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말하기 .듣기 교과서에 실려 있는 두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이억년님과 이조년님)중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 이억년님의 묘소가 800년만에 새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이화여 월백하고 원한이 삼경인제~의 시조로 유명한 이조년님의 형인 이억년님의 묘소는 지리산 어귀인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뒷산에 있으며 9월 17일에 성주이씨 문중에서 묘소 정화작업에 착수를 했습니다.
두 형제 이야기는 고려때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덩이 두개를 줍게 되고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가지게 되나 배 위에서 동생이 금덩이를 강에 던지게 되고 연유를 묻자 금덩이 때문에 그렇게 좋던 형이 미워지게 되어서 그랬다고 하자 형 역시 '네가 없었더라면 두개의 금덩이가 내것이 되었을텐데, 하는 마음이 생겼노라 하여 역시 강물에 금덩이를 던져 버린 일화의 주인공을 말합니다(강서구 투금탄 전설)
황금이라는 물질보다 인간사랑의 정신을 더 귀하게 여겼고, 물질문명에 타락해 가는 요즘의 세태에 많은 귀감이 되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사랑의 사연이 있는 두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이억년님의 묘소에 대해 아시는 분이 거의 없을줄 사료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정마을을 그냥 지나치시기에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억년님의 묘소 정화작업에 착수에 대한 부산일보 기사 내용을 복사하여 올려 봅니다.
묘소의 위치는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마을 바로 옆 산이며 지리산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있어서 쉽게 찾으실 수도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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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이억년 선생 묘비 정화 관련 뉴스)
'황금 내친 정신' 오늘에 되살려 경남 함양 이억년 묘소 새단장 뒤 문화재 추진
고려시대 형제간 우애에 걸림돌이 되는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억년 선생의 묘소가 새로 단장되고 문화재 지정이 추진된다.
18일 함양문화원(원장 김성진)과 성주 이씨 대종회(회장 이시욱)에 따르면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정마을 인근에 있는 이억년 선생 묘(사진)가 봉분이 낮아지고 축대가 무너지는 등 크게 훼손돼 17일 묘소 정화작업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낸 뒤 정화작업에 들어갔다. 함양문화원 등은 봉분을 돋우고 한문으로 된 비문을 한글로 번역해 새로운 묘비를 세울 예정이다.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개경유수를 지낸 이억년은 고려 충렬왕 때 외세의 침입으로 국정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맏형인 이백년과 지리산 기슭인 문정마을로 낙향해 도정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이억년과 동생 이조년의 '황금 투척' 일화는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억년은 어린시절 이조년과 길을 가다 우연히 황금 두 덩이를 얻어 그 한 덩이를 동생에게 주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중 동생이 "금덩이를 보자 형님을 시기하는 마음이 싹튼다"며 금덩이를 강물에 버리자 이억년도 던져 버렸다.
김성진 함양문화원장은 "재산다툼으로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요즘 이억년 형제의 아름다운 교훈을 널리 알리고자 묘소를 정비하고 문화재 등록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김길수기자 kks66@busanilbo.com
*지리산 커뮤니티 홈(http://ofof.net/) 지리산 소식방에 올려진 내용
지난 12월 4일 지리산 어귀인 함양군휴천면 문정마을 뒤에 있는 고려말 개성유수를 지냈던 이억년 선생의 묘비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오브넷의
산마을 일기 - 동네이야기 1번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고려문인: 2005년 1월 21일)이란
글을 게재한 이후 오브넷
산소식 155번 (황금보다 형제사랑 택한 이야기: 2006년 9월 18일)
을 게재하였고 지난 12월 4일 드디어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두 형제 이야기중 형인 이억년 선생의 묘소 정화작업 완료와 함께 새 묘비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된 것입니다. 그 경과 과정이 오브넷에 그대로 날짜별로 기록이 된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산일보, 함양신문에 상세히 보도가 되었고 지난 12월 11일자 (진주 mbc 뉴스투데이 오늘)에까지 보도가 되었네요.
진주 mbc 홈에서 뉴스 코너의 (뉴스투데이 경남) 뉴스 다시보기 12월 11일자를 클릭하시면 함양 이억년 선생관련 뉴스를 다시 볼수 있습니다.
이는 이씨 문중의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겠지만 도덕적 불감증이 만연한 요즈 다시 한번 도도한 정신을 일깨우는 국민 도의적인 차원에서 한번쯤 새겨봄직한 일이라 여겨지기에 다시 한번 더 소개를 해 봅니다.
일찍이 영남(嶺南) 내륙에 터를 잡고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의 집안으로 명망을 떨쳐왔던 성주이씨는,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아들 5형제(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가 가문의 5대 인맥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기틀을 다진 집안입니다.
이 다섯형제중 개성유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남도 함양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의 동생 이조년은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차 두 사람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개성유수라 함은 당시의 수도가 개성이었으며 수도를 총괄하는 직책이었으므로 요즘의 서울특별시장급이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도중에서 금 두뭉치가 땅에 떨어져 있어 이를 주워서 두 형제가 한 뭉치씩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양천(김포군내)강 나룻터 양화도(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안에 당시 나룻터 현장이 있음)에서 배를 타고 건너게 됩니다.
배가 중간에 이르렀을때 아우인 이조년이 주운 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인 이억년이 그 연유를 물으니 아우가 대답 하기를
"저는 평소에 형님을 공경 하는 마음이 깊었는데, 황금 뭉치를 주어서 둘이 나 누어 가진 순간부터 홀연히 시기하는 싹이 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황금이란 즉 착하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인 이억년이
"너의 말은 참이로구나, 나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도다." 하며 그 또한 가졌던 황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일화는 [고려사 절요],[고려사 열전],[양천읍지],[동국여지승람]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그 연대는 대략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이며 그 이후 이 나루터 강을 투금강(투금강)또는 투금탄(탄,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내에 당시의 나룻터를 나타내는 표지와 함께 공원 안내문 가운데 고려 중,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간의 고사라고 밝힌 투금탄의 전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두형제의 이야기와 함양의 지리산과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이억년이 어수선한 정치 세계가 싫어 지리산으로 갈려고 할 때 동생 이조년이 배웅을 하게되고 이때 생겨난 투금강 일화가 생겨난 것으로 추측되며, 후에 이억년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정확한 위치를 표현하면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도정마을이 됩니다.
이들 형제중 이억년은 그의 형님인 이백년과 지리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맏형이었던 이백년의 이름에 유래되어서 현재 마을 이름이 백연마을이 되었으며 이억년의 묘소는 백연 마을과 가까운 문정 마을의 뒷산의 양지 바른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성주이씨 이백년(첫째), 이억년(넷째) 형제가 함양군 휴천면 문정에 와서 살았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현존하는 함양군 휴천면 백연마을(이백년)과 도정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는 도정마을(문정리)이 있으며 이억년 묘소가 문정마을 바로 뒷산에 있기 때문에 지명의 유래와 묘소가 그 증거가 된 셈입니다.
함양의 지명 책자에도 언급이 되어 있고, 마을 이름이 백연이며, 문정 마을 뒷산에 이억년의 묘소와 함께 있고 이억년이가 도정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는 도정마을이 문정리에 있으며 억년바위 등이 그 실체를 말해주고 있으며 이것은 막연한 전설이 아닌 실존의 사실로 인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형제를 살펴보면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 모두 다섯 형제가 되는데 이들중 이백년, 이억년이 고려때 이 지리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이조년의 그 유명한 시조도 함께 나열해 봅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말하기.듣기) 교과서 38-39쪽에 이 내용을 소재로 두형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약간 각색을 하였지만 근본은 꼭 같습니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황금덩이 대신 형제사랑을 택한 두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물음에 답을 하도록 교과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말하기 듣기 주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면
(금을 버린 형과 아우) - 교사용 지도서에 게재된 듣기 자료 내용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날, 아우가 강바닥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덩이 두개를 발견했습니다. 아우는 금덩이 얼른 건져 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한개를 형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어느 정도 건넜을 때, 갑자기 아우가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형은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 저는 평소에 형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덩이 하나를 형님께 드리고 나니 자꾸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
이 말을 듣고 형도 가지고 있던 금덩이를 꺼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상이 국정교과서인 3학년 1학기 말하기.듣기 교과서에 실린 주 내용입니다.
두 형제 이야기에서 금덩이가 우연히 발견되어진 부분에 대해서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실에 약간 각색이 되어질 수도 있고 미화가 되어질 수도 있으나 그 자체가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점보다 두 형제가 보여준 인간사랑의 실천 그 자체에 우리는 많은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책자에만 소개되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 기록이 되어진 것을 보면 두 형제의 아름다운 사례를 당시에도 상당히 비중있게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시들어 가는 듯한 요즘의 분위기에서 새롭게 국민 도의적인 차원에서 다 함께 새겨 보았으면 해서 자꾸 글을 올려 봅니다. 이 내용도 지리산의 이야기이니까 오브넷 산소식방에 올렸습니다.
진주 MBC 뉴스자료(TV, 라디오뉴스) 다음은 진주 MBC보도부 12월 10일자 라디오 뉴스데스크 뉴스 자료입니다. 문정의 이억년 묘소와 관련 보도된 자료를 그대로 입력해 드립니다.
진주MBC TV뉴스 보도 단신 자료입니다. 12월 11일자 보도된 자료입니다. 이 뉴스를 다시보기를 하시고 싶으신 분들께서는 인터넷에서 (진주mbc)라고 치고 홈에서 왼쪽의 뉴스 다시보기중 (뉴스투데이)를 클릭 - 12월 11일자 뉴스 다시보기를 하시면 휴천면 문정의 이억년선생관련 뉴스가 비중있게 보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라디오 뉴스(12월 10일자) R) 두형제 이야기-이종승 【 ANC 】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두 형제 이야기를 한 번 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실제 인물이 고려말의 대유학자이자 문필가인 이억년,이조년 형제라는 주장이 나왔고,형인 이억년의 묘소는 함양군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종승 기자!!
【 VCR 】 두 형제 이야기는,
길에서 주운 금덩이 2개를 형제가 나눠 가지지만, 2개를 다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자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금덩이를 강물에 버린다는 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CG)이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돼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속의 형제들이 고려말의 대유학자인 이억년, 이조년 선생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사 양천읍지나 성주이씨 세진록 등에 이씨 형제가 한강에서 금덩이를 던졌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 INT 】 두 형제 중 형인 이억년 선생의 묘소는 현재 함양군에 있습니다.
(S/U)그동안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최근 문화 유적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묘소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밝혀졌습니다 【 INT 】
종친회에서도 뒤늦게 사실을 알고 묘소 성역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이씨 형제라는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개성유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초야에 묻혀 반평생을 청렴하게 살아간 선생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손들의 좋은 표상이 될 만 해 보입니다.
MBC뉴스--
(자료출처 : 진주 MBC 홈 보도부 뉴스데스크 )
2. 진주MBC TV뉴스 보도 단신 자료입니다. 12월 11일자 보도된 자료입니다.
뉴스투데이 진주에서 전해드립니다.
먼저 이 시간 주요뉴습니다.
---------- '두 형제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실제 인물이 고려말의 대유학자이자 문필가인 이억년,이조년 형제라는 주장이 나왔고, 형인 이억년의 묘소가 함양군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원-달러 환율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자 도내 중소기업들이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900원대 붕괴도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전망 속에서 도내 수출기업들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 울산지역 아파트 고분양가 논란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부지역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천만원을 웃도는 데도 청약률이 2대 1을 훌쩍 넘었습니다.
------------- 수산물 수요가 늘어나는 연말 연시를 맞아 오늘(11)부터 22일까지 열흘 동안 경상남도가 원산지표시 위반 합동단속을 실시합니다.
◀ E N D ▶
(출처 : 진주 MBC 홈 보도부 자료 )
(이억년선생 묘비문 )
(이억년선생 새 묘비문)
前面)星州李氏開城留守公諱億年之墓
配慶州李氏 ?左
(碑文)
樂山齋公은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기 혼란할 때 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樂山幽谷에 은거하였는데 공의 성은 李氏요.관향은 星州이며 諱는 億年이요. 자는 仁汝로서 호는 樂山齋라 하였다.공의 시조는 신라에서 宰相에 올랐던 諱 純由로 망국의 절개를 지켜 星州에 은둔하여 살았으며 중흥시조는 諱 純由의 十二世孫인 諱 長庚으로 戶長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으므로 京山府院君에 追封되었다.京山府院君은 百年 千年 萬年 億年 兆年 五兄弟를 슬하에 두었는데 五兄弟 모두가 晦軒 安谷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충열왕 十一년에 文科及第하여 높은 벼슬길에 이름 날렸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億年과 兆年 兄弟가 길에서 주운 금덩이를 漢江에 던진 投金灘 전설이 高麗史 양천읍지에 전한다. 이 道學行義는 儒林鄕約本所와 전국 팔도유사가 흥분감탄한 나머지 公의 碑文에 새겨 영원히 보존토록 도모하고자 褒彰完議文을 千九百十九年 회람한 바 있고 현 국정교과서에 등재되어 국민 도의교육에 크게 기여 하고 있으며 公은 兄弟중 넷째로 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治績을 쌓아오다가 외세의 침입과 간섭이 심해지고 國政이 문란해지자 「十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 즉 “十年 벼슬길이 번거롭고 꿈같으니 어디메 靑山을 찾아 홀로 지낼까”라는 時 한수를 남기고 맏형 百年公과 더불어 이곳 엄천계곡으로 들어와 道正精舍를 짓고 孔孟之道를 강론하였으니 비록 風塵世俗을 벗어나 심산유곡에 들어왔지만 碧溪水처럼 맑고 우뚝 선 삶은 이것이 바로 선비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맏형 百年公이 살던 곳을 백년동이라 하고 億年公이 살던 억년터, 거닐던 곳을 億年臺,道正精舍를 지어 강론하던 곳을 도정동이라 이름하였다,淑夫人은 경주이씨로 龍幹의 딸이며 雙墳으로 이곳에 모셨다. 슬하에 아들 台成公은 밀직사사를 지냈고 台文公은 郎中을 지냈으며 사위는 廣平君 李能이다 七百餘年이 지난 오늘 墳墓가 허물어지고 墓碑가 風化되어 대종회에서 뜻을 모아 墓域을 정화하고 이 비를 세운다
二千六年 九月 十七日
咸陽文化院長 孤岩 金聲鎭 글 짓고
星州李氏大宗會에서 세우다.
前面)星州李氏開城留守公諱億年之墓 配慶州李氏 ?左 (碑文)
樂山齋公은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기 혼란할 때 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樂山幽谷에 은거하였는데 공의 성은 李氏요.관향은 星州이며 諱는 億年이요. 자는 仁汝로서 호는 樂山齋라 하였다.공의 시조는 신라에서 宰相에 올랐던 諱 純由로 망국의 절개를 지켜 星州에 은둔하여 살았으며 중흥시조는 諱 純由의 十二世孫인 諱 長庚으로 戶長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으므로 京山府院君에 追封되었다.京山府院君은 百年 千年 萬年 億年 兆年 五兄弟를 슬하에 두었는데 五兄弟 모두가 晦軒 安谷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충열왕 十一년에 文科及第하여 높은 벼슬길에 이름 날렸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億年과 兆年 兄弟가 길에서 주운 금덩이를 漢江에 던진 投金灘 전설이 高麗史 양천읍지에 전한다. 이 道學行義는 儒林鄕約本所와 전국 팔도유사가 흥분감탄한 나머지 公의 碑文에 새겨 영원히 보존토록 도모하고자 褒彰完議文을 千九百十九年 회람한 바 있고 현 국정교과서에 등재되어 국민 도의교육에 크게 기여 하고 있으며 公은 兄弟중 넷째로 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治績을 쌓아오다가 외세의 침입과 간섭이 심해지고 國政이 문란해지자 「十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 즉 “十年 벼슬길이 번거롭고 꿈같으니 어디메 靑山을 찾아 홀로 지낼까”라는 時 한수를 남기고 맏형 百年公과 더불어 이곳 엄천계곡으로 들어와 道正精舍를 짓고 孔孟之道를 강론하였으니 비록 風塵世俗을 벗어나 심산유곡에 들어왔지만 碧溪水처럼 맑고 우뚝 선 삶은 이것이 바로 선비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맏형 百年公이 살던 곳을 백년동이라 하고 億年公이 살던 억년터, 거닐던 곳을 億年臺,道正精舍를 지어 강론하던 곳을 도정동이라 이름하였다,淑夫人은 경주이씨로 龍幹의 딸이며 雙墳으로 이곳에 모셨다. 슬하에 아들 台成公은 밀직사사를 지냈고 台文公은 郎中을 지냈으며 사위는 廣平君 李能이다 七百餘年이 지난 오늘 墳墓가 허물어지고 墓碑가 風化되어 대종회에서 뜻을 모아 墓域을 정화하고 이 비를 세운다 二千六年 九月 十七日 咸陽文化院長 孤岩 金聲鎭 글 짓고 星州李氏大宗會에서 세우다. (이억년 선생 묘비 번역 자료)
*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뒷산에 있는 이억년 묘소의 묘비를 탁본하여 김윤수 교수님께서 직접 번역을 하였습니다. 엄천골짜기에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 자료는 함양역사관 홈에서 김윤수 교수님의 동의를 얻고서 복사하여 옮겨온 것입니다. 李億年墓碑文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 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韓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 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 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 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 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 之相遜 如彼者何哉 且?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 吾樂山公 不得於一?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 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 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蒙赤奮若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고려처사 성산이공의 묘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사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고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거하는 집을 한 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10년의 속세 일은 꿈 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고 수면에 달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억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성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밀직사사이고 태문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 삼가 씀 후학 언양 김윤수 삼가 옮김 ① 한유한-<고려사 열전>
한유한은 역사에 그 계보 기록이 없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고,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독재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굳은 절개로 깨끗하게 살며 외부인과 교유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풍취를 고상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불러 서대비원 녹사로 삼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짝으로 이거한 채 종신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거란 병의 침략이 있었고 몽고 병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韓惟漢. 韓惟漢史失其系世居京都不樂仕進見崔忠獻擅政賣官曰難將至矣. ?妻子入智異山淸修苦節不與外人交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終不就乃移居深谷終身不返未幾果有契丹之難蒙古兵繼至. ②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하니 청산하처독엄비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은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하여 개성유수를 역임한 듯하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③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김이상(金履祥) 별칭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 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허백운(許白雲) 허겸(許謙)
절강성 금화 사람이다. 자는 익지요 어려서 고아 되고 학문에 힘썼다. 인산 김이상에게 수업하여 그 비오를 다 전수받았다.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은 지 40여 년이었다. 공경대부들이 여러 번 천거했지만 초치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강학하여 정성을 다하니 종유한 제자가 1천여 인이었다. 사방의 선비들이 문하에 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들러 안부를 물었고 간혹 예법과 정무를 묻기도 하였는데 듣고서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늦게 백운산인이라 자호하니 세상에서 백운선생이라고 불렀다. 졸하자 문의공이라고 하였다. 저서에 《독서총설》, 《시집전명물초》, 《백운집》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 원초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금원사대가로 불리는 명의 단계 주진형의 스승이다. ④ 산봉우리에 옥을 얹고: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 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 千頃水面生一月也. 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별칭 자 원로(元老), 시호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⑥ 억년동: 억년동은 미상이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백련동은 이억년의 백형인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정리는 일두(문헌공 정여창)선생이 살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문헌동과 이억년의 도정정사가 있던 도정동을 합하여 명칭한 것이다.
⑦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영정(影幀)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다.
서원(書院)의 제도는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憔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峴)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 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敬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 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는 농서군공(농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종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文化財)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년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⑧ 이능 5세손- 이호성(李好誠)
이호성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호는 동산이며, 삼중대광 광평군 이능의 5세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1397(태조6)에 태어나 금산에서 1467년(세조1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이 되고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였으며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9년 거제 현감에 임명되어 읍을 옮기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보성, 경산 고을을 맡아 청백명관으로 알려져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 거쳐 국정이 불안해지자 노모의 봉양을 애걸하여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지사가 되고 144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연변제읍의 제색군인을 동서양계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을 내지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큰 성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의 북정 때 편비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 이라 불렀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함에 실수가 없었다. ⑨ 이도복(李道復) (1862~1935, 철종13~)
성주인 경무공파 19세 수(壽)77세 14세 강촌(江村) 여공(如珙)의 5세손이다. 자(字) 양래(陽來), 호(號) 후산(厚山), 거(居) 단성(丹城) 신안(新安) 철종(哲宗) 13년 임술(壬戌) 1862년 5월 28일생이며 1938년 무인(戊寅) 윤(閏) 7월 8일 졸(卒)했다. 졸(卒) 36후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에서 진안군 영곡사(靈谷祠) 배향(配享) 하였다. 동곡(桐谷) 조(晁)의 후손, 동범(東範)의 자(子)로 천자(天資)가 강의(剛毅)하고 기우(器宇)가 준정(峻整)하여 박만성(朴晩醒), 송연재(宋淵齋)에게 의기(李氣)와 학문을 전수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곽종석(郭鍾錫)과 조약무효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최면암(崔勉庵)에게 ?수신사명(修身俟命)?이란 글을 받아 후일을 기약했다. 스승 문집간행에 성실히 하고 한유(韓愉)와 깊은 학문을 토론하다 경술국치이후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입산, 그곳 호남선비와 상교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동감절요(東鑑節要) 등과 문집 22권 11책이 전한다. ⑩ 심상복
목판본 古書 탄생과정 '한눈에' 2004-07-14 한말 이후 서부 경남 유학자 집안 목활자 인쇄문화의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목활자 일괄 유물이 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에 공개 됐다. 특히 전시되는 6만5천여 개의 목활자는 유일하게 제작자가 알려진 개인 제작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고경희)은 지난 13일부터 8월31일까지 '목활자로 보는 옛 인쇄문화-심재온 기증유물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에 나온 유물들은 지난해 3월 심재온(79·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 계리)옹이 기증한 목활자와 인쇄용 소도구, 고서적들. 여기에는 활자새김에서부터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목활자 6만5천186개, 활자를 분류해 보관하는 상자 21판, 활자 식자판 4개, 새기는 칼 등 활자 관련도구 들이 그 것. 또 활자 집게용 젓가락, 식자용 송곳 등 판짜기 도구, 책 표지 장식 그림인 능화판(菱花板)과 밀돌 등 제본용 도구, 활자를 처음 새기기 위해 쓴 활자초인자본(活字初印字本),교정지 등도 포함돼 있다. 또 188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215종 551책의 서적도 기증목록에 올라와 있다. 기증자 심재온의 조부인 심상복(1876~1951)의 문집 '치당집(恥堂集)'을 비롯, 한말 이후 일제시대 이 지역 유학자인 김복한의 '지산집(志山集)', 이택환의 '회산집(晦山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의 60% 가량은 기증 목활자로 찍은 것이어서 결국 목활자 새기기에서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유물이 망라된 셈이다. 한편 지방의 목활자들은 만든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 활자로 간행 한 책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증된 활자의 경우 심상복이 자본(字本)을 쓰고, 각수 김명곤이 하루에 1천개 가량의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제작자가 분명하다. 또 심상복은 단순한 인쇄업자가 아니라 최익현, 이도복의 가르침을 받은 노론계열의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서적 들을 통해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부 경남지역 유학자들의 교육활동과 학문세계도 유추할 수 있다. 기증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29일 오후 2시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목활자와 경남 지역의 목활자 인쇄문화', 이상필 경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청송심씨 가장(家藏) 고서적의 성격'을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