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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대승론 중권
3.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 인식의 상에 들어가다
위와 같이 이미 응지승상(應知勝相)을 설하였다.
어떻게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을 알아야 하는가?
다문(多聞)에 훈습된 의지는 아리야식에 섭지되지 않으면서 아리야식과 같이 종자를 이루며, 정사유(正思惟)에 의해 섭지되며,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는 상에 의해 생하여지며, 취하여진 것[所取]과 같은 종류이며, 견이 있으며, 의언분별(意言分別)이다.
어떤 사람이 응지(應知:인식)의 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이 서로 이어지고 헤아릴 수 없이 세상에 나오신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여 높이 섬김을 이미 얻으며, 정위(正位)를 결정코 믿고 즐거워함[信樂]에 이미 들어가며, 선근을 잘 성숙시키고 닦아 익히고 늘리며 키움으로 해서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올바르게 얻는다.
모든 보살은 어느 처(處)에서 유식관에 들어가는가?
가르침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봄으로써 상을 드러내므로 의언분별하는 대승의 인식현상의 상이 생하여진다.
원락행지(願樂行地)에 들어간 사람은 들음[聞]을 따라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견도(見道)는 이치와 같이 통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수도(修道)는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구경도(究竟道) 가운데라는 것은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一切法]은 오직 식만이 있다.
설명하는 것과 같이 문혜를 따라서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이치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선근력을 지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세 가지 모양의 연마심(鍊磨心)이 있기 때문이며,
4처의 장애를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며,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되고 틈이 없이 닦고 공경하여 사마타비바사나(奢摩他毘鉢舍那 : 定慧)를 닦아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지 않기 때문이다.
시방세계를 세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세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도(人道)에 있는 중생이 순간순간에 위없는 보리를 증득(證得)한다.
이것을 첫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바른 의지(意志)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을 반드시 생하여 자라게 함을 얻으니, 내가 믿고 즐거워하여 이미 견고하게 머무름을 얻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나아가 원만함을 얻으므로 곧 어렵지 않게 된다.
이것을 두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많은 선법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뒤에 명(命)을 버렸을 때 모든 생을 받는 가운데에서 애착할 수 있는 부유함[富]과 즐거움[樂]이 자연히 이루어진다.
이 사람이 장애가 있는 선(善)을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가 오히려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어찌하여 나는 원만한 선과 장애가 없는 선을 얻는다고 하며,
모든 뜻과 같이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을 마땅히 이루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것을 세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도(人道) 가운데의 중생은
생각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처소(處所)가 세어 헤아림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열한 마음이 없다.
착한 마음의 사람은 믿고 즐거워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을 생할 수 있고
뛰어난 사람은 이러한 뜻을 얻어
보시 등을 닦을 수 있다.
만약 착한 사람이 죽을 때
곧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는다.
멸위(滅位)의 원만하고 깨끗한 선(善),
이러한 정의는 어찌하여 없는가?
네 번째의 처의 장애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의 사유를 버려 떠났기 때문에 삿된 사유가 멸한다.
대승 가운데서 믿는 마음을 생하고 결정코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모든 삿된 뜻과 의혹을 멸한다.
이러한 듣는 것[所聞]과 사유하는 것[所思]의 모든 인식현상[法] 가운데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의 삿된 집착을 버려 떠나기 때문에 법집(法執)을 멸하여 제거한다.
안립하여 눈앞에 나타나 머무는 모든 상과 사유를 모두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별을 제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드러나 머무르고 안립한
모든 상과 사유를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된다. 무슨 인과 무슨 방편으로 들어감을 얻는가?
문훈습(聞熏習)의 종류는 정사유에 섭지되며, 가르침과 실체와 같이 나타나며, 견이 있는 의언분별(意言分別)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는다.
이름과 실체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을 말하며, 거짓으로 심사를 세운다.
네 가지 여실지(如實智)로 말미암으니,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자성 그리고 차별이다.
여실지는 네 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이것들과 같이 실체적 대상에 이미 들어가 이해했다면 곧 가행(加行)을 닦아 유식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관 가운데서 의언분별하여 문자와 언설[字言] 그리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이 문자와 언설의 상(相)은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통달을 얻는다.
이 실체적 대상은 이름과 언설에 의지하는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이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차별은 단지 거짓으로 설한 것이며, 양(量)이 된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다시 이러한 위계 가운데서 단지 의언분별만 증득(證得)한다. 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을 보지 않고, 자성과 차별의 가설도 보지 않는다. 실상(實相)으로 말미암아 자성과 차별의 정의가 있음을 얻을 수 없을 따름이다.
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아 의언분별에 있어서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므로 유식관에 들어감을 얻는다.
유식관 가운데서는 무슨 인식현상에 들어가며,
무슨 인식현상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가?
단지 유량에 들어가며, 상(相)과 견(見)의 두 가지 인식현상이며, 여러 가지 상모이며, 명과 의, 자성과 차별의 가설, 자성과 차별의 대상, 이 여섯 가지의 상에는 실체[義]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있지 않아 실체적 대상이 된다.
일시에 갖가지 상모와 같이 나타나고 생하기 때문에, 마치 어둠 속의 등나무가 뱀과 같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마치 등나무 가운데 뱀이 곧 허망하여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러한 등나무의 의미를 요별한다면 먼저의 뱀이라는 산란한 지각[亂智]은 경계를 연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곧 문득 사멸하여 단지 등나무라는 지각(知覺)만이 있다.
이러한 등나무의 지혜는 허망하여 실제의 경계가 없다고 미세하게 분석함으로 말미암는다. 왜냐 하면 단지 색(色)과 향(香)과 미(味)와 촉(觸)의 상이기 때문에 만약 마음이 이 경계를 연한다면 등나무의 지각은 역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미 이와 같이 보아서 여섯 상이 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의언분별로 나타나는 것을 굴복시켜 없앤다면, 마치 뱀이라는 지각과 같은 차별적 대상[塵]의 지각이 생하지 않는다.
여섯 가지 상을 굴복시켜 멸한 실체적 대상 가운데에서 이 유식의 지각이 역시 등나무라는 지각과 같은 것을 굴복시켜 없앨 수 있어야 한다.
진여의 지각에 의하여 이와 같이 보살은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의언분별의 모습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분별성에 들어감을 얻고,
유식의 실체적 대상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의타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어찌하여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가?
만약 유식의 상(想)을 버렸다면 이 때의 의언분별은 먼저 들은 것[所聞:문혜]의 인식현상이 훈습한 종류이다.보살은 이미 차별적 대상[塵]의 상(想)을 요별하여 굴복하여 없앤다.
모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것도 다시 생하는 연(緣)이 없기 때문에 생할 수 없다.
따라서 유식과 같은 의언분별도 역시 생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모든 실체적 대상[義]과 명(名) 가운데서 오직 무분별에 머문다.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인 법계(法界)를 증득할 수 있다.
이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연과 소연이 무분별지를 생한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식현상과 인식 주관과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
자성[性]과 간략한 명(名)과 상세한 명,
깨끗하지 않은 것과 깨끗한 것과 구경(究竟)의 것,
열 가지 명은 차별적인 경계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응지승상(應知勝相)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 상(相)에 들어감으로 해서 처음에 환희지(歡喜地)에 들어감을 얻어서 바르게 법계를 통달하며,
시방의 모든 부처와 여래의 집안에 생할 수 있으며,
모든 거듭 생하는 마음이 평등함을 얻어서 모든 보살의 마음의 평등함을 얻으며,
모든 부처와 여래의 마음의 평등을 얻는다.
이러한 관(觀)을 보살의 견도(見道)라고 이름한다.
또한 어떠한 이유로 보살은 유식관에 드는가?
궁극을 꿰뚫는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세간을 벗어난 사마타(奢摩他:定)와 비발사나(毘鉢舍那:慧)의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뒤에 얻어지는 갖가지 상식(相識)이 상(相)이 되는 지혜이기 때문에,
본래의 아리야식 가운데 모든 유(有)의 인(因)인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함께 제거하여 멸하게 되며,
법신을 촉(觸)할 수 있는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생하고 키우게 되며,
의지를 바꾸게[轉依] 되며, 모든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얻게 되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된다.
따라서 유식관에 들어간다.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진 지[無分別後所得智]란 본식과 생하여진 모든 식식(識識)과 상식(相識)의 상 가운데서 마술과 변화 등의 비유와 같이 관하므로 자성은 전도가 없다.
이러한 논리로 말미암아 보살은 마술사가 모든 마술에 있어서 스스로 요달하여 전도가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상의 인연과 과 가운데서 만약 바르게 설할 때에는 치우침과 전도가 없다.
이때 유식관의 위계 가운데 바르게 들어가는 것에는 네 가지의 삼마제(三摩提)가 있는데, 이것은 네 가지 통달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아 낮은 품류의 대상이 없는 관[無塵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얻은 삼마제가 난(煖)의 행을 통달한 부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최상품의 차별적 대상이 없는 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증장하는 삼마제가 정(頂)의 행을 통달하는 부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네 가지 여실지에서 보살은 이미 유식관에 들어 차별적 대상이 없음을 요별하기 때문에 진실한 실체적 대상, 이 한 부분에 바르게 들어간다.
삼마제를 두루 꿰뚫어 행하니, 이것은 비안립제(非安立諦)를 따르는 인(忍)의 의지이다.
이 삼마제의 맨 나중의 찰나(刹那)는 유식의 상(想)을 깨달아 굴복시키므로 틈이 없는 삼마제라고 바꾸어 이름한다.
세간 제일의 인식현상의 의지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삼마제가 보살이 비안립제의 관(觀)에 들어가기에 앞선 방편이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초지에 들어간다면 이미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에 들어감을 통달할 수 있다.
보살은 어떻게 관행(觀行)을 닦아 익혀서 수도(修道)에 들어가는가?
보살의 10지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자세히 설하여 안립하신 인식현상의 상[法相]과 같이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 십이부 경전을 섭지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눈앞에 드러날 수 있다.
설하여진 통(通)과 별(別)의 두 가지 경계를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궁극에 통달한 경계를 연하여 생기함으로 말미암아,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지는 사마타비발사나의 지혜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백천(百千)의 구지 대겁(俱胝大劫) 가운데 거듭거듭 닦아 익힘에 의거함으로 말미암아,
예전과 지금 얻어진 전의(轉依)로 말미암아,
세 가지 불신(佛身)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가행을 닦아야 한다.
성문의 견도라는 것과 보살의 견도라는 것의 차별은 무엇인가?
성문과 보살의 견도에는 열한 가지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한 가지인가?
첫 번째는 경계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대승의 가르침[法]을 연하여 경계가 됨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의지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하여 의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통달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과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열반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무주처열반을 섭지하여 머무는 곳[住處]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지(地)의 차별이니, 10지(地)에 의해 벗어나 떠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번뇌의 습기(習氣)를 없애는 것과 정토를 다스려서 청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덟 번째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얻는 평등심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중생을 성숙하게 하여 가행한 공덕과 선근을 버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홉 번째는 태어남을 받는 것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태어남이 되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드러나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불자의 대집륜(大集輪) 가운데서 바른 교법(敎法)을 섭지하여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말한다.
열한 번째는 과보(果報)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는 여래의 법, 그리고 무량한 공덕이 생겨나서 과(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두 구의 게송으로 읊는다.
이름[名]과 실체적 대상[義]은 서로간에 객(客)이 됨을
보살은 심사(尋思)하여야 하며,
두 가지가 오직 양(量)일 뿐이라는 것과
그 두 가지의 가설을 관하여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참다운 지혜가 생겨나,
차별적 대상의 분별인 세 가지를 떠난다.
만약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면
3무성(無性)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바른 가르침인 두 게송은 분별관론이 설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적정위[靜位]에 있어서
마음이 오직 환영일 따름이라는 것을 관한다.
바깥의 차별적 대상의 상을 버려 떠나고
오직 스스로의 상념을 결정코 관(觀)한다.
보살은 안에 머무르며
소취(所取)가 있지 않음에 들어가고
다시 능취(能取)가 공(空)함을 관하여,
뒤에 둘이 없음을 촉(觸)하여 얻는다.
또한 『대승장엄경론』에 설하여진 다섯 구의 게송이 이러한 도를 드러낸다.
보살은 복덕과 지혜를 낳아 키워서
두 가지 자량(資粮)이 헤아릴 수 없을 때
인식현상에 있어서 사유하는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의 품류[義類]가 분별의 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실체적 대상의 부류가 단지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유식 가운데 사의(似義)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관을 행하는 사람은 법계를 증득하여
두 가지 상과 둘이 없음[無二]을 여읠 수 있다.
마음을 떠나서 그 밖의 것이 없음을 알면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곧 마음이 있지 않음을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가 있지 않음을 보아서
둘이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를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두루 항상 평등하게 행하므로,
빽빽하게 허물이 모여 있는 성질에 의거하는 더러움[染]을
마치 약이 독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떠나보내고 없앤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른 법(法:교법)이 올바르게 세워져서
편안한 마음은 법계에 뿌리를 두고
억념(憶念)이 오직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아서
지혜로운 사람은 공덕의 해안(海岸)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