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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모든 것 되신 그리스도를 누림
(4) 구속이신 그리스도를 누림
<고린도전서 1장 30절~31절>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은 모든 것 되신 그리스도를 누림의 마지막으로 구속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구해준다는 뜻인데, 우리말로 제일 적합한 말은 '무르다'라는 말이다. 요즘은 '무르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잘못 사왔을 때 무르라고 한다. 또 내가 누구의 물건을 쓰다가 망가뜨렸으면 물러주어야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물러주는 자가 되셨다. 구속이란 어디에 팔려 간 우리를 값을 주고 물러주었다, 원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는 뜻이다. 보통 널리 알려지기는 구속이라는 말을 우리 죄를 사해주었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음
1.1. 값을 치르심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것을 우리를 물러주었다, 돈을 대신주고 값을 대신 주고 찾아왔다, 값을 치르고 찾아왔다는 뜻이다. 어떻게 값을 치루었는가? 멸시받고 고난받고 죽으심을 통해서 값을 지불했다는 뜻이다. 이사야 53장에 우리를 구속해 줄 자가 올 텐데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가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채찍을 맞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 사람이 바로 우리를 물러 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사야 53장에서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석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들은 바로 이사야 53장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것이다.
왜 고난받고 멸시받고 버린바 되었는가? 왜 그렇게 함으로써 값을 지불했는가?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저 위의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야 된다. 아담이 지어진 다음에 동산에 두어져서 하나님 동산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담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쫓겨나게 되었다. 생명나무가 있고 선악을 아는 나무가 있는데, 먹으라는 생명나무 과일은 먹지 않고 왜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을 먹게 되었을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입증되었는가? 천사는 그 양식을 먹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생의 약점이 무엇인가? 흙으로 지어지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서 산혼이 되었기 때문에 빈 그릇이다. 자기라는 것이 없다. 나라고 할 정체성이 없다. 그 정체성은 오직 빈 그릇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생의 약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사람이 인생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허무해진다. 무엇을 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가면 허무하다. 아무리 잘 살았든지 못 살았든지 대통령이 되었든지 간에 마지막에 가보면 빈 그릇이다. 공수레공수거다. 그러니까 인생을 곰곰이 생각하면 살지 못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까 살지 깊이 생각하면 못산다. 대강 생각하는 사람은 잘 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못산다.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앞날은 어떻고 인생은 죽느니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앞에 있는 현실만 생각하고, 그것을 쟁취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앞날을 미리 짚어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것 하면 뭐해, 죽을 건데...뭘 해도 다 죽을 것이므로 자기가 해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병철씨가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부자다.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만한 대업을 성취해놓았다. 대통령은 몇 명을 바꿔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 나온 사람으로 대통령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고 나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아들이 아버지 기업체를 한다고 해도 밥 세끼 먹던 것을 6끼를 먹겠는가, 10끼를 먹겠는가? 물론 좋은 차는 타고 다닐 것이지만 그만큼 또 일이 많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차가 필요 없다. 차가 없어도 잘살 수 있다. 좋은 차 탄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 가면 역시 죽고 만다. 자기 것도 아니다. 저렇게 기업이 커져버리면 자기 것이 아니다. 이미 국가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거기서 얻어진 모든 것이 자기 개인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 사회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구멍가게를 할 때는 내 것이지만 큰 것을 하게 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고, 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많은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이 먹고산다. 그것은 일을 하는 사람이지 결코 자기 것이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기업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밤낮 데모를 하는데 요즘 이랜드 데모를 하는데 나 같으면 폐업 신고해버리고 나갈 것 같다. 그것 하나 없어져도 될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다. 다시는 그런 것을 하지 않을 것 같다. 폐업시키고 해고시켜버리면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은 허탈해질 것이다. 자기는 뭘 해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나 같은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것인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업을 할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욕을 하나마나 그것을 하겠다는 사람이 기업을 하지 나 같은 사람은 치워라 편안하게 살자 그것 한다고 밥 여섯끼 먹느냐고 생각한다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인생은 깊이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안된다. 허무주의에 빠져서 결국은 자살을 하든가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비겁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훼밍웨이처럼 내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자고 할 수 있다. 훼밍웨이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운명적으로 거부하고 싶어 자살한 것이다. 자살한 모든 작가들은 다 그렇다. 모는 것을 내 마음대로 했고 내 뜻대로 했는데 이것만 내 뜻대로 안되니까 이것도 내 뜻대로 해야지 왜 이것은 운명에 맡겨야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 자살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다. 끝까지 자기 인생을 지킨 사람이다.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지킨 사람이 자살한 사람이다. 자연사하는 사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평생 동안 자기 의지대로 자기 방식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순응하는 사람이므로 마지막은 이율배반이고 모순이고 비겁한 것이다.
그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천사의 양식을 먹고 자기도 그렇게 되려고 했다. 원인은 그것이다. 이렇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진 그런 사람들에게 만일 다시 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산혼이 된 그 빈 그릇이 온다면 얼마나 멸시받고 푸대접을 받겠는가? 멸시받고 고난받고 채찍맞고 너는 우리 인간을 모독한 놈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해보니까 어떤 젊은 청년들은 듣고 나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인생을 기분 나쁘게 한다. 인생을 왜 흙이라고 하는가. 왜 빈 그릇이라고 하는가. 앞길이 창창하고 희망이 있고 인류 역사를 보면 인류는 위대한 것인데 왜 인류를 빈 그릇이라고 하는가. 그 말을 듣고 나면 자기 자신이 비참해지므로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불교 사람들은 전도를 하면 자존심을 키워준다. 너 자신이 부처이므로 부처를 찾으라고 하니까 힘이 나고,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것은 괜찮지만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를 전하면 인생은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허탈하게 생각하고 간다. 정말 복 받을 사람이 따로 있구나. 그 말을 듣고도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이상하구나. 내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딱 그 자리에 오면 대부분 졸립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은 대부분 졸립다. 길가에 만난 사람은 바쁘다고 하고 가겠지만 좁은 방에 집어넣어놓고 이야기하면 갈 곳이 없어 졸립다. 이번에도 누구와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오니까 딱 졸려한다.
멸시받고 버림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희망적인 인생을 이야기한다면 달나라에 가는 이야기를 한다면 희망이 솟을 것이나 빈 그릇을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이 허탈해진다. 멸시받고 고난받고 버린바 되고 결국은 죽임 바 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기대를 가졌다. 그 이전에도 메시아라는 사람이 여러 번 나왔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나왔는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요즘말로 하면 혁명가들이었다. 그래서 민란을 일으키고 반동을 일으켰는데 역부족으로 안된다. 로마라는 큰 나라가 지배를 하고 있는데 유태인들 몇 명이 모여서 요즘 텔레반 같은 경우는 무기도 있지만 그때는 칼을 가지고 대항하니 되겠는가? 결국은 실패하고 실패하여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로마 사람 한 명 죽으면 유태인은 10명이 죽어야 되는 것이 실전이다. 일제 36년 동안 해본 것도 그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예수가 온 것이 혹시 이 사람은 그 사람들과 다를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적을 행한 것을 보니까 저런 사람 같으면 뭔가 큰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여 수많은 사람이 따라왔다. 베스다 광야에 5천명이 모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굉장한 사람이 모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따라왔는데 왜 그냥 가버렸는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니까 가 버렸다. 원자폭탄을 가지고 왔으면 되는데 내 살과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그리고 그 많이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다 아우성을 치고 고개를 흔들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저런 거짓말쟁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무슨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다.악한 짓을 해서가 아니다. 자기들을 너무나 실망시겼고 자기들을 조롱했다는 것이다. 지금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이 필요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빵이 필요한데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에게 가서 성경책이나 읽고 있으면 자기를 조롱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갈고 저주한 것이다.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기본 바탕이 우리 인간의 목적 안에서 우리 인간의 바탕 안에서 볼 때는 허무하다. 내 목적을 가지고 내 생각을 가지고 나를 생각하면 허무하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찾으면 영광스러운 것이고, 내 목적 안에서 찾으면 비참하다. 그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어떤 분이 미국에서 내과전문의사인에 남편도 내과전문의사라고 한다.미국에서 전문의사 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한국에 살려고 나왔다고 한다. 내용을 보니까 꼭 직업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말세론 때문인 것 같다. 미국이 앞으로 신앙의 자유가 없어진다고 하여 미리 한국에 나왔다는 것이다. 어떤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말세론자들의 말을 듣고 심취해있다. 옛날에 계룡산을 찾았던 사람들처럼 어떻게 하면 말세 피난처를 찾을까하는 것이다. 여러 예언자들의 예언을 종합하여 보니까 지구의 종말이 TV에서 2012년 12월 20일에 온다고 한다.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나나 새싹회 분들은 살만큼 살았으니까 억울할 것이 없는데 젊은 사람들은 억울할 것 같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것 때문에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수십년을 살다가 한국에 나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산다고 해도 적응이 안되어 다시 미국으로 나간다. 선진국에 살다가 후진국에 사는 것이 쉽겠는가? 우리가 월남에 가면 살기 쉽겠는가? 똑같은 이치다.
우리 인생을 인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런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 신앙을 해도 어떻게 하면 죽어도 영생을 얻을까? 천당은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가보았자 도로 죽을 것이다. 안식교인들이 예수님이 산위에서 재림하신다고 모두 산위로 올라갔다. 산위에서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 맨 처음 문경집회를 갔을 때 그 관문에 있는 동네가 그런 동네였다. 한 때는 초등학교가 세워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학생이 한 명밖에 없다고 했다. 교육청에서 의무교육이니까 택시 한 대를 대절하여 매일 그 학생을 학교로 데려갔다. 그 학생 한 명을 두고도 학교를 운영하려면 교장 있어야 되고 교감 있어야 되고 담임 있어야 되고 다 있어야 된다.그보다는 택시 대절하는 것이 싸다. 그런 동네가 거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군데 있었다. 지금도 모여 사는 곳도 있다. 산위에서 생식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예언을 믿고 산으로 오신다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보아야 도로 죽을 텐데 예수님 오시면 죽지 않을 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도 그런 꿈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인생은 결국 죽는다. 언제 죽어도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하다. 이 허무한 인생이 희망에 벅차 있는 사람에게 와서 멸시받고 고난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바 된 것이다. 우리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변질되어 희망이 벅찬 사람이 되었다. 선악과를 먹고 변질되어 희망에 부푼 사람이 되고 달나라를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 쉽겠는가? 그것이 하루 이틀된 것도 아니고 얼마동안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좀 읽고 저렇게 된 것이다. 12시까지 이야기해도 안된다.
우리 인류 역사가 얼마인가? 성경에 기록된 것만도 6천년인데 사실은 6만년인지 60만년인지 모른다. 그런 역사 동안 사람은 계속 동안 선악과를 먹고 선악과가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얼마나 심각하고 깊게 변질이 되었겠는가? 원상을 찾는다는 것이 너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난 30년을 돌이켜보아도 그때 그 사람 얼굴을 생각하지 못하겠다. C.C.C.에서 나온 형제들 가운데 최영의 자매가 제일 나이가 어리다. 하이 C.C.C.고등학생들이었는데 내가 갈 때 대학교로 들어왔다. 그 이전에 하이 C.C.C. 다니던 학생들과 관계가 안되어 있고 대구에 와서 하이 C.C.C.는 다른 강사가 담당을 하여 나와 직접 관계가 없었다. 대구 하이 C.C.C. 역사에서 우리 교회로 온 사람은 최영의 자매 한 명뿐이다. 그때 나이가 20살인데 지금 50세인데, 아무리 그때 소녀 시절의 대학교 1학년 얼굴을 사진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고 지금 얼굴 밖에 모른다. 하물며 6천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원형을 찾아내겠는가? 내 얼굴도 옛날 사진이 없으면 모른다. 사진이 있기 때문에 안다. 여러분도 해보면 옛날 얼굴을 절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잊어버린다. 원형을 잊어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동산에서 만들어진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내겠는가? 온갖 방법으로 인생을 회복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안된다. 불가능하다. 불교에서는 참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다. 참 나가 누구이겠는가? 원래 만들어진 것이 참 나다. 그런데 그것을 찾는다고 되겠는가? 사진도 없고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6천년이나 시간이 지났는데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전문가도 아닌데 초상화를 그린다, 왜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냐고 했더니 엄마 얼굴을 본 일이 없어 초상화를 그리다보면 엄마 얼굴이 생각날까해서 그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 얼굴이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 봐서도 기억이 안되는데 보지 않았는데 나오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자기 얼굴도 기억이 안된다.
우리 인생이 우리 인생의 원형을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산에 있는 그 사람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참선을 하고 별짓을 하고 어디는 촛불을 켜놓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있고 최면술을 하여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있지만 우리 원형을 찾을 수는 도저히 없다.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그 원형을 찾아주기 위해서 온 사람이다. 바로 그 원형이었기 때문에 멸시받고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은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은 이런 사람이 오면 똑 같은 대우를 하게 된다. 멸시하고 버리고 죽인다. 왜?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지워버려야 된다. 허무한 사람을 지워버려야 된다. 허무 자체가 된 그 인생을 지워버려야 된다. 그런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다. 그것을 여러분이 듣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매일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분의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아마 처음부터 들었으면 놀랬을 것인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알아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참고 있다 보니까 지금이 되었다. 교회 오래 붙어있으면 된다.
인생의 원상회복을 위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폭로했다. 가장 완전한 한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선악과를 먹고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겠는가? 물위로 걸어가고 싶은 것,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 죽은 자를 살리고 싶은 것이 선악과를 먹은 목적이다. 그런 목적을 다 이루고 있는 사람, 저 사람이 사람인가 신인가 생각했다. 저가 누구길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 그것은 바로 아담이 소망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니다.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면 뛰어 내릴 것으로 생각했고 무슨 이적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죽었다. 복음서는 하나같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되어있다. 천당에 갔다는 말도 없고 날아갔다는 말도 없고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도 없고 그냥 죽었다고 되어있다. 그 죽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죽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당연히 죽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아놓았는데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사람을 못 박아놓았는데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를 못 박았을 때는 많은 사람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못을 박은 사람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병들이 단단히 지켰던 것이다. 혹시라도 살아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이 진실이 폭로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구속이 되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인데 왜 예수의 죽음만 우리의 구속이 되는가? 그것은 그럴만한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1.2. 원상으로 회복시키심
우리 인생의 원상을 회복시켜 주었다. 사람은 원래 저것이 사람이구나. 빈 그릇이라는 말이 저것이 빈 그릇이라는 뜻이구나. 흙으로 지었다는 말이 저렇게 생긴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 숨을 코에 불어넣었다는 말이 저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 산혼이라는 말이 저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 우리는 6천년 이후인지 6만년 이후인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을 본 것이다. 우리의 원형을 본 것이다. 우리의 진실을 우리가 보았다. 원상을 우리에게 물러주었다. 구속했다. 값을 치르고 물러주었다. 교리적으로 말할 때 사탄에게 값을 치루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탄에게 팔려갔으니까 사탄에게 값을 주고 건져내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값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그 원상회복을 위한 값을 치루었다. 진실이 폭로되게 하는 값을 치루었다. 그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을 보고도 이것을 또 다시 왜곡시켰다. 희생적인 사랑, 희생적인 고난 같은 것으로 왜곡시켜 버리고 말았다. 폭로된 인생을 싫어했기 때문에 폭로된 진실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미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십자가를 다시 또 미화시켜서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지금 생각하고 있다.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사랑했을까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해서 우리 죄를 소멸했을까로 생각하게 만들어버렸다. 해석차이다. 어떻게 십자가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내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되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해서 자기 독생자를 주어서 죽게 까지 한 것도 이해가 안된다. 왜 그런가했더니 정곡을 벗어난 것이고 다른 데로 빗나간 것이다. 이제 보니 확실하고 간단하다.
그 하나님 같은 사람이 죽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던 그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껍데기가 다 벗겨졌다. 6천년 동안 입고 있던 옷이 다 벗어졌다. 그러니까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했는데 거기에서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진 한 장 없이 내 모습을 어떻게 찾겠는가? 사진보다 더 정확하게 내 운명이 딱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이 지금도 피하려고 한다. 아담이 왜 피했을까? 지금 사람들이 피한 이유와 똑같다. 왜 종교가 그렇게 변질되었을까? 그것을 피하고 싶으니까 변질되었다. 그래서 말세론으로 간다거나 천당으로 피해가게 되어 십자가의 공로가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같은 것이 되었다.
인생이 폭로되지 않았다. 세상 앞에 인생은 이것이라는 것이 폭로되지 않았다. 자기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 우리를 물러주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무리해도 내 원상을 찾을 수가 없는데 그분이 내 원상을 찾아주기 위해서 고난받고 멸시받고 죽으셨으니까 대신 값을 치루고 나를 물러주었다. 원상을 회복시켜 주었다. 원상으로 물러주었다. 원상으로 되돌려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고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부활이다.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버렸지만 하나님은 인정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고 하시는 말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이다. 우리는 아무리 봐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아니다. 흙으로 짓고 생기를 불어넣어 산혼이 된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영광스럽고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창세기 1장 마지막 절에 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만족하면 이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 인생은 행복해진다. 여기서부터 인생의 행복은 시작되고 영광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아담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준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담에게는 저주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 사람에게 축복이다.
이제 이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이 들리게 되어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오게 되어있다.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사도들이 말했다. 이 말은 그 멸시받고 버린바 되고 죽은 사람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구나. 이것이 행복이다. 내가 내 운명을 거부하고 내 운명을 싫어하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사람이다. 그 내 운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
이것이 인생이 뒤집어진 것이다. 술 먹던 사람이 술을 먹지 않는 것도 뒤집어진 것이고 노름하던 사람이 노름하지 않는 것도 뒤집어진 것이고 싸움질 하던 사람이 싸움질하지 않는 것도 물론 뒤집어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뒤집어짐은 아니다. 표면적인 부수적인 문제들이 뒤집어진 것이지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영국이 기독교로 인해서 엄청난 변화를 했다. 한때 요한웨슬리나 후드가 복음을 전파할 때 영국에는 극장이 다 폐쇄되고 술집이 다 없어졌을 정도로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굉장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부 바깥에 있는 물결이 바꿔진 것에 불과하지 근본적인 것이 바꿔지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한,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이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한 인생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영국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던 기독교가 도로 영국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 중에서 가장 세상이 되었다. 기독교로 인해서 세상이 더욱더 세상스러워졌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되지 않았다.
원상회복! 우리의 원상회복은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이 보일 때 내 원상은 완전히 영광스럽게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의 승리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산다, 죽은 후에도 또 산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버린 인생이 우리가 버린 우리의 운명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그 사람이다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다.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하고 말했다. 왜?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새 사람이 되는 길이다. 새 인류가 되는 길이다. 새 인류는 여기서부터 다시 난 것이니까 이것을 보고 거듭났다고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났다. 거듭났다. 이래서 거듭났다는 것은 다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근원적으로 여기서 나여 다시 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4절 15절에 나온 것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 것에서 난 것이 바로 영생이고, 거기서 난 것이 거듭난 것이고, 거기서 난 것이 부활이고, 거기서 난 것이 새 사람이다. 다시 난 것이다.
1.3.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 나라를 확장시킴
이분이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분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영으로 진실의 영으로, 요한복음에서는 진리의 영이라고 했고, 영광의 영으로 생명의 영으로 사람들에게 임함으로써 오심으로써 그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오늘 그분의 이런 영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교회가 되고, 그분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고 그분의 영이 우리 생명이 될 때 우리는 교회가 된다. 그러니까 교회는 바로 그분의 영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분의 영이다. 사람들은 멸시하고 버렸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그 영이다. 이것이 진실의 실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오시면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영으로 인해서 실재의 영으로 인해서 흙으로 지어지고 생기를 코에 부름 받아서 산혼이 되었던 그것이 생각나게 된 것이다. 나는 흙으로 지어졌고 생기를 받았으며 나는 산혼이구나. 빈 그릇이구나. 그렇게 우리가 알아진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이분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소망이다. 이 소망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재림을 약속했다. 다시 온다고 약속했다.
1.4. 소망의 영으로서 재림을 약속하심
영원한 생명의 나라! 이것이 바로 재림의 약속이다. 로마서 5장 17절에 보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나라가 우리의 소망이다.(계21:3) 이것이 바로 재림의 약속이다. 다시 오심의 약속이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그 양반도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머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오겠냐고 했더니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물질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나라!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만 가도 복이다. 우리 영관이가 이번 여름집회 주일학교에서 몇 가지 단어를 알고 왔다. 분열, 연합을 알고 왔다. 분열을 정확히 알고 왔는데 영관이는 하고 싶은데 이모 진실이가 뭘 하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이모 뜻대로 하면 분열이라고 한다. 당신(하나님) 뜻대로 하면 연합이고 이모 뜻대로 하면 분열이라고 한다. 그 한마디만 알아도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나라! 연합이라는 이 말 자체만도 우리에게 얼마나 소망이 되는지 모른다.
만유를 새롭게 하는 나라!(계21:1) 어떤 개인이 아니라 결국 다 나라다. 보라,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다. 하늘과 땅이 다 새로워진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옛 하늘과 땅이 지나가고 하늘과 땅도 새로워졌다.
영원한 왕국!(계11:15)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 소망을 가지고 오실 주를 재림 주라고 한다. 다시 오실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가 혼자 구름을 타고 오시겠는가? 나라가 오는 것이다. 나라가 어떻게 오겠는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가 공중에서 내려오겠는가? 하늘로부터 온 나라! 성경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많다. 문자대로 쓸 수 없어서 그렇게 써놓지 않은 것이다. 비유가 아니면 말할 수 없어서 비유로 말씀한 것이다. 상징이 아니면 말할 수 없어서 상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왜 그런가? 물질적인 것 같으면 문자적으로 쓰면 된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세계고 영적인 세계다. 물질적인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에게 들으면서 구체성이 없고 추상적이라고 한다. 구체성이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것이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렇구나하고 생각하다가 모든 인간이 다 그렇구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늘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의 기독교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문자대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계속해서 아주 우스운 일이 생긴다. 산으로 온다고 하니까 산에 집을 짓고 살면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멸망이다.
영원한 왕국!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의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라고 말한다.(마25:34) 그 나라가 온다. 그 나라가 오면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그 나라와 함께 오시지 그 나라가 없는 그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은 그 나라와 함께 오시는 분을 말한다. 그러니까 천당이 아니다. 내세도 아니다. 그 나라가 오는 것은 내세가 아니다. 그 나라가 지금 땅으로 온다는 말이다.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더라고 한다. 하늘로부터 온 나라다. 사람이 만든 나라가 아니다. 바벨론은 사람이 쌓아서 올라간 나라다. 바벨론하면 세상을 상징하는 것인데 땅으로부터 쌓아 올라간 것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뜻이다. 우리 영관이가 바벨탑은 왜 무너지는가? 땅에서부터 올라가기 때문에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배워서 왔는데 대단한 것을 배워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유치부부터 베운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대학교를 몇 개씩 졸업해도 안되는 것을 우리 교회는 유치부에서 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늘 이렇게 살다보니까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내과전문의가 되려면 의과대학을 나오고도 5년 정도가 걸리는데 미국은 7년도 걸리고 8년도 걸리고 쉽지 않다고 한다. 또 음대를 나와 음악전문가고 피아노도 잘 치고 솔로리스트도 잘하고 합창지휘도 잘하고 온갖 것을 잘해도 이것은 안된다. 다재다능해도 이것은 안된다. 어찌 생각은 유치하게 하는지, 그렇게 많이 배웠는데 왜 유치하게 생각하는지, 유치원 학생보다 못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미국 헌법 2조에 모든 자유가 열거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미국의회 80%가 유태인이고 그 뒤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로만캐톨릭이고 신부들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미국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삭제했다고 한다.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1조인지 2조에 여러 자유가 들어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중요한데 그것을 삭제했기 때문에 미국은 앞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 추상적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럴 수밖에 없다. 땅의 것이 아니니까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조선말을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가 땅에서 올라간 것을 이야기하면 쉬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땅에 있는 것은 추상적이다. 물속에 있는 고기에게는 날아가는 새의 이야기가 추상적이고, 날아다니는 새들에게는 물속의 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추상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물속에서 호흡을 하느냐?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어떻게 말하겠는가? 세계가 다르다.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 말씀을 곡해할 수 있는지 모른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다시 곡해시키고 다시 곡해시킨다. 천하에 없는 율법을 주었지만 결국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망한 백성들이다. 사람에게 아담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다시 저주가 되어버린다. 무엇을 주어도 저주가 되어버린다. 돼지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돼지가 나오고 개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개똥이 나온다. 아담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나오는 것은 그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 너무너무 맞는 말이다. 거기서부터 빗나가 버리면 그 다음 문제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근원이 빗나갔기 때문에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까 한다. 근본은 감추어놓고 무엇을 할 것이냐만 자꾸 묻는 것이다. 종의 근성이 있는 것이다. 종은 자꾸 무엇을 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디서 무엇을 할까요만 하나님께 내놓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선한 선생님이요, 당신이 선한 줄 알기 때문에 내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그 말과 전혀 관계없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전혀 다른 말이다. 니고데모는 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으러 왔다. 당신은 선한 분인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으러 왔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 세계가 다르니까 전혀 다른 대답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기 전에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여러 가지가 물론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의 원상을 회복한 일이다. 우리의 원상을 물러주는 일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값을 치르고 원성으로 우리를 되돌려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할 때 어디로 구속했겠는가? 하나님 섬기는 백성으로 구속했다. 하나님 섬기는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의 본분이다. 바로를 섬기고 바로를 위해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기 때문에 그 본분으로의 복귀다. 애굽에서 광야에 나온 다음에 한 일은 성막을 건축한 일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실은 출애굽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을 건축하는데 있었다. 출애굽은 수단이고 방법이고 목표는 성막을 건축하는데 있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상을 회복시켜 주고 내가 무엇인가를 폭로시켜주었다. 내 원상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보고 나서도 또 다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물위를 걸을까, 어떻게 하면 바람을 잔잔케 할까? 이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위를 걷고 바람을 잔잔케 하던 분이 죽었으니까 그분도 인생이었구나. 인생으로 온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구나. 이것이 근본이구나. 그런데 거기서는 비참한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정했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 누구일까를 사람들이 생각할 때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께 인정받을까를 생각한다. 전도를 해야 인정할까, 봉사를 해야 인정할까, 뭘 해야 인정할까, 전부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고 세상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은 무엇을 해야가 아니고, 어떻다고 아무것도 안한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가 아니고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 안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빈 그릇 안에 있는가? 빈 그릇이어야 하나님이 쓸 수 있는데 빈 그릇이 아닌데 어떻게 쓰겠는가? 무엇을 갖다가 쓰겠는가? 그릇이 비어있어야 무엇을 담을 수 있다. 하나님은 네가 빈 그릇이냐를 묻고 있는데 사람은 거기에 자기대로 무엇을 담아 와서 이것이 어떤지를 묻고 있다. 쌀을 담아올 수도 있고 보리를 담아올 수도 있는데 주인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담아 왔다. 그러다보니까 종교적인 여러 항목들이 있는데 그것을 담아 와서 이것이 어떤지 저것이 어떤지를 묻고 있다.
내가 그날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할 것이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저것도 했다 하리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할 것이다. 왜 주의 이름으로 했는데 모른다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 그릇이지 내용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내용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그 내용물을 채울 수가 있고, 하나님만이 필요한 것을 가질 수가 있다. 자기 필요를 자기가 알고 계신다. 나도 옛날에 안정이 안될 때 어떤 때에 안정이 안되었는가? 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했으니까 이러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좋아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을 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안되어 항상 갈등이 있었다. 왜 이렇게 안될까가 문제였다. 내가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면서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구나. 나는 단지 빈 그릇이면 되고 필요한 것은 그분이 채울 일이지 내가 그것을 채워서 이것이 어떠습니까 하려니까 안된다. 내가 빈 그릇으로 손을 놓으니까 그때 내 인생이 안정되었다. 무엇을 할까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빈 그릇으로 내 인생을 드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내가 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단지 빈 그릇으로 나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이고 일은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내가 생각지 않은 일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일이 한 가지도 된 일이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다 되었다. 지금 30년을 돌아보면 내가 계획하고 생각했던 일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만 일어났다. 너무너무 이상하다. 옛날 같으면 내가 계획한 것이 안될 때마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계획이 포기돼버리고 내가 계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내가 늘 하나님을 따라 다니니까 편하다. 그분이 하신 일을 구경하니까 아주 편하다. 그리고 재미있다. 아이들이 어른 따라 다니면 재미있듯이 하나님 뒤 따라 다니면 재미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끌고 가려니까 힘이 들지 뒤 따라 가면 너무너무 편하고 재미있고 신기하고 매일 같이 새롭다.
빈 그릇으로서의 우리를 폭로시켜 주신 분이다. 이것을 우리가 그분이 폭로해놓았다고 해서 그대로 있으면 안된다. 그것을 자기로 알고 받아들이면 그것을 또 내가 누린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누림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이 구속함은 그분이 그렇게 행하신 것을 내 것이 되게 한다는 것으로 동명사로 사용되었다. 그분이 구속을 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구속함이 되었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함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고 우리 자신이 되었으니까 이제 이 원상을 회복한 것이 내 것이 되었다. 물러주었으니 내 것이다. 나를 물러받았다. 원상의 나를 물러주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분이 나를 물러주었지만 그분을 소유한 것은 나다.
진실을 누리게 되고 진실 아닌 것은 우리가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가질 수도 없게 되었다. 물위를 걸어간다 해도 내 것이 아니고 바람을 잔잔케 해도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볼 때도 신기하다고 생각은 되어도 인생의 것은 아니고 인생의 할 짓을 아니다. 인생의 몫은 아니다. 혹시 어떤 경우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나를 사용해서 공중에 붕 뜨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난리날 것이다. MBC, KBS 다 달라 들 것이다. 뉴욕타임즈까지 다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빈 그릇이다. 올라가도 빈 그릇, 내려가도 빈 그릇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올라갈 일도 없고 내려갈 일도 없다. 누가 올린다고 올라가 지지도 않고 누가 내린다고 내려가 지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하늘로 끌어올리겠는가? 누가 나를 음부로 끌어내리겠는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제 진실이 드러났다. 내가 누구인가가 드러났다. 무엇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무엇을 입혀준다 해도 무슨 일을 나에게 시켜서 어떤 일을 벌어지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더라도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거기에 빠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지 안다. 이것이 진실을 누리는 것이다. 원상을 누리는 것이다. 빈 그릇을 누리는 것이다. 항상 나는 빈 그릇이다. 내용물을 채우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또 채우고 나면 채운다 하더라도 맞는지 안맞는지 어떻게 아는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기준밖에 안된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굉장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 자신에게는 늘 갈등이 있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빈 그릇을 누리는 것이 가장 진실한 누림이다. 언제든지 주님이 오늘은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내일은 죽을 먹을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국그릇으로 알고 있다하더라도 주인이 필요하면 밥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옛날 같았으면 밥을 왜 담는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할 때는 국그릇인데 밥을 담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 담을 수도 있고 밥 담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국그릇인데 내일은 밥그릇이면 신기하다. 내가 다 알고 있으면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다. 모레는 무엇을 담을지 또 모른다. 모레는 무엇을 담을지 또 모른다. 모레는 금을 담을지 모르니까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다. 인생을 모르는 것도 이렇게 복이 된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복이 된다. 다 알면 허무해진다. 그런데 내가 그릇이니까 오늘 이런데 내일은 어떨지 모른다. 오늘 내가 밥그릇이었는데 내일 국그릇일지 모르고 또 밥그릇일지도 모른다. 내일 가면 또 새롭고 모레가면 또 새롭고 늘 새롭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 문제다. 그러니까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영광의 소망을 누리는 것이다. 언제든지 어디까지 갈지 우리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스테반이 그렇게 말하고 사도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의 소망은 얼마나 영원한 소망을 가졌으며 얼마나 높은 소망을 가졌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권이다. 빈 그릇으로 지어진 인간의 특권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지! 나를 밥그릇을 만들었다면 나는 평생 밥그릇 노릇만 할 것이므로 얼마나 지겨웠겠는가? 그런데 나를 빈 그릇으로 지어놓았으니까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신기하다. 하나님 따라 가는 일이 신비로운 것은 바로 우리가 빈 그릇일 때 신비하다. 내가 빈 그릇이 아니면 하나님 따라 다니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10년을 기다렸다. 왜? 빈 그릇이 아니었다. 무슨 빈 그릇이 아닌가? 나쁜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너의 자손으로 하늘의 별 수같이 많게 하겠다, 창대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으로 차 있었다. 그릇에 약속이 차 있었는데 그 차있는 것이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1년을 기다리고 나면 또 힘들고 2년 기다리고 나면 또 힘들고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나님이 분명 약속을 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나님 약속도 담고 있으면 힘들다. 심지어는 그렇다. 좋은 것이라도 아브라함이 10년 기다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10년을 기다리겠는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인내심도 좋은 사람이고 대단한 사람이다. 10년을 기다렸는데도 허탕을 쳤다. 1년을 기다리나 10년을 기다리나 수준을 똑같다. 결국은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다. 이삭을 낳을 때는 물론 빈 그릇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줄지 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도저히 안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 하셔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나겠는가하고 사라는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빈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이 인간의 특권이다. 참 인간의 특권이다. 신기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희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진실아래서 비로소 사탄에게서 해방된다. 속이는 자. 거짓말 하는 자. 처음부터 거짓말 하는 자고 처음부터 속이는 자다. 우리가 속이는 자로부터도 해방되게 된다. 이 영광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담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얼마나 큰가! 그 모든 업적을 내가 이길 수 있으려면 이 영광의 소망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이길 수가 없다. 나는 처음 목회하러 나가니까 세상이 만들어놓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그 세상에 휘말려 들어가 꿩 잡는 것이 매구나 하면서 돌아다녔다. 되지도 않을 사람이 나도 뭐 좀 해본다고 방언도 하고 입신도 하고 예언도 하여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쫓아다녔다. 만일 그렇게 됐더라면 그것은 완전 멸망이다. 안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것으로는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영광의 소망, 빈 그릇의 영광을 알 때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구속! 이것은 원상회복을 누리는 것이다.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창세기 3장이 참 오래 걸렸다. 거두어놓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창세기 2장 원점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을 인류는 속은 상태다. 지금도 속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전도하는 일은 미련한 일이다. 아주 미련한 일이다. 돌보고 돌이라고 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이 없다. 우리는 돌을 보고 돌이라는 말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 해야 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할 것이고 엉뚱한 소리 한다고 할 것이고 추상적인 소리 한다고 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말을 계속 해야 된다. 빈 그릇이라는 말을 계속해야 된다.
이 빈 그릇의 영광! 이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몇 억겁에 가려진 우리 인생을 주님께서 영 단번에 처리하시고 우리를 원상으로 물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을 본 이상 더 이상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속을 필요가 없고 당신의 영광, 빈 그릇의 영광을 본 이상 우리가 허황된 세상의 영광에 휘말려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 우리를 이 자유 안으로 소망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