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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 옆이 돈의동(교동)이었는데..나는 휴전 후 서울로 귀향하여 돈의동 고모 댁에 잠시 살았었는데 이 골목 입구에 <한국남 산부인과>가 있었고 골목안에 큰 한약방과 무용교습소가 있었다.
큰 길(종로 길)에서 첫번째, 두번째 골목이 당시 낙원동인데.. 그 때는 낙원극장은 없었다. '탑골공원'만 있었다. 흔히 <빠고다 공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나의 주된 놀이터였다.
첫번째 골목 끝에 천막 텐트 학교가 있었다. 이른바 교동국민학교가. 피난살이 끝내고 올라와 이 학교에 3학년으로 전학을 하였다. 교장은 '정의성' 선생.
[나는 대전에서 피난국민학교 1,2년 과정을 마쳤는데, 마치고나서 수료증인지 우등상장인지를 보니 <서울삼청국민학교장 이철호 (인:도장 꽝)>라 되어 있어..'아하..서울에서 삼청학교가 대전으로 피난온 거였구나..' 라는 전후사정을 혼자 감잡았던..그리하여 자존심까지도 회복하였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대전의 우리 학교 근처의 원주민 학생들이 좋은 교사(대전 삼성국민학교)에서 커다란 칠판이 있는 넓고 좋은 교실에서 배우는 게 무척 부럽기도 하고 내 열악한 피난학교 - 대전역 철도 관사 - 가 은근히 부끄럽기도 하고..컴플렉스가 있었는데..알고보니 서울 삼청국민학교..라니..얼마나 속으로 반가웠던지.. 8살 짜리의 어린 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잊지를 못하고 있다.^^일학년 입학하고 일년 동안은 책걸상이 없어 마루에 앉아서 책 읽고 엎어져서 글쓰고.. 하였으니..ㅠ.ㅠ^^]
전학 첫날 교실에 들어가니 '이슬비'인가? 송알송알 싸릿잎에 은구슬 대롱대롱 거미줄에 옥구슬..어쩌구..하는 노래를 배우는데 참 신기하였다. 풍금 소리를 처음 들어보니...ㅉ
그런데 이 자리는 원래 옛날 <명월관> 자리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다시 <피카디리> 극장이 돼버렸다. 이것도 이젠 없어지고 다른 무언가가 세워진다는데..
한편..이 천막학교는 1년 후 경운동 원래의 건물로 되찾아 옮겨갔다. 그 동안 미군이 부대로쓰고 있었는데 다시 내주고 저쪽 용산 쪽으로 갔다나 뭐라나.. <수운회관>은 그때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고..
두번째 골목 길 입구에 유명한 <낙원 설렁탕>집이 있었고..조금 더 들어가면.. 태양여관..낙원여관이..연달아 있었는데.. 정윤용의 집이 이 중 하나였다. 윤용이는 흔히 말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육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일학기 때 반 학생회(어린이회)장을 하였다. 나는 생활부장(이학기 때는 담임이 나를 회장시키던데..그때는 이미 입시공부 때문에 활동이 전무한 상태라 명목만..).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을 대비하여 학교측에서 공부를 밤 늦게까지 강제로 시켰는데.. 윤용이..아니 윤옥이(당시 이름)는 집이 부자라서 그런지 지갑에서 "뻘건" 지폐를 한장 꺼내 교문밖 길 건너편 빵집에 가 빵을 사오면 커다랗게 한봉지였다. 내가 그걸 얻어 먹었는지 어쩐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무튼 내겐 딴나라 얘기만 같았지.
빵집 옆의 옆집은 그 유명한 민대감댁이었는데..지금도 인사동..경운동에 가면 그대로 있다. 이 민대감은 아마도 민오규의 아저씨나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일 것 같다. 휘문학교와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윤옥'이는 경복중학 입시에 실패하여 왕십리로 와서 나와 다시 만났다. 묘하게 중1때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이때 이름도 '윤용'으로 개명을 하였다. 뭐 '옥'이도 괜찮은 것 같더만.. ㅎ
중학 때 그는 이미 이성에 눈이 떠서.. (박경자 여사 얘기는 나는 전연 모르고 있었다.)
퇴계로 일신 국민학교 5학년인가 하는 동생을 사귀었다고 하면서 나와 함께 만나보자 하여 국도극장 뒷골목 지나 퇴계로로 찾아가 만나본 적도 있었다. 귀여운 아이였다. 이성으로 좋아한 건지..동생으로 좋아한 건지..지금도 모르겠다.
그 밖에 신호균, 신장균 쌍둥이(이란성) 형제도 교동 동창(호균이는 역시 같은 반)인데 왕십리로 왔다. 호균이도 운명적으로 또 1학년 같은 반이 되었는데.. 2학년 때 기어코 경복으로 가버렸다. 뭐라더라..보결전학이라던가? ㅎ 호균이는 20대 청년 때 정신분열을 일으켜 방황하다..저 세상으로 갔다고 들었다. 나랑 철학책을 바꿔보기도 했는데.. 나의 쇼펜하우어와 그의 칸트를.. ㅋㅋ..지금도 가지고 있지..
호균이는 주황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그림도 잘 그렸고..나는 국교 때..그가 그림 그리면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는 그 비싼 36색 크레파스로 멋진 색을 써가며 일필을 휘둘렀는데..ㅋ..
그들 쌍둥이 형제는 종로 3가의 유명한 <세창서관> 집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은 신태삼씨였고.. 종로2가의 유명한 <영창서관>의 신태일씨(?)의 아우님이었지..아마..
아무튼..나의 국민학교 동창들은 대부분 부잣집 아들들이었다. 을지로 부중으로 간 '박영준'(코리아 리서치 회장)이도 그렇고..한복 입은 그의 모친은 참 미인이었었는데..ㅋㅋ..영준이도 무척 장난꾸러기였는데..지금은 의젓한 사회적 명사가 되어..ㅋㅋ..
부자가 아닌 초등 동창은 윤기정, 이병우, 정근택..정도였다.
기정이는 중학 3년동안 나랑 무척 가깝게 지냈다, 고교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기정이도 이성에 일찍 눈을 떠 나랑 호흡이 맞는 편(?)이었다. ㅋㅋ
중3때 나와 함께 같이 관심 두었던 권순자네 집을 주소만 가지고 찾아간 적도 있었다.
만리동 꼭대기를.. 찾느라고 헤매느라 제법 시간이 흘러 컴컴한 밤이 되어 집앞 문패를 라이타 불을 켜고 확인하였지..ㅋㅋ 만리동 2가 291-34를..! 하하..어제그제 모임에 이 얘기를 하였더니 김인영회장인가 권짱인가가 믿지를 않더구만.. 중학 앨범 찾아 확인해보시게나..! ㅎㅎ
틀림이 있을 리가..왜냐면 나랑 고교 졸업 후 편지를 한 1,2년인가 그 친구 시집가기 전까지 주고받고 했었거든.. 그래서 안 잊어먹는다는 얘길세..허허..
아이고..또 얘기가 길어졌네.. 오늘 욕지도 쪽으로 낚시 가기로 했는데.. 그만 잠자고 일어나 준비해야징..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