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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의 연대기(1) [162.8]
신인간 ・ 2021. 8. 31. 8:58
해월신사의 연대기(1)
지일기념 특집으로 삼암 표영삼 종법사가 정리한 ‘해월신사의 연대기’를 세 차례 나누어 싣는다. /편집실
1. 머리말
신사(神師)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이하 신사로 약칭함)은 35세(1861)에 입도하여 37세(1863)에 대신사로부터 도통(道統)을 물려받아 36년간 50여 곳을 숨어 다니면서 동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등 삼남 일대는 신사의 피어린 발자취가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1864년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순도하자 관의 지목을 받으며 1871년 신미교조신원운동을 비롯하여 1892년의 공주(公州)․삼례(參禮)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의 광화문전 교조신원운동, 보은과 원평에서의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 1894년의 동학혁명운동을 지도하여 우리 나라 근세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한편 교단적으로는 1880년에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 동경대전을, 1881년에 용담유사을 간행했으며 1893년에는 동학의 단위조직인 포제도(包制度)를 공식화하였고 그밖에 여러 가지 종교의례를 새로 마련하였다. 신사의 유년기부터 72세에 순도할 때까지의 발자취를 연대순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입도 이전의 신사
최남주(崔南柱=1906년생, 경주박물관장을 지냄)가 전하는 필사 족보(族譜)를 보면 신사는 1827년(丁亥) 3월 21일(양 4월 16일)에 외가(月城 裵氏)인 경주 동촌 황오리(현재 皇吾洞 229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최종수(崔宗秀 1804년 6월 22일~1841년 10월 15일) 어른이요 어머니는 월성(月城) 배씨(裵氏 ?~1832년 4월 22일) 어른이었다. 5세때에 모친이 돌아가자 영일(迎日) 정씨(鄭氏)를 계모를 섬겼다. 신사의 명은 경상(慶翔)이오 자는 경오(敬悟)이며 후에 시형(時亨)으로 고쳤으며 호는 해월(海月)이다.
터일과 마북동(금곡) 갈림길
유년기는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터일(基日洞)에서 자랐으며 15세까지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 부친이 15세 때에 별세하자 계모는 떠나가고 누이동생과 먼 친척집에 기탁하게 됐다. 17세가 되자 터일 안쪽 올금당 마을 제지소(製紙所 韓紙)에서 일을 했다. 19세(乙巳 1845년)에 흥해 밀양(密陽) 손씨(孫氏 ?~1889년 10월 11일)와 결혼하여 흥해 매곡(梅谷)에서 살림을 차렸다. 10년 후인 28세(甲寅 1854년)에는 산 넘어 마을인 마북동(馬北洞)으로 이사했다. 마을 사람들의 천거로 집강이 되어 출입했다. 33세(己未 1859년)에는 다시 금등골(劒谷) 산중으로 들어가 화전민 생활을 시작했다.
3. 입도 초기의 신사
35세 되던 1861년 6월에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동학에 입도 했다. 이로부터 자나깨나 주문 소리를 떼지 않았다 한다. 1862년(壬戌) 1월부터 계곡에서 냉수목욕의 수련을 했다. 어느 날 공중에서 “건강에 해로운 것은 찬물에 갑자기 들어가 앉는 것이니라”는 말이 들려오자 목요을 중단했다. 7월에 남원에서 돌아와 경주 서면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있는 대신사를 찾아가 신비체험을 상세히 말했다. 대신사는 “큰 조화를 받은 징조라”고 칭찬했다.
1862년 8월부터 김이서(金伊瑞)로부터 백미 100석을 빌려 포덕에 나섰다. 영덕의 오명철(吳明哲), 유성운(劉聖運), 박춘서(朴春瑞), 상주의 김문여(金文汝), 흥해의 박춘언(朴春彦), 예천의 황성백(黃聖伯). 청도의 김경화(金敬和), 울진의 김욱생(金旭生) 등은 이때 신사의 지도로 입도한 분들이다.
9월 29일에 대신사가 영장에 체포되자 신사는 도인들을 모아 관에 항의하여 5일만에 석방토록 했다. 민란이 두려웠던 관은 10월 4일경에 석방한 것이다. 용담에 돌아온 대신사는 10월 하순경 신사에게 은신할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여러 곳을 물색하다 흥해 매곡(梅谷) 손봉조(孫鳳祚)의 집으로 정하고 11월 9일에 대신사를 이곳으로 모셔 갔다.
1862년 12월 26일 즉 납일(臘日)에 대신사가 접제(接制)와 접주(接主)를 공식화시켜 접주를 임명했다. 이후 여러 곳을 다니며 교화하던 대신사는 관의 지목을 무릅쓰고 1862년 3월 9일(음)에 용담으로 돌아왔다. 6월경부터 한 번에 3~40명씩 용담에 도인들을 모아다 집단교화인 개접(開接)을 계속했다. 7월 23일 대신사는 돌연 파접 통문을 내고 신사를 불러 북도중 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여 경주 이북 지역을 관할하게 했다.
1개월 뒤인 8월 14일에는 신사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8월 15일경에는 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龍潭水流四海源 劒岳人在一片心)이라는 결시를 지어 주었다. 많은 제자 중에서 대신사의 본뜻에 가장 충실한 사람은 바로 신사라는 뜻이다.
11월 어느날 대신사는 신사에게 국한문(國漢文) 경전을 건너 주며 인쇄하라 부탁했다. 몇 사람과 의논하여 추진하던 중 12월 10일에 대신사가 체포되는 교난을 당하여 경전 간행도 중단됐다. 체포된 대신사가 과천에서 1864년 1월 6일(음)에 대구감영으로 환송되자 접주들과 같이 대구 성중에 들어가 옥바라지를 했다. 1월 20일경 첫 번째 심문에서 수제자의 소재를 추궁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21일에 김춘발(金春發)과 같이 안동으로 피신했다.
영양 용화동/다들바위
몇 달 후에 탄로되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동해안쪽으로 피신하여 영덕 직천(直川) 강수(姜洙)의 집에 갔다. 대신사의 불행을 전하고 영해(寧海)를 거쳐 평해(平海)로 올라가 황주일(黃周一)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울진 죽변(竹邊)에서 피신했다. 1년 후인 1865년(乙丑) 3월에는 영양군 용화동(龍化洞) 깊은 산중으로 다시 옮겼다. 지목 받던 김덕원(金德元), 정치겸(鄭致兼), 전윤오(全潤吾), 김성진(金成眞), 백현원(白玄元), 박황언(朴皇彦), 김양언(金良彦), 황재민(黃在民), 권성옥(權成玉), 김성길(金性吉), 김계악(金啓岳) 등도 이웃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해 7월에 상주 동관음에 있던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이 찾아왔다.
1865년 10월 28일 검곡에서 대신사 탄신기념제를 올리는 자리에서 “인(人)은 곧 천(天)이라. 고로 人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인이 인위로써 귀천을 분함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니라. 우리 도인들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토록 하여 스승님의 본뜻에 따르도록 하라”는 유명한 법설을 했다.
1866년(병인) 3월 10일 대신사의 마지막 기일제에서는 적서(嫡庶)를 타파하라는 강론을 했다. 한편 봄(3월 10일 순도일)과 가을(10월 28일 탄신일)에 모이도록 하고 매번 4전씩 염출하는 계안(禊案)을 만들었고 계장에는 강정(姜錠)이 맡도록 했다.
4. 신미교조신원운동
1870년 10월 어느날 영해 도인 이인언(李仁彦)이 찾아와 이필제(李弼濟)를 소개하면서 한번 만나 보기를 권했다. 이루부터 전후 5차례나 사람을 보내 3월 10일에 영해에서 교조신원운동을 하자고 했다. 1871년 2월에 5번째로 찾아온 권일원(權一元)은 만나 보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신사는 2월 10일경에 영해 도인들의 동정을 알아보기 위해 영해로 넘어왔다. 영해 도인들은 이미 3월 10일(대신사 순도일)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동원 중이었다. 강수를 찾아가 의논했으나 그도 이필제를 만나 보자 동조하자 신사는 부득이 동원령을 내렸다.
형제봉 병풍바위/영해
3월 10일 형제봉 산중 평풍바위에 모인 인원은 6백명이 넘었으며 저녁 때 천제를 마치고 30리의 영해읍으로 달려갔다. 밤 9시경 서문과 남문 앞에 이르러 성문이 열리자 단숨에 성중을 장악했다. 무기를 수습한 다음 부사를 대청 아래 꿀리고 치죄했다. 욕설로 항의하자 김진균(金震均)이 살해하고 말았다. 이튿날 11일부리 흩어지고 이필제와 강사원 등 30여명은 신사가 있는 영양군 일월산 뒤쪽 윗대치로 철수했다. 15일에 출동한 관군이 윗대치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신사와 이필제, 강수(姜洙), 전성문은 간신히 봉화로 넘어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대신사 사모님이 사는 영월 소미원에 이르렀다.
이미 소식을 들은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과 세정․세청 형제는 어디론가 피신하고 없었다. 조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이필제가 안내하는 대로 단양 가산(佳山) 정기현(鄭岐鉉)의 집으로 갔다. 이튿날 새벽 신사는 정석현(鄭碩鉉)의 집으로 배정되어 가족을 찾아다 고용살이로 근근히 생활했다. 5월 어느날 강수가 급히 찾아와 “체포하려 오고 있으니 피하자”고 했다. 급한 나머지 가족을 남겨둔채 영월 피골 정진일(鄭進一)의 집으로 갔다. 신사의 부인 손씨 사모님은 관졸에 체포되고 말았다.
8월 2일에 이필제는 문경변란을 일으켜 정기현 등과 같이 체포되었었다. 마을마다 행인을 검색하기 시작하자 신사 일행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넓은 바위 위에 초막을 치고 13일간을 지내자 소금도, 장도 떨어졌고 9월의 추위도 점점 더해 갔다. 황재민은 먼저 영남으로 떠나고, 14일만에 신사와 강수는 직동 박용걸의 집으로 내려왔다. 신사는 박용걸과 결의를 맺고 안방에서 겨울을 지내며 대인접물(待人接物)과 우묵눌(愚黙訥)에 관한 설법을 했다.
5. 정선 무은담에 접소
대인접물비
10월 15일부터 고한 적조암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시작하여 12월 5일에 마쳤다. 사방이 온통 눈꽃으로 덮여 장관을 이루었다. 매서운 실바람은 청아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신사는 이 광경을 보고 감회를 시로 나타내었다.
태백산중에 들어 49일의 기도를 드리니(太白山工四十九)
한울님께서 여덟 마리 봉황을 주어 각기 주인을 정해 주셨네(受我鳳八各主定)
천의봉 위에 핀 눈꽃은 하늘로 이어지고(天宜峰上開花天)
오늘 비로소 마음을 닦아 오현금을 울리는 구나(今日琢磨五絃琴)
적멸궁에 들어 세상의 티끌 털어 내니(寂滅宮殿脫塵世)
뜻있게 마치었구나 49일 간의 기도를(善終祈禱七七期)
1년이 지난 1873년 2월 초순에 적조암을 찾아가니 노승은 병석에 누어 있었다. 마련해 간 새 옷을 갈아 입히고 하루를 머무르니 스님은 운명하고 말았다.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으로 모시고 영춘으로 갔다. 박용걸의 집에서 김연순(金演順)과 김연국(金演局)을 불러 단양 대강면 사동(절골) 일대를 보고 오게 했다.
단양서 헤어진 손씨 사모님이 3년간 소식이 없자 제자들은 안동 권씨와 재혼하게 했다. 권명하(權明夏)가 단양 남면(大崗面) 사동(寺洞)에 집을 마련하여 4월 10일에 이곳으로 이사하자 강수도 훈장직을 버리고 신사와 동거했다. 김연순과 김용진(연국)도 이웃에 와서 살았다. 1875년(乙亥) 1월 24일에는 첫아들인 덕기(德基)를 낳았다. 이때 대신사의 둘째아들 세청이 1월 22일에 돌아가자 대가 끊겼다.
8월 보름 신사는 지도체제를 통일하여 새 출발을 다짐하는 고천제례(告天祭禮)를 올리고 강수와 성문을 동반하고 남쪽 경북 지방을 순회했다. 10월 18일에는 단양 송두둑 신사 댁에서 새로 법관과 법복을 만들어 고천제례를 엄숙히 거행했다. 이로부터 매년 10월 상달이면 고천제례를 올리는 제도가 정착됐다. 그리고 강수를 도차주(道次主)로 임명하였으며 얼마후 “시(時)자와 활(活)자로 개명 개자(開字)” 했다. 신사는 시형(時亨)으로, 강수는 시월(時元)으로, 유인상은 시헌(時憲)으로 고쳤다. 11월 13일에는 유시헌을 도접주(道接主)로, 김계원(金啓元)을 인제접주로 임명했다. 이해 가을에는 6년전 헤어진 손씨 사모님과 상봉했다.
1877년(丁丑) 10월 3일에 고천제례를 구성제(九星祭)라 이름했다. “하늘에는 구성이 있어 땅의 구주와 응해 있다”고 한 논학문에 의한 것이다. 1878년(戊寅) 7월 25일에는 무은담 유시헌의 집에서 대신사 때 파접(罷接)했던 접회(接會)를 살려 개접(開接)했다. 도인들이 모여 진리를 토론하는 자리를 개접이라 하는데 이날의 주제는 시천주(侍天主)의 시(侍)였다. 그리고 향해 설위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1879년(己卯) 9월에는 구성제(九星祭)를 인등제(引燈祭)로 바꾸고 음식 대신에 쌀과 포목(布木)을 차려 놓게 했다. 먼저 유시헌, 홍시래(洪時來), 최시경(崔時敬)의 집에서 시범으로 소인등제(小引燈祭)를 봉행하여 보이니 49일 기도한 효과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이후 해마다 10월과 11월에 인등제를 올리게 되어 상달의 제례로 자리잡았다.
6. 경전간행과 육임제
단양 / 인제 경전간행터
1879년 11월에는 선생수단소(先生修單所=대선생주 문집)를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정하고 강시원이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를 탈고했다. 신사께서 보시고 견봉날인(堅封捺印)하여 유시헌에게 맡기면서 후일에 반포하리라 했다. 1880년(庚辰)에는 드디어 동경대전을 간행했다. 5월 9일에 인제 남면 갑둔리(甲屯里) 김현수(金顯洙=字 致雲)의 집에서 판각을 시작하여 6월 14일에 100여부를 출간했다. 별공록(別功錄)을 만든 다음 15일 아침에는 봉고식(奉告式)을 거행했다. 전해지지 않아 발문을 알 수가 없다. 1888년에는 절판되어 김병내(金秉鼐) 등 인제접에서 동경대전과 국문경전인 용담유사를 중간(麟蹄接重刊版) 했다. 이듬해인 1881년(辛巳) 6월에는 단양 남면 천동(南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용담유사를 처음 간행했다.
1882년 6월에는 임오군란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찾아오는 선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883년(癸未) 3월에도 계속 늘어났으며 1884년(甲申) 6월에는 지목이 일어났다. 전라도 익산 금마 사자암(獅子庵)으로 피신했다가 10월에는 朴致京이 주선하여 상주 화서면 봉촌리(鳳村里) 앞재(前城)에 초가 3간을 매입하여 가족을 이사시켰다.
공주 가섭사/ 상주 앞재
한편 신사는 손병희, 박인호, 송보여(宋甫汝)를 대동하고 공주 가섭사(迦葉寺=迦葉庵)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10월 24일에 육임제(六任制=敎長․敎授․都執․執綱․大正․中正)를 구상했다.
1884년은 갑신정변으로 어수선했고 1885년(乙酉)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5월에 신사는 지목을 피해 보은군 장내리로 이주했다. 이후 청주와 진천지역을 순회하며 도인들을 지도하다가 청주 북이면 금암리(琴岩里) 서택순(徐垞淳)의 집에서 유명한 천주 직포(織布) 법설을 했다. 6월 3일 저녁 강시원과 이경교(李敬敎), 김성집(金成集) 3인이 체포됐다는 급보를 받자 장한주(蔣漢柱)를 대동하고 공주 마곡사 동리로 피신했다.
8월초에는 경상도 영천 부장대(阜場垈)를 거처 화계동(花溪洞=迎日郡 星溪里 花溪洞)으로 피신했다. 산막에서 약 1개월 반을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 서인주(徐仁周), 황하일(黃河一)과 상의하여 9월 15일(望間) 경에 상주 화서면 봉촌리(鳳村里) 앞재로 돌아왔다. <최 보따리>라는 신사의 별명은 여기서 얻었다.
신사는 이곳에서 “부인이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거든 정성을 다하여 절하라”라는 부화부순(夫和婦順)의 설법과 “선생(대신사)이 이르기를 사람을 섬기되 한울님과 같이하라” 하셨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설법을 했다. 1886년(丙戌) 신사는 봄부터 위생을 각별히 엄수하라고 당부했다. 가래침을 뱉으면 땅에 묻고, 먹던 음식을 새음식에 섞지 말 것이며, 항상 부엌을 청결히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6월 하순부터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상했으며 추석이 지나서 가라앉았다. 다행히 수도한 보람이 있어 도인 집은 거의 무사했다.
1887년(丁亥) 1월 1일 신사는 61세의 새해를 맞아 “무극대로에 작심으로 정성 드리니 원통봉 아래서 또다시 통하고 통하는 도다(無極大道作心誠 圓通峰下又通通)”라는 시 한 수를 읊었다. 1월 15일에는 둘째 부인 안동 김씨 사모님의 소생인 아들 덕기(率峰)가 13세의 나이로 성례를 올렸다. 음성 율봉(栗峰)에 있는 음선장(陰善長)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기쁨도 잠시 김씨 사모님이 우연히 병을 얻어 2월 24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묘소는 원통봉 아래 밭머리에 모셨다.
신사는 회갑(回甲) 잔치를 마치고 3월 25일에 서인주(一海)를 정선으로 보내 기도를 준비하게 한 다음 4월초에 정선으로 가서 49일 기도를 마쳤다. 5월 하순에는 장내리로 돌아오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신사는 6월 중순경에 육임을 임명하여 육임소를 설치했다. 육임제는 교(敎)와 집(執)과 정(正)의 직급으로 구분되어 교장과 교수는 1급, 도집과 집강은 2급, 대정과 중정은 3급에 해당된다. 그리고 교(敎)는 교화를, 집(執)은 업무와 규율을, 정(正)은 직언과 건의를 책임지게 했다.
2월 하순 김씨 사모님의 3년상을 마치자 많은 이가 신사에게 재취를 권했다. 손씨 사모님이 고령으로 해수병까지 도지니 뒷바라지 할 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암 성사의 누이동생과 성혼하니 신사는 63세였고 손씨 부인은 26세였다. 1888년(戊子)에는 삼남 일대에 흉년이 들자 동학에 들어오는 이가 늘어갔다.
강원도 고성 왕곡리
1889년(己丑) 7월에 신사는 지목을 피해 괴산군 새양지말(新陽洞)로 피신하여 여름을 보내다가 10월에 인제군 갑둔리 김현경(金顯卿)의 집으로 갔다. 인제에서도 지목이 심하여 간성 왕곡리 김도하(金河圖)의 집으로 넘어갔다.
1891년 1월에야 인제 김연국의 집으로 돌아와 피신하다가 2월에 갑둔리 성황거리 이명수(李明秀)의 집으로 옮겼다. 3월에는 다시 충주 외서촌(外西村=陰城지역) 보뜰(洑坪; 가족을 이곳에 옴겼다.)로 옮겼다. 4월에는 양구군 양구면 죽곡리(竹谷里) 길윤성(吉允成)의 집에, 5월에는 김연석(金演錫)의 집에, 7월에는 양구와 간성 양군을 넘나들면서 피신했었다.
성황거리(비밀의 정원), 이명수의 집은 알 수 없다.
이때 7월 초순경에 신사는 성황거리 이명수의 집에서 “새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라는 설법을 했다. 8월에는 홍천에 있다가 공주 정안면 활원에 가서 가족을 만났다. 9월에는 청주 대주리 서택순(徐垞淳)의 주선으로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금성동(金城洞)으로 이사갔다. 1891년 10월에 생활신천의 지표로서 10개조항(一曰明倫理, 二曰 守信義, 三曰 勸業務, 四曰 臨事至公, 五曰 貧窮相恤, 六曰 男女嚴別, 七曰 重禮法, 八曰 正淵源, 九曰 講眞理, 十曰 禁淆雜)을 명시한 통유을 발송했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해월신사의 연대기(1) [162.8]|작성자 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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