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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3권
8. 동진품(童眞品)
그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제8의 보살은 8주지(住地)에서 그 행을 청정하게 하나이까?”
[제8의 보살의 행]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제8의 보살은 언제나 신통과 지혜를 완전히 갖추어서 중생의 근기를 환히 깨달아 그 뜻의 취향[趣]을 관하여 그를 위해 나타내 보이며,
다시 신통으로써 모든 국토에 노닐면서 그 기특하고 빼어나게 묘한 행을 관찰하며,
다시 스스로 그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고 스스로 가서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뵙고 예배하고 공경하느니라.
부처님 몸의 모습[身相]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관하고 지(知)와 인(忍)을 배워 익혀 모든 근(根)을 분별하며,
언제나 여환삼매정의(如幻三昧定意)에 들어가서 그 근본이 없음을 알고,
짓는 바의 공덕은 앞의 형기(形器)를 따르고 저마다 그의 처소에 따라 그것을 성취하느니라.
공의 행[空行]과 무상(無想)과 무원(無願)을 초월함으로써 형상이 있지 않으며,
삼계를 건너 영원히 속박이나 집착이 없고 지혜로써 기억하는 바도 없으며 생멸도 있지 않나니,
생기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혜[慧]라 하고,
짓되 짓는 것과 또한 짓는 것이 없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지혜라 하느니라.
지경[疆界]이나 중간이나 처소가 없고 도무지 머무르는 바도 없으며 또한 소굴도 없고,
지혜는 청정하고 식(識)은 기대는 바가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생각이나 기억이 없음을 말미암나니, 지혜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니라.
힘[力]과 방편(方便)으로써 탐욕에 머물지 않고,
또한 색(色)에 머무르지 않고 색이 없는[無色] 데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비록 때[垢]와 같이 해도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최승아, 큰 지혜[大智]라 하느니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여의어 어리석음의 어둠[愚冥]에 처하지 않고,
영원히 해탈하여서 걸림이 없으며 집착도 없고 끊지도 않으며,
12인연의 무명(無明)의 근본을 버리고 아(我)와 인(人)을 보지도 않고 나와 내가 아님[我不我]도 없으며,
탐욕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一]임을 분명히 알고 색이라는 생각[色想]을 구함도 없으며, 다시 온갖 색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나니,
이것을 바로 제8 보살의 지혜 업[智業]이라 하느니라.
끝내 연(緣)을 따르지도 않고 번뇌의 우환도 없으며,
의심과 합하지도 않고 또한 행위[爲]에 있지도 않고 행위에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복을 구하지도 않고 공덕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든 악(惡)과 법이 아닌[非法] 일을 초월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법성은 언제나 존재하되 어리석은 이가 법이 아닌 일을 행하는 것도 보지 않고,
그 몸과 마음과 의식을 번거롭게 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뜻은 어지러운 생각이나 다른 생각으로 내닫지도 않기 때문이니,
최승아, 이것을 바로 지혜라 하느니라.
공관(空觀)을 분별하여 생김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아주 없다[斷滅]거나 항상하다고 헤아리는 것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며,
여섯 관(關)을 억눌러 제어하면서 끝내 삿된 것이 엿보게 하지 않고,
서원은 광대하고 먼 데 있고 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헤아리지 않으며,
동진(童眞)으로 금계를 닦아 차례를 뛰어넘지 않고,
만일 물러나서 하위(下位)에 있는 이를 보면 곧 권유하여 힘써 위[上]에 미치게 하고,
법을 받들어 수순한 이면 모든 부처님께서 닦는 계율의 근본[律本]을 끊지 않게 하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다하거나 끝나지 않고 도의 즐거움[道樂]을 일으켜 법신(法身)을 없애지 않으며,
성중(聖衆)을 끊지 않고 속박이나 해탈도 있지 않느니라.
또 도속(道俗)의 법을 닦아 익혀야 하고 법의 성품[法性] 때문에 모든 배움을 끊지 않느니라.
금계를 삼가고 인(因)이 본래 청정하여 다할 수 없고 모든 생사에 있을 때에는 이 모두가 다함이 있으며,
5도(道)에 유전하여 돌아다니고 오가면서 또한 편안히 쉬지 않고,
무상한 곳에 머무를 때에는 역시 다하고 소멸하거니와,
외도와 이학(異學)은 비록 다섯 가지 신통을 얻는다 하더라도 세간의 지혜를 여의지 못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고 구하니, 뒤에는 신족을 잃게 되며 또한 다시 수명이 다하면 곧 생사를 겪게 되느니라.
혹은 어떤 중생은 5계(戒)와 10선(善)의 행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인간이나 천상에 나게 되고,
5계에 힘써서 욕천(欲天) 중에 있을 때는 자연의 공덕을 받으면서 두루 갖추기도 하느니라.
혹 어떤 중생은 공정(空定)을 익히고 배워 색천(色天) 중에 있으면서 기쁨[歡悅]으로써 밥[食]을 삼는지라 괴로움의 근본[苦本]을 생각하지 않느니라.
혹 어떤 중생은 심식(心識)이 담연하여 무위를 희망하나니, 이를테면 무상(無想)하고 영원히 고요한 열반[泥洹]을 위하기도 하느니라.
이 모두는 자기 자신을 조절하여 마지막 멸도의 처소에는 이르지 않거니와,
제8 보살은 이런 곳을 관하여 환히 알아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고 한결같이 법을 연설하여 배우는 이에게 권고하여 멀리 여의게 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동진(童眞)의 업은 또한 이승(二乘)의 도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
수다원으로부터 벽지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허물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은 끝내 아라한의 법을 생각하지 않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에 마음을 쓰면서 열반의 도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연각은 닦지만 보살은 배우지 않으며,
그것에 뜻을 내면 큰 자애(慈哀)가 없어지므로 이렇게 배우는 이의 이 모두는 바른 것이 아니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마지막으로 지혜의 바다를 배워 익히고자 하면,
그 근원을 다하도록 끝이 날 수 없고 서원으로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여래의 법을 닦아 멸하지 않는 성품을 위하고,
지혜는 다하는 끝이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으며 도과를 열어 펴면서 성취할 수 있게 하느니라.
진실을 심는다[種實]고 말하는 것은,
보살이 큰 서원의 마음으로 10력(力)과 무외(無畏)와 18불공(不共)의 특수한 법에 대한 뜻을 일으키는 것이니, 또한 불가사의하고 또한 다할 수도 없느니라.
제8 보살은 있는 데마다 노닐며 교화하되,
뜻을 지니고 인욕을 행하는 것은 헤아리거나 말할 수조차 없고,
마음은 그릇된[非] 일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악(惡)이 없으며,
성을 내거나 원망하며 중생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또 뜻을 일으켜 사람들과 다투지도 않으며,
다시 사람을 훼패(毁敗)가 있는 데로 인도하지 않고,
몸과 입을 삼가 지키면서 망령되이 범하지 않느니라.
중생을 보호하며 자기 행의 근본을 삼가고 삿된 부류에 처하지 않고 착한 업[善業]을 사유하며,
애욕에 뜻이 없고 몸을 잘 장엄하는 것이 마치 부처님의 색상(色像)과 같이 하느니라.”
[음향의 구의 뜻]
그때에 세존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동진(童眞) 보살은 언제나 음향의 구의 뜻[句義]을 익히고 행하여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음향의 뜻을 배우는가?
이에 보살은 모든 법은 공(空)한 줄 알고 모든 소견에 물들지 않으며,
모양 없음[無相]을 사유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원이 없음[無願]을 분별하여 영원히 3유(有)를 여의며,
법에는 음욕(淫欲)이 없고 본래의 성품이 스스로 청정하며,
성을 내지 않고 영원히 태어나지 않게 하며 무명을 관하여 분명히 알아 어리석음의 어둠이 되지 않느니라.
다시 미래나 과거나 현재의 법은 다하여 일어나는 바도 없고, 모든 법은 자연(自然)이라고 사유하여야 하며,
흥하거나 멸한 것을 보지도 않고 나거나 죽는 것도 보지 않으며,
보응을 위하지도 않고 진실로 선악을 지으면 과실(果實)이 있다는 것을 알며,
입을 청정하게 닦아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 마음을 밝게 알아 행에 결점이 없으며,
일으킨 바의 일은 뛰어나서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 꿈이요 허깨비의 법이라고 헤아리며,
설령 삿된 기억[邪念]이 있어도 곧 스스로 깨달아 알고,
뜻과 성질[志性]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그 뜻을 수호하여 악을 내지 않게 하고,
언제나 청정하게 참되고 바른 선비의 마음을 내느니라.
설령 인간에 있어도 온갖 덕을 완전히 갖추고 상호는 80가지이며,
음성은 애란(哀鸞)과 같고 또한 범천(梵天)처럼 말하는 것이 미묘하나 화려하게 꾸밀 것을 생각하지 않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버리며 다시는 근심이나 걱정이 없느니라.
끝내 나쁜 얼굴로 사람을 향하여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짓는 공덕은 일찍이 망실하지 않으며,
그 근본에 따라 영원한 안락에 이르게 하고,
언제나 법다운 말로써 온갖 중생에게 권유하며,
외도의 사학(邪學)과 이술(異術)을 항복받고,
고뇌를 여읨으로써 다시는 액난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구족한 법을 갖추어 알고,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욕을 하여 몸과 마음은 지극히 은밀하며,
욕설을 받게 된다 하여도 잠자코 있으며 갚지 않느니라.
만일 중생이 회초리를 가지고 때려도 원수처럼 여기지 않고,
또한 지대(地大)가 만물을 포용하여 받아들이듯 하며,
끝내 식의 생각[識想]으로 더하거나 덜하는 뜻이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는 법성이 본래 공(空)하기 때문이니라.
설령 분하여 성이 난다 하여도 끝내 원한이 있지 않으니,
그 성낸 기색을 보는 것은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이 여기며,
뜻을 일으키고 와서 향해도 마음은 거역함을 가지지 않느니라.
만일 악을 생각한 이가 속임수를 쓰면서 모르게 하면, 은밀히 스스로,
‘나는 지금 자세히 살피면서 그를 알아보아도 텅 비어 있으니,
마땅히 멀리 여의면서 그런 인연을 일으키지 않아야겠으며,
그 사람이 성을 내고 있어도 나는 마땅히 삼가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가령 어떤 사람이 와서 칭찬한다 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또는 때리는 이를 만나도 역시 근심하거나 괴로워함이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자기의 몸이나 그 막대기는 아프다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
모두가 쌓은 행을 말미암아서 마음과 뜻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니라.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몸 안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덧없는 일과, 고통ㆍ근심ㆍ걱정ㆍ두려움ㆍ배고픔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를 헤아릴 적에는,
다시 거듭,
‘이 몸은 망가지는 것이어서 덧없는 법이요,
이 몸은 괴로운 그릇[苦器]이어서 여러 가지 질병이 모여 들며,
이 몸의 허공 같은 4대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이 몸은 내가 없으니[無我] 나는 것도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無滅],
삼계의 중생은 흐름에 떠다니는 것이어서 애욕에 흐르는 이면 침몰하고 유전하면서 또한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라고 관찰하고,
먼저 마음을 제압하면서 더 불어나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흐름이 있는 근본은 삼계에 처해 있으면서, 나고 죽음을 겪는 바요 몸을 받아 쉬지 않게 된다’라고 생각하며,
또한 ‘사견(邪見)의 흐름은 중생들이 어리석게 따르면서 뒤바뀐 소견[倒見]이나 62가지 번뇌[塵]에 헷갈리는 도(道)를 일으키게 된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무명(無明)의 흐름은 삼계의 중생을 눈이 멀고 어리석게 만들어 진실한 도(道)를 알지 못하게 하므로, 깨끗하지 못한[不淨] 것을 깨끗한 것이라 여겨 도리어 욕류(欲流)에 들어가며,
괴로운[苦] 것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덧없는[非常] 것을 항상 한 것이라 여기며, 몸이 아닌[非身] 것을 몸으로 여기며,
또한 탐욕으로 흐리고서 스스로 속고, 오랜 세월 동안 익히지 못했는지라 늙도록 음행을 쉬지 않으며,
재물이 있으나 보시하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것을 사유하여 제거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네 가지의 폐단[弊]이라 하는 것이니라.
드디어 애욕의 뿌리[愛根]를 더 늘리어 뜻으로 기억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함께 서로 받아들이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 고요히 관찰하여 악(惡)을 버리고 욕심과 착하지 않은 생각을 제거하며,
안으로 자기의 몸을 관하여 3보를 기억하고,
생각으로는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몸이 아닌 것을 자세히 살피며,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며,
괴롭다거나 즐겁다고 하는 마음이 없고,
네 가지 증(證:諦)을 수행하여 그 뜻을 궁구하고 펴나니,
남[生]은 고증(苦證)이 되고 애(愛)는 습증(習證)이 되며,
청정함은 진증(盡證)이 되고 해탈[度]은 도증(道證)이 되느니라.
이 형상을 미워하고 싫어하니 하나도 탐낼 만한 것이 없다.
그 근본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를 깊이 생각하며, 성품[性]에 따라 관하여야 비로소 그 근원을 아나니,
고(苦)는 몸으로부터 생기고 습(習)은 애(愛)로 인하여 생기며,
애가 소멸하면 진(盡)을 이루고 욕(欲)이 없어지면 도(道)를 이루느니라.
언제나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좇으면서 해치려는 뜻이 없고, 도의 교화[道化]를 기르면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며,
나고 죽는 근고(勤苦)를 뽑아 구제하여 주고, 온화한 얼굴과 기쁜 빛으로 중생에게 향하며,
권하여 중생을 가르쳐 도의 뜻을 일으키게 하고, 말한 바는 통하고 날카로워 막힘이 없으며,
모든 법상(法相)의 진실한 이치를 알고,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여 때에 따라 들어가며,
갑자기 물어도 신중히 대답하되 근기에 맞추어 곤란함이 없고, 말한 바는 때에 맞고 언사는 착란(錯亂)하지 않느니라.
보살은 인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으로서 형상 있는 무리는 질병(疾病)과 쇠상(衰喪)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므로, 그들을 위하여 방편을 베풀어서 해탈하게 하려고 두루 생각하며,
다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온갖 중생의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덥고 얻고 잃고 죄짓는 허물과 간난(艱難), 우환 등을 불쌍히 여기고 교묘한 방편을 사유하여 마음이 화평하게 하려 하며,
다시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써,
‘모든 세간에는 다 근심 걱정과 두려운 재난이 있으니, 나는 마땅한 방편으로 영원히 안온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수호하는 마음으로써 삼계의 8난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제도하여 주기를 원하고,
어리석고 어두워서 바른 도를 보지 못한 이들을 구제하려 하고 무위(無爲)를 얻게 하느니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마음에 동요나 옮아감이 없고,
비록 이런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뜻은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근고로써 물러남을 내지 않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之道]를 간절히 우러르며,
모든 통혜(通慧)에 대하여 만족해 함이 없고,
설령 5악(樂)과 노래하고 춤을 추는 일이 있다 하여도 역시 마음을 내어 기뻐하지 않으며,
세속의 이 모두는 허깨비와 같은 줄 깨달아 알며,
온갖 만물은 다 덧없는 데로 돌아가고, 여덟 가지 법의 소견에 동요되지 않고, 마음은 한결같이 멀리 여의나니,
마치 겁소(劫燒)를 피하듯 하며, 그 안에 있어도 사람의 괴로움을 받지 않느니라.
또 탐욕ㆍ성냄ㆍ원한으로 자기에게 와서 향하는 이에게는 끝내 터럭만큼이라도 앙갚음하지 않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감히 범하는 일이 없으며,
가령 어떤 사람이 보살을 해쳐 몸을 갈갈이 찢어 저마다 딴 곳에 두려 한다 하여도, 모두 다 잘 참고 어지러운 생각을 내지 않고, 그로 인하여 동진(童眞)의 행을 완전히 갖추기를 바라느니라.
보살은 다시 몸과 마음의 법은 합하고 이루어지고 흩어지고 사라진다고 함을 관하나니, 어느 것인들 족히 탐착하면서 보배로 여기겠느냐?
이 과행(果行)을 반연하여 반드시 부처님 몸을 얻고 여래의 숨은 창고[匿藏]를 갖춰 다 성취하며,
큰 서원을 세워서 도(道)의 근원을 궁구하고 보살이 행하는 권도[權]는 변화가 무궁하느니라.
만일 외도와 이학(異學) 중에 있으면서 몸이 불에 들어가는 일을 나타낼 때는,
앉고 눕는 데에 자유로이 하고, 다시 불에서 일어나고 다친 데가 없으면서,
곧 그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도[眞道]가 있음을 알게 하여, 마음이 스스로 바뀌고 뉘우치고 청정한 행을 닦게 하며,
어리석은 뜻을 교화하여 다시 진실한 데로 돌아오게 하고,
그로 인하여 천상에 가 날 때도,
그들을 위하여 법을 강연하여 하늘의 자리[天位]도 역시 쇠하고 죽는다는 일을 알리고,
보살은 권도(權道)로써 들지 않는 바가 없으며,
제석ㆍ범왕ㆍ사천왕도 스스로 귀의하여 머리 조아리지 않는 이가 없나니,
이것은 공(功)을 쌓고 도덕이 뛰어나기 때문이니,
또한 이승으로써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동진(童眞)의 신령한 지혜는 또한 가장자리도 밑바닥도 없고,
마음은 넓고 끝이 없어 한량할 수 없으며,
말한 바는 이익이 있으니, 또한 손모(損耗)가 없느니라.
이 때문에 지혜는 다할 수 없고,
낱낱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법은 모두 다 공(空)한 줄 분명히 알고 또한 아무것도 없음을 분별하며,
인혜(忍慧)를 뛰어나게 통달하여 곧 온갖 지혜[衆智]에 미치며,
모든 것은 바로 항상하다거나 항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곧 끝없는 지혜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만일 앞 사람과 음성이 왔다갔다하는 언교는 마치 산중의 메아리와 같다고 사유하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바로 방편의 지혜[權慧]라 하느니라.
또 다시 유위와 무위의 공한 성품의 법은 진실로 스스로 공허하고 고요하여 임시로 이름만 있을 뿐임을 관찰하며,
자기 몸은 도과를 이루었고 그 밖의 하열한 이는 역시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 계율을 수행하고 법교(法敎)를 받들고 존숭한다고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며,
끝내 뜻을 일으키지 않아도 약간의 생각을 내나니,
이것을 바로 동진의 권혜가 끝이 없다 하느니라.
혹은 어떤 보살이 중화인(中和忍)ㆍ공인(空忍)ㆍ정인(頂忍)ㆍ불퇴전인(不退轉忍)을 행할 때에는 사실대로 관찰하며 허망함이 없고,
3범당(梵堂)을 수행하며 공(空)이라 근본에 머무르지도 않고 견실(堅實)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상관(思想觀)이 없고 사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원하고 구하지 않으나 원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느니라.
법계는 한 모양[一相]이나 또한 모양이 없으며,
생사를 사유하되 또한 마지막과 처음도 없으며,
또한 시행[施爲]이나 시행이 없는 것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보지 않고,
돌아다니거나 가고 오는 것은 도무지 진실이 없으니,
과거는 닳아 없어졌고 현재는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는 생기지 않았느니라.
덕(德)이 있는데 덕이 없다고 보고 덕이 없는데 덕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덕이 있으려 하지도 않고 덕이 없으려 하지도 않으며,
덕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덕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덕이 있는 것과 덕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
담연(澹然)하고 공하고 고요하여 생기거나 멸하거나 집착하거나 아주 없다거나 하는 이름조차도 있지 않느니라.
다시 무생(無生)을 관하되 생기는 바가 있지도 않고 생김이 없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생긴다거나 생김이 없다는 것은 텅 비어서 진실이 없고, 하나요 둘이 없다고 분별하고,
세간을 건너는 도과(道果)의 증득도 보지 않으며,
또한 앞뒤나 중간도 보지 않고,
문자나 언교가 흩어진다거나, 세간과는 합하지 않는다고 보지도 않으며,
다시 모여서 같이 흐른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동진(童眞)이 닦는 바는 깊고 멀어서 미치기 어려우며, 불가사의하여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도인(道忍)과 지인(智忍)이 합친 것을 보지 않고, 지인과 도인이 합친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합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라.
도가 없는[無道] 것과 지혜가 없는[無智] 것이 합친 것을 보지 않고, 지혜가 없는 것과 도가 없는 것이 합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도인(道忍)과 도(道)는 스스로 함께 합치지 않으나, 합친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또한 합치지 않은 것도 아니니,
그 까닭이 무엇이인가?
성품[性]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니라.
[의심을 일으키는 두 가지 법]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세간에는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새로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의심스런 생각이 있게 하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법이어서 의심을 일으키는가?
이에 보살이 백천 가지 법을 닦을 때에 열반에 기대고 집착하면서 해탈한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런 수행이 있는 이는 곧 감손(減損)이 있느니라.
혹은 어떤 보살은 열반의 성품이 영원한 해탈인 줄 알면서도, 염착을 일으키거나 생사를 시설하지도 않고 좇는 것도 없으면서 여의는 것도 없으며, 하나[一]인 줄 깊이 알면서 약간 부분의 이름조차 없느니라.
[보살의 지혜 인]
보살의 지혜 인[慧忍]은 마침내 마음을 내지도 않으면서 피차(彼此)가 평등한 대승이 있으며,
공혜(空慧)인 줄 알면서 들어가 집착도 없고 아주 없다[斷]는 것도 없으며,
더러움에 물든 바가 없어야 비로소 평등하다 하나니,
평등한 성품으로 관하여 알면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또한 짓는 바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바가 없고,
자연(自然)이어서 생멸이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느니라.
그러한[然] 것을 해탈하여야 이에 자연이라 하되, 그러함에 있는[有然] 것도 보지 못하고 그러함이 없는[無然] 것도 보지 못하며, 자연을 해탈하면 모두 있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바로 청정하다 하고 이것을 바로 멸하여 다한다고 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행을 쌓아서 지혜가 한이 없고 무생혜(無生慧)를 행하여 다할 수 없으며,
처음 배움을 쌓으면서부터 도량에 이르러 불수(佛樹) 아래 앉아 악마를 항복받아 위없는 도를 이루기까지,
먼저 이 인혜(忍慧)의 정의(定意)에 들어가야 하며,
그러한 뒤에야 사자분신독보삼매(師子奮迅獨步三昧)에 노닐며 큰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느니라.
어떤 이라도 광명을 본 이면 이 모두는 인혜로 감쌈을 보게 되고, 의식(意識)이 부드러워져서 억세고 딱딱한 마음이 없느니라.
언제나 자애(慈哀)로써 몸과 입과 뜻을 껴잡으며,
언교가 청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손상함이 없고 불도를 존숭하는 것에서 마음대로 무위(無爲)하며,
뜻이 삼매에 노닐어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고 남에게 겸손하여 낮추면서 교만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없으니,
공덕과 도과는 밤낮으로 불어나고 속박의 결[縛結]과 원한의 악[怨惡]은 영원히 뿌리와 싹이 없느니라.
다른 지방의 여러 부처님 국토를 노닐 만하고 그 광명과 신령한 감응을 빌며,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니 제도되지 않는 이가 없고,
그 광명을 찾아도 마침내 있는 바가 없으며,
모양[相貌]도 역시 진실이 없다고 분별하느니라.
[색ㆍ통ㆍ상ㆍ행ㆍ식으로 일어나는 모양과 형상]
다시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으로 일어나는 바의 모양과 형상을 분별하나니,
어떻게 5음의 모양을 관하여 통달하는가?
광명을 보는 이가 있는 것을 바로 색(色)이라 하고,
형질이 있으면 이것도 역시 색이라 하며,
취하고 받고 주고 하면 이것도 역시 색이요,
자기의 몸으로 수호하고 지녀도 역시 또 이것은 색이며,
만일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역시 이것은 색이니라.
다음에는 통(痛)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 통이 있게 되는가?
고통(苦痛)과 낙통(樂痛)과 불고불락통(不苦不樂痛)이니라.
언제나 생각하고 분별하여도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없거늘 하물며 느낌[痛]이 있게 되겠느냐?
이렇다면 곧 그렇지 못하느니라.
자세히 깨달아 아는 것이 바로 느낌의 모양[痛相]이요,
나아가고 내달으면서 멈추지 않는 것을 깊이 기억하며 지나간 옛날과 미래와 현재의 남자나 여인과 그 밖의 수없고 한이 없는 생각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사상(思想)이라 하느니라.
이 사상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처소도 없이 텅 비어서 진실이 아니요 또한 이름도 없음을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상이라 하느니라.
만일 다시 선악의 법을 행하는 것과 유기(有記)ㆍ무기(無記)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ㆍ조작(造作)이 있는 것을 보면서 장애로 여기지 않으니,
보살은 그때에 선(善)을 행한 것을 보되 선하지 않은[不善] 것도 아니요, 악(惡)을 행한 것을 보되 악하지 않은[不惡] 것도 아니며,
어떤 때에는 또한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 그 생각을 분별하여도 선이 없다거나 또한 악이 없다고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최승아, 행을 한다[爲行] 하느니라.
다시 어떤 인(因)으로 식(識)이 있는가를 환히 알아야 하느니라.
식은 하나의 모양[一相]이 아니어서,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법도 역시 식이라 하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의 법도 역시 식이라 하며,
갱락(更樂)이 흥하고 쇠하는 법을 통달하여 아는 이것도 식이라 하고,
사상(思想) 중에 있는 것도 역시 식이라 하며,
사상을 여읜 것도 역시 식이라 하고,
선이 있고 악이 있는 것도 역시 식이라 하며,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 역시 식이라 하고,
또한 선한 것도 아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도 역시 식이라 하느니라.
이 식은 어디서부터 생기고 다시 어디서부터 소멸하는가를 알고 생기는 것도 없고 또한 일어났다 소멸하는 것도 없는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을 통달하여 아는 것을 바로 식이라 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동진(童眞) 보살은 몸과 받은 형상과 신근(身根)과 의식(意識)을 버리면서 처음부터 착란하지 않고 중음(中陰)을 받으면서 장애[留難]가 있지 않으며,
중생의 정신이 떠나서 중음에 머무르면 그 경중(輕重)과 앙화(殃禍)의 근본에 따라 곧 장애가 있거니와,
보살 대사(大士)는 뜻을 일으키는 동안에 뜻이 향하는 바에 따라 곧 가서 형상을 받되 장애가 없느니라.
[일생보처 보살의 벗]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동진 보살은 언제나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과 벗이 되어 따르고 모시면서 부처님 국토의 청정한 데를 유관(遊觀)하되,
지극히 미묘하고 가장 으뜸가는 부처님 국토를 선택하며,
뜻은 성대하게 좋으면서 불사(佛事)를 시행하나니,
제8 보살은 자재(自在)를 체득하여 그 인연을 따라 교화하되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연설한 바의 도법(道法)은 다함이 없고, 언제나 착한 가르침으로써 중생을 기쁘게 하느니라.”
[부처님 국토와 공훈]
때에 그 대중의 모임에 있던 여러 보살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늘 여래께서 지혜의 업[慧業]을 널리 펴시고 동진(童眞)의 행을 찬탄하시니,
동진의 공덕이나 과보 또한 견줄 데 없겠구나.
이제 최승(最勝)대사가 닦은 바를 관찰하건대, 동진의 업을 이행하여 역시 틀리거나 어긴 것이 없다.
가령 최승이 가장 바른 깨달음의 위없는 도를 이룬다면, 그 부처님 도를 얻을 때에 명호는 무엇이라 할까?
그리고 그 부처님 국토와 공훈도 장엄하고 청정할 터인데, 어떠한 종류이며, 모든 보살들은 어떤 것을 성취하고, 법률을 받들어 닦을 때는 차별이 있을까?’라고 하였다.
그때에 세존은 그 모인 대중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자리에서 곧 빙그레 웃으시니,
수없는 억백천의 광명이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와 시방의 한없는 세계를 비추어 해와 달의 광명을 가리고,
악마의 궁전을 덮었다가 다시 부처님 몸을 헤아릴 수 없이 돌고는 정수리 위로 들어갔다.
때에 모인 보살들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메고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그 웃으신 뜻을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뜻없이 웃지 않사옵니다. 원하옵건대 그 뜻을 들려주소서.”
그때에 세존께서는 모인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 최승보살을 보느냐?”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이미 보고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모인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현겁(賢劫) 동안에 백 분의 부처님[百佛]이 지나가시고 장차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터인데,
명호는 사자위(師子威)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ㆍ불세존이라 하리라.
그리고 국토의 이름은 지금과 다름이 없으리라.
때에 그 국토의 경계는 신묘(神妙)하고 5곡(穀)이 고루 흔해져서 저절로 값이 없을 것이며,
인민들은 더욱 왕성하고 성곽(城郭)은 장엄하고 가지런하며,
7보(寶)의 금ㆍ은ㆍ유리ㆍ수정ㆍ자거ㆍ마노ㆍ산호ㆍ호박과 마니보(摩尼寶)로 합쳐져 이루어질 것이니라.
때에 그 부처님 국토는 편편하고 여덟 갈래 교차로[八交道]가 있으면서 순전히 보배로 이루어지며,
그 땅은 부드러워서 마치 하늘의 가는 옷[天細衣]과 같고,
마치 도솔천[兜術天]의 의복ㆍ음식ㆍ궁전ㆍ실택(室宅)ㆍ원관(園觀)ㆍ욕지(浴池)ㆍ교차로ㆍ난간ㆍ누각 등이 아주 뛰어나고 자못 미묘한 것처럼,
그 부처님 국토의 신령한 덕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모든 하늘과 바람들은 저절로 나타나서 음악을 울리고,
모든 비단 번기를 달며 당기와 일산을 세우고,
이름 있는 향을 사르며 보배로운 꽃이 비처럼 내리리라.
바른 법[正法]을 보호하여 이지러짐이 없게 하고,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롭게 인도하고 이익을 열어 줄 것이니라.
지금의 이 최승보살은 이 세간에서 죽으면 장차 무노(無怒)부처님의 국토인 극락(極樂)세계에 태어날 것이요,
그 국토에 났을 때에 무노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8천4백의 기이한 법문을 연설하여 도교(道敎)를 드날리면서 구의(句義)에 돌아가게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3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며,
모두 중생들로 하여금 불퇴전(不退轉)에 서게 할 것이니라.”
[보살이 나타나는 모습]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모임에 있는 이들이 다 함께 찬탄하였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최승대사님,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심이 어찌 그리도 빠르십니까?
원컨대 장차 오는 세상에 그 나라에 나게 되어 사자위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때에 도의 가르침을 받아 동진의 행[童眞行]을 닦는 것이 최승과 같게 하소서.”
때에 모인 보살들은 거듭 스스로 생각하기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두루 모두가 혜인지(慧忍智)의 법을 얻는 것이 지금과 같아서 다름이 없게 하며,
그들이 이 소리를 들어도 두려움이 없고 망설임도 품지 않게 되리라’고 하였다.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행(行)이 구비되어 여러 가지 덕을 완전히 갖추어서 특수하고 한량없는 언교를 드러내어, 때에 알맞게 나타내 보이되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느니라.
혹은 범부 속인이나 외롭고 늙은 형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어린아이나 젖먹이의 형상이 되기도 하며,
또 권변(權變)으로써 네 도(道)에 들어가서 수다원을 이미 성취한 이와 벗이 되어 곧 으뜸가는 요의(要義)를 말하며 게으르지 않게 하느니라.
또 방편을 가져서 사다함에 들어가 권고하여 다섯 가지 재난을 끊게 하고 능히 들어가되 일곱 반[七返]을 겪지 않게 하느니라.
혹은 천상에 있으면서 감로(甘露)를 알기 쉽게 연설하여 행이 순숙(純熟)하여진 이면 세간으로 오지 않게[不來] 하기도 하느니라.
혹은 무구 진인(無垢眞人)과 함께 모여 그들을 위하여 몸의 고통[身苦]이 되는 68가지 법을 말하면서 스스로,
‘비루하여 위없는 도[無上道]가 결(缺)하며 한갖 지혜의 광명[慧明]을 없애고 법전(法典)을 손상하면서 욕되게 한다’라고 탄식하게 하기도 하느니라.
혹은 모든 부처님이나 연각의 도(道)를 나타내며,
신족을 드날리어 18변(變)을 나타내고,
잠자코 가르쳐 주면서 해탈을 얻게 하며,
안으로 권혜(權慧)를 품고서 사람의 마음에 알맞게 하고,
인연 따라 약을 주면서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하느니라.
혹은 새로 배우는 처음 뜻을 낸 이면 청정한 정(定)에 함께 들기도 하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널리 색신(色身)을 보며 삼천대천의 부처님 국토가 손바닥 안에 있게 하나니,
함께 서로 공양올리고 그 안을 왔다갔다하지만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게 하느니라.”
[청정 삼매]
때에 구창(究暢)이라는 보살이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장궤(長跪) 차수(叉手)하고 앞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삼매정(三昧定)은 이름이 무엇이기에 삼천대천세계와 시방의 경계를 널리 손바닥 안에 놓으며, 그 안의 중생들이 공경을 일으켜 공양올려도 늘거나 줄어듦이 없게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구창보살 대사에게 말씀하였다.
“그 삼매정은 이름을 청정(淸淨)이라 하며 널리 색신을 보이고 변화를 나타내되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으며[普見色身顯現變化靡不容受],
그 국토의 경계는 본래 그대로요 다르지 않으며, 또한 늘거나 줄지도 않고,
삼천대천세계와 항하의 모래 수만큼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를 모두 다 손바닥 안에 두고서 함께 서로 공손히 섬기고 복된 일을 시행하게 하며,
앉고 눕고 거닐면서 뜻에 따라 재미있게 즐기는데도,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은 저마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자기 몸이 있는 데도 부딪치거나 번거로움이 없느니라.
구창아, 알아야 하느니라.
이것은 모두 동진(童眞) 보살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시행하는 것이니,
교화를 나타낸 바가 있어도 역시 몸을 보지 못하고,
끝내 있는 데서 중생으로 하여금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마음도 있지 않게 하느니라.”
그때 자리에 와서 모인 모든 이들, 즉 천ㆍ용ㆍ귀신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이 저마다 스스로,
‘최승대사 보살로 하여금 신통 변화와 청정정의(淸淨定意)를 나타내 보이게 하고 싶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세존께서 모여 있는 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곧 최승보살 대사에게 말씀하셨다.
“너 이제 최승아, 마땅히 모든 중생과 와서 모여 있는 이들을 위하여 이 삼매인 청정 정의를 나타내어서 여기 모인 모든 이들로 하여금 돈독하게 믿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여라.”
이때에 최승보살 대사는 부처님의 위신을 이어받고 성인의 분부를 공경히 받들어 그 자리에서 삼매정수로,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있는 천ㆍ용ㆍ인민과 귀신왕(鬼神王)과 아울러 그 밖의 높은 하늘[尊天]과 거기 모인 모든 보살들과 형상이 있는 족속으로 하여금,
모조리 손바닥 안에서 선정에 들어 있는 이도 있고, 거니는[經行] 이도 있고 공덕을 일으켜 불사를 짓는 이도 있는 것을 나타내 보였다.
나타낸 바가 특수하고 높이 뛰어나서 비유하기 어려웠으며 견줄 데도 없었다.
신족을 나타낸 뒤에는 시방에서 와서 모인 모든 이들을 도로 본래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여 다르지 않게 하였고,
최승보살도 역시 본래의 자리에 있는 채 의복이 엄정하며 위의를 잃지 않았다.
때에 구창보살이 최승에게 말하였다.
“어진 이가 나타낸 삼매의 위신력은 한량없고 한이 없는 덕을 초월하였고 신령한 감응[神感]이 거룩하게 나타남은 실로 견줄 데가 없습니다.
이에 시방 세계를 능히 포용하여 그 오른 손바닥에 둔 채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었습니다.
저희들도 힘써 더욱 공(功)을 일으키고 덕(德)을 세워서 청정 정의의 법에 나아가 동진 대사의 행에 미치도록 힘쓰겠습니다.”
[스무 가지 결루(缺漏)가 없는 법]
그때에 최승이 구창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의 말과 같습니다.
만일 새로이 배우며 뜻을 내어 행하는 이가 힘써서 동진의 법을 닦아 익히려 하면,
마땅히 부지런히 더 도과를 성취할 것을 생각하여 중도에 물러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보살이 부지런히 힘쓰는 데에는 스무 가지 일이 있나니,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기르고 응하여 줄어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스무 가지 결루(缺漏)가 없는 법인가?
이에 보살이 동진의 행[童眞行]을 닦을 때는 큰 서원의 덮개 없는[無蓋] 마음을 일으켜서 위험한 액난에서 구제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지런히 힘쓰며 물러남이 없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도중(徒衆)을 한 데 모아 도교(道敎)로써 형상이 없는 법을 가르치고,
항시 공하여 없고[空無] 텅 비어 고요한 소리를 연설하나니,
이것이 바로 동진의 물러남이 없음을 행함입니다.
또 보살이 공덕을 널리 펴서 모든 하열(下劣)한 이로 하여금 감싸 줌을 얻게 하되,
먼저 탐욕을 제거하여 상념(想念)이 없게 하며,
도리어 단도무극(檀度無極:보시바라밀)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앞의 중생이 곤액(困厄)이 있는 것을 보면 몸소 가서 교화하고,
그 사람을 편안히 위로하여 고통을 받지 않게 하며,
언제나 양육을 생각하여 마음에 변하거나 바뀜이 없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고행(苦行)을 지어 수없는 고난을 겪으며,
높고 밝은 스승을 구하여 말과 법률을 묻고 받아 바른 법을 받들어 닦고,
언제나 여섯 가지 근본이 없는[無根本] 것을 막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위없는 도를 구하되 마음은 영화와 바라는 것이 없고,
더럽고 물드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 언제나 모든 신통과 지혜를 부지런히 힘써 지관(止觀)을 행하며,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때에 따라 알맞게 응대하니 권변(權變)으로 밝게 요달하며,
깨달아 앎이 없는 이는 전에 받은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이 통달하게 하고,
그런 뒤에야 방편의 마땅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발심과 서원으로 상호를 갖춰,
알아서 그의 몸을 장엄하고 스스로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황금빛이 되며,
거느리는 권속도 똑같이 한 모양[一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넓고 멀리 제도하기를 서원하되 겁약(怯弱)을 품거나 하여 거리낌이 있지 않으며,
비록 생사에 처한다 하더라도 노고(勞苦)를 사양하지 않고, 끝내 뜻이 견고하여 외도를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수없는 공덕과 복된 일을 지어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얽매이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며,
4제를 사유하되 밝게 깨닫고 지혜로 관하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큰 서원의 갑옷을 입고 수없는 겁(劫)으로부터 위없는 도를 구하여,
끝내 ‘나는 진실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이런 행이 있는 이면 줄어짐[耗滅]이 있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범부를 포용하여 스스로 와서 귀의하는 이면,
은밀하게 도의 가르침[道敎]을 말하여 지름길을 지시하여 나아갈 바를 알게 하며,
앞 사람의 근기를 관찰하고 이에 감로를 주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지방 풍속을 관찰하여 왕법(王法)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반역(叛逆)하려 하지 말고,
착한 것이면 따를 것이요 나쁜 것이면 가만히 피해가며,
스스로 높은 체하여 풍속을 무너뜨림이 없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마땅히 대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우되,
범지(梵志)의 대중이거나 장자(長者)의 대중이거나 간에 예의를 자세히 살펴 채용하되,
거닐어야 하면 알아서 거닐고, 앉아야 하면 알아서 앉으며, 누어야 하면 알아서 눕는 등 위의에 알맞게 착오가 없어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동진 보살이 대중에 들어갈 줄 아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언제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고 배워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는 지혜로써 온갖 부처님 법을 완전히 다 갖추고,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다니면서 교화하며,
모든 총지문(摠持門)을 갖춰 얻고자 하고,
여러 가지 지혜의 문에서는 지혜를 분명히 깨달아 알면서,
끝이 없이 동진의 행을 닦아 익히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보살은 바른[正] 것을 지키고 어지러운[亂] 것을 제어하여 삿된 부류에 처하지 않고,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와 선권(善權) 등 37품(品)을 갖추고,
공ㆍ무상ㆍ무원에 그 마음이 게으르지도 않고 또한 고달파하지도 않으며,
끝내 큰 서원의 마음을 잠시라도 잊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동진(童眞)의 견고한 마음입니다.
또 보살은 공덕과 온갖 선[衆善]의 근본을 한 데 모아서 스스로 몸을 감싸고, 모든 상호를 닦아서 스스로 장엄하며,
교만과 무명과 사견을 녹여 없애고,
동진 보살은 한 모양[一相]으로 청정하니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경계가 청정하다거나 청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나니,
그러하여야 상호의 공덕을 두루 갖추고 한량없는 복업(福業)이 모두 구족하며,
또한 게으르거나 물러나는 마음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진 보살은 큰 서원을 세워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고,
널리 지혜의 업[慧業]을 유포하되 정진하며 게으름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닦는 동진의 행입니다.
또 보살은 요술이나 허깨비의 속임수 법을 분별하나니,
공허하고 고요하여 영영 있는 것이 없음을 관하여 알며,
또한 형질이 없는지라 볼 수가 없고 정진(精進)을 기르면서 본래의 업[本業]을 힘써 닦으며,
16분(分)에 대하여 빠뜨리거나 버리지 않고 자(慈)를 행하면서,
보살은 항상 스스로,
‘욕심은 내가 내는 것인데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게 될까?’라고 헤아리면서,
깊이 스스로 사유하여 벗어나니, 소굴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간 사람이 스스로 식의 생각[識想]을 일으켜 염착하는 뜻으로 욕심의 불[欲火]을 일으켜 선의 근본[善本]을 태워버리고 5도(道)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탐욕을 말미암은 무명의 결[無明結]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보살이 5욕(欲)은 모두가 진실하지 않다고 분별하고 부지런히 사유하여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려 하면,
가령 다른 지방의 너른 들판에 어떤 이가 고행을 하며 욕심을 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곧 마땅한 방편으로 중생을 유도하여 그 지역으로 가서 곧 그 고행을 하면서,
욕심을 끊은 사람을 보고는 마음과 뜻이 청정해져 뜨거운 번뇌를 품지 않고 그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도의 마음[道心]을 일으켜 5욕을 제거하고,
점차로 돕고 이끌어 모든 부처님 국토를 노닐면서 모든 부처님 세존께 예배하고 섬기며 공양올리고 차츰차츰 다시 깊은 법의 미묘한 데로 끌어들입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서 보시의 덕과 계율과 인욕의 은혜롭고 온화한 일을 갖추고 뜻을 세워 정진하며,
한결같은 뜻[一意]으로 정(定)에 들어가고 생각이 내달아 흩어지지 않으며, 지혜로 가없는 업을 널리 닦나니,
구창이여, 이것이 바로 동진 보살이 수행하는 도이며, 크게 이롭게 하면서 두루 알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보살이 처음 일으켜 익히고 배워 읊고 읽으면서 스무 가지 행업(行業)을 강론하면 그런 뒤에야 비로소 동진의 자취[迹]를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 최승이 이 법을 말할 때에 1만 7천 명이 모두 크고 넓고 끝없는 뜻을 일으켜 동진의 스무 가지 행업을 수행하기를 앙모하였고,
십천의 천인(天人)들이 모두 온 데 없이 생긴 법인(法忍)을 얻었으며,
다시 수없는 중생들의 무리가 공덕을 더욱 늘려서 중도에 물러날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장하도다. 개사(開士)야, 이롭게 한 바가 많고 제도 해탈되게 한 바가 많았도다.
만일 어떤 보살이 큰 서원의 마음으로 공훈을 한 데 모아 게으름을 품지 않고 행을 더하여 권하고 도와서 법시(法施)를 닦으며,
중생의 무리를 교화함으로써 한 데 모아 제도 해탈시키며 열반의 경계에 들어가 영원히 오고 가는 일이 없으려 하면,
최승아, 이것이 바로 동진(童眞)이 수행할 바이니 그 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마음을 내어 배움을 일으키면 언제나 스무 가지 행법을 닦고 익혀야 점차로 깊은 법보의 창고[法寶藏]에 들어가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이와 같이 배우면 곧 제8 보살의 도(道)에 상응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