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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뢰1980천원07제로년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227년 서하(宁夏, 저하) 정벌과 징키스칸 사망]
[왜 서양사의 사건에서 제로년 다음으로 1440년일까? 한글 창제 1443년인데.. (50SKH)]
제7장 0년 얼굴성 319-363
§07. Année Zero: Visagéité 205-234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319-363.
§07.00. 도판 그림(205, 319): Duccio, Vocation de saint Pierre et saint André, New York, coll. Bulloz. [설명: 두쵸(Duccio di Buoninsegna, 1255/60경–1318/9경) 이탈리아 화가 「The Calling of the Apostles Peter and Andrew (from the Maestà)」(1308-1311경)]
도판 그림(225, 349) : 메르시에(Jacques Mercier), Visages des rouleaux magiques éthiopiens, d’après les documents de Jacques Mercier. [메르시에(Jacques Mercier, 1943-) 작가, 벨기에 TV 제작자.]
- Mur blac, trou noir. - Machine abstraite de Visagéité - Corps, tête et visage. - Visage et paysage. - Le roman courtois. - Théorèmes de déterritoralisation. - Fonctions sociales du visage. - Le visage et le Christ. - Les deux figures du visage: face et profil, le détournement. - Défaire le visage.
흰벽, 검은 구멍 –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 - 몸체, 머리, 얼굴 – 얼굴과 풍경[경치, 풍광] - 기사도 연애담[궁정 연애담] - 탈영토적 정리(定理) - 얼굴의 사회적 기능들 – 얼굴과 크리스트 – 얼굴의 두 형태: 앞면과 옆면, 외면 - 얼굴 해체하기
7장 0년 : 얼굴성 319 / Année Zero: Visagéité
§07.01. 흰벽, 검은 구멍 321 - Mur blac, trou noir.
우리는 두 개의 축을, 의미생성(la signifiance)과 주체화(la subjectivation)의 축을 만났다. 이것들은 매우 다른 두 개의 기호계, 또는 두 개의 지층이다. 하지만 의미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 안 된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 (321) [두 개의 지층이지만 마치 겉면과 안면이라는 앞뒤와 유사한다. 둘은 대칭도 아니고 이원론도 아니다. 심층이 표면에 솟아나며 그려지려면 화폭과 같은 흰 면이 있어야 하고,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달하려면 수신하려는 빈 구멍같은 표면이 있어야 한다. 전자의 능동성과 후자의 수동성이 양면이 셈이다. (50MMC)]
하지만 얼굴, 즉 흰 벽-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는 흥미롭다. 흰 뺨의 큰 얼굴, 검은 구멍 같은 눈이 뚫린 백묵 같은 얼굴. 어릿광대의 머리, 하얀 어릿광대, 달의 피에로, 죽음의 천사, 수의를 입은 성자, 얼굴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의 외부를 둘러싼 표피가 아니다. ... 어린이, 여자, 가족의 어머니, 남자, 아버지, 우두머리, 교사, 경찰은 일반적인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 작용하는 특질들이 특별한 얼굴성의 특질들에 연동되어 있는 언어를 말한다. 본래 얼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을 빈도나 확률의 지대들을 규정하고, 미리 적합하지 않은 표현들과 연결 접속들을 적합한 기표작용으로 중화하는 장을 결정한다. (321-322)
§07.02.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 322 - Machine abstraite de Visagéité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만 할까? 기표의 벽, 주체화의 구멍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얼굴이 아니다. 얼굴, 적어도 구체적인 얼굴은 흰 벽 위에서 모호하게 그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검은 구멍 안에서 모호하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검은 구멍 안에서 모호하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에서 얼굴의 글로즈없(gros plan)은 두 개의 극으로써 얼굴이 빛을 반사하도록 하거나, 반대로 얼굴이 “무자비한 어둠 속에” 잠길 때까지 그것의 그림자를 부각시킨다. (322)
하지만 구체적인 얼굴은 완전히 다 만들어진 채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난다. 이 기계는 기표에 흰 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323) [양태로서 얼굴모양은 추상적인 기계인 셈인데, 70억 인구의 추상기계는 차이가 있다. (50RKD)]
323추상적인 기계는 ..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지 않을 때 출몰한다. 카프카의 단편 소설인 블룸펠트(Blumfeld)(1915)를 보자. 저녁에 집에 돌아온 한 독신남자가 두 개의 작은 탁구공들이 ... (323)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와 니진스키(Vaslav Nizinskii, Wacław Niżyński, 1890–1950)의 멋진 발레에서도 작은 테니스공 하나가 황혼녘의 장면에서 튀어 오른다. (323)
324미국의 심리학은 특히 어린이와 어머니의 관계, 눈 대 눈 접촉(eye-to-eye contact)에서 얼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네 개의 눈이 있는 기계라고나 할까? (324)
1) 손, 입, 피부 또는 대체적으로 시각적인, 이른바 자기 수용성(proprioception)의 감각들은 가슴-입의 유년기적 관계와 연관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수면에 관한 아이저코워(Otto Isakower, 1899-1972)의 연구. (324) [아이저코워(Otto Isakower, 1899-1972), 비엔나 태생, 미국 정신과의사.]
2) 일반적으로 시각적인 내용들로 덮여 있지만, 꿈의 내용으로 자기 수용성 감각들 밖에 없을 때에는 백색으로 남아 있는 꿈의 백색 스크린(un ecran blanc)에 관한 르윈의 발견(Bertram D. Lewin, 1896-1971) (324-325) - [르윈(Bertram D. Lewin, 1896-1971), 미국 정신과 의사]
3) 이미 백색 스크린은 아이의 촉각적 감각이나 접촉의 대상으로 가슴 그자체를 표상한다기보다는 가슴을 잡기 위해 접근해가야 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나타나게 하는, 최소의 거리를 함축하는 시각적 지각물이라는 스피츠(René Spitz) 해석 (325) [스피츠(René Arpad Spitz, 1887-1974) 헝가리 출신 미국 정신분석학자.]
§07.03. 몸체, 머리, 얼굴 325 - Corps, tête et visage.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안할 수 있다. 얼굴은 구멍 표현들, 구멍 뚫린 표면이라는 체계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체계는 (자가 수용적인) 몸체의 고유한 공동-입체의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머리는 몸체에 포함되어 있지만 얼굴이 아니다. 얼굴은 표면이다. ... 얼굴은 하나의 지도이다. (325)
... 요컨대 머리를 포함하여 몸체가 탈코드화되고 <얼굴>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의해 덧코드화 되어야만 할 때 얼굴이 생산된다. 326
.. 입과 코, 특히 두 눈은 몸체의 다른 모든 입체들과 다른 모든 공동들을 불러내지 않으면 구멍 뚫린 표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섭고도 휘황한, 모로 박사(Dr. Moreau)에게 걸맞는 작업이다. 손, 가슴, 배, 자지와 질, 엉덩이, 다리와 발은 얼굴화 될 것이다. 페티시즘, 색정광 등은 이 얼굴화의 과정과 떼어놓을 수 없다.(326)
얼굴화는 닮음(=유사성)이 아니라 근거들의 질서(ordre des raisons)에 의해 작동한다. 온 몸체가 구멍 뚫린 표면을 통과하도록 하는 것은 훨씬 더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인데, 거기에서는 얼굴이 모델이나 이미지의 역할이 아니라 모든 탈코드화된 부분들을 위한 덧코드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성적인 것으로 남으며, 어떤 승화도 없다. 단지 새로운 좌표들이 있을 뿐이다. (326) [부분(아톰)들을 덮는 표면으로서 얼굴은 부분이 아니며, 백색 얼굴은 그 위에 그릴 수 있는(도표화 할 수 있는) 좌표이다. 그래서 알의 표면에 좌표를 그릴 수 있다고 한다. (50SKH)]
얼굴에는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비인격적] 어떤 것마저 있다. 얼굴이 어떤 문턱, 즉 클로즈업(gros plan)[close-up], 과장된 확대, 엉뚱한 표현 등에서부터 시작할 때에만 비인간적이 된다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인간 안의 비인간적인 것, 얼굴은 처음부터 그렇다. .. 이 이상한 되기는 얼rnf성의 특징들 자체가 결국 얼굴의 조직화에서 벗어나게 하고, 더 이상 얼굴, 지평선으로 뻗어가는 주근깨,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우리가 서로 바라보거나 가로질러가는 눈들 등에 의해 포섭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 그리하여 나는 나의 귀, 나의 눈, 나의 입술을 닫는다.” CsO. 그렇다, 얼굴은 파괴되고 망가지는 한 거대한 미래를 지닌다. 탈기표작용으로 향하는, 탈주체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것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327-328)
328머리-몸체의 체계에서 얼굴의 체계로 가는 것에는 진화도 없고 발생의 단계들도 없다. 현상학적 위치들도 없다. 또한 구조적이며 조직화 또는 구조화하는 조직화를 동반하는 부분 대상들의 통합도 없다. 얼굴성이라는 이 고유한 기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미 그곳에 있을 또는 그곳에 있게끔 이끌릴 주체에 대한 지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328)
얼굴의 문헌에서 시선에 대한 사르트르(Sartre, 1905-1980)의 텍스트와 거울에 대한 라캉(Lacan, 1901-1981)의 텍스트는 현상학의 장에서 반성(réfléchie)되거나 구조주의의 장에서 균열된 주체성, 인간성의 형식을 지시한다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선은 시선 없는 눈, 얼굴성의 검은 구멍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 벽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328) [시선과 거울은 부차적이다. 시선에서 구멍이 거울에서 흰벽이 기본(1차적)이다. 유물론의 견해가 먼저이고 다음에 관념 또는 기표를 다룰 수 있다. (50SKH)]
사람들(on)은 손, 가슴, 입, 눈 등 부분대상의 어떤 목록이든지 만들 수 있다. 저들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nous)는 몸체 없는 기관(des organes sans corps), 조각난 몸체를 고려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우선 기관 없는 몸체(un corps sans organes)를 고려해야 한다. 기관없는 몸체은 서로 다른 강렬한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데, 이 운동들은 문제가 되는 기관의 본성과 위치를 결정하며, 이 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또는 유기체를 그저 하나의 부분으로 삼는 지층들의 체계로 만들 것이다. (210, 328-329) [여기서 전자는 정신분석학의 라깡을 후자는 들뢰즈와 가타리 견해이다.]
§07.04. 얼굴과 풍경[경치, 풍광] 329 - Visage et paysage.
329이 운동들은 탈영토화의 운동들이다. 동물의 것이건 인간의 것이건 유기체를 몸체로 “만드는” 것은 이 운동들이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잡는 손은 단지 앞발뿐만 아니라 장소 이동에 쓰이는 손의 상대적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 직립한 여성의 가슴은 동물의 유선의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바깥으로 점막이 젖혀진 입술을 갖춘 아이의 입은 동물의 주둥이나 입의 탈영토화를 표시한다. 그리고 가슴-입술, 각각의 상대방에 대해 상관물의 역할을 한다. (329)
인간의 머리는 그 자체로 탈영토화된 환경(스텝은 삼림 환경과 대립되는 최초의 “세계”이다)으로서의 세계의 조직화를 상관물로 갖는 동시에, 동물에 대하여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그러나 얼굴은, 이제 더 느리긴 하지만 한층 더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그것은 절대적 영토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얼굴은 아주 중요한 상관물인 풍경을 가진다. 풍경은 환경일 뿐만 아니라 탈영토화된 세계이다. 이 “최상”의 층위에서 풍경-얼굴의 상관관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330)
기독교적 교육은 얼굴성과 풍경성에 대한 정신적 통제를 동시에 수행한다. 얼굴과 풍경의 상보성 안에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 구성하라, 그것들을 채색하라, 그것들을 완성하라, 그것들을 정리하라. 얼굴과 풍경의 교본들은 엄격한 훈육의 교육학을 형성하고, 예술이 교수법에 영감을 주듯 그것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330)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을 무엇보다 하나의 풍경으로 취급한다. 클로즈업은 검은 구멍과 흰벽, 스크린과 카메라, 이런 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미 다른 예술들, 건축, 회화, 심지어 소설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너의 어머니는 풍경인가 얼굴인가? 얼굴인가 공장인가?(고다르) 탐험되지 않은 미지의 풍경을 감싸고 있지 않는 얼굴은 없고, 사랑받거나 꿈꾸어진 얼굴이 서식하고 있지 않은 풍경, 다가오고 있거나 이미 지나간 얼굴을 전개시키지 않는 풍경도 없다. (330-331)
§07.05. 기사도 연애담[궁정 연애담] 331 - Le roman courtois.
소설 – 페르스발은 야생 기러기 떼가 날아올라 눈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보았다. (....) 매가 이 무리에서 버려진 기러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매는 그것을 덮쳤고, 너무나 세게 부딪혀, 기러기는 떨어졌다. 그리고 페르스발은 발밑의 기러기가 놓여 있는 눈과 아직도 선명한 피를 보았다. ..... 이 선명한 색깔은 연인의 얼굴색깔처럼 보였다. 그 생각할수록 모든 것을 망각했다. ... (...) 우리는 말 위에 똑바로 앉아서 잠든 기사를 보았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있다. 얼굴과 풍경의 고유한 잉여, 얼굴-풍경의 눈처럼 흰벽, 매의 검은 구멍 또는 벽 위에 흩어진 세 방울의 검은 구멍. .. 기사는 검은 구멍을 가로지르고 흰 벽을 꿰뚫고 얼굴을 망가뜨리며 언제나 더 멀리 운동을 밀어붙일 수 있지 않을까? (331-332)
동키호테에서 환영과 관념의 도주와 주인공의 최면적이고 강경증적인 상태를 환기시키면서 기사도 소설의 종말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베케트의 소설들에거 검은 구멍들과 인물들의 탈영토화의 선과 몰로이(Molloy)나 무명씨(Innommbable)의 분열증적 산책, 그들의 이름과 회상과 계획의 상실을 환기시키면서 소설 일반의 종말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332) 소설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자기가 찾는 것과 행하는 것도 모르는 인물들, 즉 기억상실증, 운동조실증, 긴장증에 걸린 길 잃은 인물들의 모험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해왔다. 소설 장르와 극 또는 서사시 장르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다(서사시나 연국의 주인공들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망상이나 망각 등에 빠진다). (332)
클레브 공작부인(La princesse de Clèves, 1678)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이성, 부재나 “휴식” 상태, 인물들을 덮치는 잠으로 인해 소설인 것이다. (333)
궁정 소설의 기사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기의 이름, 자기가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절대적인 탈영토화의 선을 추적하면서, 또한 그 선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고, 검은 구멍들 앞에서 멈추고, 그 안으로 빠져버린다. “그는 기사도와 모험을 기대했다.” 크레티앙 드 트루아를 어떤 페이지든 상관없이 펼쳐보라. 당신은 말 위에 앉아 창에 기대 채, 기다리고, 풍경에서 자신의 연인의 얼굴을 보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긴장증에 걸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33) [랑슬로(Lancelot)와 여왕의 이야기 도 마찬가지]
---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 [이탈리아의 화가로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했다.]
§07.06. 탈영토적 정리(定理) 334 - Théorèmes de déterritoralisation.
* 탈영토화의 정리들 또는 기계적 명제들 334
제1정리: 혼자서는 결코 탈영토화될 수 없다. 적어도 두 개의 항, 손-사용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 이로부터 손과 도구, 입과 가슴, 얼굴과 풍경 사이의 수평적이고 상보적인 재영토화의 모든 체계가 나온다. (334) [이 세 가지는 기술, 애정(정념), 그리고 주체화 문제이다. 셋째 주체화가 대상으로부터 탈영토화 한다는 것은 풍경이란 타자로부터 들어오는 고른 면 만으로서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들어오는 구멍과 안면이라는 벽도 있다는 것일 것이다. (50SLB)]
제2정리: 탈영토화의 두 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가장 빠른 것은 자신의 강렬함을 가장 느린 것의 강렬함과 연결접속 시키고, 강렬함으로서의 가장 느린 것은 가장 빠른 것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층이나 다른 판 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입-가슴의 관계는 이미 얼굴성의 판 위로 인도된다. (334)
제3정리: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은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이로 향하는 수직적인 재영토와의 둘째 체계가 나타난다. 입뿐만이 아니라,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얼굴화”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탈영토화들(탈코드화)은 이런 저런 점에서 절대적인 탈영토화(덧코드화)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 (334)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이나 얼굴의 한 요소뿐만 아니라 칼, 찻잔, 시계, 주전자도 대상으로 한다.그리하여 그리피스(Griffith)에게처럼, 주전자가 나를 바라본다. 따라서 디킨즈(Dickens)가 난로가의 귀뚜라미의 첫 문장에서 “...을 시작한 것은 주전자이다”라고 썼듯, 소설의 클로즈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가. 그리고 회화, 그 안의 정물은 어떻게 풍경-얼굴이 되는가. 보나르(Bonard)와 뷔야르(Vuillard)에게서 물품, 식탁보 위의 컵, 찻주전자는 어떻게 얼굴화 되는가. (335)
제4정리: 따라서 추상적인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얼굴 안뿐만 아니라 몸체의 부분들, 의복들, 그것이 (유사성의 조직화가 아니라) 이성의 질서에 따라 얼굴화하는 대상들 안에서 다양한 정도로 실행된다. (335-336)
§07.07. 얼굴의 사회적 기능들 336. Fonctions sociales du visage. 215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언제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언제 시동이 걸리는가? (336)
반대로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고,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그렇지 않다. 원시사회를 고려해 보면, 얼굴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없다. 원시사회의 기호계는 ..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다성적(polyvoque)이고 몸체적이다. (215, 336) [참조: <우선 [1]전-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는데, 이른바 원시적(primitive) 기호계가 그것이다. 이것은 기호들 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들(des encodages naturels)에 훨씬 더 가깝다. 여기서는 유일한 표현의 실체인 얼굴성으로의 환원을 찾아 볼 수 없다. ... 예컨대 몸체성(corporéité), 몸짓성(gestualité), 리듬, 춤, 제의(rituel) 이라는 형식들은 이질적인 것 안에서 음성적 형식과 공존한다. (147 228):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
예컨대 리조(Jacques Lizot, 1938-)는 “의무, 의례, 일상생활의 분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에 있어서 거의 완벽하고, (...) 낯설고 상상할 수 없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한 장례식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음란한 농담을 한다. 또는 한 인디언이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는 피리를 고친다. 또는 모든 사람이 잠이 든다. (336)
“원시인”들은 더 인간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정신적인 머리를 지닐 수 있다. 그들은 얼굴이 없고 얼굴을 가질 필요가 없다. (216, 337) [구석기 시대는 더 감성적일 수 있다. 머리도 얼굴도 아직 탈영토화가 덜 되었기에?(50SKH)]
337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하다. 얼굴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백인(homme blanc)의 얼굴도 아니다. 그것은 희고 큰 뺨과 눈의 검은 구멍이 있는 백색인(Homme blanc) 그 자체이다. 얼굴은 크리스트이다. 얼굴은 전형적인 유럽인이며,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가 뭔가 관능적인 인간이라 부른 것, 요컨대 평범한 색정광(l’Erotomanie)이다(19세기의 정신과 의사들이 색정광은 이상발정(nymphomanie, 색정과다증)와는 달리 종종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색정광은 얼굴과 얼굴화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얼굴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facies totius universi)이다. 슈퍼스타 예수. 그는 온몸의 얼굴화를 발명하고 그것을 도처에 전달한다(클로즈업 된 잔다크 수난). 그것은 일대일 대응화, 이원화라는 기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216-217, 337-338)
첫째 양상에 따르면 검은 구멍은 지칭의 일반적 표면으로서의 벽 또는 흰 스크린 위에서 이동하는 중앙 컴퓨터, 크리스트, 제3의 눈으로 작용한다. .. 스크린 위에서의 검은 구멍의 자리바꿈(déplacement), 지칭의 표면위에서의 제3의 눈의 여정은 둘씩 연결된 기본 얼굴인 네 개의 눈이 달린 기계처럼 이분법이나 나무성을 구성한다. 여선생과 학생의 얼굴,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 노동자와 사장의 얼굴, 경찰과 시민의 얼굴, 피고와 판사의 얼굴(“판사는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눈은 지평이 없었다...”). ... 우리는 얼굴을 소유한다기보다는 얼굴 안에서 흐른다. (217, 338-339) [어느 영화를 예로 든 것 같은데 주가 없다.]
339다른[둘째] 양상을 따르면,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선별적 반응이나 선택의 역할을 한다. 어떤 구체적인 얼굴이 주어지면 기계는 기본적인 얼굴 단위들에 따라 그것이 통과할 것인지 아닌지, 갈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다. 이항적 관계는 이번에는 “아니다-그렇다(oui-non)”의 유형이다. (217, 339)
그러나 그것은[어떤 얼굴은] [사회적 기능에서] 단지 특정한 선택의 층위에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대일 대응관계를 벗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일탈 유형별 격차들(écarts-types de dévience)울 순차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첫째 선택에서 받아들여진 것과 둘째, 셋째 둥의 선택에서만 용인된 것 사이에 이항관계를 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은 구멍은 여러 번 기능하는 동안 흰벽은 끊임없이 증가한다. 여교사는 미쳐버렸다. 그런데 광기는 n번째 선택에 적합한 얼굴이다(하지만 최종적 선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그러한 광기에 적합하지 않은 광인들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이다). (217-218, 339)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백색인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둘째나 셋째 범주의 인종들. 그들 역시 벽 위에 기입되어 있고 구멍에 의해 분포되어 있다. 그들은 기독교화, 즉 얼굴화되어야 한다. 백인의 자만인 유럽의 인종주의는 배제한다든가 누군가 “타자(un autre)”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원시 사회에서이다. (218, 340)
§07.08. 얼굴과 크리스트 341 - Le visage et le Christ.
341회화는 좀 더 즐거운 방식으로 얼굴-크리스트의 모든 자원을 이용했다. 검은 구멍-흰 벽으로 된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크리스트의 얼굴로써 모든 얼굴 단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일탈의 격차들을 생산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억제되지 않은 자유로써 회화의 환희(une jubilation)[원래 50년마다 오는 축제]가 있다. (218-219, 341)
다른 예들 중에서 하나만 보자. 풍경의 하얀 배경, 하늘의 검푸른 구멍 위에 연(鳶) 기계가 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빛살에 의해 성흔들은 성 프란체스코에게 보낸다. 성흔은 예수의 몸체의 이미지에 따라 성인의 몸체의 얼굴화를 작동시킨다. (219, 341)
정보이론은 [우선] 완전히 만들어져 있는 기표작용적 메시지들의 등질적인 집합인 척한다. 이 메시지들은 이미 일대일 대응 관계들 안의 요소들로 취해지든지 아니면 이 메시지들의 요소들은 그런 일대일 대응관계에 따라 한 메시지로부터 다른 메시지로 조직된다. 둘째로, 조합의 추첨은 요소들의 수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일정 수의 주체적인 이항적 선택들에 달려 있다. (219, 341-342) [정보이론(메시지 전달)의 주체화에서 선택을 손디와 로르샤흐까지 연결하는 것이 특이하다. (50SLC)]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된 기호계는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침입으로부터 특별히 보호될 필요가 있다. 심지어는 더 이상 외부는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론적 스크린과 그 요소들을 보호하는 벽을 이용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산적이고 디지털화되고 탈영토화된 요소들을 통해 진행되는 기표작용적 사슬들(des chaînes significates)을 구성할 수 있다. (219, 342)
모든 종류의 나무성들(arborescences)과 이분법들(dichotomies)을 그리는 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생산하는 얼굴들(les visages)이다. 나무성과 이분법이 없으면 기표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은 언어 안에서 그것들[나무성들과 이분법들]에게로 회귀하는(reviennent) 것들을 기능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얼굴의 이항성들과 일대일 대응성들은 언어, 언의 요소들, 언어의 주체들의 그것들[이항성들과 일대일 대응성들]과 동일하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그러나 전자들(얼굴의 것들)은 후자(언어의 것들)를 전제한다. (220, 343)
얼굴성의 기계는 기표와 주체의 부속장치(annexe)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표와 주체의 연결장치(connexe)이며, 기표와 주체를 조건 짓는다. ... 얼굴은 주체나 기표에게 연결장치이고, 그것들에 꼭 필요한 실체를 준다. 스존디(Szondi, 1893-1986) 테스트에서처럼 얼굴을 선택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자신의 주체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얼굴인 것이다.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1884-1922, 스위스 정신과의사) 테스트에서처럼 형상을 흰 구멍-검은 얼룩이나 검은 구멍-흰페이지로 해석하는 것은 기표가 아니다. 기표들을 프로그램하는 것이 바로 이 형상인 것이다. (220, 343)
우리는 다음 물음에 대한 답을 향해 진척을 보였다. 즉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언제나 실행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회 구성체에서나 실행되는 것도 아닐진대, 그것에 시동을 거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구성체들은 얼굴을 또한 풍경을 필요로 한다. (220, 343-344)
언어학이 동음이의어나 애매한 언표라는 문제와 언제나,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만나는 것은 우연(un hasard)일까? 언어학은 이런 문제를 이항적 환원들의 집합을 통해 다루는 것이다. 더욱 일반적으로, 어떤 다성성(polyvocité), 어떤 리좀의 특질도 지지될 수 없다. 달리고 놀고 춤추고 그리는 아이(un enfant)는 자신의 주의력을 언와 글에 집중시킬 수 없다. 그는 이제 결코 좋은 주체(bon sujet)는 아닐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기호계는 원시적 기호계들의 모든 다양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것이 잘 규정된 울타리 안에서 몇몇 견해들을 지키는 하겠지만. (221, 344) [원시적 영토화와 전제 영토화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게다가 언어에서, pitié란 18세기의 동정과 19세기의 연민은 다르다. 수난과 정열이 다르듯이. 다양체가 물질적 관계들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50SLC)]
345그렇지만 자신의 유일한 무기들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기호계들이 아니다. 새로운 내용들과 상호 전제를 이루면서, 자신의 결정된 표현의 형식으로서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권력 배치물들이다. 독재적 배치물이 없는 의미생성은 없고, 권위적 배치물이 없는 주체화도 없으며, 정확히 기표들에 의해 작용하며 영혼들 또는 주체들에게 행사되는 권력 배치물들이 없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도 없다. (220-221, 345)
이 [추상적] 기계는 얼굴성(vigagéité)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온몸과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몸체의 탈영토화는 얼굴 위에서의 재영토화를 내포한다. 몸체의 탈코드화는 얼굴에 의한 덧코드화를 내포한다. 몸체의 좌표들 또는 환경들의 붕괴는 풍경의 구성을 내포한다. (345)
따라서 가면은 얼굴 그 자체이며, 얼굴의 추상이거나 얼굴의 작동이다. [가면] 그 얼굴의 비인류성(Inhumanité). 그 얼굴은 결코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순서는 완전히 다르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구체적 배치물 -> 얼굴성, 즉 검은 구멍-흰벽의 추상적인 기계의 시동 -> 이 구멍 뚫린 표면 위에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새로운 기호계의 설치.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문제, 즉 그 얼굴과 그것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관계, 그리고 얼굴과 이 사회적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배치물들의 관계를 계속 배타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가면의] 얼굴은 하나의 정치(une politique)이다. (222, 346) [요강공주의 가면의 얼굴은 프로포폴의 것이 아니라, 삼성의 전략기획실의 가면이었다. 인민 주체화의 가면(정치적 얼굴)은 이명박정부에 대항하는 촛불(리좀의 흐름)에서 요강공주를 무너뜨린 촛불이다. 8월 15일 시청광장에 극우파가 배워 갈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들의 가면은 별들과 태극기 혼합일 것이다. 예속은 여전할 것이다. (50SLC)]
346물론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의미생성과 주체화는 서로 다른 체제(원형의 방출과 절편적 선형성), 서로 다른 권력 장치(독재적 일반화된 노예 상태, 권위적인 소송-계약)를 가진 완전히 상이한 기호계라는 것을 보았다. .. [한편] 아시아인, 흑인 또는 인디언적인 의미생성의 독재적 구성체들이 있다. [다른 한편] 주체와 권위적 과정은 유대민족의 운명에서 가장 순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호계들의 차이가 무엇이든 이것들은 그래도 역시 사실상 혼합체(un mixte)를 형성하며, 이 혼합체의 층위에서조차 자신의 제국주의, 다시 말해 다른 모든 기호계들을 으스러뜨리는 공통된 거만함을 정당화한다. 주체성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의미생성은 없다. 기표의 잔재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 주체화는 없다. (222-223, 346-347).
우리가 얼굴성의 기계에 크리스트의 0년과 <백색인(l’Homme blanc)>의 역사적 전개를 부여함으로써 특정한 날짜를 지정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혼합이 더 이상 재절단이나 교차이기를 멈추고, 마치 하얀 물 안의 소량의 검붉은 포도주처럼 각각의 요소가 다른 요소에 배어드는 완전한 침투가 되기 위해서이다. (223, 347) [크리스트 0년은 서양인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유물론자이라고 하더라도... 언어와 알파벳 문자도 그러하고(아니 이집트가 있잖아)... 그런데 극한의 얼굴들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붉은 포도주의 예를 시와 같다.]
따라서 얼굴성, 또는 검은 구멍-흰 벽 체계가 완전히 확장되는 것은 바로 여기[혼합체]에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혼합체의 상태와 요소들의 가변적 비율을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 상태에서건 기독 아닌 상태에서건 한 요소는 다른 요소들을 제압할 수 있고, 다소간 강력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극한-얼굴들(des visages limites)을 정의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얼굴의 단위들(les unités)과 혼동되지 말아야 하고 사전에 정의된 얼굴의 격차들(les écarts)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223, 347)
348I. 여기서 검은 구멍은 흰 벽 위에 있다. 이것은 하나의 단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검은 구멍은 벽 위에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이항화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검은 구명, 네 개의 검은 구명 n개의 검은 구멍들이 눈들처럼 분배된다. 얼굴성은 언제나 하나의 다양체이다. 에른스트(Ernst, 1891–1976)의 회화, 알로이즈(Aloïse, 1886–1964)나 뵐풀리(Wölfli, 1864–1930)의 데생에서처럼 우리는 눈들이나 검은 구멍들을 풍경에 서식시킬 것이다. 흰 벽 위에다 우리는 구명의 가장자리를 두르는 원들을 기입한다. (223, 348)
.. 가장 순수한 경우는 아마도 마귀를 표상하는 에티오피아의 민속 두루마리들 안에 있을 것이다. 즉 양피지나 거기에 그려진 각자거나 둥근 얼굴의 흰 표면 위에 있는 두 개의 검은 구멍. 그러나 이 검은 구멍들은 퍼져나가고 재생산되며 잉여를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둘째 원을 가장자리로 두를 때마다 새로운 검은 구멍을 구성하고 그 것에 눈을 찍는 셈이다. (223-224, 348) [다음 쪽에 나오는 둘째와 셋째 그림을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바로 이어진다] 커지는 만큼 갇히는 표면의 포획효과. 그것은 기표작용적인 독재걱 얼굴, 그 얼굴의 고유한 배가(倍加), 증식, 빈도의 잉여이다. 눈들의 배가. 독재자나 그의 대표자들(representation)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정면에서 본 얼굴, 그 자신이 본다기보다는 검은 구멍들에 의해 덥썩 낚아채인 주체에 의해 보여진 얼굴이다. 그것은 운명의, 즉 지상(地上)의 운명, 객관적인 기표작용적 운명의 모습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이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얼굴, 얼굴의 요소 또는 예견하는 시간적 가치를 지닌 얼굴화 된 대상(추시계의 바늘들은 무언가를 고지한다)에 대한 그리피스의 클로즈업. (224, 348-349) [349쪽의 넷째와 다섯째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그림: 지상의 기표작용적인 전제군주적 얼굴 - [다섯 가지 그림] [1] 단순한 기계, [2] 가장자리의 배가라는 효과를 가진 기계, [3] 네 개의 눈이 있는 기계 [4] [5] 배가된 가장자리에 의한 눈들의 증식[프락탈을 연상하게 한다]. (225, 349)
§07.09. 얼굴의 두 형태: 앞면과 옆면, 외면 350 - Les deux figures du visage: face et profil, le détournement. 224
350II. 반대로, 저기에서 흰 벽은 검은 구멍을 향해 가는 은실처럼 풀려 나온다. 풍경이 구멍의 주위로 최후의 끄트머리까지 감기는 실이 되자마자 하나의 검은 구멍은 모든 검은 구멍, 모든 눈, 모든 얼굴을 “볏처럼 모아 세운다.” 그것은 언제나 다양체이다[독신기계]. 하지만 이것은 운명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이고 반성적인(réfléchi) 운명의 또 다른 형상이다. 이것은 얼굴, 또는 바다의 풍경이다[커플기계]. 그것은 하늘과 물, 또는 땅과 물의 분리선을 따라간다. 이 권위적인 얼굴은 옆얼굴(profil)이며, 검은 구멍을 향해 풀려 나간다. 이 두 얼굴은 서로 마주보지만 관찰자에게는 옆얼굴만 보여서, 그것들의 결합에는 이미 무제한적인 분리가 표시되어 있다. 또는 그것은 배반당해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얼굴들일 수도 있다. 트리스탄, 이졸데, 이졸데, 트리스탄, 배반과 죽음의 검은 구멍까지 그들을 밀어 넣는 작은 배에 있는, 의식과 열정의 얼굴성, 공명 또는 커플화의 잉여. (350)
.. 그리피스의 클로즈업에 맞서는 아이젠슈타인(Eisenstein 1898-1948)의 클로즈업(전함 포템킨(Cuirassé Potemkine, 1925)의 클로즈업에서 슬픔 또는 분노의 강렬한 상승). 여기에서도 또한 얼굴의 두 한계-형상들 사이에 모든 조합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파브스트(Pabst)의 룰루(Lulu)에서 쫓겨난 룰루의 독재적인 얼굴은 빵 자르는 칼의 이미지, 살인을 알리는 예시적 가치의 이미지와 연결접속 된다. 그러나 또한 살인마(Jack l'Eenttreur)의 권위적 얼굴은 그를 칼 쪽으로 그리고 룰루의 살해로 이끌어 가는 모든 강렬함들의 단계들 통과한다. (350-351)
그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의한)바다의 주체적인 권위적 얼굴: [세 가지 그림이 있다.] 첫째, 독신 기계 [옆얼굴 하나가 - 저자들의 설명과 달리 - 검은 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듯이 보인다.] 둘째, 커플기계 [양쪽에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양쪽의 옆얼굴은 각각 여성과 남성이다. 셋째, 복합적 기계. 1) 음악성의 선과 6) 열정의 선, 2) 회화성의 선과 5) 의식의 선, 3) 풍경성의 선과 4) 얼굴성의 선 등.. [세 겹으로 둘러싸인 중심의 감겨진 구멍이 있다. 구멍이라기보다 (엉긴)덩이로서 구멍(다양체)일 것이다. 복합기계는 사회성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 위한 것 같다.](226, 351)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두 한계-형상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언급할 수 있다. 한편으로 흰 벽, 희고 큰 뺨들이 기표의 실체적 요소라 할지라도, 검은 구멍, 눈들이 주체성의 반성적 요소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들은 늘 함께 간다. ... 다른 한편으로 어떤 경우에건 검은 구멍은 본질적으로 가장자리가 둘려있고, 심지어는 덧-가장자리가 둘려 있기도(sur-bordé)하다. 가장 자리는 벽의 표면을 증가시키거나 선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351-352)
그리고 검은 구멍은 언제나 가장자리의 내부에 있으며, 눈들은 언제나 구멍의 내부에 있다. 검은 구멍 안에 있을수록 더욱 잘 보는 죽은 눈들. 이 공통적인 특성들은 얼굴의 두 형상들의 극한에서-차이(la différence-limite)를 볼 수 없게 하지 않으며, 어느 한 형상이 혼합 기호계 안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게 하는 비율들을 볼 수 없게 하지 않는다. 즉 지상의 기표작용적인 독재적 얼굴과 바다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권위적 얼굴(사막은 또한 대지의 바다일 것이다)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운명의 두 형상, 얼굴성 기계의 두 상태. 장 파리(Jean Paris, 1926-2001)는 회화에서 이 극을 - 독재자적 예수에서 열정적 예수에 걸친 - 의 실천을 잘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비잔틴의 모자이크에서처럼 금빛 배경 위에 눈들의 검은 구멍이 있고, 앞 쪽으로 온 깊이가 투영된, 정명에서 본 예수의 얼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15세기(Quanttrocento)의 화폭에서처럼 다양한 선들을 그리면서 그 자체에 깊이를 통합하는 비스듬한 시선들이 있는, 사분의 삼 정도나 옆얼굴로 교차되거나 외면한 얼굴들이 있다. (226-227, 352-353)
(이행과 혼합에 대해 아무 것이나 하나 예를 들 수 있는데, 가령 물가 풍경 위에 그려진 두치오(Duccio, 1255/60경–1318/9경)의 「사도들을 부르심」을 보면 둘째 공식은 이미 크리스트와 첫째 어부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둘째 어부는 비잔틴적 코드 안에 사로잡힌 채 남아있다.) (353)
353스완의 사랑. 프루스트는 얼굴, 풍경, 회화, 음악 등을 공명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스완과 오데트의 이야기에서 세 번. (MP 227 353)
우선, 전적인 기표작용적 배치가 설립된다. 희거나 노란 색의 넓은 뺨을 지닌 오데트의 얼굴, 그리고 검은 구멍 같은 눈. 그러나 이 얼굴 자체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똑같이 벽위에 배치된 다른 것들을 지시한다. (227 353)
해석들의 지시작용 안에서 이 모든 의미 생성의 배치는 열정적이고 주체적인 둘째 계기를 준비하고, 여기에서 스완의 질투, 호소망상, 색정광이 전개될 것이다. 이제 오데트의 얼굴은 단 하나의 검은 구멍, 즉 스완의 “열정”의 구멍 쪽으로 질주하는 선 위에서 뻗어나간다.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 등의 다른 선들도 이 긴장증의 구멍 쪽으로 서둘러 가고, 그 주위를 감싸면서 몇 번이고 그것의 가장자리를 두른다. (353)
§07.10. 얼굴 해체하기 354 Défaire le visage. 228
하지만 셋째 순간, 자신의 오랜 열정에서 벗어났을 때 스완은 한 파티에서 가서 우선 하인들과 손님들의 얼굴이 자율적인 미적 특질들(traits esthétiques autonomes)로 해체되는 것을 본다. (228, 354)
화자는 자신의 마들렌느, 즉 잉여, 비자발적 회상의 검은 구멍을 씹는다. 그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가 빠져나와야 하는, 탈출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 그러나 그는 예술을 통해서,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거기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224, 354)
검은 구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어떻게 벽을 뚫을 것인가? 어떻게 얼굴을 해체시킬 것인가? 프랑스 소설이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이것은 프랑스 소설이 하는 일이 아니다. (224, 354)
프랑스 소설은 심히 염세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삶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삶의 비판자”이다. 프랑스 소설은 인물들을 구멍 속으로 쑤셔넣고, 그들이 벽에서 튀어 오르게 한다. 프랑스 소설은 조직화된 여행들과 예술에 의한 구원만을 착상해낸다. 그것은 여전히 가톨릭적 구원, 다시 말해 영원성에 의한 구원이다. 프랑스 소설은 선들, 능동적 도주선이나 긍정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점을 찍느라 시간을 보낸다. 영미 소설은 전혀 다르다. “떠나라, 떠나라, 나가라! …지평선을 가로질러라(traverser) …”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에서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에서 밀러(Henry Miller, 1891-1980)까지, 가로지르고 빠져 나오고 관통하고, 점 말고 선을 그리라는 동일한 문제가 울려 퍼진다. (MP 228, 354-355) - [traverser의 의미가 에피쿠로스의 자유를 위한 형성으로서 빗금(déclinaison)이란 의미보다, 현상의 표면에서 활동의 능동성을 강조한 것이다.]
영미 소설가들은 기표의 벽을 관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었다. 크리스트 이후로, 크리스트를 통해 그것을 시작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 자신도 가로지르기(traversée)와 도약(saut)에 실패했다. (MP 229 356) [유일신앙 종교 속에서 기표의 관통은 내가보기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벽을 뒤로 물릴 수 있을 뿐이다. 기표를 기만과 미신으로 치부해야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50SKH)]
벽을 통과하기, 중국인들은 아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댓가로? 동물-되기, 꽃이나 바위-되기를 댓가로, 또는 이상한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사랑하기와 하나일 수밖에 없는 냉혹하게-되기(devenir-dur)를 댓가로. 이것은 설사 제자리에서 일지라도 속도의 문제이다. 이것은 또한 얼굴을 해체하기 또는 밀러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눈을, 눈 안을 바라보지 않기, 헤엄쳐 눈을 가로지르고, 자기 몸을 늘 더 큰 속도로 움직이는 빛살로 만들기인가? 물론 여기에는 예술, 최고의 예술의 모든 자원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글의 모든 선, 회화성의 모든 선, 음악성의 모든 선 등이 있어야만 한다. (229, 356).
왜냐하면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글(l’écriture)을 통해서이고,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색(la couleur)에 의해서이고, 냉혹하고 기억이 없게 되는 동시에 동물이 되고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 즉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음악(la musique)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목적(fin, 끝)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les lignes de vie)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229-230, 356-357) [동물되기가 글쓰기라는 것은 좀 이상한데... 밀러의 예인가보다. 카프카의 벌레되기(변신)이라든지. ]
다시 말해 예술은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닌 이 모든 실재적 생성들, 예술 안으로 도주하는 것, 예술 안으로 피신하는 것에 있지 않은 이 모든 능동적인 도주들[탈주들], 예술 위에서 재영토화 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탈기표작용적인 것, 탈주체적인 것, 얼굴-없음의 영역 쪽으로 데려갈 이 긍정적 탈영토화들인 삶의 선들(les lignes de vie)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230, 357) [크리스트-0년의 얼굴이 아닌 삶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사는 것이먼저고 철학은 다음이다. ]
357얼굴을 해체하기,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기의 위험이 있다. 분열증 환자가 얼굴, 자신의 얼굴과 타인들의 얼굴의 의미를, 풍경의 의미, 언어와 그것의 지배적인 기표작용들의 의미를 동시에 상실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일까? (230, 357)
경련이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얼굴의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얼굴성의 특징과 이 특징 위에서 갇히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그것의 도주선을 봉쇄하고 그것을 다시 조직화하는 얼굴 그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다(단속성 또는 발작성 경련과 강직성 또는 경직성 경련 사이의 의학적 구분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도주하려는 얼굴성의 특징의 우세, 후자의 경우에서는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하는 얼굴의 조직화의 우세를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얼굴 해체하기가 커다란 일인인 것은 이것이 단순한 경련의 역사라든가 아마추어나 탐지주의자의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 해체하기 역시도 정치의 하나이고, 실재적 생성들, 전적으로 잠행자-되기에 관여한다. (357)
분열분석의 프로그램과 슬로건은 이렇게 된다. 당신의 검은 구멍들과 흰 벽을 찾아라, 그것들을 인식하라, 당신의 얼굴들을 인식하라, 당신은 그것을 다른 식으로는 망가뜨리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식으로는 당신의 도주선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358)
358따라서 이제 다시 우리는 실천적 신중함들을 배가해야 한다. 우선 문제는 결코 <…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문제는 원시인들의 전-기표작용적이고 전-주체적인 기호계로 “되돌아가기”가 아니다. 우리는 흑인이나 인디언, 심지어 중국인인 척하는 데 언제나 실패할 것이다. (231, 358)
로렌스가 멜빌에게 유감 스러운 것은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얼굴, 눈과 지평선, 벽과 구멍을 가로지르는 법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잇었다는 점, 하지만 동시에 이 가로지름, 이 창조의 선을 “불가능한 회귀”, 티피(Typee)의 미개인들로의 회귀와 혼동했으며, 예술가로 머물면서 삶을 증오하는 방식,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는 보장된 방식과 혼동했다는 점이다. (“... 멜빌은 근본적으로 신비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였다. ...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총들에 집착했다. 나는 내 것들을 버린다. 나는 말하노니, 옛 총들은 썩게하라. 새것들을 구해서, 똑바로 쏘아라.”)(231, 358-359)
359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로지 신경증 환자만이, 또는 로렌스가 말하듯 “배교자”, 기만자만이 퇴행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기표의 하얀 벽, 주체성의 검은 구멍, 얼굴 기계는 막다른 골목이며, 우리 굴복과 예속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몸부림쳐야 할 곳은 그 위이다.(231 359) [심층에서 솟아나서 그 표면에서 살고 행동하고 죽는다]
오직 얼굴 한 가운데에서, 얼굴의 검은 구멍의 바닥에서, 하얀 벽 위에서만 우리는 새들처럼 얼굴성의 특징들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원시적인 머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특징들이 그 자체로 풍경에서 해방된 풍경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 되고, 각각의 코드로부터 해방된 회화성과 음악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되는 조합들을 발명할 수 있다. (232, 360)
화가들이 모든 의미에서, 모든 방향에서 크리스트의 얼굴 자체를 이용했을 때 얼마나 기뻣을까. 그 기쁨은 단지 그리려는 욕망의 기쁨만이 아닌 모든 욕망들의 기쁨이었으리라. 그리고 궁정 소설의 기사의 경우, 우리는 그의 긴장증이 그가 검은 구멍 깊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유래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여행을 위해 그를 거기서 빠져나오게 한 입자들에 그가 올라타고 달린다는 점에서 유래하는지 말할 수 있을까? 랑슬로에 비견되었던 로렌스는 이렇게 쓴다. “머리를 비운 채 기억 없이 혼자 있기. (....) 햇빛 비치는 모래 위에 있는 거무스름한 원주민처럼 혼자 있거나 없거나 있거나. (....) 멀리로, 멀리로, 마치 죽은 후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다른 행성 위에 착륙한 듯이. (....) 풍경?- 그는 풍경에 관해선 개념치 않았음. 인류? - 존재하지 않았음. 사유? - 돌처럼 물속으로 떨어졌음. 위대한, 매혹적 과거? - 바닷가에 던져진 부서지기 쉬운 반투명한 조개껍질처럼 얇게 달아빠져 부서지기 쉬움.” (232, 360)
361우리는 추상적인 기계의 서로 다른 두 상태를 본 셈이다. 때로는 그것은 단지 상대적인 탈영토화를 또는 절대적이지만 부정적인 채로 남아있는 탈영토화들을 보장하는 지층들 안에 잡혀있고, 그와 반대로 때로는 새로운 추상적인 기계들을 형성하는 힘으로써 “도표적인”기능,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가치를 그것에 부여하는 고른판 위에서 전개되었다. 때로 추상적인 기계는 얼굴성 기계로서, 의미 생성들과 주체화들 위에 나무성의 노드들과 소멸의 구멍들 위에 흐름들을 몰아간다. 그와 반대로 때로 추상적인 기계는 진정한 “탈얼굴화”의 수행자로서, 자신의 행로에서 지층들을 해체하고, 의미생성의 벽들을 관통하고, 주체화의 구멍들에서 분출하고, 진정한 리좀들을 위해 나무를 쓰러뜨리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선들과 창조적인 도주선들 위로 흐름들을 인도하는 일종의 자동유도장치(têtes chercheuse)들을 해방시킨다. (232-233, 361)
그러나 얼굴성에서 해방된 각각의 특징들은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에서 해방된 특징과 함께 리좀을 만든다. 그것은 부분대상들의 모임이 아니라 살아있는 블록, 줄기들의 연결접속이다.
362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자연스런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 할 필요가 없다. (233, 362) [타인의 시선이 나의 지옥이라는 사르트르나, 윤구병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고슴도치들이 서로 끌어안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50SKH)]
사실상 비인간성들만이 존재한다. 인간은 아주 상이한 본성들에 따라, 아주 상이한 속도로 아주 상이한 비인간성들로부터만 만들어진다. .. 얼굴 너머에 완전히 다른 비인간성(une tout autre inhumanité)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원시적인 머리의 비인간성이 아니다. (233, 362) [새로운 되기의 비인간성, 잡초되기, 나무되기, 고원되기, 아오지되기, 산(山)되기, 자연되기도 있을 것이다.(50SLC)] [- 그러면 본성(la nature)을 찾을라나? ]
잠행자(Devenir-Clandestin)가 되어라, 도처에서 리좀을 만들어라. 인간적이지 않은 삶의 경이를 창조하기 위하여. 내 사랑 얼굴이여, 마침내 자동유도장치가 되는 …. 선(禪)의 해[年], 오메가의 해(w의 해)…. 원시적인 머리, 크리스트-얼굴, 그리고 자동유도장치들, 이렇게 세 가지 상태에서 끝나야 하는가, 더는 없고? (234, 363)
(5:36, 50MMC) (13:2, 50SKH) (18:14, 50S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