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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보살경 제3권
9. 삼십칠품(三十七品)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뜻에 머묾[意止]을 깨달아 안다고 말하느냐?
만약 어떤 보살이 관찰하고 분별하려면 네 가지 의지[四意止]를 행해야 한다.
무엇을 네 가지 의지라 말하는가?
스스로 그 몸의 아프고 가려움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법 또한 다시 이와 같다.
무엇을 스스로 몸의 아픔과 가려움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법이라 말하는가?
이에 보살은 스스로 몸의 행[身行:업]을 관하고 참된 진리[眞諦]와 같이 관찰하니,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의 요체이다.
몸은 창병(瘡病)을 만들고 위태로운 재액과 온갖 해로움으로 즐겁게 익히며, 움직이고 놀이하며, 거칠고 더러워 청결하지 않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약간의 하자가 이 몸속에 가득하다.
아홉 가지 부스럼 구멍에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흘러나와 정결하지 못하고 냄새가 나는 것이니, 마치 변을 보는 변소와 같다.
이와 같이 자세히 관찰하면 머리털만큼도 좋아하여 취할 수 없다.
청결하지 못하고 더럽고 탁하니, 피부가 그 살을 덮고, 근육이 그 속에 얽혀 죄와 복으로 이루어져 쌓이고 모인 많은 집착이 곧 성음(盛陰)이 있게 된 것이다.
무엇이 쌓이고 모이는 것이며, 무엇이 성음인가?
모두 지난 세상 인연으로 이 성음이 있는 것이며, 본래 허황되고 거짓된 것을 의지하고 사모함으로써 이것을 덮었으니, 목욕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이것을 나의 몸이라고 말하나 이 쌓이고 모임을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을 성음이라고 하는가?
인연에서 일어나 과보가 상응하게 이루어지고, 행을 짓고 구르면서 4대(大)를 인연하니, 몸의 본말을 헤아리면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4대에 받아서 색음(色陰)을 이루며, 인하여 임시로 의탁함을 얻은 것이다.
몸이라 이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미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 그 까닭으로 몸[身]이라 말하며,
마음은 거기에 의지하니, 그 까닭으로 몸이라 하고,
죄와 복이 하는 바[所爲]이니, 그 까닭으로 몸이라 하여,
생각에서 생겨나 변변하지 못하고 천하며 행업과 더불어 화합하니, 그 까닭으로 몸이라 한다.
인연에서 이루어져 몸이 마침 조금 편안하다가 곧 다시 허물어져 장구하지 못하고, 항상 있을 수 없으며, 이윽고 마땅히 이별하니, 그 까닭으로 몸이라 한다.
안도 없고 밖도 없고 또 중간도 없다.
비록 시달림에 섰으나 몸이 몸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볼 수도 없으며,
밝게 알 수도 없고 생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생각도 없으니,
마치 초목ㆍ기와ㆍ돌의 종류와 같이 몸이 몸을 이루지도 못한다.
이렇게 관찰하고 통달하여 알면 곧 몸을 탐착하지 않고 사모하여 좋아함이 없어 몸이 근심이 되는 것을 알 것이다.
몸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으니, 몸이 이에 몸이 아니며,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으며,
목욕하여 화려하게 꾸며도 이 몸은 집과 같아 80가지 벌레가 이 몸을 괴롭히며,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병에서 이 몸을 구할 수 없는 3고(苦: 苦苦ㆍ壞苦ㆍ行苦]의 괴로운 액을 받으니, 말하는 바 고(苦)라는 것은 나고 죽는 근심과 이별하는 고난이다.
이 몸은 고통의 그릇으로 모든 위태로운 액을 받는다.
이렇게 관찰을 지녀서 사유하고 이치에 순종하면,
곧 몸을 탐착하지 않고, 타인도 사모하지 않으며, 뜻에는 즐거운 것이 없고,
이 몸은 나[我]가 없으니, 비록 편리함이 있으나 몸은 있는 바가 없고 다 진실함이 없으며,
이 몸은 공으로써 자연으로 허무하여 진실되고 바름이 없는 데 이르며 허위로 존립할 뿐이다.
이익이 없는 것이 얽혀 있으나 본래 행한 것을 따라 이루어져서 비록 이 몸이 있으나 곧 내 몸이 아니니, 마땅히 한결같이 사모하여 찾아 탐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능히 관찰함에 자기 몸의 수명은 합하거나 흩어지지 않고, 가고 오고 머물러서 있는 곳을 보지 못하여,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보지 못하며,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도 없고 다 집착하는 것이 없다.
신명(身命)에 의지하지 말라. 몸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내 것도 없으며,
곧 받은 것도 없고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쫓아 온 곳도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괴롭게 하되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한다.
몸의 본말을 헤아리면 생겨 일어나거나 머물러 서 있거나 다 없어짐도 없다.
보살이 몸을 관찰함에 이와 같이 몸이 없으며,
이미 몸이 허망함을 알면 만약 몸의 욕망이 성하고자 했다가도 문득 스스로 소멸하여 몸과 뜻이 곧 멈추어 서 있다가 순행(順行)하고,
이치와 같이 몸을 보면 곧 몸이 없어진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몸의 아프고 가려움을 관찰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보살이 몸의 세 가지 아픔인 즐거운 아픔[樂痛]ㆍ괴로운 아픔[苦痛]ㆍ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아픔[不樂不苦痛]을 관찰하여 그 아프고 가려움을 헤아림에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한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어 오직 허무에서 오며,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죄와 복의 과보를 받으며,
뒤바뀜을 말미암아 일어나니, 아픔은 본래 없고 생각을 인연하여 세워짐을 안다.
이런 관찰을 하는 자는 아프고 가려움을 만나지 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도 없고 처소도 볼 수 없다.
그 지나간 아픔도 공하여 내가 없음을 알며, 또한 내 것도 없고,
무상(無常)에 견고하니, 다 뒤바뀜의 법이라, 과거의 아픔에 공하고 담박하여 생각이 없고,
미래나 현재 또한 다시 함께 그러하여 이에 아픔과 가려움이 성립되지 않음을 안다.
형상을 찾을 수 없고 각각 스스로 분리되어 그 아프고 가려운 것은 일어날 것이 없고,
또한 멸하는 것도 없고 또한 있는 곳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어리석고 어두운 범부는 뒤바뀜을 말미암아 아프고 가려움이 생기며, 죄와 복의 보응도 적당하게 합쳐졌다가 곧 떨어진다.
그 까닭으로 아픔과 가려움은 다 공하다고 말한다.
황홀하고 허망하게 속이는 법이 이와 같이 아픔의 인연을 좇아 마음의 처소를 얻으면 아픔이 모여 마침내는 반드시 없어져 다함에 돌아간다.
아프고 가려움이 합하여 모인 처소를 보지 못하면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아픔과 가려움은 곧 공하고 자연이어서 형상이 없으며 생긴 것을 보지 못한다.
아픔이 생긴 것이 없다면 또한 없어질 것도 없고 성립한다는 생각도 없고 성립한다는 생각이 없음으로써 이미 모양[相]이 없고 모양은 생겨난 것이 없다.’
널리 이와 같이 관찰하면 몸의 아픔과 가려운 것은 곧 의지할 데가 없다.
아픔과 가려움을 알면 진제도 본래 없어 아픔과 가려움을 끊음으로써 모든 아픔에 들어감을 여읜다.
그것과 더불어 합하지 않고 아픔과 가려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온갖 행이 고요하여 속히 방편을 찾고 삼매인 정(定)에 이른다.
보살이 행을 관찰함에 아프고 가려움이 이와 같고 행을 보아 요달하면 곧 시방을 본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마음과 뜻의 행을 관찰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보살이 마음의 생각[心念:心識의 생각]이 행함을 관찰하고 뜻의 생각(意念)이 날 때 마음의 법을 관찰함에, 만약 이변(異變)이 있어서 이로써 능히 관찰하는 자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이 마음은 일찍이 뛰어 달아난 것도 없고 이를 곳도 없고 다른 인연으로 부림을 당하거나 모여진 것의 모양이다.’
마음은 일어나는 것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또 형상이나 모양[形貌]도 없고 다 얻을 수 없으며,
마음은 가고 돌아오고 하는 것도 없고 서도 설 곳이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도 없으며, 인연이 나타남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 마음을 헤아리면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중간도 없으면서 핍박하여 괴롭히는 것이 있다.
마음은 처소가 없고 스스로 그러함도 없으며,
갖추어 이루지도 않았고 마음은 끊을 것도 없다.
만약 끊을 것이 있다면 마음은 여러 가지 종류로 변한다고 이름할 것이다.
헤아리지 못하며 생긴 모양도 곧 없어진다.
지인아, 마음은 머무는 곳이 없고 마음은 있는 곳이 없다.
있는 곳[所在]을 이미 능히 깨달았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생각[心念]이 없는 것이며 또한 보이는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또 그 마음은 공하여 자연이어서 형상도 없고 중생이란 것도 없다.
또 있는 바도 없고 처소도 찾을 수 없다. 합할 마음도 없고 흐트러질 것도 없다.
마음은 과거도 없고 장차 올 것도 없고 중간도 얻지 못한다. 능히 보는 자도 없다.
마음은 자연이지도 않고 마음은 청정하지도 않으며,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단절하지도 않으며,
마음이란 마음도 없으니, 곧 본래 청정하다고 말한다.
뒤바뀜에 처해 있는 어리석고 어두운 범부가 허망한 인연을 가지고 모든 모양을 있다고 가르쳐 마음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킨다.
또 그 마음은 공하여 나라는 것이 없는데 몸이 있고 마음이 항상 있어 오래도록 영원히 편안하다고 헤아리니, ,뒤바뀐 법으로써 스스로 어두운 곳에 뛰어듦이다.
마음을 이와 같이 관찰하면 유순함을 얻어 마음의 뜻이 멈춘다.
마음은 생각[想念]이 없고 또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 마음을 밝게 알면 생긴 것에서도 생겼다는 생각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마음은 나오는 바도 없고 참됨[眞際]을 얻을 수도 없고,
그 모양을 얻을 수도 없으며 마음의 모양은 일어나지 않으니,
밝은이는 알 것이며 분별하여 그것을 통달하면 마음에 익힌 것과 나아갈 것과 돌아가 없어짐을 알 것이다.
자세히 알면 있는 것 같으나,
이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모여 익히는 것도 없고 멸하여 돌아가는 곳도 없으며 마음을 찾을 수도 없다.
마음을 찾을 수 없거든, 하물며 다시 익히며 구경에 돌아갈 것이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마음은 없어질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면 마음이 청정한 데 이른다.
마음이 이미 청정하면 번뇌에 떨어지지도 않고 오염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있는 것[所有]을 없앨 줄 알면 마음이 곧 청정해진다.
중생은 마음이 혼란하여 곧 번뇌에 물들지만 마음이 청정하면 곧 청정해져서 능히 없앨 줄 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마음에 번뇌가 있지만 이러한 까닭으로 중생의 행을 헤아리고,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곧 번뇌가 되니,
마음이 밝게 알면 곧 청정함을 이룬다.’
이미 이런 관찰을 하면 욕심의 번뇌도 찾지 못하고 청정한 마음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이에 마음이 본래 청정함을 통달하고 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과 뜻의 행을 관찰하여 곧 본래 청정함을 통달한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마음으로 존재하는 법과 그 법의 행을 관찰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어떤 보살이 일체 법을 관찰하되 내적인 법도 보지 못하고 외적인 법도 보지 못하고 중간에 있지도 않은데 핍박하여 괴롭히는 것이 있다.
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는데 12연기를 인연하여 생겨나 있다.
모든 법은 뒤바뀐 것이라 이룬 것도 없다.
또 그 법을 관찰하면, 안도 밖도 또 중간도 없으며, 법은 모이고 흩어짐도 없고, 모든 법은 다 형상과 모양이 없고, 있는 것도 없고 있지 않은 것도 없으며, 소리에 의탁하여 있을 뿐이다.
모든 법은 마치 허공과 같고 또 환상 같으며, 자연히 생겨서 본래 청정하고 밝으나, 모두가 각각 번뇌에 의지하고 있어서 일체 모든 법을 볼 수 없으니,
그 진실을 살펴보면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 같아 깨고 나면 볼 수 없듯이,
일체 모든 법은 마치 그림자가 비치는 것과 같아,
본래 청정하여 형상이 없고 또 이름도 생각도 없으며, 모든 법이 생각이 없고,
일체 모든 법은 부르는 소리에 메아리 같아,
허무에서 이루어졌으니, 모든 법은 곧 없는 것이다. 자연인 까닭으로 얻을 수 없다.
모든 법은 아지랑이 같아서 있는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능히 서 있는 것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는 어리석고 어두운 범부는 약간의 변화를 보고 곧 법이 없는 것을 알고 곧 법을 쓰지 않아, 합한 것도 없고 흩어진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을 봄에 영원히 집착할 것이 없다.
이렇게 관찰하여 일체 법을 보면, 가는 것도 없고 돌아오는 것도 없고 모든 법이 서 있는 곳을 볼 수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있는 곳도 있지 않은 곳도 없다. 일체 모든 법은 인연에서 일어나 뒤바뀜에 처해 있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말하고 말하지 못함도 없고 두 가지 생각이 없으며, 또한 한 가지 생각도 아니고 조그마하다는 생각도 있는 것이 아니다.
밝은 자는 알지만 얻지는 못하나 또한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또 일어나는 것도 없고 만듦도 없고 지은 것도 없고 짓는 자도 찾을 수 없다.
모든 법은 형상을 버리고 또한 몸의 모습도 없고 또 스스로 그러함이 없이 스스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모든 법은 무수(無數)이니, 본래 참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일체 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수명도 없음을 알며 공하여 없음을 관찰한다.
마음으로 생각하여 말한다.
‘일체 모든 법은 다 본성이 공하다 말하니, 법은 자연으로 또한 생각도 없으니, 온갖 생각을 볼 수 없고 법을 만들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일체 법을 관찰하나 생긴 것이 없다.’
마음으로 생각하여 말한다.
‘법은 일어난 것도 없고 또 없어지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관하면 법의 뜻이 멈춤[法意止]을 얻어서 일체 법에서 생기는 것이 없음을 알며,
습기가 다함에 돌아감을 알고 법상(法相)을 인하여 성취하면 자연히 여의어서 곧 모양이 없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이룰 수 없고 그 모양이 없다는 것은 곧 모양을 버릴 뿐이다.
모든 밝게 통달한 이는 이 일체 법이 다 근본이 없음을 분별하고 깨달을 것이다.
만약 보살이 마땅히 이런 관법을 지어서 모든 법에서 법답게 행함이 이러한 행을 할 것 같으면, 모든 법을 얻지 못하고 또한 생기는 것도 없고 모든 법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머물고 멈춤에 있어서도 또한 멸하는 것은 없다.
일체 모든 법은 다 멸도(滅度)한 모양이며, 모든 근(根)은 고요하며 모양도 담박하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해 보면, 법의 의지를 알고, 이미 멈추는 곳이 없으면 멈추지 않는 곳도 없다.
다 모든 법의 혜명(慧明)의 모양에 들어가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법의 의지(意止)를 이루면 곧 경전을 펴서 일체 법에 머무는 바 없다고 이름하며,
모든 법을 펴서 망념됨을 거두어 지혜로워지니, 이것을 일체 법에서 참된 진리를 보아 법의 뜻이 멈추는 데 이르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뜻이 이미 멈춘 자는 문득 뜻으로 몸의 뜻[身意]ㆍ아픔의 뜻[痛意]ㆍ생각의 뜻[想意]ㆍ법의 뜻[法意]을 끊는 데 이르렀다.
3계가 공함을 알고 몸과 아픔과 생각과 법을 보지 않으면 곧 네 가지 뜻이 끊어진다[四意斷].”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만약 5근(根)을 알고 속세의 근본을 뛰어넘음에 이른다면 진리를 따라 그것을 살핀다.
무엇을 5근이라 하는가?
첫째 믿음의 뿌리[信根]ㆍ둘째 정진의 뿌리[精進根]ㆍ셋째 뜻의 뿌리[意根]ㆍ넷째 선정의 뿌리[定根]ㆍ다섯째 지혜의 뿌리[慧根], 이것이 5근이다.
마땅히 이런 행(行)을 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체 법은 인연에서 일어나 뒤바뀜에 서서 허무와 합하여 이루어져 옮기고 옮겨 일정하지 않음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끝없이 헤매며, 또한 꿈꾸는 것과 같아서 자연히 물러가 버린다.
일체 법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임을 믿으며,
질병과 상처투성이로 늙어 오래 있지 못하고 오래 머물 수도 없으니, 마땅히 다시 이별하여 여의며,
모든 법은 진실하지 않고 모두 실다움이 없으며,
황홀하게 놓아 버리되 모든 근(根)을 평등하게 놓아 버린다.
마치 채색한 그림 같고 어린아이의 능력 같고 사상(思想)과 거짓 유희[欺戱]가 진실하다 하여 허황하게 속이는 것을 알지 못하되 다 있는 바가 없다.
그 신근(信根)이란 일체 모든 법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또한 머무는 것도 없고 공하여 모양도 없고 서원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행함도 없고 생각도 없고 미혹됨도 없다.
계(戒)도 청정하고 정(定)도 청정하며, 혜(慧)와 해탈로 제도함[解度]도 청정하며, 지견(知見)의 종류[品]도 청정하다.
능히 이 신근을 받들어 행하는 자는 곧 되돌아오지 않고, 독실한 믿음으로 으뜸을 삼고, 금계(禁戒)를 세워서 다 잃음이 없으며 도업(道業)을 어기지 않는다.
잃는 바가 없으므로 곧 정법을 따르며 독실한 믿음에 머물러 동요함이 없다.
선한 덕으로 보응(報應)하면 다 와서 귀의하고 보호하며,
곧은 업[直業:正命]을 세워 아첨함이 없고 모든 사견 예순두 가지의 연(緣)을 끊어 외도의 학문을 찾지 않고,
그래서 스승[師主]이 되니, 마치 해와 달을 보는 것 같아 등불이 소용없다.
오직 여래에게 귀의하여 성인[聖衆]을 알고 구족하게 이루며,
청정한 업의 계(戒)를 세워 인욕하고 인화(仁和)하며,
이와 같이 독실하게 믿어 동요하지 않고, 능히 동요하지 않음으로써 깊이 옳은 믿음[義信]을 품어 곧 도법(道法) 갖춤을 믿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정진의 근[精進根]을 관찰한다고 말하며 무엇을 방편을 훤히 알고 갖추어 이루었다 하는가?
만약 보살이 도를 두텁게 하면 어기지 않고 정진하는 까닭으로 5개(蓋)가 휴식하며,
설사 듣는다 할지라도 이와 같이 깊고 미묘한 경전을 우러러 본받아서 부지런히 따라 받들어 행하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진하여 겁나고 나약함을 근심하지 않는다.
마음은 멀리 원대함을 잊지 않고 뜻은 널리 듣기를 사모하며,
걸림이 없는 법으로써모든 폐단을 끊고 정진을 그만두지 않는다.
만약 마음으로 생각을 내면 착하지 못한 법을 싫어하고 대정진으로써 그것을 없애며,
식법(識法)이 이미 일어나 부지런히 닦음을 세우니, 일찍이 게으르지 않았다.
정진에 의지함이 없으면 가다듬어 더 부지런히 닦아, 이러한 행을 어기어 잃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힘쓰면 모든 법을 훤히 알아 분별하여 함께 응하며,
사람을 우러러 받들지 않고 세속에 있어도 정진을 잃지 않는다.
이 정진의 근은 가장 위덕이 있어 옳게 부지런히 배움으로써 정진근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의근(意根)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어떻게 의근을 훤히 알아 받들어 행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보살이 그 뜻을 제지(制止)하여 보시하고 지계하고,
들음에 따라 범행(梵行)을 구족하고,
구경의 계품(戒品)에서 청정한 업으로 정의 뜻[定意]ㆍ혜(慧)ㆍ해도(解度)ㆍ지견(知見)의 종류(品)가 청정하며,
몸[身]ㆍ입[口]ㆍ뜻[意]이 구경에 겸손하고 삼가 바른 뜻을 세우며,
일체 법에 있어서 생기는 것이 없게 하고,
특이한 데 머물러 있어 지극한 행을 관찰하고,
괴로움의 습기가 다하는 도(道)로써 이것을 끊어 없애고,
의지(意止)를 세우며 방편으로 근력(根力)을 알고 통달하며,
일심의 뜻인 정의삼매정수(定意三昧正受)를 깨닫고,
모든 법을 알고 펼치나 생각이 없고 서원도 없다.
혜(慧)가 일어나지 않아도 인욕의 성스러움을 이룬다.
욕심을 여의고 멸도하여 뜻의 멈춤을 얻어 불법(佛法)을 구족하면 성문과 연각의 경지를 행하지 않는다.
걸림이 없는 지혜를 받들어 마음이 미혹하지 않고,
능히 이와 같은 상법(像法)을 한결같이 정진하여 몸과 입을 근신하면 그 뜻을 잃지 않고,
우러러 받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와 같은 법을 관찰하면 최고로 위덕이 있어 바른 근본을 얻음에 이르니,
이것을 정의근(定意根)을 체득하여 훤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무엇을 보살이 정의근에 도달했다고 하며, 어떻게 해야 이 정의근을 훤히 깨달았다고 하는가?
만약 어떤 보살이 선(禪)과 생각하는 것을 행하여 일심으로 헛되지 않게 하면현성(賢聖)의 업을 행하고,
선하는 마음[禪心]이 집착함이 없고 방일함이 없는 선(禪)으로써 잘 정의(定意)를 거두어 바르고 평등함을 밝게 알고,
정의를 밝게 깨달아 뒤바뀐 선(禪)이 없이 정의의 문을 관(觀)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통달하여 고요한 뜻에 들어간다.
삼매에서 일어나면 다시 선정에 뜻하지 않고 또한 정수(正受:선정)도 없으며,
능히 사모하고 좋아하여 뜻을 도업(道業)에 세우고 선과 생각으로써 스스로 오락하며,
반드시 남을 우러러 보지 않으며 선과 생각으로 정수하나 선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위덕에 이름으로써 정의 일심이면 이양(利養)을 탐하지 않고 시끄럽지 않음을 행하며,
최고의 위덕으로 정의근에 이르니, 바라밀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지혜의 근[智慧根]을 행한다고 말하며, 어떻게 지혜의 근을 깨닫는 데 이르렀다고 하는가?
만약 어떤 보살이 몸이 곳곳에서 멸한다면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겠는가?
온갖 고통을 다 제거하면 항상 몸의 행함을 소멸한다.
곳곳에 지혜를 행하여 널리 욕심 여읨을 나타내고, 습기를 없애고 도를 다하면 무위문(無爲門)을 향한다.
지혜의 근을 행함으로써 3계(界)를 다 본다.
일체가 불타 3계가 고통임을 알아 그 지혜로운 이는 3계에 의지하지 않으니,
그것을 관찰함에 모두 공하여 생각이 없고 원하지 않고 마음에 생기는 것이 없고 다시 행할 것이 없다.
보이는 것은 유위법이니, 그것을 다 놓아 버려라.
머리가 불타는 것을 구원하듯이 불법을 구족하여 오로지 한마음으로 모든 법을 익혀라.
비록 3계에 있으나 일체를 거두어 없애고 다 놓아서 집착을 버려라.
3계에서는 사모할 것이 없다.
모든 즐거워하는 것을 끊고 모든 유위법과 일체 더러움에 물들거나 애욕에 얽매임을 버리면,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고, 5욕의 쾌락을 사모하지 않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에 지혜를 안고 성스러운 공훈을 밝히면, 양을 제한하지 못함이 마치 강과 바다와 같다. 행하는 것이 지성이면 끝이 없다.
모든 법을 훤히 알면, 곧 지혜로써 3계를 분별하여 다 집착할 것이 없다.
이것이 최고의 덕과 이치이며 지혜를 받드는 바라밀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인아, 무슨 까닭으로 뿌리[根]라고 말하는가?
말하는 근이란 뜻(義)이 능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그 때문에 뿌리라 한다.
움직이는 것이 없음으로써 달아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뿌리라 한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고 우러러 보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뜻은 반려할 자 없고 법의 가르침에 수순하니, 그러므로 뿌리라 한다.
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능히 흔들 자도 없고 잡되고 어긋나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뿌리라고 한다.
이와 같으면 지인아, 이것을 곧 보살이 모든 근을 훤히 깨달았다고 한다.
또 다시 지인아, 보살은 중생의 모든 근을 분별하고 방등(方等)을 잘 배우면,
중생의 근이 더러움에 물들거나 물들지 않는 자와, 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근과, 성냄[瞋恚]이 있고 성냄이 없는 근과, 어리석음[愚癡]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근을 알며,
나쁜 갈래[惡趣]에 떨어질 근과 혹은 인간에 태어날 근을 알고,
천상과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날 근과 마음이 밝게 통달하거나 혹은 유약하고 하열한 근과 또 중간의 근을 알며 다 보고 그것을 안다.
하천하고 거칠고 사나운 근과 모든 근이 구족하지 못하거나 혹은 근이 손상되지 않거나 그것을 다 안다.
모든 근이 법에 맞으며 방편이 있는 근기ㆍ방편이 없는 근기도 다 알며,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근기ㆍ의지하여 집착하고 집착이 없는 근기ㆍ위해(危害)의 근기ㆍ해가 없는 근기도 모두 당연히 안다.
순히 따르는 근기ㆍ순히 따르지 않는 근기ㆍ
걸림이 있는 근기ㆍ걸림이 없는 근기ㆍ
욕계에서 행하는 근기ㆍ색계에서 행하는 근기ㆍ무색계에서 행하는 근기ㆍ
모든 선(善)을 통달하는 근기ㆍ구경에 선(善)한 근기도 모두 능히 안다.
돌아갈 바의 근기ㆍ어질고 온화한 근기ㆍ
삿된 견해에 처한 근기ㆍ정견을 세우는 근기ㆍ
간탐하는 근기ㆍ간탐과 인색함이 없는 근기도 모두 능히 안다.
성급한 근기ㆍ성급함이 없는 근기ㆍ
미혹한 근기ㆍ미혹하지 않는 근기ㆍ
빠르게 지나치는 근기ㆍ어질고 온화한 근기ㆍ
인욕의 근기ㆍ성냄의 근기ㆍ
질투를 품은 근기ㆍ질투가 없는 근기ㆍ
구족히 보시하는 근기ㆍ구족히 보시하지 않는 근기ㆍ
믿는 근기ㆍ믿음이 없는 근기ㆍ
탐욕의 근기ㆍ욕심을 떠난 근기ㆍ
집에 있는 근기ㆍ집을 버리는 근기ㆍ
계가 구족한 근기ㆍ계를 어기는 근기도 모두 능히 안다.
계를 경계하는 근기ㆍ계를 경계함이 없는 근기ㆍ
청정한 근기ㆍ인욕이 구족한 근기ㆍ
성내고 한탄하는 근기ㆍ최상으로 정진하는 근기ㆍ
게으른 근기ㆍ마음이 어지러운 근기ㆍ
요점만 취하는 근기ㆍ정의(定意)의 근기ㆍ
지혜로 이름난 근기ㆍ지혜를 잃은 근기ㆍ
성스럽고 현명함을 구족한 근기ㆍ어리석은 근기ㆍ
두려움이 없는 근기ㆍ
스스로 크다는 근기ㆍ스스로 크다고 함을 여읜 근기ㆍ
도를 얻음에 이르는 근기ㆍ삿된 소견을 따르는 근기ㆍ
마음이 편안하고 온화한 근기ㆍ마음을 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는 근기도 다 능히 안다.
뜻이 산란한 근기ㆍ고요한 근기ㆍ
일어나고 생기는 근기ㆍ생긴 바가 없는 근기ㆍ
청정한 근기ㆍ때가 있는 근기ㆍ
앎이 밝은 근기ㆍ훤히 나타나는 근기ㆍ
성문(聲聞)의 근기ㆍ연각의 근기ㆍ보살승(菩薩乘)의 근기ㆍ불승(佛乘)의 근기도 다 훤히 알고 얻음에 이르니,
이것을 곧 힘을 얻어 같이 짝할 자가 없고 방일함이 없다고 말하며,
되돌아가지 않고 훌륭한 방편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이름을 의근(意根)이라고 한다.
모든 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륜(阿須輪)ㆍ가류라(迦留羅)ㆍ진타라(眞陀羅)ㆍ마휴륵(摩休勒)ㆍ사람인 듯 아닌 듯한 이[人非人]의 근기도 안다.
최고로 위엄 있고 존귀하여 능히 이길 자가 없고 능히 동요함이 없고, 방편을 행하여 바라밀을 넓히며, 부지런히 닦아 받들어 행하면,
이와 같은 상전(像典)을 빨리 얻어 훤히 깨달아 일체 법에서 자재함을 얻어 시방세계에 노닐며 제도하지 않음이 없다.”
부처님께서 지인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도를 훤히 깨달았다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 도에 이르렀다고 말하는가?
만약 보살이 8성도(聖道)를 받든다면,
첫째는 바른 견해[正見]이고, 둘째는 바른 생각[正念]이며, 셋째는 바른 말[正語]이며, 넷째는 바른 생활[正命]이며, 다섯째는 바른 행동[正業]이며, 여섯째는 바른 방편[正方便:정진]이며, 일곱째는 바른 뜻[定意]이며, 여덟째는 바른 선정[正定]이다.
무엇을 정견이라 말하는가?
만약 어떤 보살이 일체 삿된 소견을 끊어 없애니, 무슨 까닭인가?
일체 보는 것은 위로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을 뵙고자 하면 모두 이와 같은 모든 보는 바의 업을 버리는 것은 이에 정견이라 한다.
견해가 없고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음을 모든 견[諸見]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
모든 의지하는 바가 없고 널리 생각하는 바가 없으며 뒤바뀜이 없고 생각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보는 것이 평등하니, 무엇을 말하랴?
세상의 허망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견해를 버리며, 이와 같은 견해로 모든 보는 바를 없애고 정견에 머물면, 집착하는 것이 다 없으며,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이 없고, 열반도 보지 않으며, 모든 욕심의 견해를 멀리하고, 모든 견해를 익히지 않는다.
무엇을 정견이라 하는가?
일체가 고요하여 맑고 시원함을 냄도 없고 또한 멸한 것도 없으며 보는 것이 평등하여 함이 없다.
본래 청정함으로써 일체 법에 바라는 것이 없고 또한 생각하지 않음도 없고 상응하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것을 세간을 넘는[度世] 정견이라 말한다.
무엇을 정견이라 하는가?
현재란 것도 얻지 못하고 또 세간을 넘지도 못하고 정견으로 현재 세간의 법을 끊으며
또한 세간을 넘어도 현재 세간에서 넘었다거나 일체를 제거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평등함과 삿됨과 모든 평등하고 평등하지 못함을 얻지 못하고 모든 평등한 행을 끊으면, 이것을 세간을 넘었다고 이름하며 정견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일체 생기는 것이 없는 까닭으로 정견이라 말한다.
참된 진리[眞諦]만을 보며 바른 견해로 삿됨이 없으면 이것을 정견이라 말한다.
지인아, 보살대사(大士)가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정견이다.
무엇을 정념(正念)이라 하는가?
모든 삿된 생각과 또 무위(無爲)를 생각하는 불법의 성중(聖衆)ㆍ일체 생각하는 것이 진제(眞諦)와 같다고 아니,
무슨 까닭인가?
일체 생각을 끊으면 사유하는 것이 평등하니, 이런 생각인 까닭으로 정념이며,
온갖 모양이 없음으로써 정념이라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사유를 없애는 것을 이름하여 살핌이 바르다고 하니,
곧 삿됨이 없고 다시 생각을 품지도 않으며,
이에 정념에 머물러 사유하는 바를 얻지 못하며,
삿됨과 바른 생각을 여읜 까닭으로 정념이라 말한다.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온갖 생각을 같이 버리며 허망하고 뒤바뀜을 버리고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을 소멸하면, 일체 생각이 평등하여 모든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제거하므로 정념이라고 한다.
무엇을 정어(正語)라 하는가?
일체의 언어가 다 허망하고 뒤바뀜에 있으며 다 미혹된 생각으로 평등함을 보고 마음이 말을 생각하고 바르게 일체의 말이 드러낸 것을 끊으니, 그런 까닭에 정어라고 말한다.
말은 보이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보는 것이 이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으며, 이미 정어에 이르러 입으로 나타낸 것은 다 진실하고 지극히 성실하다.
그러므로 정어라고 말한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청정하여 머무는 곳에서 일체 가르치는 언사와 변재를 끊으면 마음속에서 깨달아 알아서 입으로 나타내는 것이 없고 삿된 말을 다 버리면 정어에 머문다.
무엇을 정업(正業)이라 하는가?
정업에 머물면 온갖 삿된 업을 안다.
그 일체 업은 참되지도 않고 진리도 아니며, 본래 지어진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업은 구경(究竟)이 없으며 업이 다 흩어지는 까닭으로 정업이라 한다.
바름도 아니며, 삿됨도 아니며, 옳지도 않고 그릇되지도 않으며,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도 없고 온갖 업을 모두 뛰어넘어 바르고 삿된 것을 짓지 않고 평등하게 모든 업에 이르면 지음도 짓지 않음도 없다.
그러므로 정업이라 한다.
다 능히 삿되고 바른 모든 업을 평등하게 말하여 참된 진리와 같이 모든 업을 알고 또 참된 진리의 견해는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정업이라 한다.
그것은 바른 행[正行]으로써 삿된 업이 없고, 평등하게 진리의 행을 보므로 정업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정명(正命)이라 하는가?
일체 생활[命]을 알면 모두가 반대로 삿됨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그 생각에는 생활이 있고 생각에는 만물이 있어서 망상을 품는다.
무위(無爲)와 열반은 청정의 생각과 또 생각으로 부처를 본다.
일심이 청정하여 그 가운데 머물러 청정하게 생활하고자 하면 모두 삿된 업에 떨어진다.
일체 모든 생활이 만약 성품과 생명[性命]을 바르게 하고 삿되지 않으며 정명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으면, 이것을 정명(正命)이라 한다.
삿된 생활[邪命]을 말하면 일체 생활에 이르러 다 청정하게 이룸을 정명이라 한다.
일체 생활을 알면 바르고 삿된 것이 없고 청정한 생활[淨命]에 머물러 행하면 방일함이 없다.
삿되고 바른 생활이 없으면 둘이 없고[無雙] 둘이 없으면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도 없으니, 이것을 정명이라 한다.
삿됨에 머묾이 없는 자는 청정한 생활을 얻음에 이르러 생활이라는 생각[命想]도 없고 선(善)도 없고 말도 없고 생활과 생활 아님[命不命]이 없으며, 평등하게 행하여 참되고 정직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보니, 이것을 정명이라 한다.
무엇을 정방편(正方便)이라 하는가?
온갖 삿된 방편을 버림이다.
왜냐하면 일체 방편은 다 반대로 삿됨에 떨어져서 방편이 있는 곳에 마음이 맺히고 붙어 있으니, 이것을 삿된 방편이라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은 참되거나 삿된 방편이 없고 행하는 방편은 곧 참되고 바르지 않다.
그 참되고 바르지 않음을 삿된 방편이라 하고 방편이 없는 것이라 이름한다.
구경도 없고 말도 없고 모든 방편을 끊어서 있는 바가 없고 열반이란 생각도 버리고 불법(佛法)이란 생각도 없으며, 행함을 아는 방편과 일체 방편은 다 참되고 바른 것이 없고 방편이 없는데 이른다.
그것이 평등하면 곧 방편이 없음이며, 일체 법이 평등하여 약간의 차별도 없고 방편도 없으며, 방편을 헤아림을 초월하며, 있는바 방편의 뜻이란 곧 헤아림이 없고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도 없으니, 이것이 정방편(正方便)이라, 방편을 얻기 어려우니, 이것을 말한다.
말하는 바의 방편이란 정의(定意)를 말한다.
모든 방편을 끊음은 온갖 참된 진리를 말함이니, 평등하게 이와 같이 보면 방편을 생각하지 않으니,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정방편이다.
무엇을 정의(正意)라 하는가?
일체 생각하는 것은 다 삿된 생각이며, 뜻이 생각하는 것은 다 이 삿된 생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가 삿됨에 떨어짐이니, 이에 만약 뜻이 생기면 모두 삿됨이 되니, 뜻에는 생각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 생각하는 바가 인연에서 생기니, 말하는바 인연이란 다 삿됨이라고 말한다.
그 뜻에 생각하는 것이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면 이것을 정념(正念)이라 하며 그런 까닭으로 정념이라 이름한다.
만약 뜻으로 생각함이 없으면 머문 곳에서 업(業)을 일으킨다.
뜻과 뜻 없음이 아니면 뜻이 제일 청정하여 삿된 뜻과 생각이 없고 온갖 사려가 다 끊어진다.
그 삿됨이라는 것은 뜻과 생각이 모두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른 뜻[正意]에 머무른 것이다.
그 바른 뜻이라는 것은 바르지 않고 삿되지도 않으며, 바른 생각과 삿된 생각이며, 일체의 뜻과 모든 생각ㆍ사상을 없애는 것이니,
밝게 아는 자는 마음에 산란함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여섯 가지 일[六事]을 행함을 정의에 머문다고 말한다.
뜻은 일찍이 뜻이 있다거나 뜻이 아니라는 상(相)을 내지 않는다.
일체 뜻을 알면 모든 뜻을 다 깨달아 참된 진리와 같이 통한다.
다시 뜻이 있고 뜻이 없고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바른 뜻에 머묾에는 뜻도 없고 삿됨도 없다.
평등하게 행하면 생각이나 생각 아님이 없고 인(因)도 없고 사려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일체의 바람이 없어 말 없는 데 이르면 뜻도 없고 뜻 아님도 없다.
생각이 평등함에 머무르면 말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일체의 말을 버리고 참된 진리[眞諦]와 같이 알며,
널리 가르침을 펴는 것도 없고 사유할 것도 없고 또 생각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평등에 머문다고 말한다.
무엇을 정정(正定)이라 하는가?
일체의 선정을 본다면 다 삿된 선정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삼매가 인연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바른 것을 바라고 제거함에 집착하면 이것은 다 삿된 선정으로, 이른바 취반(取反)이니, 이 선정은 참된 것이 아니다.
만약 모든 받음[諸受]에 받은 것이 없고 또 삼매 선정의 생각[三昧定想]을 마음속으로 찾지 않고, 출가의 가르침도 없고 선정의 뜻을 생각함이 없으며,
그 의지하는 것도 없고 지음도 없고통달함도 없으며,
기쁘고 즐거움을 끊어 없애 영원히 고요하고 안락하게 선정의 상(相)을 분별하며,
삼매 선정에서 머무는 바가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선정의 삼매라 말한다.
이른바 바른 선정은 일체의 선정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곧 방일함이 없고 밝게 아는 지혜 같으며, 훤히 선정의 뜻을 통달하며, 선정의 행에 의지하지도 않고 바라는 생각이 없고 같이 바른 행을 없애버리면, 이와 같은 자는 생각도 생각하지 않음도 없으며,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곧 말하면 바른 선정이다.
바른 것도 없고 삿됨도 없어 일체에 바라는 것이 없으며, 모든 생각을 끊고 아울러 온갖 바람[衆希]을 없애니, 이에 바른 선정이라 말한다.
말한 바의 선정이란 바르고 삿된 선정이 없고, 마음에 생기는 것이 없고, 바르지도 않고 삿됨도 없고, 바른 선정도 없고 삿된 선정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방편으로 모든 선정을 깨달아 알아서 이에 바른 선정에 머물러 삼매라는 생각도 없고 평등함도 쌓아두지 않으며 널리 말하면 일체이며, 곧 바른 선정이라고 한다.
빨리 달리지도 않고 같이 방일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것 같기도 하고, 삿된 것 같기도 하며 널리 모든 법과 같으며, 일체 선정의 뜻은 정수(正受)에 둔다.
일체 3계는 다 유위(有爲)이며, 사유하는바 참된 진리도 지혜로써 보면 일체 5취(趣:道)에 왕래하며 태어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인아, 이와 같은 보살은 도의 뜻을 훤히 깨달아 이와 같음에 이르러서 도의 뜻[道趣]을 세밀하게 판단한다.
이와 같은 성업(聖業)은 참된 진리를 깨달아 통달하므로 이에 정정(正定)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