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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8권
3. 분별세품(分別世品) ①
이미 3계에 의거하여 심(心) 등의 제법에 대해 분별해 보았으니, 이제 다음으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3계]
3계란 무엇이며, 거기에는 각기 몇 가지의 처소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옥과 방생(傍生)과 아귀와
인간, 그리고 6욕천(欲天)을
욕계의 20처(處)라고 이름하니
지옥과 주(洲)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계 위의 17처를
색계라 이름하니, 거기에는
세 정려 각각에 세 곳이 있고
제4 정려에는 여덟 곳이 있다.
무색계에는 방처(方處)가 없지만
생(生)에 따라 네 종류가 있는데
중동분과 아울러 명근에 의해
마음 등을 상속하게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옥계]
지옥 등의 네 곳과 6욕천(欲天)과, 그리고 기세간(器世間)을 욕계라고 한다.
여기서 6욕천이란 첫 번째가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이며,1)
두 번째가 삼십삼천(三十三天)이며,2)
세 번째가 야마천(夜摩天, Yāmadeva)이며,
네 번째가 도사다천(都史多天, Tuṣitadeva)이며,
다섯 번째가 낙변화천(樂變化天)이며,
여섯 번째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이와 같은 욕계에는 몇 가지 처소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지옥과 주(洲)에 각기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스무 곳이 된다.
즉 8대지옥을 지옥의 각기 다른 곳이라 한 것인데,
첫 번째는 등활지옥(等活地獄)이며,
두 번째는 흑승지옥(黑繩地獄)이며,
세 번째는 중합지옥(衆合地獄)이며,
네 번째는 호규지옥(號叫地獄)이며,
다섯 번째는 대규지옥(大叫地獄)이며,
여섯 번째는 염열지옥(炎熱地獄)이며,
일곱 번째는 대열지옥(大熱地獄)이며,
여덟 번째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다.
주(洲)의 각기 다른 곳이란 4대주(大洲)를 말하는데,
첫 번째가 남섬부주(南贍部洲, Jambudvīpa)이며,
두 번째가 동승신주(東勝身洲, Purvavideha)이며,
세 번째가 서우화주(西牛貨洲, Avaragodnīya)이며,
네 번째가 북구로주(北俱盧洲, Uttarakuru)이다.
즉 이와 같은 열 두 곳과 아울러 6욕천과 방생과 아귀의 처소로써 스무 곳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유정계(有情界)일 경우 타화자재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기세계(器世界)일 경우 타화자재천으로부터 풍륜(風輪)에 이르기까지 모두 욕계에 포섭된다.3)
[색계]
이러한 욕계 위에는 17처가 있다.
즉 아래 세 정려처에는 각기 세 곳이 있으며,
제4 정려처에만 유독 여덟 곳이 있는데,
그러한 기세간과 그곳에 머무는 유정을 총칭하여 색계라고 이름한다.
제1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범중천(梵衆天)이며,
두 번째가 범보천(梵輔天)이며,
세 번째가 대범천(大梵天)이다.
제2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소광천(少光天)이며,
두 번째가 무량광천(無量光天)이며,
세 번째가 극광정천(極光淨天)이다.
제3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소정천(少淨天)이며,
두 번째가 무량정천(無量淨天)이며,
세 번째가 변정천(遍淨天)이다.
제4정려에 여덟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무운천(無雲天)이며,
두 번째가 복생천(福生天)이며,
세 번째가 광과천(廣果天)인데,
네 번째가 무번천(無繁天)이며,
다섯 번째가 무열천(無熱天)이며,
여섯 번째가 선현천(善現天)이며,
일곱 번째가 선견천(善見天)이며,
여덟 번째가 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그런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은 모두 색계의 처소에는 단지 열여섯 곳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범보천 처소에 높은 누각이 있어 이를 대범천이라 이름하지만 한 주인이 머무는 곳으로 별도의 장소[地]가 아니니,
마치 세존께서 앉으신 자리를 ‘사중(四衆)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4)
[무색계]
무색계 중에는 처소가 존재하지 않으니, 색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방처(方處)가 없는 것이다.
즉 무색의 법인 과거ㆍ미래법이나 무표와 무색의 법이 방소, 즉 구체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상 결정코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숙생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가 있을 뿐으로,
첫 번째가 공무변처(空無邊處)이며,
두 번째가 식무변처(識無邊處)이며,
세 번째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네 번째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즉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무색계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는 처소 상 위 아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숙]생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고 열등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시 그곳에 방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처소(욕계ㆍ색계)에서 그러한 정려(무색정)를 획득한 자가 명종(命終)하면 바로 이러한 처소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곳으로부터 몰하여 욕계ㆍ색계에 태어날 때는 바로 이러한 처소(욕계ㆍ색계)에서 중유(中有)가 일어나기 때문이다.5)
이를테면 유색계의 일체의 유정과 같은 이는 요컨대 색신(色身)에 의지하여 심(心) 등이 상속하는데,
무색계에서 생을 받는 유정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심 등이 상속하는 것인가?6)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설하기를,
“그러한 처소에서의 심 등은 중동분(衆同分)과 아울러 명근(命根)에 의해 상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유색계 유정의 심 등도 다만 이러한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상속하지 않는 것인가?
유색계의 생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저열하기 때문이다.8)
무색계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 법은 어째서 강성한 것인가?
그러한 무색계에서의 두 가지는 뛰어난 선정[勝定, 곧 무색정]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니,
그러한 등지(等至)에 의해 능히 색상(色想)을 조복하기 때문이다.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무색계에서의 심 등의 상속은 다만 뛰어난 선정에 의지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의지처가 필요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예컨대 유색계에서 생을 받은 유정의 동분과 명근은 색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색계에서의 이 두 가지는 무엇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렇다면 유색계의 이 두 가지는 어찌하여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유색계의 생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저열하기 때문이다.
무색계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는 어째서 강성한 것인가?
무색계에서의 두 가지는 뛰어난 선정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즉 “그러한 계의 선정(즉 무색정)에 의해 능히 색상을 조복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에서의] 심(心) 상속의 힐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며, 혹은 심과 심소도 오로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10)
따라서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색계에서 심 등이 상속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없다.
즉 어떤 원인이 있어 아직 색의 애탐을 떠나지 않고서 심ㆍ심소 등을 인기한 경우라면 인기된 심ㆍ심소는 색과 구생하는 것으로, 색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만약 원인이 이미 색의 애탐을 떠났다면 색을 싫어하고 배반하였기 때문에 인기된 심 등은 색과 구생하지 않으며, 색에 의지하지 않고서 일어난다.”11)
[3계라고 이름한 까닭]
어떠한 까닭에서 욕(欲) 등의 3계라고 이름한 것인가?
능히 자상(自相)을 갖기 때문에 ‘계(界)’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미 앞(권제1)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계는 ‘종족(種族)’의 뜻이다.
즉 욕탐[欲]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욕계라고 이름하였으며, 색(色)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색계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를테면 후추음이라 하고, 금강환(金剛環)이라고 말하듯이 가운데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12)
그리고 그 세계 중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라고 이름하였다.
즉 여기서 말한 색이란 바로 변애(變礙)의 뜻, 혹은 시현(示現)의 뜻으로, 그곳의 본질[體]이 색이 아니기에 ‘무색’이라 이름한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색이 없다’는 사실만을 본성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13)
즉 무색[성]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무색계라고 이름한 것이니, 가운데 말을 생략한 예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욕탐의 세계를 이름하여 욕계라고 하니, 이러한 세계는 능히 욕탐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욕탐이라는 말은 어떠한 법을 설한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단식(段食)과 음욕에 의해 인기된 탐(貪)이니,
계경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14)
세간의 온갖 묘한 경계는 진실로 욕탐이 아니니
진실의 욕탐은 사람들이 분별한 탐(貪)으로
묘한 경계는 본성 그대로 세간에 머무를 뿐
지자(智者)는 그것에 대한 욕탐을 이미 제거하였네.15)
그러자 사명외도(邪命外道)가 바로 존자(尊者) 사리자(舍利子)를 힐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세간의 묘한 경계가 진실로 욕탐이 아니며
욕탐은 바로 사람들이 분별하는 탐이라고 한다면
비구는 마땅히 욕탐을 향수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나쁜 분별의 심사(尋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16)
그 때 사리자가 그에게 다시 반문하여 말하였다.
만약 세간의 묘한 경계가 바로 진실로 욕탐이며
욕탐을 사람들이 분별하는 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의 스승도 욕탐을 향수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항시 좋아하는 묘한 색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3계에 현행하게 되면 이러한 법을 바로 3계의 계(繫), 즉 3계에 종속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3계에 현행하는 법] 가운데 3계의 탐을 수증(隨增)하는 것이 바로 3계에 종속되는 법 즉 3계계(界繫)이다.17)
그렇다면 그 가운데 어떠한 법을 3계의 탐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3계 중에서 각기 수증된 것이다.
지금 여기서 말한 바는 말을 묶는 이[縛]와 말[馬]에 대해 답하는 것과 같으니,
비유컨대 어떤 이가 ‘말을 묶는 이가 누구인가?’ 라고 묻자 ‘말의 주인이다’고 답하여 말하고,
그가 ‘그렇다면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다시 묻자 ‘말을 묶는 자이다’고 답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18)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답은 모두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말한 바는 그러한 답과 같지 않으니,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욕계의 온갖 처소에서 아직 탐을 떠나지 않은 자의 탐을 ‘욕탐’이라 이름하며,
이러한 탐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욕계계’라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색계와 무색계의 처소 중에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은 부정지(不定地, 즉 散地)에서의 탐을 ‘욕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욕계계’라고 한다.
또한 온갖 정려지(靜慮地, 즉 4정려)에서의 탐을 ‘색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색계계’라고 한다.
나아가 온갖 무색지(無色地, 즉 4무색정)에서의 탐을 ‘무색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무색계계’라고 한다.
욕계 변화심(變化心) 상에서 어떻게 욕탐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19)
다른 이로부터 들은 바에 대해, 혹은 스스로 퇴실(退失)하여 [변화심에 대해] 애미(愛味)를 낳기 때문이다.20)
혹은 변화하는 자의 자재로운 힘을 보고서 그러한 변화심에 대해 탐애를 낳기 때문이다.21)
[혹은] 만약 마음이 능히 향(香)ㆍ미(味)의 두 가지 법을 변화하였다면 이러한 능변화심은 바로 욕계계이니, 색계의 마음은 능히 향ㆍ미를 화작(化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22)
이와 같은 3계는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인가?
3계는 가없는 것[無邊]으로, 마치 허공의 양(量)과도 같다.
따라서 비록 처음으로 생겨나는 시기(始起) 유정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각기 무수한 유정을 교화 제도하여 무여(無餘)의 반열반계(般涅槃界)를 증득하게 하였으니,23) 그러한 유정의 무궁무진함은 마치 허공과도 같은 것이다.
세계는 마땅히 어떠한 형태로서 안주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옆으로 병립[傍]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비유하자면 수레바퀴 만한 하늘 비[天雨]의 방울이 무간(無間)에 끊임없이 허공으로부터 아래로 쏟아 퍼붓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무간에 끊임없이 멸하기도 하고 혹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동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남ㆍ서ㆍ북방도 역시 또한 이와 같다”고만 말하였을 뿐,
상하로 그렇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24)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상하 두 방향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니, 다른 부파가 전승한 경에서는 시방(十方)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색구경천 위에도 다시 욕계가 있으며, 욕계 아래에도 색구경천이 있으니, 이렇듯 세계는 끝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25)
그리고 만약 한 욕계의 탐을 떠날 때면, 온갖 욕계의 탐도 모두 멸하여 떠날 수 있으며, 색계와 무색계의 탐을 떠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26)
그러나 초정려에 의해 신통의 지혜[通慧]를 일으킬 때에 생겨난 신통은 다만 그 자신이 생겨난 세계와 범세(梵世)에만 미칠 수 있고, 다른 세계에는 미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정려에 의한] 신통의 지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3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5취]
5취(趣)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 중에 있어서 지옥 등은
자신의 명칭에 따라 5취(趣)로 설해지니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유정에 속하지만, 중유(中有)는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3계 중에는 지옥 등의 5취(趣)가 있다고 설한다.
즉 지옥 등을 자신의 명칭대로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지옥ㆍ방생(傍生)ㆍ아귀(餓鬼), 그리고 인간과 천(天), 이것을 5취라고 이름한다.27)
그리고 오로지 욕계에만 네 가지 취 전부가 있으며, 3계에는 각기 천취의 일부만이 있다.
3계(界)에 포섭되면서 ‘취’에는 포섭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럼에도 3계 중에 5취가 있다고 설한 것인가?
있다.
이를테면 선(善)과 염오와 외적인 기세간과 중유(中有)는 비록 계에 포섭되는 존재[界性]일지라도 취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니, 5취의 본질은 오로지 무부무기(無覆無記)일 뿐이기 때문이다.28)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취는 서로 뒤섞여야 할 것이니, 하나의 취 중에는 5취의 업과 번뇌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29)
그리고 5취는 오로지 유정수(有情數)만을 포섭하며, 중유 자체는 포섭하지 않는다.
곧 『시설족론(施設足論)』에서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4생(生)은 5취를 포섭하여도 5취는 4생을 포섭하지 않는다.
포섭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중유이다.”30)
또한 『법온족론』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계(眼界)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4대종과 소조의 정색(淨色)으로, 바로 지옥ㆍ방생ㆍ아귀ㆍ인간ㆍ천의 취(趣)와 수소성(修所成)과 중유의 안(眼), 안근(眼根), 안처(眼處), 안계이다.”31)
나아가 계경에서도 역시 중유를 ‘취’와는 다른 존재로 헤아리고 있다.
어떤 계경에서 그러한가?
이를테면 『칠유경(七有經)』이니, 거기서는 이를테면 지옥유(有)ㆍ방생유ㆍ아귀유ㆍ천유ㆍ인유ㆍ업유(業有)ㆍ중유의 일곱 가지 존재를 설하고 있다.32)
즉 그 경에서는 5취와 아울러 5취의 원인(즉 업유)과 그것으로 나아가는 방편(즉 중유)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33)
그렇기 때문에 ‘취’는 오로지 무부무기라고 하는 사실의 이치는 지극히 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업유라는 원인을 통해 판단하건대, 그것은 [결과인] 온갖 ‘취’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서는 이와 같은 계경을 외워 전하고 있다.34)
“존자 사리자(舍利子)는 이같이 말하였다.
구수(具壽)여! 만약 어떤 이에게 지옥의 [과보를 받을 만한] 온갖 번뇌[漏]가 현전하는 일이 있다면, 지옥의 이숙을 초래할 업[順地獄受業]을 조작하고 증장할 것이니, 그 때 그의 신ㆍ구ㆍ의 업은 첨곡(諂曲)ㆍ진예(瞋穢)ㆍ탐탁(貪濁)할 것이기 때문에 나락가 중에서 5온의 이숙을 받게 된다.
즉 그 같은 이숙이 이미 일어났으면 그것을 나락가(那落迦, naraka, 즉 지옥)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온의 법을 배제하고서 어떻게 그러한 나락가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취’는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인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음의 『품류족론』의 내용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즉 거기서는,
“5취는 일체의 수면(隨眠)에 의해 수증(隨增)된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5)
거기에서는 5취로 속생(續生)하는 마음 중에 5부의 일체 번뇌가 있을 수 있음을 설한 것으로, ‘취’와 아울러 그것으로 드는 마음을 모두 ‘취’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5취가 무부무기라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비유하자면 촌락과 촌락 변두리를 모두 촌락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36)
그러나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5]취 자체는 선과 염오와도 역시 통한다.
그렇지만 『칠유경』에서 업유(業有)를 헤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결정코 그것(5취)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마치 5탁(濁) 중에 ‘번뇌’와 ‘견(見)’을 구별하여 ‘탁’이라고 설하고 있다 하여,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견은 결정코 번뇌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유도 역시 비록 ‘취’이기는 하지만, ‘취’의 원인을 나타내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다.”3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칠유경』 중에서 5취와 별도로 설한] 중유도 역시 마땅히 ‘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취’의 뜻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취’란 말하자면 그렇게 ‘가게 된 것[所往]’으로, 중유를 설하여 바로 ‘가게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것은 바로 죽는 곳[死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도 역시 마땅히 ‘취’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바로 죽는 곳에서 생을 받기 때문이다.38)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중유는 ‘중유’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마땅히 ‘취’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바로 두 가지 ‘취’ [즉 사유(死有)와 생유(生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간의 존재 즉 ‘중유’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취’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중유’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존자 사리자가,
“이숙이 이미 일어났으면 그것을 나락가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이숙이 일어나야 비로소 지옥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지,
‘지옥은 오로지 이숙일 뿐이다’는 사실을 설한 것은 아니다.
또한 다시 “오온의 법을 배제하고서 어떻게 그러한 나락가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고 말한 것은,
능히 온갖 ‘취’로 나아가는 실유(實有)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부정하기 위해 그같이 설한 것일 뿐,
[이숙의 무기온 이외] 그 밖의 다른 온을 부정하기 위해 그같이 말한 것은 아니다.39)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5]취는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한결같이 이숙생(異熟生)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는 말하기를,
“역시 소장양(所長養)과도 통한다”고 하였다.40)
앞에서 설한 3계와 5취 중에는 그 순서대로 식주(識住)에 일곱 가지가 있다.41)
[7식주]
그것의 일곱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체가 다르고 아울러 생각도 다른 것과
신체는 다르지만 생각은 동일한 것과
이와 반대되는 것과, 신체와 생각이 동일한 것과
그리고 무색의 아래 세 가지 처이다.
때문에 식주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 것으로
그 밖의 처는 식주가 아니니, 손괴함이 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 중에서 설하기를,42)
“유색의 유정은 신체가 다르고[身異] 생각도 다른데[想異], 예컨대 인간과 일부의 천(天)과 같은 유정이 바로 제1 식주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부의 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욕계의 6천과, 겁초(劫初)에 생겨난 자를 제외한 초정려[의 온갖 천]을 말한다.43)
‘신체가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색신은 여러 가지의 색깔ㆍ형태[顯形]와 모양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체가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신체를 갖었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신체가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의 관념[想]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생각을 갖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는 다르지만[身異] 생각은 동일한[想一] 자도 있으니, 범중천(梵衆天)과 같은 이로서 이를테면 겁초에 일어난 자가 바로 제2 식주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겁초에 일어났으므로 그들 여러 범중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다.
‘우리들은 모두 다 대범(大梵)에 의해 생겨난 이들이다.’
그리고 그 때 대범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제 범중들은 모두 다 내가 낳은 이들이다.”44)
이같이 [대범이] 단일한 원인이라고 동일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러나 대범왕의 신체는 그 크기가 높고 광대하며, 용모나 위덕(威德), 언어, 광명, 의관 등에 있어서 각각이 모두 범중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45)
“범중천은 이같이 생각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일찍이 이와 같은 중생(즉 대범)이 장수하며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그런데 그(대범)가,
‘어떻게 하면 그 밖의 다른 유정(즉 범중천)으로 하여금 우리(대범천)의 동분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원을 세웠고,
그가 이러한 마음의 원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바로 그의 동분 안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범중은 일찍이 어떤 처소에서 대범을 보았던 것인가?
유여사는 말하기를,
“극광정천(極光淨天)에 머물 때이다. 즉 그들은 그 하늘로부터 몰(歿)하여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 범중들은] 어떻게 지금 제2 정려를 획득하지 않았으면서 그곳에서의 옛날 일[宿住事] 능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만약 그가 이미 제2 정려를 획득하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범을 연(緣)으로 삼아 오히려 계금취견(戒禁取見)을 일으키는 것인가?46)
다시 유여사는 설하기를,
“중유 중에서 머물 때 [보았다]”고 하였다.47)
그들이 중유 중에 머물 때에는 장시간 머무는 일이 없으니, [제2 정려로부터 몰하여 초정려의] 생을 받는 데에는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범중천이,
‘우리들은 일찍이 이와 같은 중생(즉 대범)이 장수하며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범중은 바로 그들 자신의 하늘 즉 범중천에 머물면서 여기에 태어나기 이전의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그들(대범)이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서 그 후 [거기에 태어나] 다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극광정천(極光淨天)의 경우처럼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다른[想異] 자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제3 식주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만 뒤의 것(즉 제2 정려의 최후인 극광정천)만을 언급하였지만 아울러 처음의 것(즉 역시 제2 정려천인 小光天과 無量光天)도 포섭해야 하니, 제2 정려가 모두 여기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한 소광천이나 무량광천은 어떠한 식주에 포섭될 것인가?
즉 그러한 천은 색깔과 형태, 모양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동일하다’고 일컬은 것이며,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교차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48)
그리고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 천(天)은 근본지(根本地)의 희근(喜根)을 싫어하여 근분지(近分地)에 의해 사근(捨根)을 일으켜 현전시키고,
다시 근분지의 사근을 싫어하여 근본지의 희근을 일으켜 현전하게 하니,
마치 부귀한 자가 욕락(欲樂)을 싫어하여 법락(法樂)을 향수하고,
법락을 싫어하여 다시 욕락을 향수하는 것과 같다.”49)
어찌 변정천(遍淨天)의 생각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하지 않겠는가?50)
변정천에서는 일찍이 낙(樂)을 싫어하는 일이 없으니, 낙은 적정(寂靜)이므로 일찍이 싫어한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 정려의] 희(喜)는 그렇지 않으니, 마음을 요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른 어떤 계경에서는 그러한 천 중에서의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극광정천 중에 새로이 태어난 천중(天衆)이 있었는데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였다.
그는 [괴겁(壞劫) 시에] 하지(下地)에서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보고 두려움과 염리(厭離)를 느낀 나머지,
‘저 화염이 범궁(梵宮)을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 계속 올라와 우리의 처소(즉 극광정천)에까지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 때] 이미 오래 전에 극광정천에 태어나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떤 천중이 있었는데, 그 놀라고 두려움에 떠는 천중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정선(淨仙)이여! 정선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옛날에도 저 화염은 범궁을 모두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는 거기서 바로 꺼져 버렸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들(제2 정려의 천중)은 [하지의] 화염을 보고서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울러 ‘두렵다’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일컫는 것이지,
[유부의 주장처럼]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51)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변정천의 경우처럼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동일한[想一] 자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제4 식주이다.
즉 오로지 [적정 미묘한] 즐거움의 생각[樂想]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이름한 것이다.
[생각이 동일하고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다시 정리하면]
초정려 중에서는 염오한 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며,52)
제2 정려에서는 두 가지의 선한 생각(즉 희근과 사근)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며,53)
제3 정려에서는 이숙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54)
나아가 아래 세 가지 무색정(無色定)의 명칭의 차별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식주로서,55)
이상의 식주를 일컬어 7식주라고 한다.
여기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식주(識住)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그것에 계속(繫屬)되는 5온과 4온을 바로 ‘식주’라고 이름한다.56)
그 밖의 [처소의 온]은 어째서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인가?
그 밖의 처소에서는 모두 식(識)을 손상시키고 파괴[損壞]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식’이 거기에 낙주(樂住)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처소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惡處:지옥ㆍ아귀ㆍ방생)와 제4 정려, 그리고 유정천(有頂天: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에는 무거운 고수(苦受)가 있어 능히 ‘식’을 손상시키며,
제4 정려에는 무상정과 무상사(無想事:즉 무상과)가 있고, 유정천 중에는 멸진정이 있어 능히 ‘식’을 파괴하고 그 상속을 끊어지게 하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악처 등을 제외한] 다른 처소에 처해 있는 유정은 마음으로 즐거이 와서 머물며, 만약 그곳에 이를 경우 다시 나가려고 희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하였다.
그렇지만 온갖 악처에는 이러한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없다.
즉 제4 정려의 마음은 항상 나가기만을 희구하니,
예컨대 여러 이생은 무상(無想)에 들기만을 희구하고,
여러 성자는 정거(淨居) 혹은 무색처에 드는 것만을 즐기려 하며,
혹은 정거천(淨居天)의 유정은 적멸을 증득하기만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57)
그리고 유정천은 어둡고 저열[昧劣]하기 때문에 ‘식주’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7식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9유정거]
이에 따라 다시 9유정거(有情居)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정거의 아홉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7식주와] 함께 유정천(有頂天)과
그리고 무상(無想)의 유정이
바로 9유정거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 밖의 곳은 즐거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정거가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7식주와 아울러 제일유(第一有:즉 非想非非想處인 有頂天을 말함)와 무상(無想)의 유정, 이것을 일컬어 아홉 가지라고 한다.
즉 온갖 유정류는 오로지 이러한 아홉 곳에서만 즐거이[欣樂] 머물기 때문에 ‘유정거(有情居)’로 설정한 것이다.58)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처소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니, 즐거이 머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밖의 다른 처소라고 함은 온갖 악처(惡處)를 말한다. 즉 그곳은 유정류가 스스로 즐거워하며 머무는 곳이 아니니, 악업의 나찰(羅刹, raksana)이 그를 핍박하여 머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은 감옥과 같기 때문에 유정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무상천을 제외한 그 밖의 제4정려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니, 앞서 식주(識住) 중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59)
[4식주]
앞에서 인용한 경에서는 7식주를 설하고 있지만, 다시 어떤 다른 경 중에서는 4식주를 설하고 있다.60)
그것의 네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4식주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온(蘊)으로서 오로지 자지(自地)의 그것뿐으로
유독 식온(識蘊)만은 식주가 아니라고 설하며
[7식주와 4식주는] 유루로서, 4구(句)로 포섭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식주의 네 가지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즉 경에서,
“식(識)은 색(色)에 따라 머물며,
식은 수(受)에 따라 머물며,
식은 상(想)에 따라 머물며,
식은 행(行)에 따라 머문다”고 하였으니,61)
이것을 네 가지 종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순서에 따른 유루의 4온(蘊)이다.
또한 이것은 오로지 자지(自地)에 존재하는 것만 식주가 되며 다른 지에 존재하는 것은 식주가 아니니, ‘식’의 소의처가 되어 탐착[依著]하게 되는 것을 ‘식주(識住)’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즉 ‘식’은 다른 지(地)의 색 등의 온에 대해서는 갈애하는 힘[愛力]에 의해 그것을 소의처로 삼아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식온은 식주가 된다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머무는 것[能住,즉 식]’을 떠나 ‘머물게 되는 것[所住,즉 대상]’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능히 머무는 식을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자면 [능히 왕좌에 앉는 자인] 왕을 왕좌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혹은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부리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법을 식이 타고 부린다고 한다면, 이러한 법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하니, 식은 능히 그 자신을 타고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온을 설하여 식주라고 하지 않는 것으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이와 같다.6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는,
“식식(識食) 중에도 희(喜)가 있고, 염(染)이 있으며, 희염(喜染)이 있기 때문에, 식은 거기에 머물며 그것은 식에 의해 제어(乘御)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63)
또한 [식온이 4식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앞의 7식주는 5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비록 이러한 설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생처(生處)에 포섭되는 (5)온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
즉 [5온] 전체가 희염을 낳았기 때문에 식이 일어날 때에도 역시 ‘식주’라고 이름한 것으로, 오로지 식온에 대해서만 [식주라고] 설한 것이 아니다.64)
그러나 색 등의 (4)온은 각기 능히 여러 종류의 희염을 낳고, 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의로 삼아 탐착하게 하기 [때문에 식주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유독 식온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4식주 중에서 식은 식주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경우에 있어서는 [식을 포함시켜] 설할 수 있다.65)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4식주는 마치 좋은 밭과 같고, 취착함이 있는 일체의 온갖 식[有取識]은 종자와도 같다”고 설하셨으니,66)
종자(즉 식)를 좋은 밭(4온)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존이 설한 교법의 뜻을 우러러 헤아려 보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또한 법(식 이외 4온)은 식온과 구시(俱時)에 생겨나 식의 좋은 밭이 될 수 있어 ‘식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식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식주가 아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논설된 일곱 종류와 네 종류의 식주는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유루이다.
[7식주와 4식주의 관계]
7식주가 4식주를 포섭하는 것인가, 4식주가 7식주를 포섭하는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두루 포섭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할 수 있다.
즉 자세히 관찰하면 이러한 두 가지 교문(敎門) 자체에는 서로 범주 상의 넓고 좁음이 있어 혹 어떤 경우 7식주에는 포섭되어도 4식주에는 포섭되지 않는 등의 4구가 있을 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제1구는 7식주 중의 식이 바로 그것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온갖 악처와 제4정려, 그리고 유정천 중의 식온을 제외한 그 밖의 온이 바로 그것이다.
제3구는 7식주 중의 [식온을 제외한] 4온이 바로 그것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행상을 제외한 것이다.67)
[계ㆍ취ㆍ생의 내 가지 종류]
앞에서 설한 온갖 계(界)와 취(趣)의 생(生)에는 간략히 네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68)
무엇을 네 가지라 하며, 어떠한 처소에 어떠한 생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ㆍ5취] 중에는 4생의 유정이 있으니
이를테면 난생(卵生)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과 방생은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며
지옥과 아울러 온갖 천(天)과
중유는 오로지 화생(化生)이며
아귀는 태생(胎生)과 화생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정의 유형에는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이 있는데, 이것을 일컬어 4생(生)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이란 말하자면 생류의 뜻으로, 온갖 유정 중에는 비록 잡다한 종류로 뒤섞여 있을지라도 생류로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난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알껍질[卵殼]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난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거위나 공작ㆍ앵무새ㆍ기러기 등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태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탯집[胎藏]으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태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코끼리나 말ㆍ소ㆍ돼지ㆍ양ㆍ나귀 등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습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습기(濕氣)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습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벌레나 누에나비ㆍ모기ㆍ노래기ㆍ지네 등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화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곳(즉 앞에서 언급한 알ㆍ태ㆍ습기 등)에도 의탁한 바없이 생겨나는 유정류를 화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나락가나 천(天), 중유 등과 같은 것이다.
즉 감관을 모두 갖추어 결함이 없으면서 수족이나 마디마디[支分]가 단박에 생겨나니, 없는 듯하다가 홀연히 있기 때문에 화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온갖 취(趣)에는 각기 몇 가지의 생이 있는 것인가?]
인간과 방생의 취에는 각기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즉 인간이면서 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고니의 알에서 생겨난 세라(世羅)와 오파세라(鄔波世羅)와,69) 녹모(鹿母)의 소생인 서른두 명의 아들과,70) 반차라왕(般遮羅王)의 오백 명의 아들 따위와 같은 자이다.71)
인간이면서 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바로 지금 세상의 인간과 같은 자이다.
인간이면서 습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만타라(慢馱羅), 차로(遮盧), 오파차로(鄔波遮盧), 합만(鴿鬘), 암라위(菴羅衛) 등과 같은 자이다.72)
그리고 인간이면서 화생인 경우는 오로지 겁초(劫初:즉 태초)의 인간뿐이다.
방생의 세 가지 종류(즉 난ㆍ태ㆍ습의 3생)는 모두 현재 관찰되고 있는 바이며,
방생이면서 화생인 것은 용(龍)이나 게로다(揭路茶) 등과 같은 것이다.73)
그리고 일체의 지옥과 온갖 천과 중유는 모두 오로지 화생일 뿐이다.
나아가 아귀취는 오로지 태생과 화생 두 종류와 통할 뿐이다.
즉 아귀이면서 태생인 자는 아귀모(餓鬼母)와 같은 이인데, 목련(目連)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나는 밤마다 새끼를 다섯 낳아
낳는 대로 모두를 먹어 치우며,
낮에도 다섯을 낳아 역시 그러하여
비록 모두를 먹었으되 배부른 일이 없도다.74)
일체의 ‘생’ 가운데 어떠한 생이 가장 뛰어난 것인가?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
가장 뛰어난 것은 오로지 바로 화생일 뿐이다고.75)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생’을 획득하는데 자재(自在)하면서도 [화생을 받지 않고] 태생을 받은 것인가?76)
현재세에 태생을 받을 경우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여러 위대한 석가종족의 친족과 권속을 인도하고 관계[相因]하여 정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종족을 인도하여 ‘보살이 바로 전륜왕(轉輪王)의 종족이다’는 사실을 알고 경애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낳게 하여 그것으로 인해 삿된 것을 버리고 정법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교화될 중생으로 하여금 ‘그(최후신의 보살)는 이미 인간임에도 능히 대의(大義)를 성취하셨다.
우리도 역시 그러하니 어찌 능히 정근(正勤)을 발하여 정법을 전수(專修)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증상심을 낳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다고 한다면 [즉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보살의 족성(族姓)을 알기 어려워 천신(天神)인가 귀신인가 하여 허깨비[幻化]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을 것이니,
이를테면 외도의 논(論)에서 거짓되게 비방하여 말한 것과 같다.
“백 겁을 지난 후 마땅히 위대한 환술사(幻術師)가 세간에 출현하여 세간을 집어삼키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생을 받아 온갖 의혹과 비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신계(身界:즉 사리를 말함)를 남기기 위해서 태생을 받은 것이다.
즉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과 온갖 이류(異類)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한번만 공양을 베풀어도 천 번이나 하늘에 태어나고 아울러 해탈을 증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화생을 받았다고 한다면 외적인 종자[外種, bāhya-bīja]가 없기 때문에 몸이 문득 죽게 되면 더 이상 남아있는 형체가 없으니, 이는 마치 등불이 꺼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지원통(持願通)를 갖고 있어 능히 오래도록 그 몸을 남겨둘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77)
논의에서 논의가 낳아지는 법, 만약 화생의 몸이 마치 등불이 소멸한 것처럼 죽어서 더 이상 남기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에서 ‘화생의 게로다(揭路茶) 새가 역시 화생인 용을 잡아먹기에 충분하다’고 설하였던 것인가?78)
[화생의 용인 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만 먹기 위해 용을 잡은 것일 뿐, 허기를 채운다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79)
혹은 용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는 잠시 허기를 채울 수 있지만, 죽고 나면 다시 배고프게 된다.
즉 [살아 있는 동안에] 잠시 먹었다 하였는데,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4생 가운데 무엇이 가장 많은 것인가?
오로지 화생이 가장 많다.
왜냐 하면 3취(즉 인간ㆍ방생ㆍ아귀)의 일부와, 2취(즉 천과 지옥) 전부, 그리고 일체의 중유(中有)가 모두 화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법을 설하여 중유라고 일컬은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 중유는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80)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死)와 생(生)의 두 가지 유(有) 중간의
5온을 중유(中有)라고 이름하니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유는 ‘생’이 아닌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중유란] 사유(死有) 이후, 생유(生有) 이전, 다시 말해 그 중간에 존재하는 [5온] 자체로서, 태어나야 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해 이러한 몸을 일으킨 것이니, 2취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몸도 이미 일어난 것이라면 어째서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81)
‘생’이란 말하자면 당래(當來)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는 것으로, ‘이른다’는 뜻에 의해 ‘생’이란 명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유의 몸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일어났을지라도 아직 그곳(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82)
무엇을 일컬어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이라고 한 것인가?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의 5온이 마침내 분명하게 되는 것,83) 이것을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중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죽음으로부터 생처(生處)에 이르는 사이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84)
이는 마땅히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증(理證)과 교증(敎證)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증과 교증에 의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곡식 등이 상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곳(즉 生處)에 끊어짐 없이 속생하니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의 실재가 병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상속한 것이 아니며, 두 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으로
경에서 건달박(健達縛)과 아울러 5불환과와
7선사(善士)의 존재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정리(正理)에 의할 것 같으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상속(相續) 전전(展轉)하는 법은 요컨대 끊어짐이 없이, 즉 무간(無間) 찰나에 속생(續生)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의 곡식 따위가 상속하는 것처럼 유정이 상속하는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찰나에 속생하여 반드시 끊어짐[間]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어찌 현견하고 있지 않는가?
즉 마치 거울 등에 의지하여 본체[質, 즉 거울에 비친 상의 본체]로부터 영상[像, 거울에 비친 상]이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법이 속생(續生)하더라도 그 사이에 역시 끊어짐이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85)
이와 마찬가지로 유정의 사유와 생유 사이에 비록 끊어짐이 있을지라도 무엇이 속생하는 것을 방해할 것인가?
실로 [거울에 맺힌] 온갖 영상이 실재한다고 하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본체와 영상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예증은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즉 [본체와는] 다른 별도의 색이 낳아진 것을 설하여 ‘영상’이라고 이름하지만 그것의 체성이 실유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설사 이루어질 수 있다 할지라도 양자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86)
즉 [본송에서]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실유의 색]이 병존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처소에 거울이라는 색법과 영상이 함께 현전하는 것을 보지만,
[만약 그것들이 실유라고 한다면] 두 가지의 색은 마땅히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들은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87)
또한 폭이 좁은 강물 위에 비친 양안(兩岸)의 색형(色形)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상이 동시에 함께 나타난 것으로, 양안에 있는 자는 서로를 분명히 본다.
그러나 일찍이 동일처에 병존하는 두 가지의 색을 본 일이 없으니, 이러한 두 가지 색은 마땅히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림자[影]와 빛[光]은 일찍이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림자 가운데 매달려 있는 거울을 보게 되면 빛의 영상이 환하게 비쳐 거울의 면에 나타나지만,
마땅히 여기(하나의 거울 면)에 두 가지 상(그림자와 빛)이 함께 생겨났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은 [본송에서]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사물이 병존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을 때의 두 가지란,
거울의 면과 거기에 비친 달의 영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는] 가깝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등의 차별이 있으니,
마치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88) 만약 [동일한 처소에]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다르게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영상[像]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보이게 되는 것은 온갖 인연이 화합한 세력 때문으로, 이러한 제 법성의 공능의 차별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본송에서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본송에서]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함은,
본체[質]와 영상[像]은 상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본체와 영상은 [사유와 생유처럼] 동일한 상속이 아니니,
오로지 거울 등에 의지하여서만 영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영상과 본체는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와 생유와 같은 것은 바로 동일한 상속으로 전후에 끊어짐이 없이 다른 곳에서 속생한다. 본체와 영상을 서로 견주어 보더라도 거기에는 이와 같은 상속이 없다.
즉 [양자의 관계는]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본체와 영상은 중유 무체론(無體論)의]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89)
또한 [거울에] 나타난 영상은 두 가지 연(緣)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중유 무체론의 비유가 되지 않는다].
즉 온갖 영상은 두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첫 번째가 본체이며, 두 번째가 거울 따위이다.
즉 영상은 이 두 가지의 인연[因]이 뛰어날 때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90)
그러나 생유는 두 가지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오로지 사유에만 의지할 뿐 별도의 뛰어난 의지처가 없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본체와 영상의] 비유는 이러한 법(즉 사유와 생유)과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또한 [생유는] 외적 무생물[非情, acetanā]인 정혈(精血:아버지의 정액과 모태의 피) 등의 연(緣)을 뛰어난 의지처[勝依性]로 삼는다고 설할 수도 없으며,91)
화생이 공중에서 홀연히 생겨난다고 할 경우, 거기서는 어떠한 법을 뛰어난 의지처로 삼았다고 헤아릴 것인가?
정리(正理)에 따라 ‘사유로부터 생유에 이르는 데에는 끊어짐[間節]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 유여사의 종의(즉 중유무체론)에 대해 이미 논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92)
[중유가 존재한다]
다음으로 성교(聖敎)에 의거하여 중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증하리라.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유(有)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5취(趣)의 유와 업유와 중유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93)
만약 그들 부파(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대중부 등의 부파)에서는 이러한 계경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 『건달박경(犍達縛經)』은 외워 전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태에 들어가는 것은 요컨대 세 가지의 사실이 함께 현재 나타났기 때문이니,
첫 번째로는 어머니의 몸의 시기가 적당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애(交愛)가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하였다.94)
그러니 중유의 몸을 배제하고서 그 어떤 건달박이 존재할 것이며, 선행한 온(本有의 온)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무엇이 바로 나타나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이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음의 『장마족경(掌馬足經)』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그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95)
“그대는 지금 아는가, 모르는가?
이러한 건달박(犍達縛)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면,
그를 바라문(婆羅門)이라 해야 할 것인가,
찰제리(刹帝利)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폐사(吠舍)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술달라(戌達羅)라고 해야 할 것인가?96)
혹은 동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남ㆍ서ㆍ북 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즉 선행한 온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무엇이] ‘왔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왔다’고 하는 말은 오직 중유가 왔다는 것이다.
만약 다시 이와 같은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오불환경(五不還經)』은 마땅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그 경에서는 설하기를,
“다섯가지의 불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중반(中般)이며,
두 번째는 생반(生般)이며,
세 번째는 무행반(無行般)이며,
네 번째는 유행반(有行般)이며,
다섯 번째는 상류반(上流般)이다”고 하였는데,97)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일컬어 ‘중반’이라고 할 것인가?
유여사는 주장하기를,
“천(天)이 있어 그것을 중간이라고 이름하니, 그곳에 머물면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중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고 하였다.98)
그러나 그럴 경우 마땅히 ‘생(生)’ 등의 하늘도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99)
이미 그 같은 하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 아니다.
또한 경에서 “일곱 가지 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100)
그것은 즉 앞의 다섯 가지 불환에서 중반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중반으로 나아가는] 처소와 시간상에 가깝거나 중간이거나 멀거나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01) 즉
“비유하자면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잠시 일어났다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서 소멸하는 것처럼 첫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불꽃이 일어나 중간쯤 지속하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두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멀리까지 이르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욕계와 색계] 중간에 하늘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처럼 [중반불환에] 시간과 처소에 세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바(중유무체론)는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다시 설하기를,
“[정해진] 수량(壽量)[을 다하지 않고 그] 중간에, 혹은 [색계]천에 가까운 중간에 그 밖의 나머지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성취할 때를 ‘중반’이라 이름하니,102)
계(界) 혹은 상(想) 혹은 심(尋)의 상태[位]에 이르러 반열반하기 때문에 거기에 [가깝고 중간이고 멀다는] 세 가지 품류가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103)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색계의 중동분을 취하고 나서 바로 반열반에 드는 것을 바로 첫 번째의 경우(즉 近)라고 일컫고,
이로부터 그 후 색계천의 즐거움을 향수하고 나서 비로소 반열반에 드는 것을 바로 두 번째의 경우(즉 中)라고 일컬은 것이며,
다시 이로부터 그 후에 이르러 색계천의 법회(法會)에 들어 바로 반열반하는 것을 일컬어 바로 세 번째 경우(즉 遠)라고 하였다.104)
나아가 법회에 들고 나서 다시 많은 시간을 거쳐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을 바로 생반(生般)이라 이름하니,
처음 태어나서가 아니라 많은 수량(壽量)을 감(혹은 滅)하고서 비로소 반열반하기 때문에 ‘생반’이라 이름한 것이다”105)고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앞서 인용한] 불꽃의 비유와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열반의] 처소로 가는 것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106)
또한 [중반을 그와 같이 해석할 경우] 무색계에서도 역시 마땅히 중반열반이 있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그곳에서도 역시 수량(壽量) 중간에 반열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곳에 중반열반이 있다고는 설하지 않으니, 올타남(嗢拕南, Udāna)의 가타(伽陀, gāthā)에서 설한 바와 같다.107)
여러 성자와 현자를 총합하면
4정려에 각기 열 가지가 있고,
3무색정에는 각기 일곱 가지가 있으며,
오로지 여섯 가지는 비상처(非想處)이다.108)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모두 다 허망한 분별일 뿐인 것이다.
만약 다시 이와 같은 따위의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무상법왕(無上法王, 즉 세존을 말함)께서 멸도(滅度)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온갖 대법(大法)의 장군들도 역시 반열반하였으며,109) 성교(聖敎)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이미 다수의 부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문의(文義)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들이 이리 저리 난무하고, 정의(情意)에 따라 그것들을 임의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니, 지금이 바야흐로 지극히 그러하다.110)
아! 슬프도다. 그대들은 어리석고 미혹함을 굳게 지키어 이치도 어기고 교법도 거부하니, 가슴 아프기가 그지없다. 제 유정으로서 앞에서 논설한 이증과 교증에 의거하여 그것을 기준[量]으로 삼은 자라면 거기(욕계ㆍ색계)에 중유가 실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계경 중에서,
“극악한 업을 지은 도사마라(度使魔羅)는 현신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111)
이 경의 뜻은 ‘그(도사마라)가 아직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 때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그의 몸을 태웠고 그로 인해 목숨을 마치고서 그 같은 중유를 받아 이에 따라 무간지옥에 떨어졌다’는 내용을 설한 것이다.
즉 그의 악업의 세력이 너무나도 강성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마치기도 전에 괴로움의 상(相)이 이미 이르렀으니, 먼저 현수(現受) 즉 순현수업(順現受業)의 과보를 받고 그 후에 생수(生受) 즉 순생수업(順生受業)의 과보를 받았다는 것이다.112)
그렇다면 어째서 경에서,
“어떤 종류의 유정은 5무간업(無間業)을 짓거나 증장하게 되면 결정코 반드시 무간에 나락가(那落迦, 지옥)에 떨어진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 경의 뜻은 그가 다른 취(趣)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그의 업은 결정코 순생수업임을 나타내는 것이다.113)
그리고 만약 [그대처럼] 단지 문구에만 집착한다면 요컨대 다섯 가지 무간업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지옥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중의 한 가지라도 빠트리거나 혹은 다른 업에 의해서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큰 잘못이 될 것이다.
또한 ‘무간에 나락가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그러한 업을 짓는 즉시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중유가 바로 ‘생겨나는 것[生]’이라고 누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나락가라는 명칭도 역시 중유와 통한다. 즉 사유와 무간에 중유가 일어날 때, 역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중유는] 생유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무간에 나락가에 생겨난다’고만 말하였지,
‘이 때(즉 나락가에 생겨날 때)가 바로 생유이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11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경의 송문(頌文)을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이를테면 경의 게송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재생(再生)이여! 그대는 지금 성년을 지나
노쇠에 이르고 염마왕(琰魔王)과 가까운데
앞길을 가고자 하여도 자량(資糧)이 없으니
중간에 머무를 곳 더 이상 없구나.115)
만약 중유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그는 중간에 머무를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이 게송의 뜻은 그(악업자)가 인간 세상에서 너무나도 빨리 마멸되어 잠시라도 머무름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혹은 그의 중유가 [당래] 태어나야 할 곳에 이르는 동안 역시 잠시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니, 거기로 가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의 뜻은 이와 같을 뿐 그 밖의 다른 뜻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중유무체론자의 물음)
그렇다면 그대는 다시 이 같은 뜻이 아니라 다른 뜻이라는 것을 어찌 안 것인가?
(논주의 반문)
양쪽의 허물이 이미 같거늘 어찌 한쪽(중유무체론자)으로만 치우쳐 나무라는 것인가?(중유무체론자의 항변)
앞의 두 해석은 경에 대해 모두 어긋남이 없다.
[그럼에도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을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치우쳐 경증(經證)으로 삼는 것인가?
무릇 경증으로 인용하는 말은 이치상 다르게 해석되는 뜻[異趣]이 없어야 하니,
그것에 만약 다르게 해석되는 뜻이 있다고 한다면 경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논주의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