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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오르던 꿈 많던 청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났다. 바비킴은 데뷔한 지 11년이 지나서야 주목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와 가볍고 단순한 소리가 오묘하게 겹친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목소리라고 10년 넘게 외면당해"
트럼펫 불며 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말려 그만두기도… 귀국 후 가수 데뷔도 반대
"'고래의 꿈' 녹음 때 아무 말 없던 아버지가 트럼펫 연주"
도봉산서 여섯달 득음(得音) 훈련…극심한 좌절 끝 '공황장애'…성가대 활동 1년 만에 사라져
"몸값 올리면 욕먹는다" 아버지의 신신당부에 처음엔 20만원만 받고 일 해
도봉산(道峰山)에서 아침마다 괴성(怪聲)이 들렸다. 서울 방학동 아파트 맞은편 산 줄기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패한 가수라고 했다. 그는 내는 앨범마다 망했다. 제작자들은 "한국인이 싫어하는 목소리"라고 수군댔다.
청년은 하산해 또 앨범을 냈다. 다시 망했다. 득음(得音)의 무용(無用)을 안 어느 날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동대문시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극심한 좌절을 겪을 때 나타나는 '공황장애'였다.
부모는 아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돈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정신과(精神科)에 간다'는 자체가 싫었다. 대신 택한 게 성당(聖堂)이었다. 그는 오묘한 신(神)의 섭리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 말을 못했던 것이다.
성당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 여학생 둘이 다가왔다. 그들은 "성가대(聖歌隊)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우리 말을 못 한다고 해도 무작정 청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1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느닷없던 공황장애가 느닷없이 물러갔다.
청년이 고난의 세월을 보낼 때 가요계의 도(道)가 무너지고 있었다. 국적불명의 가사만 들렸다. 붕어처럼 입만 뻥긋댔다. 요란한 복장에 떼거리로 몰려다녔다. 그때 이 도봉산 청년이 등장했다. 바비킴 스토리다.
■득음
덕수궁 옆 카페 '달개비'에 바비킴(37·본명 김도균)이 나타났다. 재킷·바지에 운동화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못 보던 안경을 쓰고 있어 뭐냐고 물으니 손가락을 쑥 끼우며 "눈에 다크서클이 생겨서…"라고 했다.
―명창(名唱)들이 폭포 앞에서 득음한다는데 그들처럼 목에서 피(血)가 나오던가요.
"(깜짝 놀라며) 피요? 안 나왔죠. 6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노래의 도가 반년 만에 깨쳐지던가요.
"산 밑에서 훈련하던 군인들이 저를 향해 한꺼번에 입을 모아 고함치더군요. '시끄러워! 제발 그만 떠들어'라고. 그 일이 있은 뒤부턴 산에 가는 걸 그만뒀습니다. 대신 집에서 연습했습니다. 타월을 둥글게 만 뒤 그 안에 입을 대고요. 아파트에선 시끄럽게 하면 안 되잖아요."
―공황장애는 잘못 치료하면 큰일 날 수도 있는데.
"병원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부모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아요. 절 괴롭힌 건 세상과의 부조화(不調和)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 두 여학생이 바로 천사(天使)였던 것 같아요."
―바비킴의 목소리가 주변에서 보통 들을 수 있는 음성은 아닙니다.
"이상하고 특이한 목소리지요. 전 제 목소리가 정상인 줄 알았어요. 서울에 와 가수가 되려 오디션을 받으니 '한국인들에게 잘 먹히지 않을 이상한 소리'라고 하더군요. 미국에선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습니다."
―노래를 들어보니 어찌 보면 끈적끈적한 것 같기도 하고. 여성 팬들이 질퍽질퍽한 목소릴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래요? 전 그냥 노래를 하고 싶었습니다. 인기도 얻고 싶었고요.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 게 제 운명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을 여러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낄 뿐입니다."
―여성 팬들이 실제로 많습니까? 특히 중년 여성들이.
"콘서트를 하면 10대부터 50대까지 계시죠. 어머니와 딸이 같이 오기도 하고요. 전 무대에서 항상 나이를 확인해요. '여기 50대 계십니까? 손들어보세요' 하고요."
―중년들은 뭔가 다르겠지요.
"선물이 주로 홍삼(紅蔘)이 많이 들어옵니다. 비타민도 있고요. 내일모레 사십이니 건강을 챙기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해요. 음식을 직접 해다주는 팬들도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까지 휘성·김범수와 함께 전국 투어를 했습니다. 대구·부산·광주·전주·서울까지. 어느 정도 관객이 몰리면 성공인가요.
"객석이 보통 2000석에서 5000석인데 거의 찹니다. 서울 잠실에서도 만석(滿席)이 됐고요. 보통 콘서트는 20~25곡 정도를 소화합니다. 이번에는 각자가 5~6곡씩 부르고 같이 몇곡 부르는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콘서트에선 자기 노래만 합니까.
"가끔 다른 분의 노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분이 나훈아 선생 노래를 해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가끔 부르는 게 그분의 '사랑'입니다."
―아! '이 세상에 하나밖에~'로 시작되는 그 노래?
"예(옆에 있던 그의 소속사 강태규 이사는 '바비킴이 그 노랠 부르면 나이 지긋한 팬들이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다).
―일부 가수들은 무대보다 TV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 주업(主業)으로 삼던데, 왜 TV 출연은 안 합니까.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무대에서 관객들과 직접 호흡 맞추는 게 제가 가야 할 길이지요."
■트럼펫
그의 아버지 김영근(68)은 국내에서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였다. MBC 관현악단 소속이었던 그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누구나 그리는 꿈의 무대, 뉴욕에서 음악으로 성공해보겠다는 야망이었다. 바비킴의 나이 두살 때다.
미국 땅은 녹록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고 인맥도 없는 동양인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김영근은 이름없는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다 페인트칠·옷 장사·음식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가 위협당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실의에 잠긴 모습을 봤습니까.
"어려서 그런 건 잘 몰랐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방송국에서 미국 교포 위문공연을 왔을 때 아버지가 트럼펫을 하는 모습을 봤어요."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아버지처럼 휘황한 조명 아래서 박수를 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잘했겠네요.
"상당히 잘했어요. 선생님들이 중학교 수준이라고 했으니까요. 어떤 분은 '너처럼 트럼펫을 부는 아이는 몇십년 만에 처음 본다'고까지 했어요."
―아버지가 뭐라던가요.
"중학교 2학년까지 트럼펫을 익혔는데 아버지가 반대하시더군요. '네 나이 때, 내 실력이 지금 네 두 배는 됐다'면서요. 밖에서는 정반대로 얘기했다더군요. '아주 잘 분다'고(바비킴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왜 반대했을까요.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와 아버지께 따졌어요. 방에서 문 잠그고 엿들으니 이런 대화였어요. '이렇게 훌륭한 솜씨를 왜 그만두게 하려는 거냐'고 선생님이 하자 아버지는 '연주 때문에 공부를 잘 못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겐 트럼펫 불어선 미국 땅에서 살 수 없다고 했어요."
―공부를 못했나요?
"100명 중 60등 정도. 수업시간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전 항상 튀고 싶었습니다."
―트럼펫을 그만둔 뒤 공부에 몰두했습니까.
"운동에 빠졌습니다. 야구를 잘했어요. 동네 팀에서 상(賞)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키(173㎝)는 작지만 어깨가 강했어요. 3루를 맡다 나중에 포수(捕手)를 했습니다."
―그 뒤론 트럼펫을 불지 않았나요.
"단 한번도. 자존심이 상했거든요. 전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않습니다. 자라서는 후회하긴 했어요. 유명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그 실력이면 대학에 장학금 받고 입학할 수도 있는 길이 많은 걸 나중에야 알았거든요."
―바비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붙인 이름입니까.
"누나(김혜령)와 제가 자주 보던 시트콤이 있었어요.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막내 이름이 바비였습니다. 누나가 TV를 보다 갑자기 '앞으로 너, 바비해'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바비가 된 거죠."
―1970년대면 인종차별이 남아 있을 시절인데.
"제가 살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은 동양인 중에서도 소수(少數)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옆을 지나가다 갑자기 제 머리 냄새를 맡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음부터 머리 잘 감고 오라'고 하더군요. 전 분명히 아침에 샤워하고 갔는데요."
―그래서요.
"김영석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둘만 구박을 받았어요. 영석이가 아침 7시 30분이면 저희 집에 왔어요. 머리 감은 뒤 그 위에 린스를 바르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여교사가 냄새를 맡곤 '음~ 어제보단 나아졌네'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눈이 큰 편인데도 손가락질하며 '어이! 눈 뜨고 다녀'라고 하기도 하고 '차이나맨'이란 소리도 숱하게 들었습니다. 싸움도 많이 했어요. 고교에 입학해서야 놀림이 줄어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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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뷔 10년 만에 바비킴 앞에 "난 네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관객들도 '목소리 죽인다'며 웅성거렸다. 그는 용기를 내 솔로 앨범을 냈다. '고래의 꿈'이 서서히 이뤄졌다. / 오스카이엔티 제공
■좌절
바비킴은 토머스 에디슨 초등학교, 페르난도 리베로 중학교, 웨스트모어고를 나와 샌프란시스코 애슐리대 1학년을 다니다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2년이다. 가족의 역(逆) 이주는 어머니(정정자·61)의 뜻이었다.
아내는 음악밖에 모르는 남편이 미국에서 세월을 썩히는 걸 안쓰러워했다. 아내는 혼자 서울에 와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가능성을 타진했다. 답은 '다시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1992년 귀국한 뒤 가수로 데뷔했지요.
"그때도 아버지는 가수 데뷔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연세대 어학당(語學堂)에서 2년 동안 한글을 제대로 익히고 다시 미국으로 가 공부를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첫 1년은 어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과외를 했어요. 한달에 8만원쯤 받았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친구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가수로?
"아버지 아는 분을 통해 오디션을 봤지요. 제 노래를 들은 뒤 계약을 하자더군요. 좋은 평가는 아니었어요. '랩은 훌륭한데 솔로로 활동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목소리 톤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음향 엔지니어로 목소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분인데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선 못 들어보던 소리였지만 '그런가 보다'하고만 생각했지요."
―1994년 그룹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요.
"정규 앨범 내고 단독 콘서트 2번 한 뒤 1996년 해체했습니다. 인기는 없었지만 평이 그다지 나쁘진 않았어요. 음악이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요.
"일부 멤버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됐습니다."
―혹시 바비킴도?
"전 안 했어요. 나쁜 건 안 해요."
―어렵사리 한 데뷔인데 허무했겠습니다.
"처음엔 놀라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쉬웠지요. 그때 멤버가 저를 포함해 7명이었는데 지금 음악 활동은 저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멤버의 막내였지요. 막내는 무슨 일을 합니까.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했는데 형들이 잘 챙겨줬어요. 경기도 안양의 연습실 겸 방에서 머물렀는데 큰 형만 방에서 자고 저희는 소파나 뭐 그런 곳에서."
―돈도 못 벌었겠네요.
"딱 한번 10만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말술로 알려져 있는데 술을 그때 배웠죠?
"형들이 남자답게 살려면 술을 배워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 소주를 마셨을 때 다 토했습니다. 꼭 소독약을 먹는 기분이었어요. 이런 걸 왜 마시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요."
―한국과 미국의 술 문화를 비교해본다면.
"미국은 대개 바 같은 곳에서 혼자 마시잖아요. 한국은 남자 대 남자가 대결하는 식으로 마주 보고 앉아서. 제 술 실력을 두고 일설에 소주를 60병 마신다는 소문도 있는데, 말도 안 돼요. 그럼 죽죠. 3병쯤 마시면 완전히 취해요."
■터널의 끝
1996년 첫 실패 후 그에게 시련이 왔다. 공황장애였다. 다리 힘이 풀리고 땀이 나면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느껴졌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성당에 가면 가라앉던 공포가 눈을 뜨면 다시 다가왔다.
어학당에 다녔지만 여전히 그의 한국어 실력은 어린아이 수준을 맴돌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빠' '엄마' '배고파' '불고기' '김치' 정도였다. 스물 세살 청년에게 세상은 감옥(監獄)처럼 죄어오기 시작했다.
―'천사'라고 표현한 그 여학생들과 아직도 연락이 됩니까.
"제 미니홈피에 글을 남긴 적이 있어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믿음의 힘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2~3차례 성당에 나갔어요. 친구들이 생기니 증세가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회복된 뒤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겪는 고통이 나중의 성공을 위해 준비된 게 아닐까'하는. 영화 같은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거죠."
―'닥터 레게'가 해체된 뒤 4년이 지난 1998년에야 다시 앨범을 냈습니다. 그동안은 뭘 했습니까.
"한글을 전혀 못했기에 음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EBS교육방송에서 성우(聲優)를 했어요. '뽀뽀뽀'에도 출연했고요. 2년 반 정도 하며 한달에 70만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1997년 댄스 붐이 일면서 다시 기회가 왔죠.
"댄스 붐이 일면서 간주(間奏)부분에 영어로 랩을 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처음 랩을 했지요."
―누구와?
"털보하고 엄정화 언니요(강태기 이사가 '털보'가 아니고 '터보'라고 바로잡았다). NRG, 코요태도 하고 젝스키스와는 랩 디렉터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를 받나요.
"처음엔 20만원을 받다가 나중에 30만원으로 올랐어요."
―그렇게 임금이 박합니까?
"아버지께 여쭤보니 '(가격을) 올리면 욕먹는다. 절대 올리지 말라'더군요. 30만원으로 오른 것도 제가 요구한 건 아닙니다. 말을 안 했는데도 더 준 거예요."
―그러다 작곡가 이윤상을 만나 1998년 '바비'라는 이름으로 단독 앨범을 냈지요? 또 실패했고.
"HOT·김건모·조성모·룰라가 활동할 때였어요. 밀리언셀러가 많을 때였습니다. 제 음반도 10만장 이상 나갔지만, 워낙 호황일 때여서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
―2001년 그룹 '부가킹즈'를 결성했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시 힙합그룹은 사회비판 아니면 괴물(怪物) 같은 그룹명을 짓는 게 유행이었어요. 부가는 '신나게 논다'는 뜻입니다. 킹즈는 왕이란 뜻이었고요. 그룹명(名)을 지을 때 무조건 '킹'이란 단어를 넣고 싶었어요. 'Kings'가 아니라 'Kingz'로 쓴 건 아무 뜻도 없어요. 그냥 재미있게 하려고 붙인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부가킹즈 멤버에 '쥬비'와 '간디'가 있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쥬비는 본명이 주현우인데 '주'를 '쥬'로 바꾼 뒤 아무 뜻 없이 비를 붙인 거고요, 간D는 본명이 최헌입니다. 예명이 동현이었는데 거기서 D를 따왔고, 간은 그 친구 얼굴이 간이 나쁘게 생겨서 붙인 겁니다."
―어떤 얼굴이 간이 나쁘게 생긴 얼굴입니까.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거든요."
■고래의 꿈
1998년부터 힙합 장르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앨범은 실패했지만 계약기간이 남았기에 바비킴은 무대를 떠날 수 없었다. 하릴없이 아르바이트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지금 '부가킹즈'의 멤버인 쥬비와 간디를 만났다.
바비킴에게 서광(曙光)이 비친 것은 2004년 솔로 1집을 내면서부터다. 타이틀 곡 '고래의 꿈'이 히트친 뒤 2005년 부가킹즈 2집, 2006년 솔로 2집, 2008년 부가킹즈 3집, 2009년 바비킴 스페셜 앨범이 줄줄이 인정받았다.
―실패를 거듭하면 주변 사람들과도 멀어지죠.
"이윤상씨는 '세상이 이상한 거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사실 당시 앨범도 그렇게 형편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부가킹즈 1집도 망했잖아요.
"그땐 정말 '이게 운명인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부턴 가수의 꿈을 접고 작곡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2002년 가수 윤미래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갔다가 지금의 전홍준 사장을 만났습니다.
"그때 전 사장님이 앨범을 내자고 했지만 전 싫다고 했어요. 곡(曲)이나 쓰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난 네 목소리가 특이해서 좋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국에 와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제 목소리 좋다는 분을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하하."
―윤미래면 지금 타이거JK와 결혼한?
"같은 교포 출신이기에 서로를 잘 이해해줬어요. 전 사장님 말을 듣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하는데 '목소리 죽인다'는 평가가 나온 거에요. 2004년에 마지막 앨범이다 하는 기분으로 바비킴 솔로 1집을 냈습니다."
―히트곡 '고래의 꿈'의 원제(原題)가 'Beats within My soul'이지요? 원래 가사를 영어로 쓴다면서요.
"제가 영어로 쓰면 서승희(버블시스터즈)씨와 그의 친구들이 한글로 번역해줍니다. 고래라는 단어를 쓴 건 자유롭고 싶어서, 고래처럼 넓은 바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곡도 처음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진 않았지요.
"제 노래는 대개 서서히 주목받아요. '고래의 꿈'도 2004년 8월쯤 나왔는데 10월에 들어가자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도 처음 하게 됐지요."
―부모님이 뭐라든가요.
"참 좋아하셨어요.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니 이제야 대중들이 받아들인다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것도 다 운명이구나 하는."
―'고래의 꿈'에 아버지가 트럼펫 연주를 했지요.
"부탁드렸는데 아무 말도 안 해,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방에서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고래의 꿈'과 딱 떨어지는 소리였어요. 아버지가 속으로 절 도와주려 있어 그걸 연습했던 겁니다. 그 덕분에 노래가 더 빛났지요."
―한국의 팬들이 힙합보다는 대개 로맨틱한 발라드 음악을 좋아하지요? 어떤 게 더 좋은가요.
"솔로로 할 때는 아무래도 발라드가 많고 부가킹즈는 주로 힙합입니다만 전 둘 다 좋아요."
―곡을 작곡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보통 저녁 9시부터 작업하는데 빠르면 10분 안에 나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1주일 이상 걸릴 때도 많지요. 'Let me say goodbye'가 7분 정도 걸렸고요. 가요계를 떠나는 것 같은 슬픈 기분이 들어 쓴 곡이에요. (술 마시며 곡을 쓰느냐고 하자) 아니요, 다 끝나고 마셔요."
―그 뒤 드라마 주제곡도 많이 불렀죠?
"하얀거탑의 '소나무', 쩐의 전쟁의 '1년을 하루같이', 타짜의 '리즌', 친구의 '오직 그대만을' 같은 노래들입니다."
―가수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굴까요.
"우리 가수 중에는 이적·임재범·타이거JK. 있는 그대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고요, 나훈아 선생님 노래도 좋아합니다. 외국 가수 중엔 밥 말리·마빈 게이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기 노래를 '비빔밥'으로 표현했다. 리듬 앤 블루스(R&B), 록, 댄스에 우리 정서를 가미했다는 뜻이다. "사실 미국은 음반시장 자체가 비빔밥입니다. 빌보드 10위권 안에 별의별 음악이 다 있거든요."
고생 끝에 찾아온 낙(樂)은 길음동 아파트다. 3년 전 마련한 그 집에서 바비킴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노래하고 아버지는 얼마 전 남진 콘서트에서 트럼펫을 불었다고 한다. 부자(父子)는 지금도 연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