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초들의 세상에 둘러싸인 두 여자의 이야기. 전도연과 이혜영이 맡은 수진과 경선을 상대하는 남자 주인공이 바로 정재영이다. 정재영이 맡은 독불 역은 전직 권투 선수 출신으로 투견장을 관리하며 보스 KGB 밑에서 그 누구도 믿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주먹만을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인물. 욕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펼치는 투견장의 돈가방을 둘러싼 음모에서 자신의 여자 수진, 믿었던 보스 KGB, KGB가 심어놓았던 부하에까지, 모두에게 배신당하며 결국 희생자가 되고 만다. 영화에서 독불은 약한 여자 수진에게 함부로 폭력을 가하며 어느 곳 하나 매력을 찾기 힘든 악역이지만 그래도 라운드 걸이었던 수진과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을 자신의 자동차 키에 붙여놓는 순정을 보여주기도 한 독불의 비참한 최후는 정재영의 연기에 힘입어 묘한 여운을 남긴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전도연과 이혜영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가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사람들은 정재영의 연기에 대해 감탄하기 시작했다. PD가 되고 싶었던 고등학교 시절, PD가 되려면 연극영화과를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극반에서의 활동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연극반 선생님의 이야기 때문에 연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우 정재영, 그에 대해 알아본다.
서울예전 연극과를 졸업한 후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정재영은 <박봉곤 가출사건>을 시작으로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연극만 할 때에는 영화를 찍게 된다면 큰 배역을 맡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누구하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욕심은 무너져버리고 그저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시절. 그러나 사소한 단역을 맡으면서도 정재영은 조그만 역이지만 이 역으로 인정받아 더 큰 배역, 하고 싶었던 배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했다. 대학교 1년 선배이자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인연의 장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간첩 리철진>에서의 4인조 택시 강도 중 한 명으로 비로소 개성있는 조역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정재영은 <킬러들의 수다>에서 신세대 스타 원빈, 신하균과 함께 4명의 킬러 중 한 명으로 등장. 대중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배우가 된다.
신세대 스타로 각광받는 원빈, 신하균과 함께했던 작업. 내가 그 또래라도 원빈이나 신하균을 좋아하지 나같은 배우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재영은 그들의 인기가 전혀 부럽지 않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고 인기가 있어야 내가 더 하고 싶은 배역을,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인기는 단순히 오락적인 인기가 아니라 연기력을 통해 인정받은 인기라고 덧붙인다. 자신처럼 외모로 밀고 나가지 않는 배우일수록 인기가 있다면 배우 생활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피도 눈물도 없이>는 <간첩 리철진>을 함께 했던 김성제 프로듀서의 소개로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출연했던 인연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기본적으로 류승완 감독의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하게 독불 역을 하게 되었다고. 여러가지로 마음에 들었던 시나리오였고 스타일이 확실하고 굉장히 새로운 영화라는 것이 <피도 눈물도 없이>에 대해 느꼈던 정재영의 첫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 촬영 분위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정재영도 22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두 바늘은 촬영 들어가기 전 액션 스쿨에서 사전 운동을 할 때 머리에 부상을 입어 꿰매야 했고, 날카로운 투견장 철망에 오른손을 부딪히면서 20바늘을 추가로 꿰매야 했다. 이러한 촬영 분위기는 그냥 힘들게 찍었다라는 수준이 아닌, 말 그대로 항상 긴장된 상태였다고. 7바늘을 꿰맨 전도연을 포함해 배우와 스탭들이 총 100바늘 정도를 꿰매고 나서야 촬영이 끝났다고 <피도 눈물도 없이>의 힘든 촬영을 회상했다.
같이 작업했던 음악감독한테 후배들이 정재영을 볼 때마다 '저 배우 누구냐?'는 질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심지어 <킬러들의 수다> 얼마 후에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면서도 누구야 물어보는 사람이 있더라는 얘기에는 해도 너무한다 생각도 들지만 자신에게 개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그리고 이것이 배우 생활하는데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정재영은 말한다. 관객들에게 쉽게 질리지 않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무대에서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몰입하면서 연기를 할 때 배우가 된 기쁨을 느낀다는 정재영은 다른 배우 누구나 그렇듯이 연기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는 것이 자신의 기본적이면서도 최종의 목표라고 밝힌다.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 역을 통해 정재영은 인정받는 배우로써의 첫 걸음을 당당히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