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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혀를 재갈 먹임
<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가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키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불을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몸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오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도 다 길들AM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 3 : 1~12 ) >
우리는 지금 야고보서를 통해서 온전하여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보고 찾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겐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항목들을 통해서 지혜를 얻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은 혀를 재갈 물린다는 말인데 말을 조심한다는 뜻이다. 말을 조심한다는 말이 적합한 것은 아니다. 말을 잘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이나 의사나 이런 모든 것들을 전달하는 만능의 수단이다. 우리 인간이 표현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표현하는 기능에 있어서 말은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하면 표현이 되고 말을 못하면 그 사람이 표현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표현이 되지마나 말만큼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오해를 할 수 있다. 눈으로, 혹은 입으로도 표현되지만 오해될 수가 있다. 그러나 말은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말처럼 표현에 좋은 도구는 없다.
말은 못하는 벙어리들은 말 대신 수화를 통해서 의사를 표현한다. 말을 못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질이 좀 급하고 무뚝뚝하게 된다. 그러나 말을 충분히 하는 사람은 성질이 유순하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말을 늦게 하는 아이들은 대개 난폭하다. 자신의 의사 표현이 안되기 때문에 난폭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런데 말을 일찍 하는 아이들은 자기의 의사가 충분히 표현되기 때문에 대부분 순하다.
광주에 가면 벙어리 학교와 장님 학교가 큰 운동장을 쓰고 있는 곳이 있다. 그런데 아주 다르다. 벙어리 학교 아이들은 옷을 입을 때 색깔을 맞추어서 입으니까 칼라가 있다. 그리고 운동장에 나와서 체육시간이나 노는 시간에 보면 난폭하다. 말을 못하니까 행동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난폭하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쥐어박는다.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그런데 장님 학교 아이들은 칼라가 없다. 자기가 못 보니까 제 각기 입고 다닌다. 그런데 휴식 시간이 돌아오면 밖에 나오지 않고 각자 이야기를 하면서 논다. 어떤 아이는 웅변 연습을 하고 있고 어떤 아이는 연설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 다 말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사람은 표현을 해야 사는 동물이니까 무슨 방법으로든 표현을 해야 한다. 표현을 하지 않으면 자기가 답답해지니까 부드럽지 않은 방법으로 자기를 표현하게 된다. 자기 의사를 제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은 술을 잘 먹지 않는다. 그렇게 쓰고 맛도 없는 것을 무슨 맛으로 먹겠는가? 먹고 나면 속 버리지, 남에게 욕 얻어먹지, 집에 가면 마누라한테 칭찬 못 받지...이런 것을 왜 먹겠는가? 자기 의사 표현이 안되기 때문이다. 술을 좀 먹으면 좀 활발해져서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술을 먹게 된다.
사람은 표현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수화를 해서도 표현을 하고 술을 먹고라도 표현을 한다. 사실은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하나님도 표현이 안되시면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하나님도 표현이 안되시면 무뚝뚝하고 무서워지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도 말씀을 하시면 부드러워진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드럽지 않은가? (웃음) 항상 여러분에게 말을 해서 제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으니까 여러분에 대해서 스트레스가 없다. 그런데 만일,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여러분들 각자에 대해서 다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저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날 왜 못 알아줄까?'하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전 그런 생각이 없다. 내가 충분히 말을 다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를 다 알 줄로 알고 안심을 한다.
아마 하나님도 그러하실 것이다. 자기 자신이 표현이 안되면 하나님도 무서워진다. 그런데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표현되니까 하나님이 부드러워진다. 결정적으로는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표현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와 실재로 이 땅 위에 오시게 되셨다.
만일, 하나님이 표현되지 않았다면 은혜와 실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표현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보면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만유가 다 자신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다. 개를 키워봐도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쓴다. 자기가 표현하는 의사를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자기가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알아주면 그 사람을 싫어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표현을 했는데 뜻을 잘 알아주면 좋아지고 뜻을 못 알아들으면 싫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제가 의사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딴전을 피운다든지 못 알아듣는다든지, 안 알아 듣는다는지 하면 내가 싫어지는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인가?'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의사를 표현했는데 우리가 딴전 피우고, 옆 사람과 얘기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농담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이 싫어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일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난 내가 말할 때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한다. 안 그럴려고 해도 자연히 그렇게 된다. 누구든지 고루 다 좋아하고 사랑하려고 생각하지만 안 듣는 사람은 좋아지지 않더라는 말이다. 어쩔 수 없다. 하나님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제한한다는 것은 삶을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표현을 가로막는 것은 삶을 가로막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나 도덕주의 같은 것이 왜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가? 밥을 주지 않아서도 아니고 옷을 주지 않아서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도 잘 못해서 그렇지 잘 살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공산주의를 실천하는 위정자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 공산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패했지만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우리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가?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인 표현밖에는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밥이 부족하거나 가난해서 싫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표현이 가로막히고 말을 잘못하면 죽는다. 여기서는 어지간히 말해도 괜찮지만 거기서는 말을 잘못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가지 않는가? 그래서 싫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경제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싫다는 말은 경제주의자들이 하는 말이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표현을 막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표현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미국의 건국 목표는 '자유'였다.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 관문에 세워두었다. '우리는 자유가 목표이고 방법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 좋다. 미국에 가서 살아보면 미국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미국인은 다 이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들에게 자유를 보장해주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애국심이 저절로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얼마나 표현의 갈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도덕주의적인 사회에도 표현의 자유가 가로막혀있다. 그래서 거기서 자유를 찾으려고 하다보니까 오남용되어서 삼천포로 빠지게 되기도 한다.
표현에 있어서 말은 절대적인 도구이다. 그래서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다. 표현될 때 온전하게 표현되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내가 온전한 사람이지만 말은 삐뚤게 하니까 너희가 제대로 알아들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온전하다면 온전하게 표현해야한다. 표현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잘못되어있는데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람을 잘 아니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 번이지, 두 세 번씩 계속 그러면 그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표현 자체가 그 사람이 된다.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쁜 표현을 계속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은 나쁘게 남게된다.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이 안 그러니까 말은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가져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어떤 형제가 마음으로는 형제들을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욕만 한다면 자기 마음이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알려진 것은 나쁜 사람만 알려지게 되고 그 나쁜 사람이 그 사람자신이 된다.
내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말도 그렇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아이들한테 말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가령, 어른들끼리는 '죽인다'고 말해도 극단적인 표현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지 진짜로 죽인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죽여버린다'고 말하면 진짜로 칼을 가지고 와서 죽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순진하기 때문에 상처가 되어서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충주에 있는 이영수 형제가 일생동안 정신분열증으로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 영수 형제가 개구쟁이였는지 삼촌인가 누군가가 자기를 우물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재로 빠뜨리려고 했다기 보다 겁을 주려고 그랬겠지만 그것이 어린 영수 형제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우리 방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무슨 냄새가 나느냐고 자세히 물으니까 시골 우물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있는데 그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냄새와 무슨 연관이 있냐고 했더니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 때 놀라면서 받아들여졌던 그 냄새가 일생동안 냄새가 나는 것이다. 자기가 좋지 않으면 그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는 말이 아주 위험하다. 어른은 무슨 말은 해도 '저건 그 말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은 자기 아버지가 밭에 가는데 네다섯 살 때 따라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열 일곱에 자기를 낳아서인지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층층시하에 대가족 속에서 열 일곱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다. 내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나서 둘이 있으면 형제간 같이 보인다.
그 때 영수 형제가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아빠, 아빠'했더니 아버지가 창피하니까 '너 나보고 아빠라고 하면 죽여버린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나이 오십이 다 되었는데도 그것이 안 지워지고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자기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너희 아버지냐고 물으면 자기 큰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라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군대에 갔을 때 자기 큰아버지가 자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큰아버지는 조카를 사랑했고 자기 아버지는 못 본 채 하셨고 결정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죽여버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박혀있어서 고쳐지지 않는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가 없다. 약을 먹어서 진정되어있을 뿐이지 고쳐지진 않는다. 눌려져 있기 때문에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지 조금만 약을 쓰지 않으면 그것이 다 사실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청소년기에 자라면서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갈등이 생겼겠는가?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려면 얼마나 갈등을 느꼈겠는가?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방황을 해서 평생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사실대로 말해야지 과장해서 말하면 안 된다. 혼내주기 위해서 무서운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사실대로 말하고 사실대로 설득해야 한다.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표현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 주일 학교 학생들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대로 계신다고 받아들인다. 왜 계시는가하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어렸을 때 부처님이 계신다고 배워버리면 평생을 그렇게 아는 것이지 왜 부처님이 있느냐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론이 들어온다고 해도 잠재의식 속에 박혀있는 것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칩에 내장이 되어서 지울 수가 없다.
표현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표현이 없어도 안 되고 잘못 표현해도 안 된다. 표현의 중심이 말이니까 말은 안 해도 안 되고 잘못해도 안 된다. 하나님이 만일, 표현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은 그 분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안다고 하더라도 오해할 수 있다.
가령, 불을 내린다든지, 홍해바다를 가른다든지 하는 이런 사건만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신다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오늘날도 산에 가서 기도해서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구체적인 말씀으로 체험하지 않고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나 환상이나 꿈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오해가 되어서 빗나가고 만다. 똑같은 사물을 봐도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꿈을 꾸어도 해석하는 것이 다르다.
똑같이 앞산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설사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없으니까 그 사람 자신의 생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부터 '빛이 있으라'고 말씀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빛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복음인지 모른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무엇을 만드셨다면 오해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에겐 큰 축복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는가? 말을 하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셨다. 동물들을 지으셨을 때 힘 센 놈도 있고 강한 놈도 있고 별 것이 다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식물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다 있었다. 그래도 만족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왜 사람을 지으셨는가? 말을 하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을 못한다든지,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마지막 날 창조가 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말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요즘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데 수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여러 가지 있다. 그런데 결국 최종적으로는 국어실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표현해야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연구한 것을 언어화시켜야 다른 사람들이 알지 않겠는가? 언어화시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결국 국어가 가장 중심이 된다.
요즘은 국어 공부를 어떻게 시키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국어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국어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표현만 할 수 있도록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어렵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언어로 표현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를 택하셨다. 선지자는 말하는 사람, 하나님을 말해내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왜 사도들을 택했는가? 말해내는 사람을 택했다. 예수의 제자들 중 벙어리를 택한 적은 없다. 말을 하는 사람을 택했다.
그리고 이 표현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고치셨다. 벙어리를 고쳤다, 눈 먼 자를 고쳤다, 앉은뱅이를 고쳤다, 중풍병자를 고쳤다, 열병 든 자를 고쳤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질병들 중 대표적인 질병들이다.
이 질병들을 자세히 보면 전부 다 표현과 관계된 질병들이다. 그러니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고쳐주신 것이다. 우리도 원래는 잘못 표현하던 사람들이었다.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고쳐서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이다. 엉뚱한 것만 표현하던 사람을 이젠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고쳐주셨다. 알고 보면 이것이 구원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말해내는 사람들이고 사도들은 예수의 생각과 뜻을 말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분의 존재 자체를 자기 자신들로 해서 풀어낸 사람들이다. 이것을 풀어낼 때 말씀으로 풀어냈다. 그러니까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말해내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3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면, 예루살렘 성전에나 왔다갔다하고 눈만 끔벅거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말을 하셨다. 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말을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셨다.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속으로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입을 다물고 겉으로는 전혀 표현하지 않고 나사렛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갔다 했다면 누가 그를 죽였겠는가? 말을 했기 때문에 표현되기도 하고 말을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말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말인데 왜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는 것일까? 말을 보면 입안에다 쇠사슬을 넣어두었다. 물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해두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은 무엇을 씹을 때마다 그 재갈과 같이 씹어야 한다. 그리고 입이 제한되어있어서 크게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해두었다. 그래서 말이 무엇을 먹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큰 짐승이 입을 크게 벌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소는 이가 한 쪽밖에 없는데 말은 이가 양쪽에 다 있기 때문에 물까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까봐서 재갈 물렸으니까 남을 무는 혀는 재갈 물려야 하지 않겠는가? 남을 물어뜯는 혀, 남을 물어뜯는 말,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재갈을 물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말에게 이빨이 없었더라면 재갈을 물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빨이 있어서 남을 물기 때문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남을 무는 이빨을 가진 사람은 재갈을 물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자가 사람에게 말을 주신 것은 우리끼리 의사소통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잘 살라는 의미로 주신 것 이전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다른 동물들을 보라. 그들에겐 언어가 없어도 생존, 활동, 자기들의 사회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
사람에게만 말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닌 것 같다. 사람도 만일, 말이 없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벙어리들도 다 살아나가지 않는가? 그러므로 말이 없더라도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말을 하는 인간을 찾으셨는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해서이다. 말은 나를 위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말의 목표를 하나님에게 두어야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두면 안 된다.
자기 감정,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신 것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므로 그렇게 사용될 때만 이것이 거룩한 것이다.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동물들은 자기들의 생활에는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보다 자유롭다. 사실은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린 병원을 짓고 또 지어도 부족하다. 육신적으로 말하더라도 인간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 그런데 동물들은 정말 건강하다. 옛날 우리 집에서 개를 키웠는데 그 개가 자궁외 임신을 하게 되었다. 배에 시커먼 것을 달고 다녔는데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데 뒤에 가서 그것을 째보니까 그 안에 쥐새끼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바로 새끼였다. 그것이 거기서 썩어서 시커멓게 된 것이다. 만일 사람이었다면 폐혈증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달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째서도 약을 바르니까 나았다. 그러니까 동물들은 얼마나 건강한지 모른다. 그러니까 병원이 필요 없다.
사람 같으면 그렇게 피가 썩어서 시커멓게 되었는데 살아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동물들은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언어가 없다고 해서 생존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없어도 우린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말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서 우리가 서로 그것을 교통하고 확산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벌들을 보면 언어가 없어도 자기들 생존을 위한 기술이 있다.
한 벌이 꽃을 찾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나가 보고 와서는 벌통에 와서 막 움직이면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 벌에 접촉한 놈은 다 그 꽃으로 날아간다고 한다. 언어는 없지만 아주 정확하다고 한다. 전부 그 꽃에 가서 꿀을 따온다. 그러니까 언어가 있다고 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이 없다. 사는 데는 벌들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언어를 하나님 표현을 위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축복이 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우린 말을 함부로 해서 말을 할 때는 안 하고 안 할 때는 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모든 교통은 대부분 다 말, 언어로 이루어진다. 우리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이 없다. 교통을 많이 하다 보니까 말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사방에서 말을 한다. 여기서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는 말은 필요 없는 말,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제한하라는 뜻이다.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남을 욕하는 말, 남을 판단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결국 자기가 도로 화를 당하게 된다. 내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만날 판단만 한다면 그 판단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자기가 화를 당하게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만날 남을 판단만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정보교환이 안 된다. 정보 교환이 되지 않으니까 교회생활이 안 된다. 교회 생활이 안되니까 교회 생활에서 왕따가 된다.
교회 생활에서 왕따가 되면 비참하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아야 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은 물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특별히 선생된 자들은 주의하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은 보통 사람들의 말과 달라서 연합을 시킬 수도 있고 분열을 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왜 분열되는가? 말 때문이다. 연합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 역시 말씀 때문이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놓으면 내가 분열시키려는 마음이 없었는데도 분열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일부러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악당이 누가 있겠는가? 마귀에게나 있지 인간에게는 없다. 더구나 교회 형제들 가운데서 일부러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어떤 말을 해놓으면 그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 연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비방하는 말을 하면 분열이 되고, 주장하는 말을 하면 분열이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쁜 것을 주장했을 때 보다 좋은 것을 주장했을 때 더욱 분열이 된다.
어떤 사람이 나쁜 것을 주장하면 얼른 분열이 되지 않는다. 누가 나와서 만날 좋지 않는 것만 주장한다고 하자. '교회 오지 말고 축구 하러 갑시다. 축구를 하는 것이 교회에 오는 것 보다 좋은 것이다. 축구를 안 하는 것은 교회생활을 안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을 한다면 거기에 선동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한다면 분열된다. 나쁜 것으로 보다 좋은 것으로 분열이 된다.
이것은 참 중요하다. 처음 말이 '선생된 자들은 주의하라'고 했다. '형제들아, 너희들은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로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한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한 가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갈라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따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자연히 갈라지게 된다. 분열이 된다.
이 분열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몸을 가르는 무서운 것이다. 왜 수많은 교파가 갈라졌는가? 좋은 것 때문이다. 성경에서 옳은 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해서 갈라진 것이다. 술 먹으러 가자, 극장에 가자고 해서 갈라진 것이 아니다. 다 좋은 것을 주장해서 갈라졌다.
교회에서는 절대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는 간증을 해야지 절대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간증과 주장은 다르다. 간증은 자기의 체험 된 것을 내 놓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먹을 사람은 먹고 안 먹을 사람은 못 먹는 것이다.
그러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다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장은 분열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우리 대구교회에서도 처음에는 나와서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이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분열이 되지 않는다.
계속 주장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분열이 될 것이다. 이것은 노파심이겠지만 내가 없을 때 어느 형제가 나와서 좋은 것을 계속 주장한다면 갈라질 것이다. 내가 없다고 가정하자. 없어질 것이니까(모두 웃음) 내가 없어진 다음에 어떤 형제가 나와서 나쁜 것을 주장하면 갈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좋은 것을 주장하면 갈라진다. 그러니까 주장하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어떠함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분열의 원인이 된다.
간증과 주장은 아주 다르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주장이다. 누가 나쁜 것을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만 좋은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혀를 가리켜서 배의 키와 같고 산의 작은 불과 같다고 했다. 배는 큰데 키는 아주 조그마하다. 수천 수만톤 되는 배에도 가보면 배는 큰데 키는 아주 작다. 그런데 그 키가 그 큰배를 좌우한다.
비행기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도 아주 조그맣다. 빠른 것일수록 키가 작다. 키가 작아도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빨기 가기 때문에 조금만 날개를 틀어도 방향이 확 바뀐다. 비행기를 탈 때 방향을 보면 뒤꼬리를 조금만 틀어도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착륙할 때도 날개를 쫙 펴면서 착륙을 한다. 그 날개가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이 큰 것을 움직인다. 그래서 배의 키와 같고 산의 불과 같다고 했다. 불이 날 때 하늘에서 큰불이 떨어져서 나는 경우가 있는가? 우리 나라에서 산에 불이 나는 원인은 전부 담뱃불 때문이다. 정말 이 담배를 없애야 하는데 전매청 수입 때문에 담배를 그냥 두고 있다. 우리 나라도 하루 속히 담배가 정부의 손에서 민간인의 사업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정부가 규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부 것이기 때문에 규제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금연실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금연 운동가들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전매청에서는 담배가 많이 팔려야만 수입이 오를 것이고, 그래야만 국고도 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써 담배, 소금, 인삼 같은 것을 전매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국가에서만 팔 수 있고 일반인들은 팔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해방 된 지 50년이 된 지금도 이것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소년들까지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이다. 지금은 초등학생까지 담배를 피는 연령층이 낮아졌다. 이것은 정부가 전매 이익 때문에 그것을 규제하지 않아서이다. 우리 나라에서 어딜 가도 담배를 다 살 수 있으니까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러다 보니까 아무리 산불조심, 자나깨나 불조심하더라도 그 중 천의 한 사람, 만의 한 사람이라도 산에 가서 담뱃불을 버린다면 온 산을 다 태우는 것이다. 나무가 자라서 나무답게 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다. 그리고 좀 더 나무답게 되려면 20년은 걸려야한다.
그런데 그것이 일 순간에 다 타버린다. 그러니까 산에 돈을 들여서 나무를 심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100년을 키웠어도 한 번 불이 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서운 불이 지극히 작은 담뱃불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말이다 조그만 말 한마디를 잘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커져서 온 산에 불이 붙듯이 집안을 망해먹는 경우도 있고 온 인류를 망해먹을 수도 있다.
'산의 불'과 같다는 것은 지옥 불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지옥이라는 것은 불무더기를 말한다. 유황이 있어서 계속해서 쓰레기를 태우는 곳으로 요즘 말로는 쓰레기 소각로를 말한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자랑한다. 담뱃불이 자랑하기를 '야, 나 무시하지 마라. 나 대한 민국도 다 태울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언젠가 효령에 가다보니까 언덕 위에서 조그만 연기가 난다 싶더니 삽시간에 산에 불이 나버리는 것을 보았다. 달려갈 시간도 없이 번져버렸다. 그러니까 조그만 불이 얼마나 자랑을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의 혀도 작지만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재갈 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키, 불, 혀는 작지만 큰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다.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완전히 패가 망할 수도 있다. 우리말 속담에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빚을 졌는데 말을 잘 해서 빚을 갚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잘 못해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모두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우리가 무조건 말을 조심할 일이 아니다. 말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를 알고 조심 해야한다.
언젠가 철규 형제 집에 가서 보니까 벽에 '삼사일언'이라고 써 붙여져 있었다.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한다는 뜻이다. 연경이 자매가 어딘가에 붓글씨를 쓰러 다녔는데 그 선생님이 써 주신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연경자매 집의 형편을 잘 모르고 그렇게 써주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삼사 일언 할 것이 아니라 일사 삼언을 하라고 얘기해주었다.
왜냐하면 철규형제는 말을 잘 안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런 집에다가 삼사일언이라고 써붙여놓았으니 더더욱 말을 안 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 집구석(?)이 뭐가 되겠는가?(모두 웃음) 철규 형제 같은 경우는 매일 말을 해야하는데 매일 낚시나 하러 다니고 이러면 안 된다. 말을 하지 않는 일에 종사하면 안 된다.
참 마음은 좋은 친구인데 말을 안 하니까 잘 모른다. 그리고 자기가 말을 잘 하지 않다 보니까 자기 속에 답답한 것이 많다. 철규형제 같은 경우에는 말을 많이 해야한다.
우리 형제들도 말을 많이 해야 교통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안 해야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할 말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오직 예수만 말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에만 이 말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말이 많은데 하나님을 많이 표현하라고 말이 많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이 적은 사람은 ‘아, 나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좀 더 많이 해야겠구나!’하고 생각하면 말을 많이 할수록 좋은 세계가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만 말하니까 말을 많이 할수록 좋은 세계이다.
세상에는 말이 많으면 나쁘다.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런데 교회에는 좋은 말이 있기 때문에 말이 많아야된다. 이곳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생명의 말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할수록 좋은 곳이다.
우리 교회가 좋은 이유는 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간증할 사람이 많다. 또 작은 모임들이 있는데 다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지 않겠는가? 말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린 좋은 세계다.
세상 같으면 이렇게 말이 많으면 난리가 난다. 공산당보다 더한 곳이다. 옛날에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공산당보다 열 배나 말이 더 많다.(모두 웃음) 그런데 왜 좋은가? 좋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쁜 말을 이렇게 많이 한다면 정말 큰 일 날 일이다. 기네스북에 오르고 인공위성에 뜰 일이고 뉴스에 나오고 구경 올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모여서 말을 하고 만날 때마다 말을 하고 그래도 말을 할수록 좋은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만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말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아주 지독하게 말을 해놓았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곳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만일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어찌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이 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한 입으로 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다른 쪽에서 형제를 저주할 수 있겠는가? 찬송을 하려면 찬송만 하든지 저주를 하려면 저주만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어찌 한 우물에서 쓴 물과 단 물이 나오겠는가? 요즘 정수기에서는 뜨거운 물과 찬물이 같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지만 속에는 기계가 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니까 하나만 해야한다. 찬송하던 입으로 저주해서는 안 된다. 저주하던 입으로 찬송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간증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입이라면 그것을 거룩하게 보존해야겠다는 말이다.
이 입을 가지고 어찌 저주하는 말을 하겠으며 남을 해하는 말을 하겠는가? 이 입을 가지고 남을 살리는 말을 해놓고 또 어떻게 해하는 말을 하겠는가? 사랑하는 말을 해놓고 또 어찌 미워하는 말을 하겠는가?
내 입은 오직 한 군데로 고정되어서 사랑하는 말로, 찬송하는 말로, 간증하는 말로만 쓰이는 봉한 우물이 되어야겠다. ‘봉한 우물’은 임금만 먹을 수 있는 우물을 말한다. 봉해두었다가 주님만 표현하는 우물, 봉해두었다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쓰는 우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만 쓰는 우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쓴 물과 단 물을 한꺼번에 내는 우물이 될 것이다. 봉한 우물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만 말해내자.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만 말해내자. 물론, 내가 말할 때 은혜도 생각나지만 좋지 않은 것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내 안에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야 되는 것인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생각나지만 내 입이 하나님만 찬송하도록 지어진 입이니까 내가 불평이 있는 생각을 말하지 말고 내가 찬송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봉한 우물이 되어야 한다. 사람 속에 어떻게 전혀 나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있으니까 진실하게 얘기해야겠다고 나와서 꿈에 아무개를 죽이려고 했다고 하면 되겠는가? 분명히 꿈에 죽이려고 했지만 듣는 사람이 생각하기는 ‘저 사람이 내게 무슨 유감이 있는 모양이구나. 내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꿈이라고 했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까지 다 말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그리스도뿐이다. 그것만 말해야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주인을 위해서만 필요한 입이 되어서 주인에게만 필요한 입이 되지 않겠는가? 주인이 필요할 때마다 열어서 꼭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 입을 평소에 딱 봉해두었다가 교회에 와서 간증할 때만 열고 또다시 봉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봉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에게 해를 주는 말, 남을 기준 나쁘게 하는 말, 남이 기분 나빠야 시원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찔러서 그 사람이 속상해하는 것을 보면 속이 후련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특히, 부부지간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참다가 한 판 해서 상대방이 찔찔 짜고 있으면 속으로 ‘그럼 그렇지. 시원하다. 너도 한 번 고생해봐라’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늘 상처를 준다. 상처를 주면 나아도 흉터가 남는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나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번 상처가 난 곳은 나았어도 흉터진 것은 제 구실을 못 한다. 세포가 정상적인 세포가 아니기 때문에 제구실을 못 한다. 내가 그렇지 않은가? 오른쪽 폐에 상처가 났다가 아물었지만 이것은 모두 흉터이다. 흉터니까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있으나 마나이다.
우리 살에 흉터가 진자리는 다른 세포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해줘서 그렇지 그런 상처난 세포만 있다면 사람이 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그 사람 일생에 오점을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을 내가 함으로써 내가 진실해지는 것이 아니다.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은 거짓이다. 진실이 아니다. 그리스도만 진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만 말해내려면 진실만 말해야한다. 그리스도는 말할수록 더 좋다. 표현할수록 좋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말이 많으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입을 다물고 밥 먹을 때만 여는 사람이 무난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말을 안 했으니까 흠잡힐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나쁘다할 것도 없고, 좋다 할 것도 없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있으면 장례식장 같아서 안 된다. 여기 와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냥 가버리고 모임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버리기 시작하면 장례식장이 돼버린다. 무슨 말이든 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고 또 즐겁다. 즐거운 말을 하자. 좋은 말을 하자. 남을 살리는 말을 하자.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을 하자. 그러면 우리가 말을 많이 해도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삼사일언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은혜를 입었으니까 우리는 그 은혜를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 되자. 직장에서도 표현하고 교회 와서도 표현하고 친구한테도 표현하고 다 표현해야된다.
표현을 늘 하다보면 같은 표현이라도 좀 부드럽게 표현할 수도 있고, 지혜롭게 할 수도 있다. 너무 잘못된 표현만 하고 살다가 갑자기 좋은 표현을 하려니까 내용은 좋은 것인데 잘못 표현해서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내용은 좋은 것인데 방법이 잘못 되어서 의외의 사건이 생기는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늘 표현하는 것을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더 부드럽게, 보다 더 온유하게, 보다 더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직 예수만 말하자! 오직 그리스도만 말하고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삼사일언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반대로 말을 더 많이 하자. 그래서 널리널리 전파하고 서로 더 넓은 교통을 갖기를 원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물이 되었고, 하나님이 찾으신 바가 되었고 당신에게서 우리가 구원받은 바가 되었는데 우리 입으로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만을 찬송하고 우리를 부르신 주님만을 찬송하고 당신의 영화로우심과 당신의 아름다우심과 당신의 그 풍성하심만을 말해내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것을 말해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어떠하심을 말해내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세상 앞에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우리가 세상 앞에 그리스도를 알리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