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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2권[3]
[제29조. 혜가 선사] 慧可
선사는 무뢰武牢 사람이며, 성은 희姬씨이다.
아버지 적寂은 당초 아들이 없어서 그 부인과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극히 선한 가문인데도 자식이 없으니 참으로 슬프구나. 어느 성현께서 굽어 보살펴 주시려나’ 했는데,
후위의 여섯째 왕인 효문제孝文帝 영의永宜 15년 정월 초하루 저녁에 광명이 온 집안에 두루 하는 상서가 나타난 뒤로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광광光光이라 하였다. 나이 15세에 9경經을 통달해 외웠고, 30세가 되자 용문龍門의 향산사香山寺로 가서 보정寶靜 선사를 섬기면서 항상 정定과 혜慧를 닦았다. 출가한 후에는 동경東京의 영화사永和寺로 가서 구족계를 받았고, 32세가 되자 다시 향산사로 돌아와서 스승을 섬겼는데, 다시 또 8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고요한 밤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그가 광에게 말했다.
“과위를 받으려 하면서 어찌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남쪽으로 가야 도道에 가까워지리라.”
본래의 이름은 광광인데, 신인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신광神光이라 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밤이 되자 갑자기 머리가 찢어지는 듯이 아파서 그 스승이 뜸을 뜨려 했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이는 뼈를 바꾸기 위한 것이라 예사 고통이 아니니라.”
스승이 곧 그만두었다. 마침내 전의 이상한 신을 본 사실을 스승인 보정에게 이야기하니, 보정이 말했다.
“반드시 상서祥瑞일 것이다. 네 정수리가 달라졌으니 옛날의 머리가 아니다. 5봉이 옥 수레에 내려앉은 듯 그 모습이 기이하구나.”
그리하여 스승을 하직하고 남쪽으로 갔다. 달마를 만나 상승上乘의 법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달마가 말했다.
“일진一眞의 법을 모두 가졌으니 잘 지키어 끊이지 않게 하라. 그대에게 신의(信衣:가사)를 전하나니 각기 표시하는 바가 있느니라.”
혜가가 말했다.
“무엇을 표시합니까?”
달마가 대답했다.
“안으로는 심인心印을 전하여 마음을 깨쳤음을 증명하고, 겉으로는 가사를 받아서 종지를 확정하나니 착오가 없기 위한 것이다. 내가 입적한 뒤 2백 년 동안 이 가사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법이 온 누리에 퍼질 것이니, 도에 밝은 이는 많아도 도를 행하는 이는 적을 것이며, 이치를 말하는 이는 많아도 진리를 통한 이는 적을 것이다. 그 뒤로는 도를 얻은 이가 천만 명에 가까울 것이다. 그대가 도를 펼 때에 늦게 배우기 시작한 이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 사람이 뜻을 돌리면 반드시 보리를 얻을 것이다. 초심初心 보살은 부처님의 공덕과 동등하리라.”
이때 혜가 대사가 법을 부촉 받고서널리 선전하고 유포하여 뭇 유정有情들을 제도하였다. 천평天平 연간에 이르러 후주後周의 제2주主인 효민왕孝閔王 기묘己卯 해에 한 거사가 나이와 계절을 말하지 않은 지 14년 만에 조사(혜가)에게 와서 절을 하고 성명도 밝히지 않은 채 말했다.
“제자는 풍병[風疾]을 앓고 있으니, 화상이시여, 제자를 참회하게 해주십시오.”
조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죄를 가지고 오면, 죄를 참회하게 해주리라.”
거사가 말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가 말했다.
“내 지금 그대를 참회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저 불ㆍ법ㆍ승 삼보에 의지하기만 하라.”
거사가 다시 말했다.
“화상만 뵈면 승보임을 알겠으나 세간에서 어떤 것이 부처이며, 무엇을 법이라 합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곧 법이니,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니라. 그대는 알겠는가?”
거사가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렇듯이 법과 부처가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조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을 알고 곧 머리를 깎아 주면서 말했다.
“그대는 승보이니 승찬僧璨이라는 이름이 적합하구나.”
그리고 구족계를 받게 하고서 일러 말했다.
“여래께서 대법안을 가섭에게 주셨고, 그렇게 점차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하여 나에게 이르렀는데, 내가 이제 이 법안을 그대에게 주고 아울러 가사를 주어서 법의 신표로 삼노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본래 땅이 있었기에
그 땅을 인해 종자가 꽃을 피운다.
본래 종자가 없다면
꽃 또한 필 수 없다.
이 게송을 다 말하고는 승찬에게 말하였다.
“나는 업도鄴都로 가서 묵은 빚을 갚으리라.”
그리고는 훌쩍 업도로 떠나서 중생을 교화하기를 34년 동안 혹은 저잣거리 어디서나 인연에 따르고, 혹은 남의 심부름을 하되 일이 끝나면 곧 업도로 돌아가니, 지혜 있는 이들이 매양 권했다.
“화상은 덕이 높으신 분이시니 남의 심부름은 하지 마십시오.”
조사가 말했다.
“내 스스로 마음을 조복調伏시키기 위한 것이지 다른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오.”
이때 변화辯和 법사라는 이가 업도鄴都 관할에 있는 성城인 안현安縣의 광구사匡救寺에서 『열반경』을 강하고 있었는데, 그때 조사가 그 절에 이르러 설법하니, 조사가 설법하는 곳에는 모인 대중이 많았으나 법사의 강석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자 변화 법사는 조사를 시기하여 현령인 적중간翟仲侃에게 가서 “사견邪見을 가진 저 사람이 나의 강석을 무너뜨렸습니다” 하고 모함하니, 적중간은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도리에 맞지 않게 손상을 입혀 죽게 하였다. 자주磁州 도양현塗陽縣 동북쪽으로 70리쯤에 장사지내니, 세수 107세였다.
이렇게 멸도함을 보인 때는 수隋의 첫째 임금인 문제文帝의 개황開皇 13년 계축년癸丑年이었다.
당唐의 내공봉內供奉 사문인 법림法琳이 비문을 지었고, 덕종德宗 황제가 대홍大弘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호를 대화大和라 하였다. 수隋의 계축癸丑에 입적하고 나서 지금 당唐의 보대保大 10년 임자壬子에 이르기까지 359년이 된다.
정수 선사가 찬탄하였다.
2대 조사인 큰 학자는
지조가 굳고 단단하였다.
마음은 3승乘을 꿰뚫고
이마는 오악보다 훌륭했다.
천하에 하나뿐인 기린麒麟이요
인간 세상의 붕새로다.
팔을 끊고 눈 위에 섰으니
혼연히 하나 되어 외롭지 않다.
[제30조. 승찬 선사] 僧璨
제30조 승찬은 수隋나라 때의 3조이며, 어디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성도 이름도 모른다. 혜가 대사를 만나 심법을 얻은 뒤에는 대중을 많이 모아 놓고 정법正法을 두루 폈다. 모임 가운데 한 사미가 있었는데, 나이는 겨우 14세이고, 이름은 도신道信이라 했다.
조사에게 와서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지금 무슨 마음인가?”
대답하여 말했다.
“저는 지금 마음이 없습니다[無心].”
“그대도 마음이 없거늘 부처님께서 무슨 마음이 있겠느냐?”
다시 물었다.
“화상께서 저에게 해탈법문을 가르쳐 주시기를 오직 바랄 뿐입니다.”
조사가 대답했다.
“누가 그대를 속박했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다면 그대가 바로 해탈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다시 더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道信이 말끝에 크게 깨닫고, 조사의 곁에 8, 9년 있은 후에 길주吉州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돌아와 다시 조사를 뵈니, 조사가 법을 전해 줄 것을 선언하고 다음의 게송을 말하였다.
꽃과 종자는 땅에 의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땅속의 종자에서 꽃이 핀다.
아무도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과 종자 모두 생길 수 없도다.
조사가 수隋의 둘째 임금인 양제煬帝의 대업大業 2년 병인丙寅 해에 입적한 뒤 지금의 당 보대保大 10년 임자壬子까지는 340년이 된다. 대명大明의 효황제孝皇帝가 지경智鏡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정수 선사가 찬탄하였다.
3조 대사여,
법왕의 참 아드님이다.
하시는 말씀은 깊고 그윽하고
마음에는 너와 내가 없다.
혹은 산 속에 거처하고
혹은 도시에서 살았다.
땅으로 인해 꽃이 피니
전단 향기가 바람에 실려 퍼졌다.
[제31조. 도신 대사] 道信
화상은 당唐나라에서 4조가 되며, 성은 사마司馬씨이다. 본시 하내河內에서 살다가 기주蘄州의 광제廣濟에서 성장하였다. 승찬 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뒤 뜻밖에 황매黃梅의 길에서 한 어린이를 만났는데, 나이는 일곱 살 정도였고, 말하는 것이 특이하였다.
조사가 물었다.
“네 성이 무엇인가?”
동자가 대답했다.
“성姓은 있으나 예사로운 성이 아닙니다.”
조사가 말했다.
“그게 무슨 성이더냐?”
동자가 대답했다.
“불성佛性입니다.”
조사가 말했다.
“너는 성이 없단 말이냐?”
동자가 대답했다.
“그 성은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조사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예사롭지 않으니, 내가 멸도한 지 20년 뒤에 크게 불사를 이루리라.”
동자가 물었다.
“여러 성인들은 무엇에서 증득합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텅 비고도 텅 비었느니라.”
“그러면 성이랄 것이 없겠습니다.”
조사가 말했다.
“여전히 사람의 티가 남았구나.”
조사가 이어 법을 전해 주고, 다음의 게송을 주었다.
꽃의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으니
땅으로 인해 꽃의 성품이 나거니와
큰 연이 이 성품에 계합하면
나되 난다는 생각이 없다.
조사가 법을 다 전한 때가 고종高宗 영휘永徽 2년 경술庚戌의 윤 9월 4일이었는데, 조용히 열반에 드니, 세수 72세였다. 장사 지낸 지 3년 되는 해 4월 8일에 탑문이 까닭 없이 저절로 열렸는데, 용모 단정함이 생존 시와 조금도 다름없었다. 이로부터 문인들이 다시는 탑을 닫지 않았다.
대력大歷 연간에 이르러 대종代宗이 대의大醫 선사라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자운慈雲이라 하였다. 중서령中書令이자 태자 빈객인 양양공襄陽公 두정륜杜正倫이 비문을 지었다.
정수 선사가 찬탄하였다.
4조는 14세에
스승에 의해 해탈을 얻었다.
세간에 있으면서 도와 함께하니
자비를 일으킴 넓고 깊었다.
영화와 쇠퇴가 영원히 끊겼고
시작과 마지막이 아득히 사라졌다.
열매는 적고 꽃이 많은 세상에서
홍인이 그의 의발을 전해 받았다.
[제32조. 홍인 화상] 弘忍
화상은 당나라에서 5조이며, 성은 주周씨이고, 본시 여남汝南에서 살다가 남쪽인 기주蘄州 황매黃梅에 옮겨 살았다. 태어난 지 7년째에 출가하여 도신道信 대사를 섬겼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두 번 묻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빛이 나서 하늘을 관통했고, 항상 이상한 향냄새를 맡고는 몸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윽고 태어나니, 그 형색이 단엄端嚴하여 관상쟁이가 보고 말하였다.
“이 아이는 일곱 가지 대인大人의 상相이 부족하여 부처님보다는 못합니다.”
그때 노盧 행자行者라는 이가 있었는데, 나이 32세에 영남嶺南으로부터 와서 조사를 친견하였다.
조사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로 왔는가?”
노 행자가 대답했다.
“신주新州에서 왔는데 부처되기를 바랍니다.”
조사가 말했다.
“그대는 영남 사람이라 불성이 없느니라.”
노 행자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조사가 말했다.
“그대는 무슨 공덕을 짓겠는가?”
행자가 대답했다.
“힘껏 돌을 지고 방아를 찧어 스승과 스님들께 공양할까 합니다.”
조사가 바로 허락하니, 하룻밤 하루 낮에 쌀 열두 섬을 찧으면서 한결같이 시봉하여 8개월이 지나자,
행자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대도大道의 근원입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속인이거늘 나에게 그것을 물어 무엇 하려 하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세속제[世諦]에는 승속僧俗이 있으나, 도道에 어찌 승속이 있겠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일 그렇게 안다면 절대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라.”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밖에서 얻을 것이 아닙니다.”
조사가 대답했다.
“안에서 찾는다 해도 옳지 못하느니라.”
조사가 입멸하기 직전에 대중에게 고했다.
“바른 법은 듣기 어렵고, 거룩한 모임은 만나기 어려운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으니, 만약 깨친 바가 있거든 말해 보라. 나의 말만 기억하지 말라. 내가 증명해 주리라.”
그때 대중 가운데 신수神秀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조사가 누차 훈고訓告하는 말을 듣고 곧 붓을 들어 벽에다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썼다.
몸은 보리수菩提樹요
마음은 밝은 거울틀이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조사가 이 게송을 보고 이내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만일 이 게송에 의지해 수행하면 해탈을 얻게 되리라.”
뭇 대중이 모두 이 게송을 외웠는데, 한 동자가 방앗간 곁에서 외우자,
행자가 물었다.
“무엇을 외우시오?”
동자가 대답했다.
“행자님은 모르시는가요?
제1 상좌께서 게송을 지으셔서 조사께 바쳤는데,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이 게송에 의지해 수행하면 해탈을 얻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행자가 말했다.
“동자여,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나에게 한 번 더 외워 주시오.나도 듣고서 부처님의 회상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이때 강주江州 별가別駕인 장일용張日用이란 이가 회중會中에 있었는데, 행자를 위하여 높은 소리로 게송을 외우니, 행자는 곧 장일용에게 청했다.
“나를 대신해서 게송 하나를 받아 써 주시오. 나에게도 졸작이 하나 있습니다.”
이에 장일용이 그를 위해 게송을 써 주니 다음과 같다.
몸은 보리수菩提樹가 아니요
마음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끼랴.
이때 조사가 다시 가서 보고 지워 버리고는 온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었다. 칭찬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훌륭함을 인정하였다.
조사는 또 방앗간으로 가서 행자에게 물었다.
“수고하는구나. 행자야, 쌀이 익었느냐?”
행자가 대답했다.
“쌀이 익은 지는 오랩니다만 아직 아무도 까부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조사가 말했다.
“3경이 되거든 오거라.”
행자가 대답을 하고, 3경이 되자 조사의 처소로 가니, 조사가 그의 이름을 혜능慧能으로 바꾸어 주고, 그날 바로 가사를 전하여 법의 신표信表로 삼게 하니, 마치 석가모니불께서 미륵에게 수기授記를 주시는 것과 같았다.
조사가 게송을 말했다.
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땅으로 인해 다시 열매가 난다.
무정無情이면 종자가 없고
성품이 없으면 남[生]도 없구나.
행자는 게송을 듣고 기뻐하면서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행하였다. 조사가 다시 말했다.
“내가 3년 뒤에는 열반에 들 것이다. 그대는 당분간 법을 펴지 말라. 그대에게 손상이 있을 것이다.”
행자가 여쭈었다.
“어디로 가야 환난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회懷를 만나면 멈추고, 회會를 만나면 숨어라.”회懷는 주州요, 회會는 현縣이다.
행자가 다시 물었다.
“이 가사는 계속 전하리까?”
조사가 대답했다.
“후대에는 도를 얻는 이가 항하의 모래 같으리라. 이제 이 신표信表의 옷은 그대에게서 멈추라. 왜냐하면 달마達摩 대사께서 이 옷을 전하신 뜻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해서 신표로 삼으신 것이니, 법을 듣는 일이 어찌 옷에 달렸겠는가? 만일 이 옷을 계속 전하면 생명을 해치게 될까 걱정이다. 이 옷을 받은 이는 목숨이 한낱 실 끝에 매달린 것 같을 것이다.
더구나 달마 대사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한 꽃에 다섯 잎이 퍼져 열매가 저절로 맺으리라.’ 하셨으니,
이는 이 땅에서 그대까지가 다섯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인가하신 말씀이다.
또 반야다라般若多羅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매가 가득하니 보리가 원만하고,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난다’ 하셨으니,
이 두 구절도 역시 지금의 법의法衣가 그대에게 이르러서는 남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인가하신 것이니라.”
행자가 분부를 받들고 곧 조사를 하직하니, 조사가 곧장 강가로 가서 조그마한 나룻배에 올라 손수 노를 잡았다. 행자가 말했다.
“제가 노를 잡겠습니다.”
조사가 말했다.
“그대는 날 귀찮게 하지 마라. 내가 만일 버티지 못하면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면 되고, 그대가 만일 버티지 못하면 그대가 나에게 부탁하면 된다.”
강을 다 건너고서 행자에게 말했다.
“잘 가거라.”
행자는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조사는 절로 돌아와 사흘이 지나도록 설법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대중이 물었다.
“스승의 법을 누가 전해 받았습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나의 법은 이미 영남嶺南으로 떠났다.”
신수神秀가 물었다.
“누가 법을 얻었습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능能이란 자가 얻었다.”
대중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보니, 행자가 보이지 않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
‘아마도 그가 법을 전해 받아 갔을 것이다.’
그때 7백 명 대중이 함께 노 행자의 뒤를 쫓았는데, 대중 가운데 혜명慧明이라는 한 스님이 맨 먼저 대유령大庾嶺까지 쫓아갔다. 가서 보니, 의발은 있는데 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혜명 상좌가 가까이 가서 손으로 의발을 들려 하였으나 의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자기의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바로 산으로 들어가서 행자를 찾아다녔는데, 높은 곳에서 멀리 행자가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행자 역시 멀리서 혜명 상좌를 보고, 이내 자기의 의발을 빼앗으러 온 줄을 알고 말했다.
“화상께서 지금 나에게 의발을 주셨는데, 내가 굳이 사양했으나 두세 번 거듭 받으라 하시기에 받지 않을 수 없어서 가지고 오기는 했으나 지금 저 고갯마루에 있으니, 상좌가 원한다면 가져가시오.”
혜명 상좌가 말했다.
“의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다만 불법을 위해 왔습니다. 행자께서 5조를 하직할 때 5조께서 어떤 밀어密語나 밀의密意가 있으셨는지요?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행자가 상좌의 마음이 간절함을 보고 곧 그에게 말했다.
“생각을 차분하게 하고 사념을 가라앉혀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그렇게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나에게 명 상좌의 본래의 면목을 돌려주시오.”
혜명 상좌가 다시 물었다.
“밀어와 밀의가 위에서 말씀하신 그것뿐입니까, 아니면 그 밖에 다른 뜻이 있습니까?”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분명하게 말했으니 비밀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자기의 면목을 스스로 얻으면 비밀은 도리어 그대에게 있느니라.”
상좌가 행자에게 물었다.
“황매黃梅 화상의 회상에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행자가 대답했다.
“화상께서 내가 신수神秀 상좌의 게송에 대답한 것을 보시고서 내가 문 안에 들었음을 아셨고, 그래서 곧 혜능惠能이라 인가하시되 ‘신수神秀는 문 밖에 있으나 너는 문 안에 들어와 앉아서 옷을 입었다. 후일 스스로 알게 되겠지만 이 의발은 예전부터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만나야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 너에게 전하니, 너는 반드시 힘써 노력하되 앞으로 10여 년은 이 교법을 펴지 말라.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그때가 지난 뒤에 어리석은 사람들을 잘 교화하라.’ 하셨느니라.
내가 다시 묻기를,
‘어디로 가야 그 난리를 피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시되,
‘회懷를 만나면 멈추고, 회會를 만나면 숨어라.’ 하셨느니라.”
혜명이 다시 말했다.
“제가 비록 황매黃梅에서 머리는 깎았으나 실로 종승宗乘의 면목은 얻지 못했었는데, 이제 행자의 가르침을 받아 들어갈 곳을 알았사오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행자께서 이 혜명의 스승이십니다.”
그리고는 곧 도명道明이라 이름을 고치니, 행자가 말했다.
“그대가 그렇듯이 나도 그렇다. 그대와 함께 황매에 있었으니,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 잘 지키고 간직하라.”
도명道明이 말했다.
“행자께서는 속히 영남을 향해 떠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뒤에서 많은 스님들이 행자의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명이 다시 물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행자가 말했다.
“몽蒙을 만나거든 머물러라[住]. 표表를 만나면 끝나리라.”
도명이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자를 하직하고, 곧 북쪽으로 길을 돌려 건주虔州에 이르렀다. 그때에 과연 50여 명의 스님들이 행자를 찾아오고 있기에도명이 보고 그들에게 말했다.
“대유령大庾嶺 마루, 회화진懷化鎭에서 5~6일 동안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또 여러 성문들과 나루터에서 북쪽을 향해 행자의 행방을 찾았으나 모두들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되돌아갔고, 도명은 혼자서 여산廬山의 포수대布水臺로 갔다. 3년 뒤에 다시 몽산蒙山으로 가서 수행하는데, 무릇 납자가 찾아오면 모두를 영남의 6조에게 보냈다. 지금도 몽산에는 영탑靈塔이 남아 있다.
조사가 법을 전한 뒤 고종高宗 24년 임신壬申 2월 16일에 입적하니, 춘추春秋 74세요, 대종代宗이 대만大滿 선사라 시호하고, 탑은 법우法雨라 하였다. 상원上元의 임신壬申에 입적한 뒤로 지금의 당 보대保大 10년 임자壬子까지는 280년이 된다.
정수 선사가 찬탄하였다.
5조는 7세 때부터
언어 이전의 소식을 깨쳤네.
돌 소가 안개를 토하고
나무 말이 연기를 머금는다.
몸과 마음, 언제나 고요하고
이理와 사事가 모두 현묘하다.
정情도 없고 종자種子도 없으니
천년 만년 영원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