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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0월 1일. 저서 – 시집
남진원 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지음 (1987년 10월 1일.명지사 )
목차
다시 창세기에 – 7 / 종족 – 8 / 삶2 - 10 /비우기 -12 / 낙엽 - 13 / 김장을 담그며 - 14 / 단지 한 개 정도는 - 16 / 우리들의 겨울 – 18 / 물 - 21 / 연 – 22 / 부끄러움 – 24 / 눈1 – 26 / 눈 온 아침 – 27 / 어느 가을 – 28 / 봄 비 – 29 / 숭늉을 마시며 - 30 / 늦가을 산 – 32 / 가을 산 – 33 / 가을 강가에 서면 – 34 / 노을 – 35 / 달과 별 – 36 / 눈2 – 37 / 가을엔 이가 아프다 –38 /성마령 – 40 / 지하철 3호 – 42 / 잡초 – 43 / 풀잎은 누구에게 –44 / 낯짝 – 46 / 갱속에서 – 48 / 목조르기 – 50 / 뉴스 8692호 – 51 / 귀신아, 잠 깨어서 – 52 / 삶1 – 54 / 부엌 - 56 / 황토를 밟고 서면 -58 / 가리왕산 古死木 - 60 / 가을 山行 - 62 / 황국 – 64 / 印章 - 65 / 별 – 66 / 對局 - 67 / 바다1 – 68 / 바다2 – 69 /바다3 - 70 / 담배1 - 71 / 담배2 - 72 / 해 – 73 / 사람아 – 74 / 산나리 – 76 / 꽃 - 77 / 코스모스 – 78 / 비 – 79 / 해님이 꽃밭에 – 81 / 해바라기 – 82 / 눈병 – 83 / 꽃밭에서 – 84
글 머리에
시집을 묶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내게는 이렇다할 중대한 이유라는 게 없다.
그러나 시집을 묶어내는 순간이 내게는 큰 즐거움이고 내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세 번 째 시집을 묶어낸다.
전체적인 사정이 잘 돌아간다면 좀 반질반질하게 내고도 싶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아주 만족한 상태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고 좀더 작품 창작에 몰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도와주고 협조해 준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여기 적어 두고 시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 1987년 여름 강릉에서 -
다시 창세기에
때를 빨아 버리고 싶을 때
기름을 생각하지만
꿈을 빨아버리고 싶을 때
향기 있는 석탄을 생각하지만
세상은 빨아버리기 조차 아가운 관심
덕지덕지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세상은 녹이는 용광로에다
와삭 녹인 후
산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는
또다시 창세기가 돌아오는 날
그때
돌이 되리라.
種族
살과 뼈가 기름으로 만들어진 종족에게
주어진 지유는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고 기름에 불 지르는 것
뿐이다.
못 조각 몇 개와 사금파리 몇 개를
살 속에 박고 다니는 우리의 종족은
태어날 때부터
방황을 예고했다.
오늘도 사무실 네모난 방에 갇혀
기름 많은 종족의 어깨 아래에서
뼈들은 어디를 위해 무릎을 꿇고
방황을 찾고 있는가?
작고 가냘픈
눈을 부릅뜬 채
혼돈과 무지로
너는 깨어나고
사슬에 묶인 종족의
흰 뼈가 웃으며 서 있는 광장
더러운 개와 뱀과
사슴의 종족이
서로의 때를 살찌우며
살을 태우기를 거부하고 있다.
벼를 녹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기름에 불 지르기를 거부하고 있다.
삶 2
살다 보면
새로운 다짐도 필요하다.
마누라쟁이와 싸우는 것도
이젠 내가 참아야지
가끔씩 이런 다짐을 하며 살다 보니
제법 사람 꼴이 돼가는 같다.
해 뜨고 해 지는
늘 그 틈바구니 삶이지만
집안 청소도 하고 새 옷도 입어 보고
이발도 하고 양치질도 하고
좀 바지런을 떨면
푸릇푸릇한 냉이 맛도 난다.
위대한 사상가도, 철학자도, 정치가도
아니지만
하늘과 햇빛과 물을 벗하며
한줄 詩와 가까이 지낼 수 있음은
다 복 받은 일이거니
가끔씩
고마운 생각으로 살아야 겠다.
비 우기
비우는 연습 중이다.
이가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도 비우고
다시 마주하기 싫은 사람도 비우고
슬픔도 비우고
기쁨도 비우고
욕망도 비우고
체념도 비우고
뼈를 비우고
살을 비우고
어둠도 비우고
빛도 비우고
자꾸 비우는 연습 중이다.
낙엽
빈 땅에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헤어짐도
겸허한
사랑
가을빛에
흔들리는
마음을 챙기지만
낙엽이여
나무는
무거운 그림자를 안고
쓸쓸함 몇 개로 묶어 놓을 수 없어서
허전함 몇 개로 묶어 놓을 수 없어서
김장을 담그며
가을이 저무는 문턱에서
한가로운 웃음을 섞어가며
김장을 담근다.
김장을 담그고 나면
잔걱정도 한풀 엷어지고
설한풍에도
따끈따끈한 구들목만 있으면
그만인 것
얼얼한 맛을 버무려넣고
맛들일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었다.
이 김장으로
적도 부쳐 먹고
만두도 해 먹고
국도 끓여 먹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먹는 낙이 첫째 아닌가.
엄동 한철을
말없이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김장 덕분인데
배추야, 무우야
고맙다.
단지 한 개 정도는
단지 한 개 정도는 살면서
된장 맛처럼
곁에 두고 볼 일이네.
빈 놈으로 한 개 정도는
마당이고 우물곁이고 나무 밑이고
그 어디이건 간에
둬 두고 볼 일이네.
보게나
해 뜰 무렵엔
새떼가 무더기로 들어차고
한나절엔
심심한 하늘이 고였다 가고
어떤가
저녁 무렵이면
산마루에 걸렸던 노을이 담겼다가
밤이면 여보게
촉촉이 이슬에 젖은 풀벌레 소리를 타고
스르르 달빛이 흘러드는
그러다 절로 울려나오는 가야금 하며…
단지 한 개 정도는
가슴 한 쪽에
놓아두고 볼 일이네.
우리들의 겨울
<1>
모닥불이었다.
전생의 늪을 휘돌다
마주한 눈물이었다.
조금씩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고
바람이 불 때 쯤
눈에는 눈으로 불씨를 견디며
겨울 하늘에 불을 올렸다.
서늘한 소리 속으로
살과 뼈속에 남아 있던 물방울을
기화시키는 수증기의 질긴 외로움
조만간 술 기운에도 쓰러지지 않을
별이 보였다.
<2>
아직 흘리지 못한
몇 조각 만남이 있었길래
자리도 없는 땅 위에 선 채
흰 옷고름으로 부는 바람
그대 가슴 밀물지는 날에도
터질 듯 말 듯
끝내 사랑하나 나누어 들지 못한
부끄러움만 쌓이고
마른 피부 사이로 떠내려가는
우리들의 겨울
가슴조차 비어버린 지금
차가와지는 어둠을 누르며
악수를 한다.
나, 꽃잎의 꿈을 꾸고 싶다.
<3>
그리움도 익으면
분이 나는가
쓸쓸함 몇 개로 비인 하늘, 땅, 나무
깊은 눈물의 어지럼증 타고 별이 뜨고
그대 솔빛 파릇한 가슴에
김오르는 말없음표
젊음이 젊음 만이 아닌 것으로
늙음이 늙음 만이 아닌 것으로
자리를 비우면
거기
물풀이 크는
마을 한 채 지을 것이니
둥그런 달도 한 채 띄울 것이니.
물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하고
냄새나는 것을 말끔하게 하고
사람 몸뚱아리를 매끈하게 하고
그래서 물, 원하는 것에게 다 주고
그래도 남은 물
코의 때를 받아서
썩은 고름도 받아서
팬티에 묻은 똥, 오줌 냄새도 받아서
말
없이
흘러간다.
鳶
하늘, 해, 구름에
먼 먼 웃대의 말씀이 얹힌
그래서 말씀 하나 앉히고 싶은 바램으로
댓살에 종이를 바르고
귀한 귀 하나를 열어놓은 아침.
가난도 맛드는 연줄에
맺힌 것
가라앉힌 것
모두 일구어
신라적 바람마저 부추기며
비늘을 세우면
발가벗은 몸으로 솟구치는
외로운 넋 하나
광활한 솟을 대문을 두드리는
아름다운 나의 자맥질
연실
넘실거리며 출렁이며
함성 한 끝을 쥔 채
마악 불을 지르고 있다.
부끄러움
어른이 컨닝을 하다 아이에게 들킨
어른의 얼굴을 쥔 아이의 눈이
부끄러워하고 있다.
다 그런 거야 임마
너도 크면 알게 돼
아이의 눈속에 갇힌 어름의 함성이
쳇바퀴를 돌며 외칠수록
아자씨
용서해 줘요
아이가
자꾸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어른의 긴 혀가
목구멍을 탓하지만
헛기침 바로 뒤에 목구멍이
또 부끄러워 하는 줄을
눈1
줄이 끊어진 것이다.
아니
매듭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세상만사 쯤 한번
마음 밖에다 훌쩍 던져놓고
푸짐하게 쌓이는
눈이나 보라 한다.
하기사
봄부터 가을까지
어디 넉살좋게 늘어진 잠이나
제대로 자 봤던가.
삶의 질긴 고삐를
오늘 만이라도 풀어 놓고
그저 푸근하게
잠자듯 눈이라 보라 한다.
꿈꾸듯 눈이라 보라 한다.
눈 온 아침
헛된 울음과 웃음
욕지거리들이
함몰된 채
나무여
저 순교자의 손처럼
아침이 빛나고 있다.
하늘은 보고 있는가
꿈꾸고 싶은
허전한 얼굴을
성냥팔이 소녀가
땅의 아침을
손시린 채 받들고 선
이 空腹의 城에
누가
성을 지키는 빛을 뿌리는가
햇살이 무너지도록 쏟아지는가.
어느 가을
헤어져 쓸쓸한
풀숲에
남은 꽃그늘
몹쓸
꽃대궁을 쓰다듬는
바람의 서운함만 쌓여
섭섭함이 비고
또 섭섭함이 비면
그 때
우물 곁에 두고 싶은
귀뚜라미
귀뚜라미 울음
봄비
망설이다가
한참을 그렇게
두근거리다가
가슴을 여며 안고
사쁘니
떠나고 있는 것이야
희디 흰
목련이 피는 밤
전하고 싶은 그리움일랑 챙겨
송송송송
오시고 있는 중이야
숭늉을 마시며
잠시 생활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숭늉을 마신다.
검정 쇠솥에 눌어붙은 누릉지를 끓여 마시던
숭늉은 아니지만
숭늉을 마시면
문득 장작 타는 연기 사이로
소금처럼
빛나는 고향집
나사못으로 꽉 죄인 듯한
하루하루를 무너뜨리고
빽빽이 들어선 건물 사이를 돌아
우중충한 하늘 빛을 걷어내고
소나무 숲을 헤치며
우르르 솔바람 소리가 들렸다.
늘 바쁜 같고 늘 피곤한 내 몰골 한쪽을
너는 아름드리 고목나무의 까치소리로
환히 열어놓고
양지쪽 아지랑이든
모깃불 쫓던 손자국이든
떨어지는 잎을 책갈피에 모으던 일이든
아무렴
설움이면 어떠랴
아무래도 좀 천천히
천천히
숭늉을 마시며
늦가을 산
타는
불길을‘ 가라앉히고
사람이
들어서도
모른 채
탈속한 눈빛으로 앉아 있다.
가을 산
두근거리며
산꽃이 피었습니다.
오래도록
쓸쓸한 모습입니다.
가슴이 설레이고만 싶은
나즉한
눈물 하나 흘리고 싶습니다.
다시는
불꽃으로 타지 않아도
두근거림 데워가는
작은 나라에 머물러 있습니다.
억새꽃 우거진 길 따라
산새 울음이 고운
외로움 몇 송이가 손 흔드는 나라입니다.
가을 강가에 서면
이가 아파도
기댈 곳이 없어
강가에 서면
차가운 물소리
구부러진 채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사랑하는 이,
실낱같은 그리움의 머리칼을 세다가
너무 맑아서 눈을 뜨면
산도
강도
나무도
어깨가 허전해 보인다.
아무렇게 몇 송이 꽃이 피어
웃는 날
노을
기인
그리움 하나
익은 채 떠서
호올로
빛나는
눈 먼 사랑
지금은
황홀한
아픔
달과 별
임
오시듯
달
뜨면
그 곁에
반작이고 싶은
별
한 개
눈 2
야들아
하늘의
층계를
밟으며
천상의
주인이
오신다.
가을엔 이가 아프다
씻길 대로 씻긴 가을 하늘을 보면
이가 아프다.
외진 산기슭
피어 있는 코스모스
흔들리는 바람에도
이가 아프다.
이리 소중해도
닦을 수가 없어서
차마 닦지 못해
다시 어느 해 저승 봄에 솟을
이가 아려 온다.
오랫동안 무던히
잊은 듯 살아온
뽀오얗고 귀여운 이
가을이 익어가는
강가에 서면
봄 그림자처럼
또 이가 아파온다.
성마령
어머니 무명옷 같은
고갯길에
너
도라지꽃 피어
저무는 길목에
사슴처럼
목이 긴 소나무여
길손의 그림자
날이 저물면
만나고 헤어진
빈 자리 마다
별꽃만 수없이 쏟아지더니
이제는
주인도 손도 없는
고갯마루에
황토여
뻐꾸기만 우는가
지하철 3호
지하철 3호를 타면
석간 신문이
막 팔렸다.
똥×× 개×× 부정××금과
사라진 사람 매각
금가정부구출 죽음보장
다음 도착역은 시청 시청입니다.
내리실 곳은 왼쪽
잡초
여기 저기
웅크리고 앉았다.
저들끼리
구부러진 허리를 펴고
하루에도 몇 번 씩
엎어지다가 일어서다가 고꾸라지다가
또
배고픈 뿌리를 박는다.
풀잎은 누구에게
저 작은 것들이
밟히면 죽는 줄 알면서도
브브브브 울며 다닌다
힘이 세지 못해서
큰 소리도 못내고
우우우
쉰 목소리로
풀뿌리를 흔들어 대는 풀벌레
허기진 울음을
날이 밝도록
쏟아 놓았다.
한 잠도 자지 못한 풀잎들이
그들의 속말을 밤 내내 들어 주었다.
온 몸에 매달린 풀빛 울음으로
풀잎은 무겁다.
풀잎은
누구에게 …
누가 풀잎의 말을 들어 줄 수 있을까.
낯짝
남들은 낯짝이 보배라는데…
그놈 참 잘 생겼다. 어렸을 댄 그 말도 많이 들었는데 낯살이나 먹어 가면서부터 거울을 보면 쪽제비 낯짝처럼 생긴 게 먹어도 살은 어디로 갔는지 볼테기는 옴팍 들어갔고 광대뼈만 불쑥 튀어 나왔었다.
자고 나면 얼굴에 살이 좀 붙을까 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얼굴을 만지며 거울부터 찾아 들지만 꼬장꼬장한 성깔 때문에 어디 붙을 살이 있겠는가.
먹고 나면 잠만 자는 돼지 새끼도 더러 부럽다요. 푹푹 살찌는 잠이라도 기똥차게 자 보고 세상 근심일랑 걱정거리일랑 훌훌 벗어 던지며 사는 법도 배우다 보면 톡톡한 살이라도 안 붙겠는가.
할 일이 없는 어떤 마누라처럼 잘 처먹어 뒤뚱거리는 뚱뚱보 돼지는 싫지만 누님, 광대뼈 드러나지 않도록 나도 살 좀 붙는 비결 좀 알으켜 주소.
장모님 뵙기도 민망하고 맥도 빠져 보이는 게 걸어가면 꼭 아편쟁이 같아 죽겠소다.
나도 남들처럼 번들거리는 낯짝 한 번 쳐들고 살고 싶소.
갱속에서
밤이었다.
무후하게 잠드어 있는
어둠
밥 한그릇의 의미를 생각하며
어둠을 삽질한다.
태초에
거대한 땅에다 풀어놓은
어둠의 주인은 누구일까
동굴 모서리에 말라 붙은
공룡의 정액을 쪼아 물고
박쥐가 날고
목숨 몇 개 무너져 막힌
폐석의 저 쪽
발바닥이 아픈 우리들의 새벽은
목마름으로 남고
어둠에 섞이는 노동과
살아있는 것을 위해
화석 같은
새가 울고 있었다.
목조르기
벌써
첫 번째 노인의 목이 졸렸다.
다음 여인의 목이 졸여지고 있다.
그 다음 소년의 목이 졸려 지려고 한다.
저 손은 보이지 않지만
무척 바쁜 손임에 틀림없다.
오, 목 조르는 피곤한 자여
내일은
당신의 목이 안전한지
살펴 볼 일이다.
뉴스 8692호
죄송합니다.
0시 발 서울행 열차는
전복 중에 있으므로
예정시간 보다 10분 빨리 가겠음.
반갑습니다.
비가 오는 도중 눈이 섞이다가
불볕더위가 예상 됨.
감사합니다.
페차장에 모여 있던 차들이
일제히 정오를 기해
인사를 다닌다고 함.
끝.
鬼神아, 잠 깨어서
鬼神이 잠들었구나
五方神將 관속에 배를 들먹거리며
편하디 편한 잠을 자는구나.
잠이 들면 가는 귀 먹는단다
잠이 들면 새앙쥐가 코 깨문단다.
일어서라 잠든 귀신아
머저리 귀신아
네 앞에 차려논 돼지 정성도 받고
엉시렁 덩시렁 김오르는 인간 정성도 받고
흥에 겨워
절름발이도 고쳐라
가난뱅이도 고쳐라
여기도 귀신이 잠들었구나
황폐한 빌딩 속에
가랑이 가랑이 벌리고
오오 불쌍한 군살만 찌는구나.
깨어나라
깨어서
백두산 하늘도 데려오고
한라산 바람도 몰고 오고
강원도, 경상도, 함경도, 제주도, 곳곳에서
신명난 춤을 추며
저 병신 짓 하는 병신 고쳐라
저 눈 뜬 봉사를 고쳐라.
삶 1
소매를 걷어 부치면
네 머리칼도 싱싱한 날
단칸 방도 한결 넓어 뵈고
마른 심장도 퍼렇게 젖을 날 있어.
근심이야
걱정이야
둘둘 말아
콱 흙속에 끌어 묻고
저승 길목에서
그때
서러운 눈물
팍, 불지르자.
지금은 푸르도록
목줄 틀어 올리고
부르튼 가슴
아리도록 신명나게 살아갑세.
부엌
어머니허리가 익은 부엌
단맛 쓴 맛도 골라 버무려놓고
매운 가난도 한 뭉텅이 장맛으로
삭혔습니다.
땀띠 돋는 가슴이며 등허리 물큰 나날
소금 절이고
배추잎 푸른 칼질을 하며
아침을 장만하셨습니다.
보리밥과 숭늉과 된장찌개를
당신의 불꽃으로
끓이고 닳이고 졸이시던
어머니의 부엌은
이제 그 내음처럼
깊은 잠 속으로 잠겨 갑니다.
아아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
사람아
너는 부엌에서
늘 손금을 보는 일을 잊지 말 일이니.
황토를 밟고 서면
여기 황토를 밟고 서면
할머니가 그랬듯이
늘 한 맴을 먹어야 된다고
가슴을 잡아 쥐는 바람을 본다.
삼베치마 같은
달이 비치는 밤이면
질긴 숨결을 꼬아 자리를 매는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는 소리도 들렸지.
지금도 매운 노끈 몇 개 묻혔음직한
황토에
물 때 끼지 않은 소나무들이
든든히 뿌리를 박고 선 길목
이곳 소나무 숲에 서면
할머니가 그랬듯이
늘 한 맴을 먹어야 된다고
또 가슴을 잡아 흔드는 바람을 본다.
가리왕산 古死木
가리왕산 정상에는
천년은 더 살았음직한 고사목들이
또 천년을 살아갈 뼈를 다듬고 있었다.
누가
죽음이라 이름했던가
피와 살과 체온을
벗어 던진 후에야
온전히 살아 있는
삶의 自由
이름 지을 수 없는 넉넉함 속에
침묵으로 가득한
네 언어의 푸른 사리들
어둠이 등천하는 안개 밭에서
태초의 소금을 뿌리며
바람이 날고
하늘 문을 열고 쏟아진 별들이
나무의 가슴에 돋아나고 있었다.
가을 산행
가을산은 풍성해서 좋다.
구르는 돌 하나에도 山色이 서려 있고
산의 눈빛처럼 맑은 수풀 밑 옹달샘
팔과 다리를 구부리고 펼치며
제멋대로 엉켜 사는
잡목들의 우직한 자유스러움을 보며
익을 대로 익은 머루 덩굴을 지나고
다래 넝쿨을 지나고 있으면
새큼한 가을빛이 온 몸에 시려온다.
불쑥
나도
산봉 하나로 치솟아 오르고 싶은 날
예서제서 들리는 새소리를 세며
산꽃을 뜯기도 하다가
자작나무 숲을 헤치며
단풍 길을 접어들면
좋을시고
이 산속 어디선가 바둑을 두고 있을
신선이라도 만날 같소
오늘은 村夫인 나도
한 세상 탈속한 느낌이 드이
황국
가을볕이 폭 익은
국화 화분을 들고 찾아왔다.
사람도
국화꽃이다.
마음이 송 송 송 국화잎에 맺혀
눈이 아리다.
사람아
국화 화분을 들고 다니지 말지어다.
印章
이름이 생기면서
부끄러운 이름을 새겨서
사는 게 온전한가 확인하며
인장을 찍는다.
그러다
땅 속에 들어갈 때면
때 묻은 이름을
네 안전한 가두어짐을
누가 찍을 것인가.
별
풀꽃이
웃는
그런 모습이라서
닿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머얼리서
이름만
불러 본다.
별 --
對局
세상을 가운데 놓고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思惟
몇 번을
行馬의 바른 자리 앉힘
할 수 있을 것인가.
죽어 있는 것들을 보며
고독한 꿈을 꾸는
돌들이여
탁
오랜 잠에서 깬
돌 하나를
無量의 벌판 위에 놓는다.
바다 (1)
前生의 緣 있어
만나는
사모친 원쑤
미친
병이 도져
여름은 그곳에
날 던졌다.
뜨거울수록
별미라서
쾌청한 상처
출렁이며 넘실대는
네 시퍼런 배를 가르며
푸른 핏물을 삼키고 삼키다가
지난 한 해 동안
말라비틀어지고 돌돌 몽쳐진 방구를
콰르르 싸댔다.
바다 (2)
-日出-
門이 욜리고 있습니다.
저 아픔은
太初의 聖音
세상에 던져지기 전에
새벽은
당신의 下血로 광휘로운 빛을 발하고
지금 마악
저리도 눈부신 아들 하나가
하늘로 출항하고 있소.
바다 (3)
가을 햇살이 남실남실
고요한 세상 하나가
머물고 있었다.
아우성으로 끓던 바다는
진득거리는 소금끼를 풀던 바다는
잡석에 섞여 히히덕거리던 바다는
다시
맑은 하늘을 벗해
갈매기들을 받으며 던지며
바다는
가을 바다는
투명한 세상 하나에
머물고 있었다.
담배 (1)
몇 시간만 참아야지
하면서도 이내
입에 꺼내 물고는
이번 한 번 만이다.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
담배를 끊으면 체중이 늘고
건강해진대요.
아내의 꾀임도 영 효과가 없다.
한 시간만 지나면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도
그렇지 못해
꽁다리를 허기진 개처럼 찾는다.
있으면 그렇고
없으면 못배기는
마누라쟁이 같은
요것
담배 (2)
나의 담배는
思惟의
샘
조반을 끝내고 뜰에 나와
담배를 붙여 물면
잊었던 것들이 살아나와
그리운 것들이 살아나와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오른다.
글샘 하날
山中에
넉넉하게 비워두고
오래도록
가슴을 데울
뜨거운 詩 하날 꿈꾸는
화평한 아침이다.
해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어서
(사실 그럴싸한 핑계지만)
눈곱을 죄뜯으며 아침상을 물리면
중천에 뜬 해가 웃는다.
능청스러운
놈
콧수염을 뜯으며 신문을 보는
저녁 무렵이면
할 일 벗이 빈둥거린 내게
해란 놈이 또 웃는다.
통 서두르는 낯짝을 볼 수 없지만
하루를 꽉 차게 살아가는
무서운
놈
사람아
거리에 나서도 사람
산에 올라도 사람
바다에 가도 사람
직장에 출근을 해도 사람
가는 곳곳마다 사람이지만
어디
푸근히 마음 놓아두고 싶은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그리 흔하던가.
어쩌면
천당에도 지옥에도 발 붙일 곳이 없어
한 세상 더부살이로 살고 있을
목숨일지라도 모를 우리네가
또 입은 왜 그리 많은지
사람이 많아서 기뻐해야 할 일이것만
사람을 만나서 바가와 해야 할 일이건만
코가 비슷해 말을 건네 보면
귀가 비슷해 악수를 하고 보면
이것도 아니구나
허전해지는 세상
너
사람아
산나리
산에 산에
홀로
피었네
산이
좋아
외로운
아이처럼
서 있구나
소슬한‘
바람에
흔들리며
꽃
보라
끝내
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의
피
핏자국
코스모스
은은한 그리움으로
티 없이 맑게 피었다가
가을 바람에
호젓이 지고 있다.
네가 운다면
눈물은 얼마나 맑으랴
네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비
잎이 돋아나는 날
나무의 가슴 속에 까지
솔솔 내리는
손이 파란
봄비
봄
푸른 칼날로
번뜩이는
들판
금이빨을 박은
바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해님이 꽃밭에
해님이
아주 가만히
꽃송이를 열어보고 간다.
늘 웃고 사는 가슴 속에
고인 눈물부터
먼저 만나 보시고 가신다.
해바라기
땅에도
하늘 말씀
좀 주소서
지금 토지신께서
활활
봉화를 올리고 있는 중
눈병
눈이 꽤나 속이 상해 있었다는 걸
눈병이 나서야 알았다.
너무 더러운 것을 많이 본 죄로
더러는 안 볼 것을 본 죄로
눈이 앓고 있다.
곪아 터진 후에야 원망을 하는
나 자신을 비웃으며
나 대신 눈이 앓고 있는 것이다.
눈이 이제는 좀
세상을 가려가며 보라고 한다.
한동안 한쪽으로만
정성스럽게 보는 법을 익히라고 한다.
꽃밭에서
철 모르고
부그러움도 없는
그런 세상이다.
벌이 한 마리 날아와
닮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남진원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발행일: 1987년 10월 1일
인쇄일: 1987년 9월 30일
인쇄처: 명지사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