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생각하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하여 9사단장 시절 얻은 별명 ‘나폴레옹’.
얼마나 엄포를 주었는지 6군단장 시절 생긴 ‘진시황’ 이란 별명이 사방에 떨쳤다. 나는 이 별명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내가 수양을 쌓고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천성은 버리지 못한다고 나의 진취성과 과단성은 좀처럼 무디어 지지 않았다.
- 이한림 회상록 ‘세기의 격랑’ 중에서 -
1921.2.10 함남 안변 출생
1944.4.20 일본 육사 卒
1947 국방경비대 제 4연대장
1953 보병 제 9사단장
1954 제 6군단장
1957 육군사관학교 교장
1960 제 1야전군 사령관
(1961.8.24 예편)
1963 수자원개발공사 사장
1968 진해화학 사장
1969 건설부 장관
1972 관광공사 사장
1974∼80 주 터키, 호주 대사
자유대한, 그리고 군인의 길 선택
16세 때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이역땅에서 조국에의 그리움을 배운 청년!
뭔가 강렬하고 폭죽처럼 활짝 타오르는 인생을 원하고 있던 청년 이한림은 특유의 성격답게 충성이니, 제국 간성이니 하는 상투적인 이유가 아닌 ‘개성(個性)을 살려 보려고’ 군에 지망,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땅에서 25세의 청년장교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남과 북의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던 1945년 12월 26일, 고향인 안변에 도착한 그는 먼저 귀국했던 어머니와 두 명의 누이동생 등 가족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상경과 입북을 반복하는 동안 남과 북을 샅샅이 관찰하면서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남쪽의 혼란은 필연적인 것이고 북쪽의 혁명 기도는 예측 가능한 것이기에 그 와중에서 군대의 역할은 조국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는데 기간이 된다고 판단하여 국군에 입대하기 위해 가족과의 기약없는 이별을 하고 남쪽의 자유대한을 조국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재월남하자마자 즉각 국군에 입대한 그는 46년 2월 21일 임관 후 국방경비대 중대장, 육사교관(남조선 국방경비 사관학교), 국방경비대 4연대장을 거쳐 48년부터 1년간 한국군 최초의 도미유학을 통해 새로운 군사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6·25 전쟁과 이한림 장군
이한림 장군은 한강선 방어작전이 치열하던 1950년 7월 1일부터 발전적 해체가 될 때까지 한 달여를 2사단장으로 역임하고 대구지구 사령관, 2군단 부군단장 겸 참모장, 육본 정보국장, 육군 보병학교장, 국방부 정훈국장 등을 거쳐 53년 2월 금화지구 방어를 맡고 있는 제 9사단장으로 부임했다.
휴전을 앞둔 적의 대공세 목표로서 제 9사단은 필수였다. 왜냐하면 금화지구의 중요성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및 북진의 3개 능선 등 주요지점에서 주 저항선을 형성,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장군(소장)은 부임 후 즉각 취약점인 야간전투에 대비케 하는 등 여러가지 지휘조치를 취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6월 12일, 중공군은 계속 인해전술로 축차투입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좌절되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 포획한 중공군의 심문을 통해 중공군 70사단 주력이 북진능선에 대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의 공격기세를 꺽기 위해 미 제 9군단장 젠킨스 중장의 의구심(매우 위험하고 야간작전으로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제 28연대장 윤태호 대령에게 6월 14일 04시부로 역습을 명령하고 사단내 가용화력의 최우선권을 역습부대 정면에 부여하였다.
마침내 역습에 성공, K고지를 완전히 탈환하여 주 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북진능선의 방어작전 성공으로 중공군 제 24군 예하 제 70사단은 심대한 손실을 입고 사단은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다.
북진능선 작전이래 쉴 틈도 없이 방어전력을 보강하면서 적의 재공격을 대비하던 장군은 7월 13일부터 중공군 제 24군 제 72사단의 공격을 받고 전투 중 인접 수도사단의 돌파구 형성이 확대됨에 따라 부득이 철수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여 연쇄적인 붕괴를 막아 더 이상의 지역손실 없이 금화를 중심으로 철의 삼각요충을 완전 확보하는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작전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장관, 미 제 8군 사령관 등 일행을 대동하고 제 9사단 사령부를 방문, 다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고 아울러 이한림 장군은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정부로 부터 은성훈장을 받았다.
격랑속의 오직 군인의 길
1954년 2월 북괴군의 주공이 지향되었던 수도권 북단의 광활한 전략 요충지를 책임지는 제 6군단이 창설되고 이한림 장군이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기존 군단을 인수받는 것보다 이를 더 영예스럽게 알고 훌륭한 군단 건설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당시 실시되었던 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이기붕 후보가 낙선하는 이변이 생기고 군단장으로서 엄정 중립을 지킨 결과(6군단 이기붕 득표율 35%) 보복 인사조치로 현직 군단장이 국방대학원에 입교하게 되는 수모를 당한다.
교육을 마친 후 우여곡절 끝에 당시 소장 직위였던 육사교장에 자원해서 부임하여 3년 3개월간 오로지 육사 건설에만 정신을 쏟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교과서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재의 재편찬, 재정비에 들어갔다.
육본, 국방부, 미 고문단 등 육사시설 확충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면 무슨 일이건 찾아서 해결지었다.
그런데 59년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에서 장래 우리나라 간성이 될 사관생도로 하여금 부정선거를 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기에 상부와 기관의 집요한 협조요청을 뿌리친 결과 3월 19일에 육사교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라는 송요찬 참모총장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육사에 계속 머물거나 군복을 벗기거나, 군사령관으로 보내거나 셋 가운데 하나 외에는 응할 수가 없다고 하고 내가 정도를 걸었는데도 교장직을 해임한다면 사관생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다그치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따졌더니 전화를 끊었다. ”
결국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는데 이어 4.19 의거가 일어나고 자유당이 몰락하면서 60년 10월 원하던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황파악과 야전군 전체 부대 실태 파악을 끝내고 뭔가 야전군 강화를 위해 새로운 개선책을 구상하고 있을 때, 어떤 극적인 전기를 만들어 새롭게 도약하는 야전군상을 완성시키고 싶었으나, 그는 5.16 군사쿠테타를 맞게 되고 죄목 ‘반혁명 주범’으로 구속, 61년 8월 24일 강제 예편된다.
마지막 공직생활
미국에의 추방생활, 귀국 후 감금생활, 박대통령의 회유 등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군사정권의 동참을 거부했던 이장군은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박대통령의 ‘나를 도와 달라, 무슨 일이든 맡아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극도로 미워했던 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풀어졌고 깊고 깊은 우정은 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산개발 공사를 설립하는데 힘이 되어 달라는 요청에 설립이 끝나고 1년 정도 회사의 업무 진전이 정상 괘도에 올랐을 때 사임하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한 것이 5년. 그리고 진해화학 사장을 거쳐 69년에는 건설부 장관, 관광공사 사장, 74년부터 80년 초까지 주 터키 및 호주대사를 끝으로 모든 공직을 떠났다.
그리고는 제자나 후배들의 정치개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지금까지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다.
심지어 종친회장 마저도 사양했다.
「건강은 인생의 생활 수단으로 쓰는 것이지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어요. 건강은 기호, 식성, 근면도 등 평소 그 사람의 생활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건강 관리 같은 것은 안해요. 국민들이 건강, 출세, 재화에 관심이 집중되면 나라가 반드시 망했던 역사를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77세의 연령에도 근엄한 자세, 카랑카랑한 목소리 등 매우 건강해 보이는 장군의 건강유지 비결은 철저한 절제, 몸에 맞는 운동, 근면함 등 평소 생활 그 자체였다.
후배들에 대한 당부
「건군 50주년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할 말은 없습니다.
우리의 안보태세는 국가가 존립하는 한 어느 순간에도 정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예요.
어느 시기는 잘하고 어느 시기는 정지해도 좋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어요.
모든 사회, 집단, 국가, 민족간의 우열은 변화, 변질, 개혁에 대처하는 능력에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우리 군도 50년이 되었으니 뭘 해야 겠다는 생각을 말고 매일매일 변화와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변화되어 오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긴 앞을 보는 전략적인 군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와 국가도 끊임없는 개혁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국가로서 대전략을 구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전략을 겸비한 국가에 지배되는 것이 역사이며,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그 국가는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멀리 있고 겉에 있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화하고 또 미화하면 아예 없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1998년, 건군 반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후배 장병들도 진정한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가치관과 철학을 견지하여 국토방위라는 막중한 사명 완수를 위해 예리한 결단력과 용맹스런 행동의지, 실천력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보며, 또한 그렇게 해줄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