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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의 조성과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살아냄(체험함)
8. 그리스도를 추구함으로 그분에게 이름 (C, D)
<빌립보서 3장 12절-14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지난주에 읽은 말씀이니까 12절부터 14절까지 보겠다. ‘그리스도를 추구함으로 그분에게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말씀이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겠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했다.
C.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쫓아감
오늘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엔가 붙잡힌다.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으려고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유에 붙잡힌 것이다.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은 송장 아니고서는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어디엔가 붙잡혀서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음성적으로 나타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라도 붙잡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제 어디에 붙잡히느냐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차피 사람은 붙잡히게 되어 있는데, 하늘에 붙잡힌 사람은 하늘로 가고, 미국에 붙잡힌 사람은 미국으로 가고, 당연하게 자기 붙잡힌 대로 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께로 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제 어디에 붙잡혔느냐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다가 사람이 많이 죽는다. 그런데도 거기 붙잡힌 사람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올라가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올라가서 정상에 오른다는 거기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가는 것이니까.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많다. 왜 그렇게 하는가? 거기에 잡힌바 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에게나 붙잡히고 무엇엔가 붙잡히는데,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다면 그보다 복된 일은 없다. 왜 그런가? 다른 것은 다 소유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잡힌 것은 소유가 아니고 존재다. 참 나, 참 자아한테 붙잡힌 것과 마찬가지고, 내가 가야할 영원한 목적지에 붙잡힌 것이고, 내 영원한 본향에 붙잡힌 것이니까 이것은 다른데 붙잡힌 것이 아니다. 이 붙잡힘이야말로 신성한 붙잡힘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 푯대를 향해서!
1. 큰 권능에 붙잡힘
바울은 맨 처음에 큰 권능에 붙잡혔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이 음성을 그가 듣게 되었는데, 그 음성을 듣는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발견하게 되었다. 큰 권위가 와서 자기를 덮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권위를 발견한 것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권위도 여러 가지다. 군대 가면 상관의 권위가 있다. 군대에 가서 군대생활을 잘하려면 상관의 권위를 알아야 군대생활을 잘한다. 상관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밥풀데기 하나라고 무시했다가는 큰일나는 것이다. 밥풀데기 하나지만 군대에서는 굉장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작전 중에는 총살권이 있다. 만일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런 권세가 있다고 한다. 군대에 간 사람은 당연히 자기보다 계급 높은 사람의 권위를 알아야 된다.
세상은 모두 권위로 구성되어 있다. 선과 악으로 구성된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권위다. 선과 악 밖에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나오면 굉장히 살기가 어렵다. 자기 위의 권위가 자기 눈에 보기에 악하다. 그러면 살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 위의 권위가 다 선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다 옳으라는 법은 없다. 자기에게 다 맞으라는 법은 없다. 자기 위의 권위가 자기에게 악하게 보이면 나쁘게 보이면 이 사람은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국가라는 것도 하나의 권위다. 우리 국가, 우리나라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게 되면 이 나라 사람으로 살기가 좋다. 그런데 이 나라의 권위에 대해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나라에 살기가 어렵고 불편하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되게 된다. 사실은 선과 악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인 조직은 권위로 되어있다. 우리가 권위를 알아야 세상을 제대로 살 수가 있다.
권위 중에서 절대적 권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이다. 절대적인 권위를 깨달은 사람, 절대적 권위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적 권위 앞에 굴복하게 되고, 절대적 권위 앞에 굴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가?하나님이 손에 잡히는가? 하나님이 와서 뭐라 하시는가? 그것이 아니다. 권위다. 바로의 권위이냐, 여호와의 권위이냐? 출애굽기를 보면 이 싸움이다. 바로는 여호와의 권위를 모르고 자기의 권위가 최고인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 종된 백성이므로 내줄 수도 있고, 안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빌라도도 내가 너를 놓을 수도 있고, 내가 너를 잡을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가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기를 권위는 위에 있다.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아무도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바울도 말하기를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아무 권세가 되든지 간에 악한 권세가 되든지 좋은 권세가 되든지 간에 위에서 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전부 권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는 결국 자기 권위를 가지고 여호와의 권위에 대항하다가 마침내 굴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선과 악을 통해서 내놓은 것이 아니라 권세에 굴복하여 내놓았다. 세상은 권세다. 권위다. 절대로 선과 악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고생한다.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그것 때문에 고생한다. 권위를 먼저 알면 절대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 굴복할 데 가서 굴복한다. 현실적인 사람은 다 그렇다. 그리고 세계에서도 잘 사는 나라, 강대국들은 어떤 나라들인가? 전부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상을 갖고 있는 나라들은 잘살지 못한다. 현실에서 잘살려면 우선 먼저 권위를 알아봐야 된다.
바울은 그때까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 단지 유대종교를 방해한 사람이고, 유대종교를 파괴하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권위를 가지고 유태교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처리하러 갔다. 그런데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주여 뉘십니까?”라고 한다. ‘주여’하는 말은 아무한테나 하는 말이 아니고 권세자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주여’하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 윗사람에게 ‘주여’한다. ‘주여’라는 말은 갑자기 자기는 작은 사람이 돼버리고, 위에서 말씀하시는 이가 크게 보였기 때문에 ‘주여 뉘십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얍복강에서 야곱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환도 뼈를 꺾은 분을 향해서 ‘주여’라고 했다. ‘주여’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권위를 향해서 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호칭할 때 이름은 여호와라고 했지만 여호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우리가 부모의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그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은 불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모든 칭호가 ‘주여’, ‘주님’이다. 아도나이(Adonai)라는 말인데, 이것은 신약에 오면 퀴리오스(kurios)하는 말이다. 천주교에 가면 노래할 때 퀴리에(kurie)라고 하는데 ‘주여’라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는 어떻게 호칭되는가? ‘주님’이라고 호칭되었다. 그러니까 ‘주여 뉘십니까?’라는 이 말은 놀라운 말이다. 유태인들이 ‘주여’할 때는 완전하게 자기가 복종하는 자세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때 무엇인가 권위를 알았다.
a. 하나님은 권위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권위로 우리를 구원 하셨음
이 권위로 천지가 창조되었다. 창조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권위로 창조되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권위로 창조되었다. 창조는 전부 권위에 속한다. 내가 마이크 하나를 만들어도 그것은 권위이다. 다른 사람은 못 만들고 나만 만들 수 있는 권위이다.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보면 권위다. 나만 할 수 있는 권위이다. 천지는 무엇으로 창조되는가? 권위로 창조되었다. 이 권위를 아는 것은 이 우주의 질서를 아는 것이다. 전체 우주가 지금 무엇으로 가고 있는가? 이것을 모르면 천지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천방지축으로 위가 어딘지 아래가 어딘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위아래를 모르는 사람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권위를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젊었을 때 이 권위를 몰라서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여 따지다가 결국은 한방 얻어맞고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구나. 정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권위가 정의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그 권위에 굴복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옳지 않은 권위에 내가 굴복하는 것이 억울하였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세상은 능력이고 세상은 권세(권위)라는 것을 알았지만 억울하였다. 왜? 내가 옳지 않은 권위에 굴복해야 되니까. 인생의 억울함이 다 어디에 있는가? 굴복하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옳지 않은 것이다. 옳게 보이는 데만 굴복하면 행복하다. 그런데 옳지 않는 데도 굴복해야 된다. 군대에 가면 상관이 분명히 못됐고 잘못한다. 하지만 내가 부하로서는 복종해야 된다. 이것이 억울한 것이다. 뒤로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나서야 그것이 억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면 세상 살기가 불편하다. 불행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라. 언제 불행한가? 여기에서 내가 억울할 때 불행하다.
천지는 권위로 창조되었다. 그 권위를 아는 것이 우주질서를 아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앞으로 살기가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를 모르고 큰다. 옛날에는 아이들을 가부장제도의 권위 아래에서 키웠다.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로 대들거나 불순한 말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그런 싹을 잘라버렸다. 요즘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 키우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부딪치게 된다. 유치원 가면 그때부터 시달리기 시작한다. 유치원에 가면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도 있고 자기보다 힘센 아이도 있고 선생님도 있다. 이래서 층층시하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고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인생고다. 시집을 갔더니 시아버지, 시할아버지, 시증조할아버지가 다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층층시하에서 고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권위를 알게 되면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뿐 아니라 그 권위 안에 자기가 적응이 되고 또 권위 속에 자기도 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불편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처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조금만 뭐해도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권위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b. 참된 권위에 붙잡힌 사람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임
사람이 참된 권위에 붙잡힌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이다. 세상의 권위는 참된 권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권위가 중요한 줄 알지만 억울하다. 그런데 참된 권위에 붙잡힌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 인생은 어디를 찾아가야 되는가? 참된 권위를 찾아가서 거기에 붙잡힌바 되어야 내가 행복하다.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해도 행복하다. 그렇게 할수록 더욱 행복하다. 이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천국이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해도 행복한 세계는 세상 어디를 가도 없다.
2. 그리스도에게 붙잡힘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었다.
a. 유대교와 그 율법과 전통에 붙잡혔던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음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었다는 것은 유대교와 그 율법과 전통에 붙잡혔던 바울이 이제는 그런데 붙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에 붙잡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다가왔으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아닌 것은 다 가치가 없을 것이다. 전에는 유대교가 중요했고 율법이 중요했고 전통이 중요했다. 정말로 좋은 것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 버리려고 하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단순해진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은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니까 어찌할 수가 없다.
바울에게 유대교는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 모두가 그럴 것이다. 율법과 전통이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그는 더군다나 율법의 전문가였다. 얼마나 그것이 자랑스럽고 중요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는 비교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격이다. 하나님은 인격위에 기름을 부었지 종교 위에 율법 위에 전통 위에 기술 위에 기름 부은 것이 아니다. 율법을 잘 지키니까 기름 부은 것이 아니다. 왕이 율법을 잘 지켜서 기름을 부었는가? 제사장이 율법을 잘 지켜서 기름을 부었는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택한 것, 하나님이 선정한 그 인격이 축복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b.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은 진실한 인격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은 진실한 인격이다. 바울은 이 인격이 그 무엇보다 탁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도 이 인격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가 다른 것에 붙잡혀있었다. 옛날에는 붙잡혀도 시시한 것에 붙잡혀있었는데, 내가 목회하러 나가면서는 나를 붙잡는 것이 생겼다. 28세에 목회하러 나갔었는데, 첫째 그 교회가 커져야 된다. 사람이 많이 와야 된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사람이 많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어야 사람이 많이 온다. 그때 제일 부러운 것이 능력있고 은사있는 목회자가 제일 부러웠다. 나도 그것을 얻어 보려고 깡통 들고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은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받지를 못했다. 도무지 주지를 않으셨다. 그래서 결국은 못했다. 그때 나는 그것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그 능력과 은사면 있으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60년대는 목회자들의 이상이 가령 한경직 목사, 강신명 목사, 강원용 목사들이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이었다. 그런데 70년대 이후부터는 어떤 목회자가 존경받았는가 하면 은사와 능력있는 목회자가 존경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순절이 판을 쳐버렸다. 지금 순복음 교회인데, 순복음 교회가 오순절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목회자가 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이다. 거리가 걸어도 15분밖에 안되는데 나라고 예외가 되겠는가? 나는 그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거기에 붙잡힌바 되어 쫓아갔는데 내 몫이 아닌 것이다. 나쁘다거나 좋다는 말이 아니고 내 몫이 아니었다. 내 몫이 아니니까 쫓아가도 못 받는다. 내 몫을 알고 가야 받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낙오자가 되었다.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가 C.C.C.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가도 또 역시 무슨 능력이 있고, 참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해보면 그 사람들처럼 잘 안 된다. 그래도 하여간 나는 한번 어디 자리를 잡으면 내 발로 떠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최선을 다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는 붙잡힐 것에 붙잡혀야 되는데, 내 몫이 아닌 데에 붙잡혀서 고생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있는 판에 내가 변화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인격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것은 이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은 그리스도는 바로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 인생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이 인격은 능력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구나. 능력을 받으려고 해도 안 되고, 은사를 받으려고 해도 안 되고, 기술로 해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격은 사람 되는 것이니까 사람이 사람 위치로 가는 것이니까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
이 인격에 사로잡힌바가 되어서, 여기에 내가 잡힌바가 되었다. 이 인격에 잡힌바가 되면서부터 나에게 안식이 오게 되었다. 다른 데 잡혔을 때는 안식이 안 된다. 분명히 그때 잡히기는 잡혔다. 그것밖에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잡혔는데 안식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격에 잡힌 후로는 안식이 되었다. 이것은 일이 아니고 존재에 관한 문제이니까 안식이 되었다. 인격을 쫓아서 그때 내가 대구로 내려왔고, 지금까지 여기에 있게 되었다. 만약 다른 것에 잡힌바 되었으면 지금도 여전히 옛날 그 생활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그렇다.
나는 이 인격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이것이면 되었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대구로 가라 해도 갔을 것이고, 제주로 가라 해도 갔을 것이고, 어디로 가라고 해도 나는 이유 없이 갔을 것이다. 대구가 일이 잘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를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 일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일 때문에 가는 것이니까 생전 모르는데 가서 뭐가 되겠는가하고 불안이 생긴다. 그런데 일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인격 때문에 가는 것이니까 대구에 가면 어떻고, 강원도에 가면 어떻고, 제주에 가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전혀 내가 상관해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에게 잡힌 것은 우리를 안정케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되면 안식이 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내 운명이구나. 하나님은 이 인격을 원하는구나. 내가 계급장을 많이 달고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자를 쓰고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놓은 그 사람을 원하는구나. 더하지 않은 사람을 원하는구나. 지금까지는 더하는 사람, 더해진 사람을 원하는 줄 알았다. 더해진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빼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붙잡힌 사람들은 전부 계속해서 빼기를 한다.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더하기도 모자라서 곱셈을 하려고 했는데, 여기에 가니까 계속 뺄셈을 한다. 빼기를 하니까 쉽다. 뺄 것이 많은 사람은 어렵겠지만 나는 뺄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빼기가 더하기보다 더 쉽다. 왜냐하면 더하기는 끝이 없다. 어디까지 가야되는지 끝이 안 난다. 빼기는 끝이 난다. 제로가 된다. 뺀 데는 보장이 확실하다. 그런데 더하는 데는 보장이 없다. 100이 되면 되는가, 200이 되면 되는가, 300이 되면 되는가? 끝이 없다. 억(億) 조(兆) 경(京) 해(垓)... 우리 영관이는 일십백천만해서 올라가면 조경해라고 한다. 자기도 뭔지도 모르고 조경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max라고 하는데 그것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다. 더하는 세계는 끝이 안 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끝이 나지 않으니까 성공해도 어디가 성공인지 모른다. 그런데 빼는 데는 확실하다. 제로 점으로 딱 빼버리면 끝난다. 더 이상 뺄 것이 없다.
하나님 앞에 오면 확실하게 끝이 난다. 확실하게 결승점에 도달한다. 더하기를 하지 말고 빼기를 하면 된다. 언제까지 뺄 것인가 하는 사람도 있다. 한 개를 뺐는데 또 빼야 되네... 두 개를 뺐는데 또 빼야 되네... 빼보면 얼마 안 된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별것이 없다. 별것이 없는데 많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흙이 나와 버리면 그만이다. 흙이 나와 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이 인격에 잡힌바 되면 그때 사람이 안식이 온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확실히만 알고 간다면 내가 목이 마르더라도 참고 갈 수 있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광야를 가는 사람이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까 사막을 가다가 신기루를 만나 죽는다.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확실하게 희망이 있다. 그와 하나될 확신이 있다. 지금 종교 안에서도 더하기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끝이 없다. 절대로 안식이 없다. 성공을 해도 절대로 안식이 없다. 그렇지만 빼기 세계에 있는 사람은 성공을 못해도 안식한다.
3. 교회에 붙잡힘
세 번째는 교회에 붙잡힌바 되었다. 교회는 이 인격의 건축이다.
a. 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큰 권능에 이끌려 갈 때 교회의 소망을 보고 그 건축에 붙잡혔음
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혀서 큰 권능에 이끌려 갈 때 교회의 소망을 보고 그 건축에 붙잡히게 되었다. 다메섹에서 그가 큰 음성을 듣고 어디로 갔는가? 성내로 들어가서 아나니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는 누가 있었는가? 교회가 있었다. 몇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교회가 있었다. 거기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이 떠진 사람이다. 눈을 뜨고 보니까 몇 몇 사람들이 앉아있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니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건축에 대한 이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였을 것이다. 바울이 눈을 딱 뜨고 봤을 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몰려가는 상황에서 큰 사자를 한 마리 잡아다가 방안에 앉혀놓았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이 둥그레져서 보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우리가 사자에게 잡혀 먹히느냐 아니면 이 사자가 우리의 개가 될 것이냐인데 얼마나 마음이 초초했겠는가? 그 장소에서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교회에 대한 이상을 봤다고 생각한다. 율법적 세계에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율법 세계 안에서 다 자기 자랑을 갖고 있는 그 세계에 살고 있다가 여기에 오니까 별 것 아닌 사람들인데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이상을 봤을 것이다.
b. 그의 서신들은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의 표현이며 건축의 갈망임
그래서 그의 서신들은, 제일 많은 서신들을 썼지만, 전부 교회를 향한 그의 소망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 전체가 다 교회를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이는 이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교회 밖에서는 이 말이 해석되지 않는다. 오직 교회 안에 준 말이니까 교회 안에서만 해석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는 그 사람 안에게만 해석이 된다. 다른 사람은 해석할 수가 없다.
교회 없이는 성경은 해석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교리를 연구할 때 교회와 무관하게 연구했다. 그런데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신학자가 나와서 교회와 무관한 교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때 그 사람이 붙인 이름은 교회 교의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놀라운 발견을 했다. 교리를 갖고 교회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있는 교리이니까. 교회 교의학이니까.
바울은 정말 잡힐 데 붙잡힌 사람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붙잡혔다. 아름다운 인격에 붙잡혔다. 그리고 그 인격 사회에 붙잡혔다. 오늘 우리도 완전한 권위에 붙잡혀야 되고, 두 번째는 그 참 인격에 붙잡혀야 되고, 세 번째는 그 참 인격의 사회에 붙잡혀야 된다. 이것 이외의 다른 것에 붙잡히면 허당이다. 다른 데 붙잡히면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도 소용없다.
D. 하나님의 상을 위해 달려감
다음은 하나님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했다. 내가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데,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 달리는 데는 어디든지 상이 있다는 말이다. 경주하는 데마다 상이 없는 데는 없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의 푯대이다.
1. 하나님의 상은 그리스도 자신으로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히 그와 같이 변화되게 하는 것임
하나님의 상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옛날에는 부흥사들이 다니면서 봉사를 잘하면 천당에 가서 오소리 감투를 쓰고, 잘못하면 개털 감투를 쓴다는 말이 있었다. 개털 감투도 좋긴 좋은데 털이 잘 빠진다. 토끼털이 참 따뜻한 털인데 왜 모피로 쓰지 못하는가 하면 털이 빠진다. 털만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토끼털처럼 따뜻한 것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상! 오소리 감투냐 아니면 밍크 감투냐 개털 감투냐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나님의 상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였다. 사람을 창조했기 때문에 사람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원형이고 그 사람의 목표이고 그 사람의 완성인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의 목표이다. 감나무의 목표는 감이다. 배나무의 목표는 배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그리스도다. 우리 인생이 가야 할 목표점이다. 자아완성을 말하면 이것이 진짜 자아완성이다. 이 나를 찾아서 떠나자고 했다. 다른 나는 버리고, 이 나를 찾아서 떠나자. 가자 속리산으로! 세상을 떠나서 가자. 나는 속리산이 세속을 떠나는 산인 줄 알았더니 반대로 산이 속세(세상)를 떠났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적으로 말하니까 그렇게 말할 것이다. 사실은 속세를 떠났다는 이야기인데 산이 속세(세상)를 떠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떠난 것이다. 시인들은 아주 재미있게 거짓말을 한다.
우리가 어디로 떠날 것인가? 그리스도를 찾아 떠나자! 하나님의 상은 그리스도다. 다른 것이 없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저것도 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고, 선교를 얼마를 했고 어쨌고 어쨌고 하리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하리니라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사업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그렇다고 사업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받을 상은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가지고 와서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은 나의 사명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은 사명일뿐이고, 하나님이 인생에 주실 상은 그리스도뿐이다.
하나님의 상을 분명히 알면 우리 인생이 안식이 된다. 하나님은 상은 바로 이것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상이구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전인적으로 내가 그리스도화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게 준 최대의 축복이다. 쌀의 최대의 축복은 무엇인가? 가장 좋은 쌀이 되는 것이다. 감의 제일 소원은 목표는 어디인가? 가장 좋은 감이 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 그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상이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상이다. 개는 개다워지는 것이 개에 대한 상이다. 또 다른 상이 없다. 개가 개다워지면 되었지 개가 무슨 상을 또 받는가? 사람이 사람다워지면 되었지 또 무슨 상이 있는가? 다른 상은 다 시시한 상이다. 진짜 상이 있다. 개와 사람이 왜 다른가? 개에게도 금목걸이를 할 수 있고, 사람에게도 금목걸이를 할 수 있다. 개에게 계급장 달면 대장 계급장 달아놓을 수 있다. 말도 옛날에는 장군이 타는 말은 표시를 했을 것 아닌가? 다른 동물에게도 계급장을 달아놓을 수 있는데 아무리 높은 계급장을 달아놓는다고 하더라도 말은 말이고 개는 개다. 사람은 아니다. 너 계급장 달고 말이 될래? 너는 계급장 안 달고 인간이 될래? 그러면 무엇이 되겠는가? 인간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게 쉬운 것을 가지고 일생동안 헤맬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사람 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 사람 중에서 또 가장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상이다.
우리 사람을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 한군데에 영과 혼과 육을 주 예수의 날에 온전케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영’이라는 말은 놓쳤던 생명을 찾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창조될 때는 혼으로 창조되었는데, 이 혼 안에 영이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생명나무를 놓쳤다. 그 생명나무는 바로 우리 영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놓쳤던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구속이라고 한다. 우리가 구속받았다는 이 말은 혼이 구속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영이 구속받았다. 우리 영을 되찾았다. 우리 몫을 찾았다. 잃어버렸던 놓쳤던 생명을 찾았다는 말이다. 옛날 찬송에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고’라는 노래가 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한 영이 되도록 그렇게 지어졌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사탄과 한 영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영이 있기는 있다. 영이 있으니까 무당도 되고 하는 것 아닌가? 무당들이 하는 것을 보면 너무 놀라운 것이 많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안다. 당신 조상이 누구지 않느냐고 한다든지 당신 할아버지 묘가 어디 있지 않느냐고 한다든지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것은 영이 있으니까 알 것이다. 우리 혼으로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탄과 합하면 사탄의 영이 되고, 하나님과 합하면 하나님의 영이 되고,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된다고 했다.
a. 영의 구원
영의 구원, 이것이 구속이다. 그런데 우리가 영만 구원된다고 해서 다 되지 않고 우리 혼이 사람의 생각이니까 이 생명이 회복되면 우리 생각이 거기 따라가야 될 것 아닌가?
b. 혼의 구원
이것이 혼의 구원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점유되어서 생각이 전부다 선악을 아는 지식에 의해서 발생한다. 선악을 아는 혼이 영원한 생명과 인격으로 점유되어서 그 인격에 의해서 표현되면 그것이 바로 혼의 구원이다.
c. 육의 구원
육의 구원은 무엇인가? 혼이 사람의 생각인데 이 생각이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그것이 시행되어야 할 것 아닌가? 사탄의 계략에 의해서 그의 뜻을 집행하던 몸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찾은 영에 의해서, 그리고 구속된 혼에 의해서, 점유된 혼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사람이 되게 되면 내 몸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내 손이 구원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에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더 이상 도둑질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선한 일을 하라, 남을 돕는 일을 하라고 되어있다. 그것을 우리가 들었어도 왜 성경에 하필 이런 말을 했는가를 몰랐는데 류시형 형제 때문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손으로 소매치기를 했다. 손만 들어가면 돈이 나오는 것이다. 대단한 기술이다. 보통 기술이 아니다. 양복 입고 가는데 전혀 모르게 양복 안주머니에서 싹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보통 기술인가? 아니다. 뒤로 보면 양복 안주머니를 싹 돌려나가는 것이다. 쏙 빠져버린다. 이것은 보통 손재주가 아니다. 이 손재주가 바꿔져서 매일 그 손으로 일해서 딸들을 다 공부시키고, 판사 앞에 가서도 당당해졌다. 이것이 육신의 구원이다. 손이 구원받은 것 아닌가? 걸핏하면 들어가던 손이었다. 옛날에는 전철 같은 곳에서 신문보고 있으면 맨날 당하는 것이다. 신문보고 있으면 손이 다른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귀신처럼 안다고 한다. 돈 냄새가 난다든가 하여튼 전문가가 되면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손인가! 그런데 그 손이 변해서 남을 돕는 손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몸의 구원이다. 류시형 형제는 혼이 구원이 되니까 잃었던 생명이 찾아지고 생각이 바꿔지니까 손이 일하는 것이 바꿔져 버렸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응하게 되었다. 성경말씀대로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상은 바로 인격이다. 그리스도! 사람 되는 것이다. 류시형 형제가 사람 되니까 그만 손이 바꿔져 버린다. 사람이 달라지니까 손이 달라져 버린다. 손은 사실은 아무 죄가 없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니까. 혼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손 아닌가? 노름 하다가 망해서 자기 손을 도끼로 잘라버린 사람이 있는데, 엄지손가락만 남아있는데도 뒤로 보니까 손가락이 없어도 화투장 다섯 장을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을 자를 것이 아니고, 생각이 바꿔져야 되고 생각이 바꿔질려면 구속이 되어야 된다. 그런데 손가락만 잘라버렸으니 괜히 병신만 되었다.
2. 하나님의 상은 하나님의 동산으로서 지금은 교회이고 천년왕국을 거쳐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완성 됨
두 번째는 하나님의 상은 동산이다. 하나님의 동산! 사람을 지어서 어디에 두었는가? 하나님의 동산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업이다. 인생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기업이었다. 이것이 네 땅이고 네가 관리할 것이고 네 농사거리라고 준 것이다. 여기는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곳이다. 같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이것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상은 이 동산을 회복해 주는 것이다. 다시 회복해 주는 것이다. 이 동산이 지금은 교회다. 이 교회는 이기는 자를 통해서 천년왕국이 될 것이고, 다시 이 교회는 더 성숙하고 변화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 동산의 완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있는 그 동산에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그대로 나오는데, 창세기에 있던 동산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동산은 훨씬 더 아름답고 화려하고 구체적이다.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2장에 나온 동산은 그냥 나무들이 있고 생명나무가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고 강들이 있고 보석들이 있다는 정도다. 새 예루살렘에 와서 보니까 12가지 보석이 있었다. 금이 있었다. 생명나무가 있었다. 생명수가 흘렀다. 온갖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지금 동산의 회복을 위해서 동산의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는 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이다. 교회가 주어진 사람은 상이다. 이 말은 자기에게 사회가 주어졌다는 말이고, 자기 친구가 주어졌다. 좋은 친구들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사람은 어차피 누구와 살아야 된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사는데 이웃이 좋으면 참 좋은 것 아닌가? 내 친구들이 좋으면 행복한 것 아닌가? 이웃이 다 나쁜 사람만 있으면 곤란하다. 우리가 가창에 처음 이사를 가니까 거기는 할머니들만 산다. 이 사람들이 객지에서 왔다고 적대감을 갖는 것이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들을 해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도 자기가 손해 본다는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이 없는지 모르고 들어갔는데, 자기들만 물을 쓰고 우리는 물도 안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광산에 갇혀 있는 똥물을 먹고 살았어야 했는데, 수동 형제가 정수기를 해줬기 때문에 망정이지 그 물로 그냥 목욕하면 몸이 가렵다. 더러운 물, 그것밖에 없었다. 우리는 적으로 온 것이 아닌데, 친구가 되려고 왔는데, 할머니들이 매사에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오래 사니까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서 지금은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그렇게 공을 들였다. 이 할머니들을 어떻게 하면 구워삶아서 친구가 되게 할까? 다 그러니까 살기 참 불편하다. 주변에 할머니들이지만 할머니들이 아니고 힘 있는 사람들이나 젊은 사람들이면 얼마나 살기가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다행히 할머니들이니까 그래보았자 별로 피해 받을 일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쁘면 아주 살기 어렵다.
하나님의 상은 좋은 동네를 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동산이고 교회다. 우리만큼 많은 친구를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상에 나가보면 아무리 별난 사람도 우리처럼 친하고 우리처럼 좋은 친구들을 형제들을 평생 동안 같이 사는 사람 없다. 아주 친한 친구라고 해야 한 두 명 있거나 두 세 명 있거나 그렇지 그것도 사실 언제 변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생겨도 변할 수가 없다. 이 안에서 우리가 평생을 산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이다. 사람을 지어서 하나님의 동산에 두었다. 이보다 놀라운 축복이 없다. 처음부터 지어서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 놓아두었으면 저주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좋은 동산을 버리고 가시덤불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는 말이다. 가시덤불이니까 친구가 없다. 그 동산 안에서는 가시덤불이 없었다. 그런데 동산을 나오니까 찔리는 그런 것만 남았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믿기가 어렵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는다고 친구였지만 돈 같은 것에 조금만 틀어져 보라. 단방에 원수 되어 버린다. 형제간도 마찬가지다. 한 밥솥에서 먹고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간들도 돈 문제가 생겨서 옥신각신 하다보면 원수처럼 되어서 같이 안 만나려고 하고 제삿날은 술 먹지 않으면 못 오고, 만나면 싸운다. 그러니까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동산이 완전히 회복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거기서 안식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 회복된 동산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아주 조금 맛보기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지금 교회생활 하는 것은 옛날 엿장수에게 얻어먹은 맛보기 같은 것이다. 맛보기가 무엇인가 하면 엿판에 엿을 깔고 다닌다. 동네에 와서 가위질을 하면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든다. 모여들면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면 고무신짝, 부지깽이, 이런 고물이 되는 것을 가져오라는데, 맛을 보아야 가져올 것 아닌가? 아주 기술적으로 칼로 쪼끔 쪼갠다. 아주 얇디 얇게 엿 조각이 떨어지는데, 그것을 하나씩 주는 것이다. 먹고 나면 이놈들이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집에 가서 신던 신발이라도 가져와야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고물이 없어서 갖다 팔게 없었다. 냄비도 구멍이 뚫어지면 떼워서 쓰니까 팔아먹을 냄비가 어디 있었겠는가? 맛보기를 안 보면 못 팔아먹는다. 이 맛보기를 보니까 아이들이 도저히 안 되겠는 것이다. 그래서 몰래 갖다가 팔아먹는다.
지금 우리가 교회생활을 누리는 것은 맛보기다. 앞으로 큰 덩어리 먹을 것은 얼마나 재미가 있겠는가! 우리 영관이에게 단 것을 잘 안 준다. 그러니까 단 것을 하나 주면 얼마나 아이가 행복해 하는지,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느냐고 한다. 안 주다가 교회 오면 누가 주니까 단 맛을 알았다.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가끔 한 번씩 먹으니까 기가 막히게 맛있는가보다.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것을 생각하면, 최종완성의 교회를 누릴 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도 좀 있고 저런 문제도 있지만 그날에 가면 김치는 완전히 곰삭아 익을 것이고, 밥은 아주 기름이 좌르르 흐를 것이고, 거기다가 포도주가 오래되어서 6천년이나 된 포도주가 나오게 되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식탁이 준비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상은 그리스도와 교회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상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다. 좋은 사회를 선물로 받았다. 세상 사람을 보면 불쌍하다. 좋은 인격도 없고, 좋은 사회도 없다. 전부 대립적이고 전부 관계가 그렇다. 친한 친구라도 같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대립해야 된다. 자리는 하나밖에 없고 둘이 경쟁하려면 대립해야 된다. 전부 이해관계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험악한 세상이다. 홍섭이가 맨 처음에 왔을 때 약방에서 잠을 자는데,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면 잠을 자다가 90도로 바짝 일어난다. 내가 그것을 보고 홍섭이가 얼마나 긴장된 속에서 살았는가 하는 그 생각이 들었다. 자다가 그대로 딱 굽힌다. 딱 일어난다. 그러다가 시간이 오래 흐르니까 들어가도 모르고 자는 것이다. 평화의 동산으로 왔다는 말 아닌가! 사람이 동산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겠는가? 우리도 자다가 바짝 일어나야 되는 그런 사회에 살았다. 코브라처럼 바짝 일어나야 되는 그런 사회에 살았다.
a.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의 보좌로서 하나님의 원초적 행정이 집행되는 곳이며 그곳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임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원초적인 행정이 집행되는 곳이다. 여기서 생명의 물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행정이 있어야 사람에게 분배가 된다. 행정이 없으면 분배가 안 될 것 아닌가? 하나님의 행정이 있어야 분배가 된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창2:10)라고 했는데, 이 말은 분배된다는 말이다. 계시록 22장에서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계22:1)고 한다. 창세기에서 에덴이라고 말했던 그 에덴은 어디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였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는 사실은 어린양의 통치다. 실제적으로는 그렇다. 하나님은 뒤에 있고, 어린양이 나와 있는 것이니까 수렴청정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어린양이 사실상 통치하는 것이다. 어린양의 통치가 있는 곳에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완전한 분배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분배는 약육강식적인 분배다. 강한 놈이 먼저 먹고 남아야 먹는 것이지 똑같이 분배될 수도 없고 약한 놈은 세상에서 죽기 마련이다. 알고 보면 약육강식의 세계로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약하면 못 산다. 사회복지 제도를 확충하는 것은 약한 사람들을 돕자고 해서 사회복지 제도를 확충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어차피 강자가 살기 마련이고, 어차피 강자가 더 많이 먹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린양의 통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의 분배가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거기서 생명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생명나무가 자라는 곳에 생명이 열릴 것 아닌가? 그 생명은 영생이고, 그 영생은 하나님 곧 자신이다. 영생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영생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시다 라고 했다. 그 영생을 생명나무가 열리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천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영생이라는 말이다. 영생이라는 말을 길게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길게 사는 것이 아니고, 영생이라는 것은 질적인 말이다. 양적인 말이 아니고 질적인 말이기 때문에 삶의 질이다. 요즘에 웰빙(Well-Being)이라고 말한다. 좋은 삶의 질이라고 웰빙한다고 한다. 지금은 못 살아서 문제가 아니고,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라 웰빙이 필요하다. 집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집보다 좋은 집이 필요하다. 밥을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고, 그 밥보다 좋은 밥을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웰빙 시대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것은 웰빙이다. 최선의 최고급의 삶이라는 말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다. 그 영생을 우리가 지금 맛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누릴 영생에 대한 맛보기다. 생명나무가 열린다. 생명나무가 있다면 얼마나 사람이 달라지겠는가? 생명나무와 같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생명나무가 있으면 생명이 열린다. 생명은 무엇인가? 영생이다. 영생은 무엇인가? 웰빙이다. 양질의 삶을 가지게 된다. 지금 양질의 삶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문화적인 정치적인 면에서 양질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결국 양질의 삶을 산다는 그 말이다. 우리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인데, 아무리 좋은 삶을 살아보았자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그렇게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동산에서 흐르는 이 물이 분배되면 웰빙이 물질적인 웰빙이 아니고, 그 영에서 흐르는, 내 영이 주를 찬양하고 그럴 때는 우리가 입으로 찬양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입으로는 혼이 찬양하는 것이지만 그 찬양하는 속에 흐르는 웰빙이 있다. 그 웰빙은 입으로 찬양하는 것 이상이다. 어떤 경우에 우리가 찬송가의 가사를 노래할 때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 이상의 웰빙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눈물이 난다. 우리가 찬송할 때 가사를 건성으로 하지 말고 조금 생각해보고 하면 아주 그 안에 가사 이상의 것을 언어 이상의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짙은 것이, 더 웰빙이 있다는 말이다. 생명나무는 동산에 흐른다. 동산에 있다. 어린양의 행정이 흐르는 곳에 바로 이런 사회가 있다는 말이다.
b.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엡1:23)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다. 이것은 교회는 단순히 우리끼리 이렇게 있다는 말이 아니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말이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까.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이 말은 만물을 완성케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온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소유가 온전하게 된다. 돈만 있으면 술집에 가던 사람, 돈만 있으면 뽕 하러 가던 사람이 딱 바꿔지니까 술집으로 가던 돈이 교회로 온다거나 뽕으로 가던 것이 교회로 오는 것이다. 이 양복도 박치현 형제가 해준 것인데 이것이 옛날 같으면 뽕이다. 이 돈 가져가서 뽕 했을 것이다. 지금 옷을 해줘서 내가 입고 있다. 사람이 달라지면 돈이 달라진다. 얼마나 그 돈도 행복하겠는가! 그 돈이 속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오더니 내가 이렇게 복을 받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 아닌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만물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돈이 자기는 좋은데 쓰이고 싶은데 돈이 주인에 의해서 다른 데로 가버린 것이다. 돈이 생각할 때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만물이 억울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만물을 실망시키지 말자.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어야 된다. 만물을 실망시키는 사람은 얼마나 실망스러운 사람인가?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것은 좀 덜하다. 실망을 시켜도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것은 그래도 인생이니까, 하지만 만물을 실망시켰다는 것은 정말 인생이라고 할 수가 없다. 적어도 만물을 실망시키지 말자. 만물을 충만케 하자.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1) 하나님이 과정을 거친 그 영으로 교회 안에 계심
하나님이 과정을 거친 그 영으로 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지금 다른 데 계시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하늘에 계신다. 그런데 그 하늘이 어디인가? 지금은 교회다. 하나님이 존재할 때 이렇게 무 생명으로 존재한다면 어느 위치에 딱 정해져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말은 살아계신다는 뜻이다.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살아있는 것을 존재라고 한다. 어디에 딱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 말이다. 살아계신 분! 이 분이 지금 과정을 거쳐서, 그냥 교회 안에 계실 수 없으니까 과정을 거쳐서 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그냥 교회 안에 돌아다니면 다 죽는다. 옛날에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은 너무나 다르고, 거룩한 불 앞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여기서 하나님이 바로 나타나면 다 죽는다. 그런데 과정을 거쳐서 왔다. 전기가 그대로 와버리면 다 죽는다. 전등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오니까 빛이 되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통해서 과정을 거쳐서 오니까 우리 생명이 되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지금 교회 안에 계신다. 교회를 떠나서 하나님을 따로 찾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큰 오산이다.
2)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몸의 생명이 되고 몸으로서 하나님의 충만이 됨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몸의 생명이 되고 몸으로서 하나님의 충만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가 되셨다.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이니라”고 한다.
c. 교회는 이기는 자로서 천년동안 왕 노릇 함
교회는 이기는 자로서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천년동안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기는 자라는 뜻이다. 천년이라는 말은 길다는 뜻이고,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이긴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천년왕국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승리를 누린다. 어떤 형제가 간증을 할 때 우리는 승리를 누린다. 이것은 천년왕국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가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왜 시원한가? 누가 내 대신 확 이겨주었다는 것이다. 내 손을 대신해서 웰빙 손이 되었고, 내 물질을 대신해서 웰빙 물질을 만들었고, 내 존재를 대신해서 웰빙 인생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시원해진다.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는 이기는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다. 우리가 언제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 세상을 이기게 된다. 세상이 크게 보인다. 크게 보이면 못 이긴다. 그런데 작게 보이면 이긴다. 예수가 크게 보여 버리면 세상이 작게 보인다. 그런데 세상이 크게 보여 버리면 예수가 조그맣게 보인다. 그러면 당연히 진다. 그래서 권투 하는 사람을 보면 만나면 눈싸움부터 한다. 눈싸움부터 해보고 눈싸움에서 지면 지는 것이다. 기 싸움이니까. 짐승들도 만나면 으르렁 대고 눈을 본다. 결국은 누가 크냐는 것이다. 크게 보이면 진다. 상대방이 크게 보이면 지고, 상대방이 작게 보이면 이기는 것이다. 목포 어디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옥에 조각을 하는데 우리 눈에는 안 보인다. 확대경을 놓고 보아야 무슨 그림인지 보이는데, 그것을 그냥 보아도 자기는 보인다고 한다. 얼마나 그것을 많이 했는지 오래 했는지 눈에도 잘 안 보이는 그림을 파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자기는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옥이 크게 보이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까 참 사람의 기능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 같다. 조그마하면 작아서 안 보일 것 아닌가? 크게 보인다고 한다. 오늘 전자제품 안에 들어가는 집적회로 IC라고 하는 것은 큰 도면의 회로를 축소시켜서 조그맣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조그맣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많은 것이 집적되어 있다. 그러니까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과학이 발전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크게 확대해서 거기에 그림을 그려서 다시 딱 축소해 버리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대단한 기술이다.
세상도 크게 보이면 지고, 조그맣게 보이면 이기는 것인데, 어떻게 조그맣게 보이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믿어지면 세상이 조그맣게 보인다. 그러면 주먹 속에 딱 들어와 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이 없게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 전도하러 갔는데 그 사람이 완전히 느부갓네살처럼 보인다거나 완전히 큰 신상으로 보인다면 아예 전쟁을 못한다. 그 집에 가보니까 아파트가 너무 으리으리하여 아파트가 크게 보여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질려버렸다. 그러면 전도를 못한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지식이 엄청나게 많다. 그러면 지식이 크게 보여 버려서 전도를 못한다. 어떤 사람한테 가보니까 돈이 엄청나게 많다. 그러면 질려서 전도를 못한다. 크게 보이면 못한다. 적게 보여야 되는데, 어떻게 적게 보이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믿어지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참 인간이라는 것이 보여지면 그러면 작게 보여진다. 이것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사람들이다.
d.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연합체로서 도래할 새 예루살렘을 준비함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연합체로서 도래할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심으로 우리의 씨가 되셨음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한테 본이 되었다. 과연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이다.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될 수 있는가는 기름과 물이 하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심으로서 우리 앞에 본이 되었다. 씨가 되었다.
2)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생명이 되었음을 간증했음(갈2:20)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생명이 되었음을 간증했다.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이라는 말이다. 성육신이 되었다는 그 말이다.
3) 오늘 우리 안에서 생명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음
오늘 우리 안에서 생명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명의 재생산을 보고 있다. 생명의 재생산이 보인다. 그 새 생명이 또 재생산 되었네. 또 재생산되었네. 생명의 재생산!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4) 교회는 점점 새 사람(단체적)으로 조성되고 건축되고 있음
교회는 점점 새 사람으로 조성되고 건축되고 있다. 단체적인 인격으로 건축되고 있다. 어제 우리는 합창단이 나와서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지 않았는가? 들어봤는데 상당히 잘하는데 왜 그렇게 잘하게 되었는가? 지휘자가 있었는데, 지휘자가 어떻게 지휘를 시켰는가 하면 틀림없이 목소리가 큰 사람은 줄이고 목소리가 작은 사람은 크게 하고 튀는 사람은 죽이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정 안되는 사람은 입만 뻥긋뻥긋하라고 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지휘자가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잘 순종을 해서 나오니까 화음이 잘 되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해버리면 화음이 잘 안 된다. 요즘 아이들 노래 부르는 것처럼 자기 멋대로 불러버리면 합창이 안 된다. 요즘 노래는 또 그런 노래다. 화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도취가 중요하다. 자기도취가 되어서 열심히 불러야 되는 것이다. 옆 사람이 가든지 오든지 상관없다. 진철이와 배진아 둘이 나와서 부르는데 보니까 둘이 막 열심히 부른다. 화음은 관계없다. 요즘 노래는 주관적인 노래다. 각자 자기가 즐거우려고 부르는 노래지 남 좋으라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러니까 듣는 사람은 좀 괴롭지만 노래하는 사람은 재미있는 것이다. 합창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교회생활이다. 내 목소리는 죽이고 합창이라는 것은 노래를 잘한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휘자에게 순종을 잘해야 합창단이 될 수 있다.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 소리 낼 때는 내고, 내지 말 때는 내지 말아야 된다. 그런 사람이 합창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목소리가 너무 튀는 사람은 합창을 못한다. 그 사람 소리만 나오면 합창이 되는가? 화음이 안 된다. 어제 보니까 교회 생활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봉숭아 악단들을 모집해 놓았는데 노래는 상당히 잘한다. 이게 바로 교회생활이구나. 그러면 우리 교회도 합창단을 못 만들 것이 없다. 못하는 사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못하는 사람은 입만 뻥긋뻥긋 하면 된다. 박자 안 맞는 사람은 소리 낼 필요가 없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서있으면 된다. 오케스트라에 보면 한참 있다가 한 번씩 쨍~ 하는 심볼즈가 있다. 그것이 없으면 또 재미가 없다. 이따금씩 한 번씩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이 졸릴까 걱정이 된다. 계속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되는데, 기다리고 있다가는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때 한번 짱~ 하는 것인데 졸려버리면 어쩌는가? 그 사람이 없으면 오케스트라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해도 교회생활이 잘 될 수가 있다. 나는 죽고 교회만!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사람, 합창단에 들어간 사람은 나는 죽고 합창만! 이래야 합창이 된다. 아멘 많이 하는 사람은 어제 분명히 입만 뻥긋뻥긋 한 사람이다. 내가 정보를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섞여도 아무렇지 않다. 전혀 안 나타난다. 우리 중에는 다 훌륭하겠는가? 그렇지 않지만 묻혀 있으니까 전체가 다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점점 새사람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는 자의 왕국을 누리고 새 예루살렘 사회의 건축을 미리 맛보고 있음
그러면 우리는 이기는 자의 왕국을 누리고,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미리 지금 맛보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붙잡혔다. 푯대가 되었다. 붙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붙잡힌 사람! 이 사람이 진짜 붙잡힐 데에 붙잡힌 사람이다. 헛된 데에 잘못 붙잡혀 버리면 인생 망하는 것이다. 망하는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잘못 붙잡혀서 망한 것 아닌가? 주식을 하다가 망한 사람은 주식에 붙잡혀서 망한 것 아닌가? 꼭 이길 것 같으니까 하다가 망한다. 그런데 하다보면 망하는 것이다. 왜? 그것은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붙잡힌 것은 망할 일이 없다. 이것은 절대로 망할 일이 없다. 이것 밖에는 완전한 성공이 보장된 데가 없다. 빼기보다 쉬운 것은 없고, 빼기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빼기보다 완전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 가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보다 완전한 것은 없다.
바울은 정말 붙잡힐 데 붙잡힌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붙잡힐 데 붙잡힌 사람이 된 이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우리 푯대가 되었다. 나는 이 푯대를 향해서 달린다고 달려왔다. 내가 빨리 달리지 못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푯대가 확실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내가 달음질이 빨라서 성공을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미 얻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경주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나는 사실은 종교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잘 못한다. 기도도 피땀 흘려 못한다. 전도도 열심히 못한다. 목회도 감기가 걸릴 정도로 못한다. 사실은 힘이 없어서 못한다. 그렇게 할 힘이 없어서 못하는데, 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가? 그것은 푯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만일 분명치 못한 푯대를 잡았더라면 그것은 아예 그냥 어디로 떠밀려 갈지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아는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될 수 있는 곳인데, 거기서 어떻게 가겠는가? 다행히 정말 다행히 잡힐 것에 잡혔고 분명한 푯대에 잡혔기 때문에 천천히 왔지만 확실하게 왔다. 그것을 간증할 수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잡을 것을 주시고 또 우리를 붙잡으셔서 우리가 거기를 떠날 수 없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서 우리 앞에 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와 교회에게만 붙잡힌 사람이 됨으로써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푯대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우리의 믿음을 지켜서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길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정해진 길이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확정된 길이고 오늘 교회 안에서 실험되고 있는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가 하나도 낙오되는 사람들이 없게 되기를 바라고 모두다 개가를 올리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