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유적지를 찾아서 2
주자는 1162년 송나라 효종이 즉위하면서 치국에 대한 방책을 논의할 것을 명했다. 주자는 상서를 올려 문학을 배척하고,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기 위해 지식을 닦는 일인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갖는 성의정심(誠意正心)을 주장하며 이학(理學)으로서 황제를 보필하고자 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1163년 그는 다시 격물치지를 진언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여 조정이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두 갈래로 나뉘자 주화파의 폐단을 들면서 주전파의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가열되는 파당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주자는 정이(程頣)의 “천지간에 존재하는 이(理)는 유일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만물에 존재한다.”라는 사상을 공부했으며, 장식(張栻)과 교제하면서 심성론(心性論)을 확립했고, 여조겸(呂祖謙)과 교류하면서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소옹(邵雍), 정호(程顥), 정이(程頣)의 주장을 담은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한편 그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구연(陸九淵: 1139-1192)선생을 만나 학문을 통해 만물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주자는 강서성 연산(鉛山)에 있는 아호서원(鵝湖書院)에서 제자들에게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육구연의 강의를 듣게 하는 등 두 사람의 만남인 아호지회(鵝湖之會)는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육구연의 사상은 명나라 시대 진헌장(陳獻章)를 거쳐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에 의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178년 주자는 남강군(南康軍)의 지주(知州)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에 백록동서원을 다시 세워 육구연 등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학을 실시했다. 당시 서원은 사립학교 같은 개념으로 관립학교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예비학교였던 것에 비해 진정한 학문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었다.
주자는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1181년 상평차온공사가 되었을 때는 마을에 곡식창고인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구제미를 대여해 줌으로써 쌀값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건의했다. 또한 장주(漳州)와 담주(潭州)의 지주를 지낼 때는 조세를 감면하고, 풍속을 개선하고, 학교를 세웠다.
금년 1월 30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방문하였다. 그곳을 가기 위해 중국에서 도자기로 가장 유명한 경덕진(景德鎭)을 지나가게 되었다. 광주차이나센터를 개관할 때 경덕진 외사판공실 정철(鄭鐵) 부주임을 만나 광주 서호(西湖)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곳에 그를 만나 도자기박물관을 관람하고, 그의 부인이 도예가여서, 우리 일행 중 주자선생의 후손이 좋은 작품인 도자기 한 점을 사 주기도 하였다.
경덕진에서 백록동서원까지는 2시간 이상이 걸리는데, 2시간이란 중국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곳은 강서성 구강시(九江市)로, 9개의 강물이 합쳐진다는 곳이다. 백록동서원에 들어가면 옛날에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장사의 악록서원(岳鹿書院)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맛이 난다. 주자선생은 무이서원이나 백록동서원의 터는 중국 서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속에 있다.
백록동서원은 여산(廬山)에 있으며, 무이서원은 무이산(武夷山)에 있으며, 여산은 이백, 백락천, 소동파의 시로 유명하다. 마침 여산에 올라간 날에 비가 오고 안개가 자욱하여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여산의 미려별장(美廬別莊)은 장개석(蔣介石)과 모택동(毛澤東)이 기간을 달리하였지만, 두 명 모두 찾아온 곳으로 유명하다. 1937년 주은래(周恩來)가 여산에서 국공합작을 한 곳으로 유명하며, 장개석 부인인 송미령(宋美齡)의 유물이 많이 남아 전시되어 있다.
모택동은 1959년 7월 여산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가 27세 때 은사의 딸인 양개혜(楊開慧)와 결혼했는데 국민당원에 학살되었다. 두 번째 부인이 하자진(賀子珍)으로 1909년생인 그녀는 17세 때 공산당에 입당하고, 정강산에 들어온 젊은 혁명전사였다.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의 연안에 근거지를 둔 고난의 시절에 모택동을 헌신적으로 떠받들었지만, 대장정에서 얻은 상처 치료를 위해 1937년 모스크바로 갔다. 그녀와 헤어진 지 22년 만에 남창에 있던 그녀를 만났지만, 이후 죽기 전까지 만나지 못했다.
모택동이 선인동(仙人洞)에서 나오는 사진이 걸려 있는데, 선인동은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지금도 도복을 입은 도사 두 명이 점을 치고 있다. 여금호(如琴湖)란 조그만 호수는 바이올린과 같은 호수라 하여 그렇게 부르는데, 바로 옆에 꽃길이란 화경(花逕)이 있다. 이곳에 백락천 초당이 있고 ‘대림사 도화’란 시가 적혀 있다. 여산은 당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가 유명하다.
향로봉에 해가 비치는 자줏빛 안개가 일어나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강을 이루었네.
날으는 물줄기가 3천척을 곧장 떨어지니,
혹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가 아닌가!
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前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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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蘇東坡)의 ‘서림사벽시(西林寺壁詩)’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면목(眞面目)’이란 말이 이곳에서 생겼다.
가로로 보면 뻗은 고개요, 옆으로 보면 솟은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고 낮은 곳에서 각각 다르구나.
여산의 진면목(참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다만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마침 백록동서원에 한국인교수가 있었는데 고려대학 출신으로 전병욱교수였다. 그리고 전북 순창군 혼몽재 학생들이 10여명 공부하러 와있는 중이었다. 작년에 훈몽재 김충호선생께서 주자묘에 왔을 때, 남창대학 교수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이곳에서 남창대학 강우철학연구소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 주자문화보존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상호 토론을 많이 하였다. 서원에는 주자선생의 동상과 주돈이선생, 왕양명선생 등의 비와 동상이 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백록동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곳이며, 주자선생이 직접 쓴 명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제 중국에 주자선생의 성역화 사업이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2018년 3월 12일
姜元求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