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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범천소문경 제3권
8. 논적품(論寂品)
그때 지심 범천(持心梵天)이 보행(普行)보살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대는 어떤 행으로써 행을 삼습니까?”
답하였다.
“저의 행하는 바란 일체 유위에 있어서는 결코 존재하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에 따라서 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일체 중생에 따라 행을 드러낸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일컬어 중생을 위한 행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여러 여래께서 행하신 바를 따르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여러 여래께서 어떤 행을 실천하셨기에 그것으로 행한다고 합니까?”
답하였다.
“일체는 영원히 공(空)이라는 것으로 행하셨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일체의 우둔한 범부에게 행하는 바가 여럿 있는데, 여러 여래께서 행하는 바도 역시 그러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여래의 경계라고 하겠습니까?”
답하였다.
“그대는 공이 어떤 차별을 지니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답하였다.
“어떻습니까? 세존께서는 제법이 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답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제법에는 차별이 없으니, 또 그 행하는 바도 모습이 없습니다.
범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여래께서는 제법에 온갖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지심 범천이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이른바 행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일러 말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네 가지 범행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행이라고 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그 네 가지 범행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공에서 노니는 것이 아닙니까?
행하며 머물되 항상 네 가지 범행을 닦으며, 일체의 범행을 구족한다면 그것은 공에서 노니는 것입니다.
범천이여, 만일 한가한 거처에서 행하거나 광야에서 거처하거나 항상 네 가지 범행을 구족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공에서 노닐고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다시 강당이나 누각에 자금색(紫金色)의 침상과 자리와 와구를 펼쳐놓고 거듭 겹치게 해 놓았다 하더라도 네 가지 범행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행이 도달하는 바를 환히 알지 못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어떤 행들에 입각하여야 지혜로 보는 행이 됩니까?”
답하였다.
“만일 그러한 행이라면 공에서 몸을 보지 않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 자아를 보지 않는 것이 지혜를 본 것입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범천이여. 자아를 보지 않는 것이 지혜를 본 것입니다.
비유하면 범천이여, 총명한 왕이 있는데 그의 신하되는 관리가 거룩하게 제왕의 일에 통달해 있어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제왕의 존경과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를 보지 않는 것이 곧 깨끗한 지혜를 보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누가 자아를 보지 않습니까?”
답하였다.
“나의 자아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범주에 속한 자들은 곧 존재하는 몸을 구족합니다.
이러한 한 부류를 이름하여 자아를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지금 말씀한 대로 내가 그 당연한 의미를 관찰해 보면 자아를 보지 않는 자는 곧 부처님을 보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도 자연이지만 부처님도 역시 자연인 것입니다.
박수여, 여래께서 보시는 바는 어떤 것들입니까?”
답하였다.
“나의 자아를 떠나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을 보는 자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무아를 인연하여 성취한다면 곧 평등에 도달한 것이겠습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만일 여러 가지 형체 있는 일을 성취한다면 어찌 평등에 도달했다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또 질문하였다.
“어떻습니까? 박수여, 어디에서 평등을 획득하고 도달하여 성취합니까?”
답하였다.
“제거하는 바도 없고 증득하지도 않으니, 이것을 받드는 자가 평등을 획득하고 도달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 지혜의 눈으로는 어느 곳을 보게 됩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그 지혜의 눈이란 보는 바가 없습니다.
지혜의 눈이란 유위도 보지 않고 무위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념이 유위인데 그 상념이 없는 것이 곧 지혜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밝게 도달하면 존재하는 눈의 자취를 이미 초과해 버립니다.
그런 까닭에 보는 바가 없게 됩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나의 자아에 인연하여 평등을 성취하니, 비구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과(果)를 획득하지 않습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정녕 평등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과를 증득하게 합니까?
평등하게 치료하지 못하거나 바르게 시키지 못하거나 준수하지 못한다면 과를 증득하지 못합니다.
상념을 여읠 때만이 획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만일 교만함에 처해 있다면 평등하게 치료하는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교만하던 교만하지 않던 약속된 시기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어떤 법들로 약속된 시기를 삼으며 약속된 시기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였다.
“그 법은 이미 생한 것도 아니고 지금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생겨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곧 제법의 약속된 시기입니다.
내가 약속된 시기를 설한다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그렇게 생하는 자는 무엇을 약속된 시기로 삼습니까?”
답하였다.
“그렇게 약속된 시기에는 생하지 않은 것이 곧 생한 것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행과 보이는 것이 초월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평등이라고 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 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 말입니까?”
답하였다.
“평등한 것에는 나의 자아와 멸도가 둘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평등이라고 합니다.
그 평등이라는 것에는 의거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합니다.
펼쳐 놓으면 평평하고 균형이 잡힙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합니다.
이익도 없고 불리한 것도 없으며, 당연한 것도 없고 당연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사념할 수 있는 것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 박수를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이 말들은 모두 훌륭한 말이다. 설해진 그대로가 진실이다.”
이러한 말씀을 설하였을 때 7천 비구가 번뇌를 멸진하여 마음으로 해탈을 얻었다.
그리고 2만 2천 천자가 티끌을 멀리하고 더러움을 떠나서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그리고 1만의 비구가 애욕을 여의었고, 2백 천신과 사람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5백 보살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그러자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박수 동진은 부처님의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때 박수가 범천에게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 출현하셨더라도 법을 위하여 출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법을 짓지 않았다면 그 법이 어느 곳에 있겠습니까?”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세존께서 한량없는 사람을 교화하여 멸도에 이르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대께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의 무리들을 이롭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사람의 무리가 없는데도 도리어 있게 하려고 욕구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답하였다.
“범천이여, 그대는 도리어 사람들의 품성으로 하여금 사람을 성취하려고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답하였다.
“범천이여, 그대는 걸림이 없으며 무소유이신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기를 욕구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답하였다.
“어디에 여래께서 제도하여 멸도에 이르게 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박수여, 그 법은 생하지 않는 것이니, 지난번에 그대가 설한 바대로 그것을 헤아려 보면 생사도 없고 멸도도 없고 얻는 바도 없습니다.”
답하였다.
“범천이여, 그렇습니다. 여래ㆍ지진께서는 생사를 얻지 않으시며, 또한 멸도하지도 않으십니다.
또한 범천이여, 세존에게서 교화를 받아 해탈한 성문들이 있거니와 그들을 살펴보아도 역시 생사도 없고 멸도도 없으니, 그것이 곧 멸도인 것입니다.
범천이여, 이른바 멸도라고 하는 것은 세속의 말일 뿐이며 짐짓 빌려 온 명호입니다. 이른바 생사라는 것도 세속의 말입니다.
나고 죽으며 윤회하는 일이란 없으며, 또한 멸도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박수여, 누가 마땅히 이 말을 긍정하고 믿겠습니까?”
답하였다.
“제법 가운데서 집착이 없는 자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의지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집착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의지하는 바가 있다면 허망한 것에 집착한 것입니다.
범천이여, 만일 그 참된 진리라는 것에 교만함이 없다면 그것에는 또한 즐거운 바도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마땅히 다시 공허한 것에 기대고 집착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참된 진리를 보는 자에게는 집착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미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생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생사가 없으니, 생사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이미 생사를 떠나지도 않는 것을 이름하여 멸도라고 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그 멸도란 무엇을 위하여 뜻을 세우고 구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범천이여, 그 멸도란 이름하여 서로서로가 돌아가며 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식별하는 행이 그 지혜의 행입니다.
그리고 여러 행은 담백하여 말미암는 바가 없으므로 거처하는 곳도 없습니다.
거처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처하는 곳이 없는 행이라면 그것을 영원한 소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의 약속된 시기입니다.
또한 생한 적이 없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4제(諦)라고 합니다.”
그때 보행보살이 박수에게 물었다.
“지금 설한 것은 모두 참된 진리의 말씀입니까?”
답하였다.
“족성자여, 일체의 언설은 모두 참된 진리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말이라는 것은 허망한 메아리일 뿐인데 역시 참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실로 참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말한 것은 모두 처소도 없고 세워진 바도 없으니, 이미 자재함을 얻은 까닭에 이름하여 참된 진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 일체의 언설은 모두 참된 진리가 됩니다.
저 여러 천신과 인간 및 여래ㆍ지진께서도 역시 말로 가르침을 설하시는데, 이 여러 말을 헤아려 보면 역시 여러 종류가 있지 않고 차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로 말한 것은 모두 여래의 언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체의 여래에게도 역시 행한 바가 없으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없습니다.
언사로써 다시 널리 가르친다고 해도 모두 역시 그와 같이 말로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모든 말은 평등하니, 문자로서 평등합니다.
곧 문자에 있어서 능히 동일하고 평등한 것입니다.
이미 일체의 문자를 능히 평등하게 대한다면 문득 능히 평등하게 하는 데 있어 자재함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언사에 있어 두루 행하되 평등한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여래ㆍ지진께서는 현자와 성인의 언사에 현자와 성인의 언사가 없다고 어찌 분별하시지 않습니까?”
답하였다.
“그대는 여러 현자와 성인의 대중들로 하여금 문자로 가르치게 하려고 합니까?
또한 다시 현자와 성인의 가르침에 문자가 없도록 하려고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없도록 하려고 합니다.”
박수가 답하였다.
“그 현자와 성인의 문자에 현자와 성인의 문자가 없으니, 상념인들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닙니다.”
답하였다.
“그러므로 문자에는 상념이 없습니다.
만일 일체의 상념을 버린다면 그것을 현자와 성인에게는 언사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현자와 성인에게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설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고 법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비유하면 악기와 큰 북을 두드리고 불고 연주하면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소리가 있지만 그것에 상념이란 없습니다.
현자와 성인도 역시 그렇습니다.
설한 것도 드러나고 언사도 있지만 역시 집착하는 바는 없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박수여, 여래께서,
‘만일 함께 모임을 이루고 있는 자는 마땅히 두 가지 일을 일으켜야 한다. 곧 법을 강론하는 일이거나 또는 현자와 성인답게 고요히 침묵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박수여, 무엇을 일컬어 법을 강론한다고 하며, 무엇을 일컬어 성스러운 고요함이라고 합니까?”
답하였다.
“만일 부처님과 다투지 않고 경의 법을 반대하지 않고 성스런 승단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법을 강론한다고 합니다.
만일 법을 사유해 본다면 부처님을 뜻에 두는 자는 색의 애욕을 여의니,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무위(無爲)이고 무형(無形)이라, 이것이 이른바 성인과 여러 현자의 성스러운 고요함입니다.
다시 족성자여, 4의지(意止)에서 준수하고 정진하고 분별하고 해설한다면, 그것이 법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일체 법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그것을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족성자여, 4의단(意斷)에서 정진하고 분별하고 해설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법을 강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법에 있어서 평등하게 강론한 것이 평등을 위한 것도 아니고 역시 취착하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성인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4신족(神足)을 준수하고 강설한다면 이것이 법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시 몸도 없고 말도 없고 마음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성인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5근(根)과 5력(力)을 준수하고 해설한다면 이것이 법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법을 믿지 못한다는 소리가 없다면 곧 현자와 성인은 제법을 결택하고 취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정성들여 한뜻으로 스스로 건립하여 본래의 해탈을 동등하게 성취한다면, 제법에 대하여 빠짐없이 믿게 됩니다.
말한 일체의 것에 대하여 빠짐없이 결택하고 요지하고 지혜로써 행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7각의(覺意)에서 현자와 성인의 해탈을 준수하면, 이것을 일컬어 법들을 강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색에 대한 애욕을 관찰하여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는 그러한 행을 얻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성자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8성도(聖道)를 준수하고 정진하고 해설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법을 강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성이 생기는 처소를 이미 보았다면 뗏목의 비유와 같이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법 아닌 것에 집착해도 안 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성자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족성자여, 이 서른일곱 가지 법의 품목들이 돌아가는 곳을 요해하는 자가 있음을 안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법을 강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기에서 법에 입각하여 몸을 증득한다면, 그것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법을 본다면 그것은 법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다는 것에는 본래 보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둘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둘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지혜로써 보는 바는 곧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성자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족성자여, 자아를 실제와 동일한 모습으로 보지 않고,
남을 실제와 동일한 모습으로 보지 않고,
법도 실제와 동일한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고 분별하여 설하면,
이것이 곧 법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만일 법을 얻지 않고, 일체의 문자로 된 가르침과 음성과 언설을 떠나고,
교만함을 제거하고, 담백함을 일으키고, 그 마음이 고요한 채 행에 있어 끝을 낸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족성자여, 만일 다른 중생 및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 모든 사람들의 근기를 각각 보고 그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설하면서 그 뜻이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을 선정에 들게 한다면, 이것이 여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입니다.
건립한 바는 있지만 혼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보행보살이 박수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가 논설한 내용을 요약하여 유추하여 살펴본다면, 일체의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에게는 법을 강설하는 것도 없고,,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근본을 능히 환히 알 수 없고 평등을 궁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박수여, 누가 마땅히,
‘그는 평등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설할 수 있으며,
‘누가 법에 순응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에 머문다’고 하겠습니까?
마땅히 여래만이 평등하다고 일컬을 수 있으며, 여러 부처님 세존만이 중생의 근본을 환히 아시며 항상 오로지 정(定)에 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박수에게 말씀하셨다.
“실로 보행 족성자가 설한 그대로입니다. 여러 부처님 세존만이 능히 요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현자 수보리(須菩提)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직접 면전에서 들은 바가 있으니,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에게,
‘만일 함께 모임을 이루었다면 마땅히 두 가지 일을 일으켜야 하니,
첫째는 경전을 강론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을 준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성문의 대중이 받들어 행하지 못한다면, 무슨 이유로 여래께서는 여러 성문을 위하여 마땅히 경전을 분별하고 설하고 강론하라는 그러한 법의 말씀을 설하셨습니까?
또한 만일 그럴 수 없다면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 뜻에는 어떠하냐?
만일 여러 성문의 대중들이 들은 바가 없다면 능히 강론을 한다든지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을 행할 수 있겠는가?”
답하였다.
“아닙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수보리야, 그런 까닭에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일체의 성문이나 연각에게는 법을 설하는 것도 없고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도 없다.”
그때 박수가 현자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장로여, 여래께서는 중생의 근본을 보시고 중생이 짓는 8만 4천 가지 행을 분별하고 설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읽고 암송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장로는 그것에 대해 어떤 지혜로 관찰하고 해탈하십니까?”
답하였다.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대에게는 뜻으로 삼매에 드는 것이 있으니, ‘관중생심(觀衆生心:중생의 마음을 관함)’이라는 이름의 삼매입니다.
이 정에 머무르는 자는 능히 중생의 마음을 관찰하고 보게 되며, 자기의 마음과 남의 마음 사이에 걸리는 것이 없습니까?”
답하였다.
“미치지 못합니다.”
박수가 또 말하였다.
“수보리여, 여래께서는 8만 4천 행을 말씀하심이 있으니, 그 행한 바를 원인으로 하여 분별하고 설합니다.
또한 의약삼매(醫藥三昧)를 요달하시고 바르게 수용하시어 동요하지 않은 채 일체 중생의 마음을 두루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수보리여, 마땅히 ‘이것은 성문 및 연각의 지위에서 능히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관찰해야 합니다.
수보리여,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공(空)의 일로써 인연하여 해탈을 얻으니, 만일 공을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여래께서는 그 모두를 아십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분노를 품고 행하며 더러운 문제점만을 봅니다.
그는 진에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지, 자애로운 마음으로 얻지 않으니, 여래께서는 그 모두를 아십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리석음을 품고 행합니다. 그는 강설하는 것에 말미암아 해탈을 얻지, 법을 설함으로써 얻지 않으니, 여래께서는 그 모두를 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동등하게 나누어 행하는 것을 품고 있는 자인데,
그는 공(空)에 의존하여 행하지도 않고,
또한 관찰함으로써 해탈을 얻지도 않으며,
자애로운 마음에 입각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진에와 원한으로써 세간을 건널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권하고 찬탄함으로써 또는 법을 설함으로써 해탈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여래께서는 법을 설하는 것에 따라서 그 행의 근본에 응하니, 형태와 부류에 의존하여 해탈을 얻거니와 여래께서는 그 모두를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수보리여, 마땅히,
‘여래께서는 선정에 드신 채 존귀한 법을 강설하시니,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이다’라고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때 수보리가 박수에게 말하였다.
“연각은 그러므로 법을 강론하는 데 임하지 않고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도 지니지 않습니다.
오직 보살만이 이 법을 구족하니, 능히 강설할 수 있고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을 준수할 수 있습니다.”
답하였다.
“여래만이 그 아시는 바가 밝으시며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한 삼매가 있으니, 이름하여 ‘입일체음정기난심(入一切音整其亂心:일체의 소리에 들어가 그 혼란한 마음을 정돈함)’이라고 한다.
보살은 이 삼매를 바르게 수용하여 정에 들어 행하고 두루 온갖 덕을 구족하고 여러 행을 동등하게 갖춘다.”
이에 박수보살이 보행보살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중생에게 8만 4천의 행이 있는 까닭에 8만 4천의 법의 품목을 담은 장전(藏典)을 설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경의 법을 강설한다[講說經法]고 합니다.
일체의 생각이 멸진되어 고요함에 이른 정에 환히 아는 것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賢聖寂然]이라고 합니다.
또한 족성자여, 부처님이 1겁 또는 1겁을 넘도록 설한 법의 의미를 분별하고 결정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賢聖寂然]이라고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 보행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과거 옛날 이미 지나간 셀 수 없는 겁은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때 명호를 보광(普光) 여래ㆍ지진이라고 하는 한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셨는데, 겁의 이름은 명문(名聞)이었고, 그 세계의 이름은 애견(愛見)이었다.
보광여래의 애견세계는 풍요롭고 안온하였다. 쌀과 곡식이 풍족하고 균등하였고, 근심이 없고 유쾌하고 안락하였으며, 천신과 인간이 번영하고 치성하였다.
그 부처님 세계는 땅이 일체의 보배로 이루어졌고, 온갖 향나무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옷은 부드럽고 섬세하고 훌륭하여 미묘한 옷과 같고, 온갖 보배를 동등하게 갖춘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애견세계에는 4백억이나 되는 네 영역의 천하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네 영역이 336만 리이고, 하나하나의 성곽이 가로세로로 40만 리였다.
모두 진귀한 보배로 자연히 장엄되어 있고, 하나하나의 큰 성에는 스무 개의 군(郡)이 있고, 그 속에 각종 행정 구역ㆍ현ㆍ읍 등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큰 성에는 나라의 주인이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천의 거주민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 인민은 자신의 눈으로 감히 보는 것이 훌륭하고 기쁘고 뜻으로 공경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모든 백성들은 빠짐없이 염불(念佛)삼매의 선정에 들어가는 것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그 부처님 세계의 이름을 애견이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보살이 다른 불국토에 가 본다면 안락함이 다른 세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보광여래께서 3승의 가르침을 설하니, 여러 성문들을 위해 경의 법을 강설한 것이며, 다시 널리 뜻을 더하여 그 당연한 의미를 해석하였다.
그리고 곧 두 가지 행을 일으켰으니, 법을 선양하고 강설하는 것과 성스럽고 담백한 행이었다.
동쪽에 있는 세계인 지재의왕(止在醫王)여래의 불국토에 두 보살이 있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욕진(欲盡)이고, 둘째의 이름은 지의(持意)였다.
그들이 보광여래의 처소에 찾아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절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합장한 채 섰다.
그 부처님의 세계에는 ‘청정보설(清淨普說:청정하여 두루 설함)’이라는 이름의 삼매가 있는데,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세계의 이름을 청정(淸淨)이라고 한 것이니,
만일 보살이 이 선정을 체득하면 곧 일체의 생각과 번뇌를 버리고 문득 부처님 법의 광명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의 이름을 청정이라고 하였다.
과거의 여러 법도 모두 빠짐없이 청정하고, 미래의 여러 법도 역시 빠짐없이 청정하며, 현재의 여러 법도 역시 모두 청정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두 가지 청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청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진실한 청정을 말한 것이다.
진실한 청정이란 생한 적도 없고, 또한 청정한 것도 없다.
그 청정이라는 것은 본래의 근원이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본래 청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처럼 본래 청정한 것이 곧 일체법이다.
어디에 있는 법이 본래 청정한 것인가?
공이 곧 본래 청정한 것이다. 문득 모두 일체의 제법을 멀리 떠나서 모두 허망하여 상념이 없이 본래 청정한 것이다.
또한 일체 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유와 상념을 제거함으로써 사악한 생각에 관련된 일이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없는 것[無願]이 곧 본래 청정한 것이다.
일체의 제법에 있어서 상응하지 않는 행을 위하여, 그리고 소원이 없는 것을 위하여 감히 궁극적인 것을 감당해 냄으로써 자연의 본성을 떠나니, 능히 본래의 청정함을 위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본래 청정한 것이라고 하니,
본래 청정한 것의 찬란한 빛을 밝게 드러낸 것이다.
생사의 청정함과 같이 열반의 본래 청정함도 역시 그와 같다.
열반의 청정함과 같이 일체 제법의 본래 청정함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본래의 청정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밝게 드러나는 것을 비유하면 족성자여, 허공이 처소도 없고 뜻하거나 원하는 것도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성품이 더럽고 피로한 것을 능히 하나로 치료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음의 본래 청정함이 처소도 없고 뜻하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면,
곧 티끌과 수고스러움의 애욕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
족성자여, 그러한 마음이 본래 청정한 마음이며 밝음을 드러낸다.
비유하면 허공에 구름ㆍ안개ㆍ연기ㆍ먼지가 있어도 허공을 해칠 수 없고, 또한 파괴하는 것도 없고 비추는 바도 없는 것과 같으니,
허공은 본래 청정하여 능히 오염시킬 자가 없고 더럽고 피로함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히 더럽혀지는 것이 없는 까닭에 허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으로 설한 것이다.
만일 이렇게 사유하여 순응한다면 우둔한 범부가 하는 말이 더럽고 피로함을 일으킨다 해도 마음의 본래 청정함에는 능히 더럽혀지는 곳이 없다.
능히 더럽히는 것이 없는 까닭에 처음도 끝도 청정한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염시키지 못하는 까닭에 본래 청정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까닭에 해탈을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족성자여, 그러한 청정한 세계는 두루 동등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 세존은 여러 보살을 위하여 분별하고 설하셨으니, 보살들은 이 삼매에 관해 듣고 마음이 곧 법의 광명이 찬란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때 진의(眞意)보살이 보광여래께 말씀드렸다.
‘저희는 이미 잘 들었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렇게 두루 들어가고 나면 마땅히 어떤 방편으로 수행해야 합니까?’
보광(寶光)부처님이 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여러 현자는 여기에 이르러 두 가지 행으로 행해야 한다.
어떤 것이 둘인가?
법을 분별하고 설하는 것이며,
현자와 성인의 고요하고 담백한 행이다.’
또한 족성자야, 그 보살은 세존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가르침을 듣고는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절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는 바로 물러나 구별되고 특이한 곳에 이르러 노닐고 관찰하였다.
그리고 누각을 화작(化作)한 뒤 그곳에서 준수하고 수행하였다.
그때 선광(善光)이라고 불리는 범천이 있었는데, 7만 2천의 범천들과 함께 보살께 이르렀다가 마침 이것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려 발아래에 절하고 보살에게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보광여래께서 함께 모여 있는 여러 비구에게 마땅히 두 가지 일에서 행해야 하니,
그것은 법을 분별하고 설하는 것과, 현자 또는 성인의 고요함으로 상념하는 바가 없는 것이라고 역시 경의 말씀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면 족성자여, 무엇을 일컬어 법을 설한다고 하며,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이라고 합니까?’
그때 보살이 선광 범천에게 말하였다.
‘범천이여, 질문에 답하려고 하니, 잘 듣도록 하시오.
여래께서 눈으로 보신 것을 분별하고 설하시니, 무극(無極:피안)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족성자야, 그 보살들은 모여 있는 대중들을 위하여 이 두 구절로써 그 의미를 자세히 설하였다.
그때 7만 2천의 범천은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고,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그리고 선광보살은 보명(普明)삼매를 얻었다.
족성자야, 그 두 보살은 걸림 없는 변재로써 어려운 질문을 일으키되, 가히 제지할 수가 없었다.
누가 법을 강설하며, 무엇이 현자와 성인의 고요함인가에 대해서 열어서 연설하였다.
7만 6천 세 동안 이 두 구절을 선포하고 전달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구절의 궁극에도 이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두 구절 모두이었겠는가?
그때 여래가 허공에 머물러 계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그만두어라. 언설로 다투거나 싸우는 일을 하지 말라. 비유를 듣도록 하라.
곧 여러 언설은 부르는 소리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
그렇지만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벗어남을 얻는다.
또한 메아리에 말미암고 순종하면 문득 변재에 들어가게 된다.
그 변재라는 것은 분별하는 바가 있으니, 다할 수 없는 행이며, 끝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뜻을 일으키는 사이에 1겁 또는 1겁 이상이 되니,
만일 그 사이에 이 현명한 변재를 선양하고 찬탄한다고 해도 끝을 낼 수 없고 그 궁극을 얻을 수 없으니,
그대 현자들은 변재의 지혜를 능히 다할 수 없으며, 또한 다시 고요함도 그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요함은 담백하여 문자로 선양하는 일이 없다.
또 공양의 이익과 같은 이익에 입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선양하는 것이다.
또한 구제의 마음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식별한다.’
그 두 보살은 여래로부터 해설하시는 바를 듣고 즉시에 침묵하였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보살은 한 생각을 일으키는 사이에 백천 겁 동안 연설한 변재를 찬송하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행한 연후에 마땅히 생각하기를,
‘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외외구호진의(巍巍救護盡意)이다. 사람들 사이에 머물면서 보행 범천과 두 보살이 들어가는 경지가 있다고 말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를 성찰해 본다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진의보살이 지금의 박수이고, 지의보살이 지금의 보행이고, 선광 범천이 지금의 지심 범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