표정으로 움켜잡았던 이에야스의 허리띠를 흔들었다.
2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성주님을 해칠 뻔했군요, 그런데 성주님은 무슨 일로 이
런 곳에?"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대가 짐짓 정색을 하고 묻는 바람에 이에야스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쿠자에몬, 희롱이 지나치구나."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희롱...... 그거 예사로 들어넘길 말씀이 아니군요. 잠도 안자고 경호
에 임하고 있는 이 몸이 희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알겠네, 알겠어. 그러나 너무 목소리가 커."
"목소리가 큰 것은 천성입니다. 대관절 성주님은 무슨 일로 이런 시간에 이곳에?"
이에야스는 이른 아침의 안개속에서 혀를 찼다.
"무슨 일이겠는지 생각해보게."
"생각해 보아라...... 과연 훌륭한 대답이시군요."
"아마 사쿠자에몬 자네가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일 테지. 자, 그만 하고 같이 가세."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무엇을 모른다는 말인가?"
"제 생각 같아서는 카네라는 여자를 죽이러 오신 것 같은데, 그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제 역
할이 아니겠습니까?"
"뭣이, 내가 카네를 죽이러 왔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쿠자에몬!"
"그대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또 착각을 하시는군요. 성주님은 본디 천성이 총명하신 분, 저는 완고한 고집쟁이에 불과합
니다. 드릴 말씀도 없거니와 들으실 성주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왔나?"
이에야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깔렸다.
"이직 모르고 계시는군요."
사쿠자에몬은 딴전을 부렸다.
"저는 성내를 순찰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성주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간 끈질기지 않군. 카네를 몰래 만나러 왔었어."
"아, 이제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내를 떠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
"성주님이 오다의 첩자에게 넋을 잃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사쿠자에몬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반쯤 열린 문에서 어떻게 될까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네의 멱살을 잡고 이에야스앞에 끌어냈다.
"카네, 너는 첩자였지?"
"예......예. 하지만 그것은......"
"첩자였지 않느냐!"
"예."
"너한테 최근에 밀사가 왔어. 새로 미노에서 할 일이 생겼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예, 그것도......"
카네가 도움을 청하듯 이에야스를 돌아보았다.
"나도 알고 있네. 카네가 말하더군."
이에야스는 나직한 어조로 사쿠자에몬에게 말했다.
"성주님은 잠자코 계십시오. 첩자를 문초하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카네!"
"예......예."
"너는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성주님 곁에 있고 싶지?"
"예."
"그러나 그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고 발착하게도 성주님을 죽이고 너도
자결하겠다고 결심했어.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뭐......뭐라구!"
이번에는 이에야스가 한걸음 물러나 기성을 질렀다.
3
"카네가 나를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했어? 사쿠자에몬! 농담이라면 용서치 않겠다."
이에야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이마에 그려넣은 것 같은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움츠러들 사쿠자에몬이 아니었다. 잇코 종도의 반란이 한창일 때도 그랬
거니와, 일단 자기가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굳게 닫힌 물과 같은 완고함을 고수하고 있었다.
비록 이에야스가 이를 간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자기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은 가신 중에서도
사쿠자에몬 한사람뿐이었다.
이에야스는 귀찮아 언제나 쓴 웃음을 짓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오늘은 참을 수 없었
다 .
"무슨 증거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용서치 않겠다."
"후후."
사쿠자에몬은 비웃었다.
"성주님! 그런 협박은 다른 사람에게 하십시오. 저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으로는
입을 다물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쿠자에몬은 성주님을 모시는 첫날부터 목숨을 버리기로
한 사람입니다."
"아니, 나를 멸시하느냐?"
"멸시한다고 여기시면 언제든지 제 목을 치십시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중간 막으신다고 입을 다물 사쿠자에몬이 아닙니다. 이봐, 카네."
"예......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통하게 하지도 않겠다! 분명히 말하여라. 너는 성주님을 죽이고
너도 죽을 생각이었지?"
카네의 얼굴빛이 밀랍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애원과 공포를 띠고 이에야스를 쳐다보고 또
사쿠자에몬을 바라보았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카네, 분명히 말하여라. 그런 일이 없다고 똑똑히 사쿠자에몬에게 말해줘라."
"성주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또다시 사쿠자에몬은 꾸짖듯이 말했다.
"성주님이 어찌 여자를 안다고 그러십니까?"
"또 말대꾸냐!"
"죽을 때까지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죽은 뒤에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츠키야
마 마님 한 분도 감당하시지 못하는 성주님이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여자를
다루는 수법은 전쟁에 임한 무장의 전략과도 같은 것입니다. 살지 죽을지도 모르고 여자에
게 푹 빠지신 성주님...... 차마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이렇듯 말씀드립니다. 어째서 대답
이 없느냐? 네눈에는 이 사쿠자에몬이 대답을 듣지 않고도 그냥 내버려둘 사람으로 보이느
냐?"
"요......용......용서해 주십시오."
"누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느냐? 정직하게 말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단지 성주님을 사모하여......"
"어서 그 다음을 말하여라."
"하지만 살아서는 주군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주군의 명이라 오와리로 돌아오라는 것 말이냐?"
"예."
"그 다음."
"죽어서라도 곁에 모시려고......용서해 주십시오. 오로지 사모하는 일념뿐입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라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알겠다. 잘 말했다. 그러나 염려 할 것 없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대신하여 성주님께 용서
를 빌겠다. 성주님! 들으셨습니까?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4
이에야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생각이 많은 눈길로 카네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생각한 살생은 원한이 아니면, 적 또는 야심이거나 공명심 따위로 유발되는것
이다. 사모하기 때문에 죽인다는 것은 생각해본 일조차 없었다.
지금 카네는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오와리로부터의 지령은 낱낱이 이에야스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자기를 사모한다는 말에 두 마음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조금도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 가장 무서운 것을 가슴에 숨기고 고백하지 않았다.
"위험할 뻔했습니다."
사쿠자에몬이 말했다.
"오늘이나 다음 번에는 성주님의 목숨이 남아있지 않을 뻔했습니다......성주님!"
"......"
"이여자의 말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습니다. 전쟁터의 무사에 비유하면 훌륭한 무사의 태도
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저를 보아서라도 목숨만은 건져 주십시오."
이에야스는 아직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서웠지만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을 알고는 이 여자에게 접근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밝아 주위가 훤해졌다. 카네는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린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마음속의 갈등. 사랑스러
우면서도 두렵고, 슬프면서도 분한 착찹한 감정이었다.
"카네......"
잠시후 이에야스는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카네는 전처럼 순순히 고개를 들지 못
했다. 아마 카네도 역시 격렬한 애욕의 태풍 뒤에 찾아온 허무감을 씹어삼키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성주님......"
다시 사쿠자에몬이 입을 열었다.
"이 여자의 목숨을 삼려주실 것을 믿고 말씀 드립니다."
"......"
"대체로 여자가 성장하려면 세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맨 처음 동정일 때는 하얀 연꽃,
중년에는 진홍색 가시나무, 이 두가지 과정을 거쳐 분별을 아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보통입
니다."
이에야스는 무뚝뚝하기만 한 사쿠자에몬의 입에서 여자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
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움직이지 않는 카네의 목덜미에 다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성주님은 이 하얀 연꽃에 색정의 붉은 빛을 떨구어 더럽히셨습니다. 그러므로 흰 연꽃은
가시나무로 변해 성주님을 찌르려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오로지 성주님의
잘못입니다."
"......"
"무릇 내전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연꽃을 물들이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들
여놓고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 죄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이런저런 가
시를 만들어 서로 찌르는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가장 어리석은 일
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나는 여자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사쿠자에몬은 빙긋이 웃었다.
"이제됐어. 허락이 내렸다. 카네, 방으로 돌아가 어서 떠날 준비를 하도록."
카네에게 말하고 자기도 조용히 일어났다.
5
사쿠자에몬이 말했는데도 카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먼저 자리
를 뜨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쿠자에몬은 강한 소리로 이에야스를 재촉했다.
"성주님!"
이에야스도 헤어지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어 번 뒤를 돌
아보았을 뿐 그대로 사쿠자에몬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잠시 묵묵히 걸었다.
본성의 성곽 언저리에서 새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이에야스와 같이
이동하는 것처럼 여겨져 정문으로 들어설 때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수고가 많구나."
사투자에몬은 문지기에게 먼저 말을 걸면서 앞장서 걸었으나 침소 앞의 정원에 다다르자 걸
음을 멈추었다.
"잠시 주무시지요."
머리는 숙이지 않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에야스는 갑자기 자기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괜찮아."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마루로 가세."
사쿠자에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따라갔다. 연하인 성주의 지기 싫어하는 기질, 이대로 그냥 넘
겨버릴 수 없다는 그의 마음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앉게."
이에야스는 거실의 댓돌에 올아서면서 사쿠자에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그대는 나에게 여자에 대한 강론을 해 주었어."
사쿠자에몬은 밝아오는 하늘에 눈길을 보내며 한 계단 아래에 걸터 앉았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 그 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그대는 어디서 여자를 알았나?"
"성주님!"
"그래, 어서 말해보게."
"저는 성주님께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에게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는 자결할 것입니다."
"뭐, 자결......자네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나?"
"남자라도 정든 주군과 헤어지기란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토록 사모하던 여자의 마음은 어
떻겠습니까? 감정보다 의리가 더 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으면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현명한 체하는구나!"
이에야스는 크게 혀를 찼으나 어딘지 수긍되는 점도 없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겠는데, 나는 앞으로도 여자를 가까이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합쳐지도록 신
이 창조한 자연이야."
"하하하."
"무엇이 우스운가?"
"성주님, 누가 성주님께 여자를 삼가라고 했습니까?"
"그러기에 삼가지 않겠다고 했지 않아."
"좋습니다. 얼마든지 가까이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사쿠자에몬은 또 방약무인하게 웃었다.
"엉덩이에 깔리기도 하고 성밖으로 도망치게도 하고 죽이려 드는데 깨닫지 못하고......병법으
로 말한다면 이건 정말 형편없는 미숙자. 어떤 일에나 미숙자는 보기 흉한 법입니다. 성주
님, 제발 달인이 되십시오."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느냐!"
이에야스는 무서운 눈으로 사쿠자에몬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6
인간이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이토록 강해지는 것일까.
이에야스는 아직까지 어느 가신의 입으로부터도 미숙자라 불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쿠자
에몬은 비록 여자에 관한 일이기는 하지만 서슴없이 주군을 꾸짖고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도 토리이 타다요시라거나 오쿠보 죠겐, 이시카와 아키, 사카이 우타노스케처럼 이에야
스가 강보에 싸였을 때 돌보았던 노신이라면 몰라도 겨우 열두세 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이렇게 생각되자 속이 뒤집혔다.
물론 이성으로는 올곧은 성격의 정말로 귀중한 가신이라는 사실도 알고, 지금 목숨을 걸고
충고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젊음이 이에 반발했다. 이 오만한 사나이를
혼내주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쿠자에몬, 그대는 설마 세상에서 말하듯이 혀만 살아있는 인간은 아닐 테지?"
"모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충고에 따라 나도 달인이 되겠다. 아까 그대는 무어라고 했지?
엉덩이에 깔리거나 성밖으로 도망치게 하거나 죽이려 드는 것도 모르고 있다고 했지?"
"성주님은 참으로 끈질기십니다."
"알고싶다. 엉덩이에 깔린다고 한 것은 츠키야마를 두고 한 말일 테지?"
"물론입니다."
"엉덩이에 깔리지 않는 연구,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기술, 여자의 마음을 꿰뚫는 방법. 그것
을 어떻게 하면 터득할 수 있다는 말이냐. 설마 그대 자신도 모르면서 나를 미숙자라고 단정
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쿠자에몬은 흘끗 이에야스를 쳐다보았다.
"성주님은 정말 이상하십니다. 밤의 잠자리에서나 할 말을 이렇게 아침부터 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닥쳐!"
"닥치지 않는 것은 바로 성주님이십니다."
"정도가 지나친 그대의 불손, 아침 햇빛 밑에서 규명하겠다. 그런 것이 어째서 잠자리에서나
할 소리냐?"
"성주님! 저더러 말이 지나치다고 사죄하라는 말씀입니까?"
"누가 사죄하라고 했느냐. 생각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성주님은 여자를 밝히시는 분입니까?"
"그것은......모른다!"
"아니, 알고 계십니다. 색욕에 정신을 잃으실 성주님이 아닙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
런 시대에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성주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또 나를 그대 생각대로 판단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으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주님이 여자를 가까이하시는 것은 한낱 놀이에
지나지 안습니다. 여자 때문에 성이 위태로어지고 가신의 신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치밀한
계산이 함께 행하시는 놀이입니다. 그런 놀이로 생명을 건 여자의 사랑과 맞서려 하고 계십
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성주님! 이쪽에서는 놀이로 여기면서 목숨을 건 칼날을 이기리라
고 생각하십니까?"
"뭣이!"
"깨끗한 마음에 단순한 놀이로 접근한다면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놀이에는 놀이로 대하겠
다, 상대가 그렇듯이 이쪽에서도 사랑 때문에 몸을 망치지는 않겠다는 계산적인 여자라면
괜찮을 것입니다. 성주님께는."
"그렇다면 유녀라도 들여놓으라는 말이냐?"
이에야스가 못마땅한 듯 반문하자 사쿠자에몬은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 참, 성주님이 이토록 계산이 어두우시니 여자 문제는 쉽게 결말이 나지 않겠군요."
7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라니......사쿠자에몬! 그것이 나에 대한 말버릇이냐?"
이에야스는 또다시 심한 분노를 느끼고 언성을 높였다. 이런 일로 다툴 생각은 없었으나 사
사건건 사쿠자에몬의 말은 그의 젊음이 반발케 했다.
"어째서 결말이 나지 않겠는지 설명을 듣고 싶다. 말해보아라."
"성주님......"
사쿠자에몬은 난처한 듯 양미간을 모았다.
"이제 그만두시지요. 놀이와 목숨을 건 승부의 차이만 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무슨 일에
나 단번에 달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기다려, 아직 일어나지 마라!"
이에야스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불러 세웠다.
"저는 아침 순찰을 돌아야 합니다."
"오늘은 하지 않아도 좋다. 내 계산이 어둡다니 그것은 내가 바보라는 뜻이다. 그런 소리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제야 아셨군요?"
사쿠자에몬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계산적인 여자라면 유녀밖에 없겠지요...... 그런 머리라면 여자에 관한 한 바보라 할 수 있습
니다."
"말을 다 했느냐!"
"다 했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했다.
"성주님, 무슨 일이든지 균형이 중요합니다. 성주님이 놀이로 여기신다면 상대도 놀이, 성주
님이 즐기신다면 상대도 즐기기만 할 뿐, 이 것을 쌍방이 득을 본다면 이렇다 할 문제는 일
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여자가 많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그런 여자를 데려 오너라. 설마 있기는 있어도 차마 데려오지 못하겠다는 비
겁한 소리는 하지 않겠지."
사쿠자에몬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분부시라면 데려오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럼."
"잠깐!"
사쿠자에몬은 벌써 침소의 정원에서 바깥으로 돌아나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댓돌 위에 잔뜩 버티고 서서 잠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이상 더 무례한
짓은 없었다. 다시 불러 베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확실히 자기가 큰 바보라는 자학적인 반
성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하하하."
갑자기 이에야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겁 없이 잘도 지껄였다."
그 웃음 속에서 사쿠자에몬의 굽힘 없는 충성심을 긍정하려 했으나 분한 감정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성주님, 세수를 하시지요."
어느 틈에 사키카바라 코헤이타가 세숫대야를 들고 뒤에 서 있었다.
이에야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코헤이타."
"예."
"사쿠자에몬이 한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해두어라. 고집불통이지만 구하기 힘든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고 이에야스는 세숫대야를 끌어당겼다.
8
전략에 대해 노신이나 공신들과 이야기할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여자 이야기는 드물었다.
그런 만큼 사쿠자에몬의 신랄한 충고 한마디 한마디는 이에야스의 가슴을 무섭게 찔렀다.
사쿠자에몬의 충고를 요약하면, 동정인 처녀와의 정사는 여자가 목숨을 걸 위험이 있으므로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산적인 여자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
지 않았다. 그 무뚝뚝한 자가 언제라도 분부만 내리면 데려오겠다는 여자의 부류에 대해서
는 더더구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코헤이타의 시중으로 식사를 끝내고 잠시 탁자 위에 놓인 논어를 읽었다. 그러다
가 마침 그때 출사한 이시카와 이에나리를 불렀다.
"셋째 성으로 카케이인을 찾아 뵙고, 카네가 그만두겠다는 청을 올리면 허락했으면 좋겠다
는 말을 전하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주는 수당이라고 전하고 오너라."
약간의 돈을 싸서 건넸다.
사정을 알고 있는 이에나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본성을 나갔으나, 얼마 후에 돌아와 이에야스
가 준 돈을 그대로 내놓았다.
"카네는 오늘 새벽 카케이인 님으로부터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래? 빠르기도 하군."
"곧 뒤를 쫓으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에나리는 이에야스의 마음을 읽은 듯 조용히 덧붙였다.
"그대로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달아났다는 말이지. 그럼 문지기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느 문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달아난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마 땅속으로 기
어들어 물처럼 새어나갔겠지요."
이에야스는 씁쓸히 웃고 다시 논어로 눈길을 옮겼다.
도주하게 한 것은 사쿠자에몬임에 틀림없다. 이에나리도 그것을 알고서 물처럼 땅속에 스며
들어 새어나갔을 것이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리라.
"이에나리."
"예."
"그대들 중신들의 눈에는 사쿠자에몬이 어떻게 보이는가. 쓸만한 사람인 것 같은가?"
"글쎄요."
이에나리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오다님은 지금쯤 이나바야마 성을 공격하려는 것 같습니다."
"미노의 이나바야마의 사쿠자에몬이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성주님도 동쪽으로 가시게 되지 않습니까. 오카자키 성에만 계실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사쿠자에몬을 기용하란 말인가?"
"안심하고 오카자키의 행정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대도 역시 사쿠자에몬과 한편이군."
"성주님도 같은 생각이실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마는."
"알겠네, 그만 물러가게. 오늘은 조용히 혼자서 독서를 하고 싶군."
이에나리가 물러가자 이에야스는 얼른 책을 덮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코헤이타를 데리
고 서쪽 망루에 올라갔다.
"그렇구나, 오다님이 드디어 미노를 공격할 모양이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야하기가와 쪽으로 뻗은 하얀 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죽음의 길
1
폭동이 진압되자 이에야스는 조심스럽게 노부나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노히메의 아버지 도산을 학살한 아들 요시타츠는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그의 병은
문둥병이었다고 하는데, 그 병의 묘약이라는 것이 실은 노부나가의 고육지책에 의한 독살이
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쨋든 요시타츠는 그 약을 먹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지금은 그의 아들 타츠오키가 이나바야마의 성주로 있었다. 노부나가는 드디어 그 타츠오키
를 공격하는 군사를 동원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카이의 타케다 쪽과 손을 잡고 신겐
의 아들 카츠요리에게 자기 양녀를 시집보내려는 생각도 하고 있는 듯했다.
이에야스와 노부나가 사이는 타케치요와 토쿠히메의 약혼 이후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그렇다고 방심해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노부나가가 미노에 군사를 출동시킨 뒤
이에야스도 동 미카와에서 토토우미로 군사를 동원할 생각이었다.
이에야스가 요시다 성으로 군사를 출동시키고 스스로 진두에 서서 오하라 히젠노카미를 공
격하기 시작한 것은, 오만과 카네 등 여자문제를 정리하고 동 미카와의 모내기가 거의 끝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올해는 기근이 들 염려가 없다."
이렇게 판단한 뒤 이에야스가 오카자키를 떠나 시모고이에 도착한 것은 5월 14일이었다.
선봉은 약관 열일곱 살로 이미 그 용맹이 널리 알려진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그리고 마
츠다이라 토노모노스케, 오가사와라 신쿠로, 하치야 한노죠등이었다.
"한노죠, 누가 최초로 공을 세울지 나와 경쟁해보지 않겠나?"
14일 새벽 시모지를 향해 행동을 개시할 때 막사를 나오면서 헤이히치로가 한노죠에게 말했
다.
"뭐, 나하고 최초의 공을 다투어 보겠다고?"
"그래. 자넨 폭동의 책임을 통감하고 더욱 사나운 말이 되었으니 나와 경쟁할 사람은 자네
밖에 없다고 생각해."
"지나치게 기세를 부리는군, 헤이하치로."
하치야 한노죠는 강 안개가 자욱한 길로 말을 몰면서 코웃음을 쳤다.
"암, 그거 좋지. 하지만 내기를 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리고 지더라도 주눅이 들면 안 돼."
"후후후."
헤이하치로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좋아. 그럼, 분명히 약속한 거네."
두 사람은 요시다 성에서 시모지로 나온 마키노 소지로 야스나리의 군사를 새벽에 공격할
작정이었다. 혼다 헤이하치로는 오른쪽 언덕에서, 하치야 한노죠는 왼쪽의 논을 돌아 공격하
여 누가 먼저 공을 세울지 경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치야 한노죠는 혼다 헤이하치로의 군대가 언덕 밑의 소나무 그늘로 사라지자 말에 채찍을
가해 논두렁길을 달렸다.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폭동이 평정된 후 다시 기용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공을 세우고 싶었다.
'헤이하치로에게 공을 빼앗길 수는 없다.'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부하들을 앞질러, 아직 해도 뜨기 전에 토요카와를 건넜다. 그리고 둑
너머로 보일락말락하는 마티노 군의 깃발을 발견하고는, 훨씬 뒤에서 따라오는 부하들을 향
해 머리 뒤로 창을 휘둘러 보이고 벼락같이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았다.
"보아라, 마츠다이라 가문의 그 유명한 하치야 한노죠가 여기있다. 날 모르는 놈이 있거
든......"
소리지르다 말고 둑 밑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이미 한발 먼저 도착한 혼다 헤이하치로가 빨
간 삿갓을 쓰고 갑옷 위에 여자의 장옷을 걸친 적을 상대로 창을 맞대고 있었다......
2
"한노죠, 늦었군."
창을 겨눈 채 헤이하치로가 말했다.
"나서지 말게, 이자는 제법 강하네."
한노죠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억세게도 무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빨간 삿갓을 쓰고 어머니
장옷을 걸치고 싸움터에 나온 것을 보니 상대는 마키노 일족 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한
키도코로 스케노죠임에 틀림없다.
"모처럼 자네가 발견한 상대인데 내가 가로챌 수가 없지."
한노죠는 이렇게 외치더니 창을 던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 하치야 한노죠는 두 번째로 공을 세우는 일따위는 원치 않아. 이걸 봐라."
등에 메었던 칼을 얼른 빼어들었다.
"나는 칼로 승부를 겨룰 것이다. 덤벼라!"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고 헤이하치로는 적과의 거리를 점점 좁혀 나갔다.
키도코로 스케노죠의 방해로 적장 마키노 소지로를 죽이는 가장 큰 공을 한노죠에게 빼앗긴
다면 제일 먼저 쳐들어온 의미가 없었다.
헤이하치로가 초조해하며 다가서자 상대는 그 거리만큼 물러섰다.
"물러서지 말고 어서 덤벼라!"
"젊은이, 너무 서두르는군."
"뭐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듣게나. 어디서 두견새가 울고 있지 않는가?"
헤이하치로는 빙긋이 웃고 다시 한걸음 다가섰다. 세차게 창이 부딪쳤다. 양쪽의 허리와 팔
에서 몇 번인가 창이 번뜩였다.
두사람이 떨어졌을 때는 양쪽 모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헤이하치로는 갑옷의 토시가 찢겨
거기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상대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으나 가세하려는 부하들을 꾸짖었다.
"나서지 마라!"
다시 한 번 창이 맞부딪치면 그것으로 승부는 날 것이었다.
헤이하치로는 아직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죽음따위는 자기와 인연이 없는 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혈기로 다시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잠깐!"
상대가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
"기다리라고 했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음, 항복하겠다는 거냐?"
"내 말을 들어. 나는 키도코로 스케노죠가 아니야."
"뭐, 키도코로가 아니라고?"
상대는 창을 겨눈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누구냐?"
상대는 조용히 웃었다.
"마티노 소지로 야스나리."
주위를 의식한 듯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마키노 소지로......당신이?"
"은밀히 마츠다이라 이에야스 님께 전해주기 바란다. 내 마음은 진작부터 이마가와 쪽에 있
지 않았다. 그대와 창을 겨눈 것도, 키도코로의 삿갓을 쓰고 있는 것도 모두 내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
"당신이 소지로 님이란 말이오?"
헤이하치로는 창을 내렸다.
"알겠소.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군요. 만일에 한노죠가 가세했더라면......"
헤이하치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와아."
소지로의 본진처럼 가장했다는 막사에서 이상한 함성이 있었다.
3
전쟁처럼 확실하게 사람의 운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도 없었다.
혼다 헤이하치로가 키도코로 스케노죠의 방해로 진격이 방해당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실은
자기가 목표로 한 적의 대장과 창을 겨루고 있는 동안, 하치야 한노죠는 무인지경으로 적의
본진에 쳐들어가 뜻하지 않은 적 앞에 서게 되었다.
당연히 마키노 소지로가 앉아 있어야 할 의자에 한 절름발이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너는 누구냐?"
방해하는 적군 둘을 베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천천히 일어났
다.
"나는 카와이 쇼토구. 그대는 하치야 한노죠로군."
손에 들고 있던 총포를 천천히 한노죠의 얼굴에 겨누었다.
"카와이 쇼토쿠란 절름발이가 바로 너였구나."
"그렇다. 모처럼 찾아왔으니 작은 총알 한방 선사할까? 아니면 여기서 얌전히 물러가든지."
한노죠는 칼을 쥔 채 비웃었다.
카와이 쇼토쿠는 예전에는 코스케라고 불렀다. 그가 어느 전쟁터에서 후퇴할 때였다.
"저놈, 부상당하고 도망치는구나. 어서 베어라."
적의 말에 얼른 뒤를 돌아본 코스케.
"나무아미타불, 나는 부상당한 게 아니야. 타고난 절름발이야."
이렇게 말하고 상대를 잔뜩 노려본 뒤 후퇴했다.
"너는 지금부터 이름을 쇼토쿠로 바꿔라."
그 뒤 우지자네가 일부러 이름을 바꾸게 한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가 총포에 탄환을 장전하고 한노죠가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
러지도 못하게 된 한노죠는 저도 모르게 칼자루 끝을 움켜쥐었다.
"덤비겠다는 말이구나. 한노죠."
"닥쳐, 나는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난 적이 없다."
"그럼, 덤비겠다는 말이군."
쇼토쿠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웃는 것과 한노죠가 훌쩍 몸을 날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탕 하는 총성이 아침 공기를 찢었다. 순간 덤벼든 한노죠와 총포를 들고 있던 쇼토쿠가 함
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노죠는 관자놀이가 으스러지고 머리띠가 끊어져 산발이 되었다. 그 머리에서 콸콸 피가
뿜어나오고, 카와이 교토쿠는 짧은 쪽 다리가 무릎에서부터 절단되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
었다.
"하하하하."
쇼토쿠는 웃었다.
"짧은 다리를 잘라주다니 너무 친절한 녀석이로군."
"뭐......뭐......뭐야?"
관자놀이가 으스러진 한노죠는 칼을 지팡이 삼아 겨우 일어섰다. 몰론 눈이 보일리 없었다.
그러나 붉은 귀신과는 같은 형상으로 그 역시 쇼토쿠의 웃음에 응수했다.
"과연 쇼토쿠답게 잘 쏘았어. 하지만 네놈의 총알로 이 한노죠는 죽지 않는다. 너희들을 먼
저......"
겨우 뒤쫓아온 부하들이 좌우에서 한노죠의 몸을 부축했다.
어느 틈에 쇼토쿠는 눈을 무릎든채 무릎에서 흐르는 피 속에 엎어져 있었다.
"이 따위 상처 갖고......"
한노죠는 이렇게 말하고 한걸음 한걸음 확인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처참하여 아무도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4
이 막 으스러진 한노죠는 막사 밖으로 걸어나가 양쪽과 앞뒤에서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딛고 선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들 것을."
누군가가 말했으나 그 소리도 멀리서 들렸다.
"필요없다."
한노죠는 고개를 젓다가 낯을 찌푸렸다.
"말을 끌어오라......"
흐르는 피 때문에 시야를 잃고 엉뚱한 방향을 노려보았으나, 총을 겨누던 카와이 쇼토쿠의
얼굴을 아직 또렷하게 눈동자에 남아 있었다.
"하하하하......"
부축을 받고 다시 대여섯 걸음 걷다가 한노죠는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
50년이라는 인생의 절반을 겨우 지났을 뿐인데 벌써 죽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느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람이란 모두 한번은 반드시 죽는다고 대범하게 생각해왔지만 막상 자
기 몸을 죽음의 손에 맡기게 되자 문득 감상 같은 것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하하......"
한노죠는 다시 웃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이었다. 사소한 불만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부처와 성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 하고 망설이
기도 하고......하지만 그것도 한방의 총탄 앞에서 너무도 무력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
서 자기를 쏜 카와이 쇼토쿠를 원망할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훌륭한 녀석!'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단지 상대가 그 자
리에서 죽지 않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가 죽는다면 자신이 결국 패배한 게 될 것 같
아 그것이 싫었다.
"들 것을."
다시 부하가 외쳤으나 이미 한노죠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것이 왔다. 두명의 부하가 그를 들것에 싣고, 귀에 입을 대고 카다랗게 말했다.
"말을 대령했습니다."
한노죠는 눈을 무릎뜨고 반듯하게 누운 채 손으로 고삐를 잡는 동작을 취했다.
"쇼토쿠는......쇼토쿠는 죽었느냐?"
"예......예, 죽었습니다."
"성주님 앞으로 말을 달려라. 성주님 앞으로 가겠다."
성주는 한노죠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이 노모는 혼다의 미망인에게 버금가는 강한 기질을
가진 여자였다. 아마도 한노죠가 적인 카와이 쇼토쿠보다 먼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면
눈물을 삼키고, 꾸짖을 것이 분명했다.
"너처럼 못난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니다."
부하는 점점 더 불규칙해지는 한노죠의 호흡을 걱정하면서 이에야스의 본진을 향해 토요카
와를 건넜다.
그때 이미 이에야스는 강어귀까지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하치야 한노죠가 부상을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사카키바라 코헤이타의 보고에 이에야스는 말을 세우고, 그 앞에는 빈사상태의 한노죠가 놓
였다.
"한노죠!"
이에야스는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들것으로 다가갔다.
"이 정도의 상처 따위에, 한노죠!"
강한 어조로 불러보았으나 한노죠의 눈은 잔뜩 하늘을 노려본 채 그대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
었다.
5
이에야스는 당황하며 한노죠의 동공을 살펴보고 이어서 맥을 짚어보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쫓고 있는지 온 정신을 모아 무의식 속을 헤
매고 있는 것 같았다.
"한노죠!"
이에야스는 갑옷을 입은 그의 가슴을 힘껏 흔들었다.
그 순간,
"성주님!"
쥐어짜는 듯한 한노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치야 한노죠, 카와이 쇼토쿠를 죽이고 개선했습니다."
"오, 그래, 잘 싸웠다."
"어머니께......어머니께......용감했다고......"
이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목이 크게 부풀어오르고 울컥하고 많은 양의 피를 토하더니 목에
서 힘이 빠졌다.
이에야스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한노죠의 명복을 빌었으나, 눈은 감지 않았다. 죽은 한노죠
와 살아있는 이에야스가 마치 증오를 불태우며 서로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아니, 이 경우 한
노죠는 이에야스를 우러르고 이에야스는 한노죠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처럼 죽음의 길을 걷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와 걸어야만 하는 자와의 애절함이 인간의
삶에 혹독한 항의를 던진 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윽고 이에야스는 눈을 하늘로 보낸 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말렸다. 여기저기서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아침 햇빛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강물에 반사되고 있었다.
"알겠느냐, 한노죠는 아직 살아있다. 그의 어머니에게는 진지로 돌아와 죽었다고 알리어라."
"예."
"그만 데려가서 치료하라."
들것이 후방으로 옮겨졌다.
이에야스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분연히 말에 올랐다.
선두가 강을 건너면서 일으키는 물보라가 이상하게도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때 건너편 강둑에서 삿갓을 쓴 마티노 소지로를 대동한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의 모습
이 보였다.
그 역시 왼쪽 팔을 흰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으나, 그와 말은 모두 기운이 넘쳤다. 이에야
스의 깃발을 보고 헤이하치로는 앞발을 번쩍 드는 말을 달래면서 풀이 파랗게 자라 있는 둑
을 내려왔다.
마키노 소지로가 한패가 되어준다면 요시다 성은 이미 함락된 것과 다름없다. 그 성주 소지
로에게 항복을 받았다는 자랑스러움이 젊은 헤이차치로의 온몸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
헤이하치로는 둑 밑에서 말을 내려 들뜬 기분으로 이에야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헤이하치로의 등 뒤에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까마귀들이 시끄러울까."
강을 건너 이에야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헤이하치로에게 힐끗 일별을 던지고 나서
불쑥 말했다.
"헤이하치로, 한노죠가 죽었어."
"아니, 한노죠가 전사했습니까?"
"전사한 게 아니라 적을 무찌르고 자기도 상처를 입은 거야."
이렇게 대답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흘끗 소지로를 보았다.
"그자는 누구냐? 못 보던 얼굴인데."
6
마티노 소지로는 순간 얼굴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얼른 두 주먹으로 땅을 짚고 머리를 숙였
다.
"마티노 소지로 야스나리, 성주님을 영접 나왔습니다."
"뭣이!"
소지로라면 적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려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타
다카츠가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쳐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익한 싸움을 피해 힘있
는 자에게 굴복하려는 지혜를 가진 소지로가 훨씬 더 훌륭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
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지로의 무사도와 죽어간 한노죠의 무사도는 대조적인 것이리라. 한쪽은 완고할 정
도로 속이 좁고, 다른 쪽은 그 타산의 밑바닥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넓었다. 물론 가증스럽다
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마키노의 부하들은 죽지 않고 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
을 것이다.
"소지로, 호의 고맙소. 시상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오하라의 성부터 공격하시오."
"잘 알겠습니다."
"헤이하치로!"
"예."
"마키노와 상의하여 즉시 사카이 타다츠구의 군사와 합세하라, 너는 참으로 원기왕성한 자
로구나."
헤이하치로는 싱긋 웃었다.
"예."
일부러 크게 고개를 숙이고 여럿이 보고 있는 앞에서 창을 한번 휘두르고 말에 올랐다. 죽
음의 공포를 모르는 나이, 싸우는 것이 재미있어 못견디겠다는 기상이 온몸 구석구석에 흘
러 넘치고 있었다.
그것이 도리어 이에야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소지로와 타다카츠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 뒤 이에야스는 다시 유유히 말을 몰았다.
이미 보급부대까지 선발대와 연결되어 승리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문득 나직하게 절규하듯 불렀다.
"한노죠."
그러면서 그의 죽음을 떠올렸다.
"하루속히 그대처럼 죽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구나."
둑을 넘어 시모지에 들어갔을 때 눈앞의 하늘에 민가가 불타는 두 줄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만일 이땅에서 전쟁이 사라진다면."
일본의 모든 무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강력한 대장이 나타나 아무도 멋대로 싸우지 못하게
하고 각자 자기 직무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일본은 얼마나 풍요로운 세상이 될것인가......?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은 오래 전부터 완전히 이마가와 영지. 예전에는 빠져나갈 수도 없고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땅. 이에야스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전쟁을 몰아내려는 염원!
치밀한 두뇌와 깊은 자비심을 지닌 불퇴전의 용사라면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
감했다. 노부나가는 이미 그 실감을 확실히 포착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렇
다면 신불의 가호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다시 두 개의 들것이 운반되어 왔다.
"다친 사람은 누구냐?"
말 위에서 이에야스가 말했다.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의 부하 이세 곤로쿠와 그 숙부 쵸자에몬입니다."
"숨은 쉬느냐?"
"예. 아니, 벌써 끊어졌습니다."
"멈추어라. 내가 명복을 빌겠다."
이에야스는 말에서 내려 시체를 덮은 천을 걷게 했다.
7
시체 하나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듯, 거기서 쏟아져 나온 피가 검게 엉겨 있었다. 눈은 감
고 있었으나 온통 얼굴을 뒤덮은 수염 속에서 입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흰 앞니가 드러나 있
었다. 육친이 보았다면 평생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참혹한 죽음의 얼굴. 오른손에는 진흙과
단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세 곤로쿠냐?"
"그렇습니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
"전사하는 장면을 보았느냐?"
"예. 적의 성에서 공격해나온 이마무라 스케나리를 맞아 싸우다가 칼이 부러져서 뒤엉켜 싸
우게 되었습니다. 곤로쿠 님은 원래부터 괴력을 지닌 분, 이마무라 스케나리를 넘어뜨리고
단검으로 찌르려는 순간 느닷없이 적병 하나가 뛰어들어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너희들은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곤로쿠님이 저희들에게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대일로 상대하겠다면서, 그런데
도 비겁하게 상대의 부하가 갑자기 대드는 바람에......"
"그래서 적은 무사했다는 것이냐?"
"예......"
이에야스는 가만히 시체 앞에 합장하고 입속으로 염불을 했다.
일대일로 싸울 테니 나서면 안 된다고 입으로도 말하고 마음으로도 맹세한 자는 죽고, 그 약
속을 깬 자는 살아남았다. 전쟁터에서나 세상일에서도 완고하게 옳은 길을 가려는 자가 오
히려 다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에야스는 곤로쿠의 시체를 천으로 덮어주고, 문득 세나와 타케치요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그에게 자식이 있느냐?"
"예. 씩씩한 아들만 셋을 두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또 하나의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악취가 풍기는 시체에서 파리떼가 날아오르고 그중 하나가 이에야스의 입 언저리에 부딪쳐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이에야스는 시체를 덮은 천을 들치고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반백인 50대
사나이가 곶감처럼 바싹 마른 얼굴이었다.
엷게 뜬 눈에서는 흰자만이 보였고, 어깨 위에서 내려친 한칼에 가슴까지 주홍색 살점이 비
어져나와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당할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미 시체 안에서
는 구더기가 활개를 치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숙부라고 했지?"
"예."
"전사할 때 상황은?"
"조카를 찌르고 그대로 도주하려는 적에게, 비겁한 놈! 게 섰거라하면서 공격해 들어갔습니
다."
"그래서 그 자를 베었느냐?"
"그런데 이때 쓰러졌다가 일어난 이마무라 스케나리가 옆에서 덤벼들어......"
"이 상처는 그 때문에 생긴 것이로구나."
"예, 그러합니다."
이에야스는 명복을 비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불운했고......하면 그만이었다. 하
지만 자기 편의 어딘가에 그 불운을 초래하는 원인이 있어 그것이 죽음의 길을 열어놓지 않았
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훌륭한 자는 죽고 비겁한 자는 살아남는다......'
8
다시 근처에 있는 나무에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야스는 새삼스럽게 시체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아침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시체는 더욱 비참해 보였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
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날카롭게 외치는 것이 있었다.
"이 쪽은 자식이 있느냐?"
"없습니다."
부하가 대답했다.
"그래서 곤로쿠가 전사한 것이 더욱 분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지난해에 사별하고......"
"혼자란 말이냐?"
"예. 집에 있을 때는 화초 가꾸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화초를......"
어느 틈에 부하는 울고 있었다. 아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울음이었
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에야스는 이 바싹 마른 사나이가 조그마
한 뜰에 서서 화초에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 남자를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의 부하. 하지만 그 타다츠구에게 출전을 명한 것은 이에야스였
다.
'난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에야스는 주검의 얼굴을 조용히 덮어주었다.
"정중하게 묻어주도록 해라."
부하는 땅에 앞드려 다시 울었다. 이에야스의 따뜻한 말을 듣게 된 죽은 자의 행복을 진심으
로 감사히 여기는 울음이었다.
"빨리 가거라."
"예."
들것이 들렸다.
이에야스는 말에 오르는 것을 잊기라도 한 듯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인간의 죽음.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길.
이것을 자연스럽게 걷지 못하게 만든 것이 자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오늘따라 마음이 약해진 걸까. 주검을 보고 감상에 사로잡힌다면 하루도 더 살아 있을 수 없
는 것이 이에야스의 입장이었다.
"성주님! 말에 오르십시오."
평소와는 다른 이에야스에게 토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가 다가와 말을 걸었으나 이에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주님! 전투에 이겼다고 해서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히코에몬."
"선봉은 이미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 어서."
"서두르지 마라, 히코에몬.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대지를 처음 본 듯한 생각이 드는구나."
"농담은 전쟁에 이긴 뒤에 듣겠습니다."
"음, 그대에게는 이것이 농담으로 들린다는 말이로군."
"자, 어서."
"그래, 말에 오르겠다. 말을 타고 죽음의 길을 걷겠다."
이에야스는 말에 오르는 자신의 발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착잡한 마음이 패
전을 초래할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앞에 불상 하나가 보였다. 호법의 대의를 손바닥에 얹고 있는 제석천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나도 이쯤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의 길을 막기 위해 걸어가는 무장. 무사 위에 제석천이 있다는 것을 잊고......
"성주님! 서둘러 주십시오."
모토타다가 다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