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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4권
2. 변본사품④
2.5. 18계의 제문분별(諸門分別)[2]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2) 견소단(見所斷)ㆍ수소단(修所斷)ㆍ비소단(非所斷)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고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 가지 색계와 5식계를 말하며, ‘오로지 수소단이다’라고 함은 이러한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도(修道)에 의해 끊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뒤의 세 가지 계’란 의계ㆍ법계 그리고 의식계를 말하니, 여섯의 세 가지(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와 통한다’라고 함은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각기 세 종류(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 모두와 통한다는 말이다. 이 중에 여든여덟 가지 수면(隨眠)과, 그것의 상응법(즉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得)이나 혹은 그것의 생(生) 따위와 같은 온갖 구유(俱有)하는 법은 모두 견소단이고,2) 그 밖의 나머지 유루법은 모두 수소단이며, 일체의 무루법은 모두 비소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을 확정짓기 위해 [본송에서] 다시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불염법(염오하지 않은 법)’이란 유루의 선과 무부무기(無覆無記)를 말한다.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에서 제6처란 바로 제6 의처(意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과는 다른 것에서 생겨난 것을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바로 안 등의 5근으로부터 생겨난 법이라는 뜻으로, 5식 등을 말한다. 그리고 색법이란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유루의 색법을 말한다. 곧 이와 같은 세 가지 종류는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즉 ‘불염법 내지 온갖 색법은 견소단이 아니다’고 함은, 그것을 근거로 하는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을 때 비로소 그것이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어졌다[斷]’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이박단(離縛斷)이고, 둘째는 이경단(離境斷)이다.
이박단이란 계경에서 “내적인 안결(眼結)이 없는 것에 대해 나에게 내적인 안결이 없음을 참답게 안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3) 이경단이란 역시 계경에서 “너희들 필추(苾芻)들이여, 만약 능히 안근에 대한 욕탐을 끊었다면, 이것을 일컬어 ‘안근의 획득[得]이 영원히 끊어졌다’고 한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4)
그런데 아비달마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은 그러한 순서에 의거하여 두 종류의 끊어짐을 설정하였으니, 첫째가 자성단(自性斷)이고, 둘째가 소연단(所緣斷)이다.
즉 어떤 법이 결(結)과 [그것이 낳은] 동일한 결과 등에 대치(對治)를 낳았을 경우, 그것의 끊어짐을 획득하는 것을 ‘자성단’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소연이 된 것에 대해서도 바로 이계(離繫)를 획득하지만 반드시 그에 대한 불성취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 것을 ‘소연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불염오인 유루의 무색이나 혹은 유루의 색과,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得)과 생(生) 등 일체의 모든 법 상에 견소단과 수소단의 온갖 결(結)이 계박되어 있을 경우, 이와 같은 온갖 결이 점차로 끊어질 때, 다시 말해 각각(즉 상ㆍ중ㆍ하)의 품류와 각기 개별적인 법체 상에 이계득(離繫得)이 생기할 때, 그러한 온갖 결(結)과 그것이 낳은 동일한 결과 등이 모두 ‘이미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불염오인 유루의 무색이나 혹은 유루의 색과,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과 ‘생’ 등의 제법 상에 온갖 이계득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끊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법은 오로지 그것이 속한 지(地)의 최후 무간도(無間道)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이다.5)
그러나 모든 견도(見道,즉 고법지인에서 도류지인에 이르는 15찰나)는 능히 그것이 속한 지에서 [점진적인] 순서에 따라 이욕(離欲)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불염오 등의 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을 능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6) 즉 그러한 법은 색 등의 대상을 소연으로 하고, 외적[外門]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3) 견(見)ㆍ비견(非見)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dṛṣṭ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adṛṣṭ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식(識)이 아니니, ‘견’의 근거[因]이기 때문이며
식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며
은폐된 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7)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의 능의(能依)인 식(識)이 아니니
전설(傳說)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세친은 식견설 비판의 논거 한 가지를 ‘전설’로 진술하여, 유부 근견설에 대해 불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가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을 말하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일체법 가운데 오로지 이 두 가지 법만이 바로 ‘견’ 그 자체이다. 즉 유색법(有色法) 중에서는 오로지 안근만이 바로 ‘견’이며,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明利]하며, 경계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慧)가 바로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견’이 아니다.
여기서 안근의 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지만,8)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9) 어두움[闇]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을 설하여 ‘견’이라고 이름하였다.
다섯 가지 염오견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분별하게 될 것이다.10)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유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무루혜를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무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결정적 판단[決度]으로서의 무루혜를 말한다.
즉 ‘정견’이라고 하는 하나의 말에는 이미 이상의 세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 각기 별도의 세 가지로 나열한 까닭은 이생과 유학과 무학의 세 단계에서의 ‘견’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11) 또한 점진적인 수습(修習)을 통하여 낳아지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온갖 ‘견’에는 전체적으로 다섯 가지 유형이 있으니,
첫째는 무기의 종류이며,
둘째는 염오의 종류이며,
셋째는 선한 유루의 종류이며,
넷째는 유학의 종류이며,
다섯째는 무학의 종류이다.
즉 무기의 존재[類] 중에서 안근은 바로 ‘견’이지만, 이근 등의 온갖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無覆無記) 혜 따위는 모두 ‘견’이 아니다.
염오의 존재 중에서 5견은 바로 ‘견’이지만, 그 밖의 염오혜는 모두 ‘견’이 아니다.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불공무명(不共無明,다른 불선법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겨나는 무명)ㆍ의(疑)와 함께 일어나는 혜, 그리고 그 밖의 염오법은 모두 ‘견’이 아닌 것이다.
유학의 존재 중에서는 혜(慧)이면서 ‘견’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다만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
무학의 존재 중에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나머지는 ‘견’이 아니지만,12) 그 밖의 다른 무학의 혜는 모두 ‘견’이다.
선한 유루의 존재 중에서는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혜만이 ‘견’이며, 그 밖의 것은 모두 ‘견’이 아니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혜 역시 ‘견’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5식신에 의해 낳아진 혜와 유표업(有表業)을 일으키는 혜와 목숨을 마칠 때의 혜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선한 유루의 존재 가운데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도 역시 ‘견’이 아니다.13)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온갖 혜는 모두 ‘견’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인가?
결탁(決度,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에서 설한 ‘혜’만이 이러한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는 바로 ‘견’ 그 자체인 것이다.
즉 [앞에서]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하며, 경계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가 바로 ‘견’이며,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오로지 이러한 특성의 혜만이 결탁의 공능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 혜는] 소연이 되는 대상에 대해 심려(審慮,심사숙고)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비견(非見)으로] 부정된 혜는 소연에 대해 능히 심려하고 결탁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결탁(決度)’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경계대상에 대해 먼저 심려(심사숙고)하고서 마침내 결택(決擇,결정 판단)한다는 뜻으로, 5식신과 상응하는 온갖 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결탁이란] 이미 요별한 대상[了境]에 대해 능히 살피고 요지(了知)하여 이치에 맞고 맞지 않음을 능히 헤아리고 살펴[推尋]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의식 중의 혜는 능히 경계에 대해 먼저 심려하고 나서 마침내 결택하기 때문에 ‘견’이라 이름할 수 있지만, 그러한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이와 상응하는 혜에는 이러한 공능이 없다. 그래서 ‘견’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에도 이러한 결탁의 특성이 없으니, 마땅히 ‘견’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識見家의 물음)14)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움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도 역시 ‘견’이라 이름한다’고.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눈이 온갖 색을 본다”고 하였다.
그래서 안근이 능히 온갖 색을 보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根見家 즉 유부 毘婆沙師의 답)
만약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다른 식과] 동시에 일체의 대상을 획득하지 못하겠는가?15)
그와 같은 허물은 없으니, 일부의 눈만이 능히 색을 본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동분(同分)의 안근을 말한다. 동분안(眼)의 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16) 즉 식에 의해 주지(住持)될 때 바야흐로 동분을 성취하는 것이지만, 일체의 근이 동시에 자신의 식에 주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안근)의 능의(能依)가 되는 식이 바로 ‘보는 것[見]’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안식이 생겨나야 비로소 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의 힘에 의해 주지될 때 [안근의] 뛰어난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이니, 마치 땔감의 힘에 의해 뛰어난 작용을 지닌 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약 색을 보는 작용이 바로 식에 의해 낳아진 법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색을 보는 작용은 눈을 떠나서도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식에 의해 장익(長益)된 구생(俱生)의 대종이 뛰어난 작용의 근을 일으키고, 이것(뛰어난 작용의 근)이 능히 온갖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능의(能依)인 식이 보는 것이다’라고 설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지자(智者)가 있어 이와 같이 말할 것인가? “인연(因緣,즉 소의와 소연)을 갖는 모든 것(즉 식)은 능히 요별을 낳으며, 이와 같은 요별은 바로 그것(즉 見)의 인연이 된다”고. 즉 식은 바로 ‘견’의 근거[因]일 뿐이며, 따라서 ‘견’ 자체는 아닌 것이다.
또한 안식 자체는 이식(耳識) 등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결정코 ‘견’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17) 안식과 그러한 이식 등의 온갖 식에 어떠한 차별이 있기에 유독 안식만을 ‘보는 것[見]’이라고 이름하겠는가? 따라서 식견설(識見說)을 주장하는 것은 결정코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유여사(有餘師)는 또 다른 이치로써 안식은 결정코 ‘견’이 아님을 논증하였다. 즉 “감추어진 색[障色]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은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18) 그렇기 때문에 안근 등이 대상을 취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하자면 [안근 등이] 능히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을 보고, 느끼며, 요별하는 것이다.
①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
이와 같이 ‘견(見)’이라고 하는 작용의 전체적 특성[總相]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시 ‘견’이라는 작용의 개별적인 특성[別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19) 보여지는 색을 ‘하나의 눈이 본다[一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이 본다[二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 중 어느 한 눈을 막거나 혹은 한 눈이 손상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한 눈의 보는 공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 눈으로도 역시 능히 색을 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의 두 눈이 손상되지 않아 함께 뜨게 되면 두 개의 안근이 동시에 색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눈이 색을 본다’는 사실의 의미는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하는 사실은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하고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 두 눈[二眼]으로 동시에 볼 경우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동시에 능히 색을 본다.20)
어떠한 근거에서 이 같이 결정적으로 아는 것인가?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한 눈을 감으면 색의 상속에 대한 ‘견’은 분명하지 않지만, 두 눈을 뜰 때 이러한 색에 대한 ‘견’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두 개의 안근이 전후로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비록 두 눈을 떴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한 눈의 ‘견’일 따름이다. 그럴 경우 한 눈을 감으면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지만, 두 눈을 떴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또는 두 눈을 뜨면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한 눈을 감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21)
그러나 이미 이와 같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혹 어느 때 ‘두 눈이 동시에 본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이다. 즉 그것(두 눈)은 [안식의] 소의로서 동일하기 때문으로,22) 눈이 설혹 백 천 개라 할지라도 하나의 식을 낳을 것인데 하물며 오로지 두 개만이 존재하는데 말해 무엇 할 것인가?23)
② 근(根)과 경(境)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
이상에서 설한 바와 같은 안근 등의 온갖 근은 자신의 대상을 취할 때 직접 접촉[至]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不至]고 해야 할 것인가?
어째서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다시 의심을 낳게 되었던 것인가?
계경 중에 두 가지의 설이 있음을 바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유정의 안근은 좋거나[愛] 좋지 않은[非愛] 색에 구애(拘礙)된다”고 하였으니, 서로 접촉하지 않고서 구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그는 천안으로써 모든 유정을 관찰함에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멀리 있고 어떤 이는 가까이 있다”고 하였으니, 직접 접촉한 대상에 대해서는 원근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두 가지 교설로 말미암아 다시 의심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근(根,감관)과 경(境,대상)이 서로 접촉[相至]한다고 할 때 그 뜻은 일정하지 않다. 만약 공능(功能,작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접촉’이라 이름하며, 그럴 경우 일체의 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 만을 취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근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근과 경 사이의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ㆍ이근ㆍ의근과 그 대상은
접촉하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이 반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非至境]을 취한다.
즉 안근은 멀고 가까운 대상을 동시에 취하기 때문에, [바로 인접하여] 핍박하는 대상(예컨대 안약)은 능히 취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역시 파지가(頗胝迦,sphaṭika, 수정을 말함) 등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보이는 것에 대해 의혹[猶豫]을 갖기 때문에, 또한 눈이 멀리 있는 대상과 직접 접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는 것이다.
이근 역시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니, 4방(方) 8유(維)의 멀고 가까운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멀고 가까운 소리를 취함에 있어 명료하고 명료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멀고 가까운 소리를 취함에 있어 결정적이라거나 의심스럽다고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24)
의근 역시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니, [동일 찰나에 존재하는] 구유법(俱有法)과 상응(相應法)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무색법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간적 方處를 갖지 않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 밖의 비근(鼻根) 등의 세 근은 앞의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비ㆍ설ㆍ신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
어찌 극미가 서로 접촉[相觸]한다고 하겠는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遍體]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實物]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25) 그런데 어떻게 비근 등이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한다고 하겠는가?26)
여기서 ‘접촉[至]’이라는 뜻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대상이 근(감관)에 근접[隣近]하여 생겨날 때 비로소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으로, 이러한 이치에 따라 ‘비ㆍ설ㆍ신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예컨대 눈꺼풀이나 눈에 넣은 약 등과 같이 [눈과] 직접 접촉한 색을 눈은 능히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눈꺼풀 등이 요컨대 안근과 실제적으로 접촉[觸]하였기에 바야흐로 ‘접촉[至]하였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눈꺼풀 등이 근에 근접하여 생겨나는 것을 일컬어 ‘접촉’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직접 접촉한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안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非至境]을 취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안근 등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지만 지극히 멀리 있는 경계대상을 능히 취하지 못하듯이 비근 등도 역시 그러하여 비록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할지라도 지극히 가까이 있는 경계대상(이를테면 코 자체의 냄새)은 능히 취할 수 없다. 다만 향 등으로서 근에 근접하여 생겨난 것만을 취하기 때문에 ‘세 근(비ㆍ설ㆍ신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고 설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근과 향 등의 감관과 대상의 극미는 전전(展轉)하며 실제적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도 아니며, 접촉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들은 장애유대성(障礙有對性)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접촉한다면 과실을 갖게 되니, 이와 같은 뜻을 밝히기 위해 마땅히 다시 논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설혹 어떤 이가 “만약 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두드리고 쳐서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하여 말하였다면, 이는 요컨대 ‘속성[德]과 결합[合]함으로써 비로소 소리를 내게 된다’는 휴류자(鵂鶹子) 등의 주장과 동일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힐난할 수 있겠는가?27) 그렇지만 사물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속성과 결합하기 때문에 소리를 내게 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소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진실된 성교(聖敎)의 이치 중에서는 서로가 결합하여 부딪치기[合擊] 때문이라는 설명을 배제하고 오로지 대종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승한 두 가지의 4대종이 결합하지 않고서 생겨날 때에도 그러한 명칭을 획득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 중의 대종은 바로 소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28) 그리고 이와 동시생기[俱生]한 소리는 바로 이근의 대상이 되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휴류자)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나(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어떻게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은 이설자)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니, 역시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제 극미는 이미 실제적으로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대종과 이러한 대종이 결합한다는 뜻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서로 근접하여 생겨날 때[隣近生]를 일컬어 ‘결합’이라 하는 것이니, 어찌 서로 실제적으로 접촉할 때 비로소 ‘결합’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대는 이러한 뜻에 대해 마땅히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저러한 대종은 결정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대종은 바로 ‘접촉되는 것[所觸]’이기 때문이며,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온갖 색온 중 오로지 촉계를 갖는 것을 일컬어 ‘접촉되는 것’이라 하고,29) 다만 신근을 갖는 것을 일컬어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접촉의 뜻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접촉되는 것’도 역시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신근도 역시 바로 ‘접촉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은 마땅히 뒤섞여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이러한 두 가지(소촉과 능촉)에는 뒤섞임의 과실이 없으니, 신식(身識)의 소연과 소의로서 구별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어찌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뒤섞임이 성취되지 않을 것인가? 즉 신근 역시 ‘접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신식의 소연이 되지 않을 것이며, 촉계 역시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어찌 신식의 소의가 되지 않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이러저러한 대종은 결정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極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근과 촉계는 어떻게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과 ‘접촉되는 것[所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근(신근)과 경(촉경)의 극미가 근접隣近]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비ㆍ설ㆍ신근은 모두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함에 있어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능히 접촉하는 것’은 비근ㆍ설근과도 통하고, ‘접촉되는 것’ 역시 향(香)ㆍ미(味)와도 아울러 통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근접함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거기에는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0) 또한 미끄러움과 껄끄러움 등에 대해 세간에서는 다 같이 ‘접촉되는 것’이라는 언어적 관념[想名]을 일으키고,31) 그것에 대한 신근을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신근과 촉을 ‘능히 접촉하는 것’, ‘접촉되는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널리 결택(決擇)해 보아야 하는 것은 『순정리론』에서와 같다.32)
③ 근과 경의 양적 관계
이제 마땅히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안 등의 제근(諸根)은 자신의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같은 양[等量]만을 취하지만, 마치 횃불을 빨리 회전시키면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듯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큰 산 따위를 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대상에 대해 같은 양이든 같지 않은 양[不等量]이든 모두를 취하는 것인가?33)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근 등의 세 근은
오로지 같은 양[等量]의 대상만을 취한다는 것을.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은 비(鼻) 등의 세 가지 근이라고 설한 바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은 오로지 능히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 즉 비ㆍ설ㆍ신근의 극미의 양과 마찬가지로 향ㆍ미ㆍ촉경의 극미의 양도 역시 그러하니, 서로 대칭적으로 결합하여 ‘비’ 등의 식(識)을 낳기 때문이다.
비근 등 세 근의 극미는 어느 때 향 등의 대상을 능히 두루 취할 수 없는 것이 아님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비근 등 세 근의 극미는 자신의 양을 초과하는 향 등의 극미를 능히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즉 세 근의 일부분의 극미는 역시 또한 능히 세 대상의 일부만을 취하니, 얼마간의 대상의 극미가 근에 이름[至]에 따라 얼마간의 근의 극미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근과 이근의 경우는 일정하지 않다. 즉 안근은 색에 대해 어떤 때에는 보다 적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털끝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보다 큰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잠시 동안 눈을 떠 큰 산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어떤 때에는 동등한 양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포도나 대추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근도 역시 그러하여 모기나 천둥, 거문고 소리 등 보다 적거나 크거나 동등한 양의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의 경우는 질애(質礙,공간적 점유성)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취하는 형태와 양(크기)의 차별을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울러 이러한 뜻을 알기를 권고하기 위한 것이니, 이제 이러한 뜻에 의거하여 다시 마땅히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④ 5근의 극미 배열의 문제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어떻게 안포(安布,분포 배열의 뜻)되어 차별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방처(方處,공간)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화집(和集)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의 안포 차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眼星] 위에서 자신의 대상을 향해 횡으로 배열되어 머물고 있으니, 마치 향릉화(香菱花, 미나리과 식물로, 꽃이 한 방면으로 향하고 있음)와도 같다. 또한 맑고 투명한 막에 덮여 있어 분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겹겹이 쌓인 둥근 알[丸]과 같은 모양으로 머물며, 그 자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마치 가을의 샘이나 연못과도 같아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34)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으면서 나선형으로 머무니, 마치 돌돌 말린 자작나무 껍질[樺皮]과도 같다.
비근의 극미는 콧등 안에 있으면서 뒤쪽[背]을 위로하고 안쪽[面]을 아래로 하고 있으니, [그 형태는] 마치 손톱을 쌍으로 나란히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상의 앞의 세 가지 근은 횡으로 행도(行度)를 짓고 있기 때문에(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마치 화만(花鬘)을 쓴 것과 같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퍼져있으며, 그 형태는 마치 반달과도 같다. 그리고 혀 중앙에 털끝만한 곳이 [따로] 있어 설근의 극미가 혀 전체에 두루 퍼져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35)
신근의 극미는 몸의 부분마다 두루 머물며, 신체형태[身形]의 분량과 같다. 그리고 여근(女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북과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골무를 낀 손가락과 같다.
또한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동분(同分)이며,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피동분(彼同分)이며, 또 어떤 때에는 일부는 피동분이고 그 나머지는 바로 동분이다. 내지 설근의 극미도 역시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극열날락가(極熱捺落迦,즉 극열지옥) 중에서 맹렬한 불길이 몸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같이[‘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근의 극미가 [동분이 되어]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그곳에 떨어진] 몸은 응당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36) 그렇지만 신근과 촉경은 각기 하나의 극미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 능히 신식을 낳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5식은 결정적으로 적집된 다수의 극미만을 비로소 소의와 소연의 존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⑤ 6식과 6근의 시간적 관계
6식의 소의(所依)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인가? 5식이 오로지 현재의 법만을 소연(所緣)으로 삼고, 의식은 3세의 법과 3세가 아닌 법[非世,즉 무위법] 모두를 소연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온갖 식의 소의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뒤의 것(의식)의 소의(즉 의근)는 오로지 과거이며
앞의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俱]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식신(識身)이 무간(無間)에 멸함에 따라 그것을 모두 ‘의(意)’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의식에 대해 소의의 근(根)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오로지 과거의 6식(즉 의근)에 근거할 뿐이다.
그러나 안(眼) 등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이다. 여기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 역시 과거[의 의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안 등의 5근은 이러한 안식과 구생(俱生)하는 [현재의] 소의이며, 과거의 소의는 바로 의계이다. 이처럼 5식의 소의는 각기 두 가지이지만 제6 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한 가지로서, 본송 중에서는 소의의 뜻에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37)
다시 마땅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바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이면, 이것은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인가?38) 만약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 이것은 또한 바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구생(俱生)의 안근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과거의 의근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법을 제외한 것이다.39) 내지 신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4구 각각에다 마땅히 자신의 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앞의 구(句)에 따라 답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의식의 소의가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다.
또한 5식계가 그 소의로서 결정코 과거와 현재의 근을 갖듯이 그것의 소연이 되는 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와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결정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미 멸한 것과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5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5식은] 소의와 더불어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현행하지 않은 대상에 근거하여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도 “안과 색을 근거로 하여 안식이 생겨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
⑥ 근만이 식의 소의가 되는 이유
식(識)은 동시에 두 가지의 연(緣,즉 根과 境)에 의탁하여 생기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소의(所依)라는 명칭은 근에만 해당되고, 경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根)의 전변에 따라 식(識)도 변이하니
그래서 안(眼) 등의 근을 소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안(眼)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안 등의 6계(界)를 말하는 것으로, 안 등의 근에 전변(轉變)이 있기 때문에 온갖 식도 변이한다. 곧 근이 증익(增益)되고 감손(減損)됨에 따라 식에도 밝고 어두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이 변화하더라도 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 식은 바로 근(감관)에 따르지 경(대상)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의’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안 등의 근에 해당하는 것일 뿐 다른 것(즉 경)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식 또한 신근에 따라 전변하니, 이를테면 풍병(風病) 등이 신체를 손상시키고 어지럽힐 때 의식도 산란되며, 신체가 안정된 상태에서는 의식도 명료해진다. 그럼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의식은 신근을 소의로 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의식은 다만] 자신의 소의에 따를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실은 없다. 즉 풍병 등이 신체를 손상시키고 어지럽힐 때, 고수(苦受)와 상응하는 식신이 발생하니, 이와 같은 식신을 산란된 의계(意界)라고 이름한다. 곧 이것과 고수가 함께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소멸할 때 능히 의근이 되어 산란된 의식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경우가 바로 의식이 명료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의 소의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여기서 ‘자신의 소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근이] 증익되고 감손됨에 따라 [식에도] 밝고 어두움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다.40)
⑦ 식의 명칭이 근에 따라 설정된 이유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경(境)으로 근(根)이 아님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식의 명칭은 근에 따라 설정하고 경에 따라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과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근(根)에 따라 식(識)을 설하게 된 것이다.
彼及不共因 故隨根說識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것’이라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안 등을 소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 말해 안 등은 소의이기 때문에) 식의 명칭을 근에 따라 설정하고 경에 따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니, ‘의지처[依]’란 바로 수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공(不共)’이라 함은, 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에만 소의가 되는 것(즉 不共法)임을 말한다. 그러나 색은 다른 이의 안식에도 역시 통하고, 아울러 자신과 다른 이의 의식에도 모두 수용되는 것(즉 共法)이며, 나아가 신(身)과 촉(觸)의 관계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대상(즉 法界)도 불공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보편적인 법[通法]과 개별적인 법[別法]이 다 같이 [불공법에] 두루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며,42) 법경은 앞의 두 가지 조건(즉 소의와 불공법)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보편적인 의미[通名]로서의 법은 오로지 불공만이 아니며, 개별적인 의미[別名]로서의 법계는 식만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43) 또한 개별적인 법계는 비록 다른 이와 공통되지 않는 것(즉 不共法)이라 할지라도 의식의 소의인 근(根)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법이 식의 소의이고, 아울러 불공의 법이라면, 그것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색 등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색식(色識) 등이라고 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북소리’라고 하거나 ‘보리의 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44)
또한 이 송문(頌文)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즉 ‘그것’이라 함은 ‘안 등의 식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를 말한 것이며, ‘아울러 불공’이라 함은 ‘아울러 안 등은 바로 불공법이기 때문에’를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생의 색은 4생(生,胎ㆍ卵ㆍ濕ㆍ化生)의 안식을 낳는 일이 있지만, 어떠한 생의 안근도 2생의 안식을 낳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4생의 식을 능히 낳을 수 있을 것인가?45) 이처럼 [3]계(界)ㆍ[6]취(趣)ㆍ[4]족(族)의 소의신의 안근은 각기 별도의 식을 낳으니, 그래서 불공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나아가 신근도 역시 이와 같다.
어찌 어떤 생의 의근도 역시 또 다른 어떤 생의 의식을 낳는다고 하지 않겠는가?46)
완전히 낳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동시[俱時]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어떠한 생의 의근도 일시에 2생의 의식을 함께 낳는 일이 없으니, 어찌 색 등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2생의 식도 낳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4생의 식을 낳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안근 등은 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4]생ㆍ[3]계ㆍ[6]취 등에서 각기 별도의 식을 낳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근(根)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고 경(境)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⑧ 3계(界) 9지(地)에 따른 근ㆍ경ㆍ식과 소의신의 관계
소의신이 머무는 바에 따라서 ‘안근이 색을 본다’고 할 때, 소의신과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지(地)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47)
마땅히 이러한 네 가지는 어떤 경우에는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같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자지(自地)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지(즉 욕계)에 속함을 말한다. 혹은 초정려에 태어나 자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도 역시 모두 같은 지(즉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지에 태어나는 경우, 네 가지의 지는 동일하지 않다. 곧 ‘다르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만약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함을 말한다. 혹은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한다.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고,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하며,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하지(下地)의 색이나 혹은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제4정려지에 태어나는 경우에도 네 가지에 다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근 등을 제외한] 그 밖의 계(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제법의 결정적인 상(相)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은 소의신보다 하지(下地)가 아니며
색과 안식은 안근보다 상지(上地)가 아니다.
색은 안식의 일체 지와 통하며
소의신에 대한 두 가지(색ㆍ안식)도 역시 그러하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도 역시 그러하며
다음의 세 가지는 모두 자지(自地)이다.
그리고 신식은 자지이거나 하지이며
의근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과 안근과 색의 세 가지는 모두 다섯 지(地)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욕계와 4정려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안식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안근을 소의신이 생겨난 지(地)와 비교해 본다면, 혹 어떤 경우 등지(等地)이기도 하고,48) 혹 어떤 경우 상지(上地)이기도 하지만,49) 소의신보다 하지에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안식을 안근과 비교해 본다면, 등지나 하지에는 존재하지만 그 상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50) 즉 하지의 안근은 거친 색[麤色]을 보는데 익숙하여 상지의 미세한 색[細色]에 대해서는 ‘견(見)’의 공능이 없으며, 또한 하지의 안근은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상지는 자신의 수승한 안근을 가지며, 하지 가운데 자신의 안식을 갖는다. 그래서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식에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색을 안식과 비교해 보면, 등지ㆍ상지ㆍ하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51) 그리고 색과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해 보면, 색을 안식에 비교하는 경우와 같으니, 이를테면 자지, 혹은 상지, 혹은 하지와도 통하는 것이다. 즉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하여 ‘자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며, 혹은 ‘상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욕계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며, 혹은 ‘하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색을 소의신과 비교하여 ‘자지와 하지와 통한다’고 함은 자지와 상지의 안근이 보는 경우가 그러하며, 만약 ‘상지와 통하는 경우’라면 오로지 상지의 안근이 보는 경우이거나 또는 자지의 안근으로써 오로지 자지와 하지의 색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상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와 상지와 하지의 색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계(耳界)에 대해 널리 설하자면 이 또한 안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근은 소의신보다 하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聲)과 이식은 이근보다 상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은 이식에 대해 일체의 지(즉 상ㆍ등ㆍ하지)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두 가지(즉 성과 이식)를 소의신과 비교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안근과 마찬가지로 널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근과 설근과 신근의 세 가지 경우에는 모두 다 자지(自地)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대개 ‘분(分,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향ㆍ미에 대한 두 가지의 식(즉 비식과 설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비근과 설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점은, 신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에 촉경과 그 지(地)가 반드시 동일하지만, 신식을 촉과 신근에 비교해 보면 혹 어떤 경우에는 자지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자지란 말하자면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위의 세 가지 정려에 태어나는 그것을 일러 하지라고 하였다.52)
그리고 의계(意界)의 네 가지는 일정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의계는 어떤 때에는 소의신과 의식과 법과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地)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상지와 하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소의신은 오로지 5지(地,욕계와 4정려)에만 존재하며, 나머지 세 가지(의근ㆍ법ㆍ의식)는 일체지(무색계를 포함하는 3계 9지)에 모두 존재한다.
즉 오로지 5지에 태어나 자지의 의근과 자지의 의식이 자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만을 일컬어 ‘의근이 세 가지(소의신ㆍ의식ㆍ법)와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에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의계는 어떤 때 상지에 존재한다’고 한 것은, 이를테면 정(定)에 노닐 때가 그러하다. 즉 만약 욕계에 태어나 초정려로부터 무간에 욕계의 의식을 일으켜 욕계의 법을 요별하는 경우,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다른 세 가지는 하지에 속하는 것이다. 혹은 제2ㆍ제3ㆍ제4 정려 등으로부터 무간에 초정려와 제2ㆍ제3 정려지 등의 의식을 일으켜 초정려와 제2ㆍ제3 정려지 등의 법을 요별하는 경우,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다른 세 가지는 하지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초정려 등에 태어나 상지로부터 하지의 의식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생을 받을[受生] 때에는 상지의 의근이 하지의 소의신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필시 하지의 소의신이 멸하지 않고서 상지의 생을 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결정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지의 마음으로 머물면서 목숨을 마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하지의 의근이 상지의 소의신에 의지하거나 상지의 의근에 의지하여 하지의 소의신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해야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지의 의계로부터 무간에 욕계나 색계에 최초로 결생(結生)할 때,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소의신과 의식은 하지에, 그것에 의해 요별된 법은 혹은 자지에, 혹은 상지에 속하며, 혹은 어디에도 계속(繫屬)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하지의 의근에 의지하여 상지의 소의신을 받는다고 해도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정에 노닐 때에 하지의 의근이 상지의 소의신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지에 태어나 먼저 하지의 의식과 소의신과 변화심[化心]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과 법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욕계의 안근으로 욕계의 색을 보거나 혹은 색계의 안근으로 2계의 색을 보는 경우, 그 때 그러한 색은 몇 가지 종류의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여기서는 다시 몇 가지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는 것인가?
[유부] 종의에 미혹하여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먼저 전체적으로 분별한 다음에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리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바야흐로 계탁분별(計度分別)과 부정(不定,즉 선정의 상태가 아닌 산란된 의식)의 수념분별(隨念分別)에 대해 분별하리라. 즉 모든 지(地)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 종류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일체의 안식은 모두 무분별(즉 自性分別)이다. 또한 선(善)의 분별은 능히 일체의 자지와 상지와 하지를 소연으로 한다. 염오의 분별은 자지와 상지를 소연으로 한다. 무기의 분별은 자지와 하지를 소연으로 한다. 그리고 태어나는 지에 따라 아직 그곳의 탐(貪)을 떠나지 않았으면 이러한 지에는 세 종류의 분별(즉 선ㆍ염오ㆍ무기의 분별)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만약 태어나는 지의 탐을 떠났으면 이러한 지에는 오로지 두 종류의 분별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염오의 분별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초정려의 선한 안식이 현재전하는 일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태어나는 지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초정려에 태어날 경우에도 역시 그 밖의 다른 지의 안근에 의해 선한 안식을 일으킬 수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지에 태어나서도 능히 그 밖의 또 다른 지의 무부무기의 분별을 일으켜 현전하는 일이 없으니, 이 역시 반드시 태어나는 지에 계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근은 오로지 어떤 한 생에 의해 일어난 분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한 생에 의해 일어난 분별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상지에 태어나는 경우 마땅히 하지의 분별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그럴 경우 이러한 생 중에서 그러한 세 가지 분별이 현재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지의 분별은 오로지 선으로 무기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앞서 이미 그 이유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의 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설하는 경우에도 모두 이렇게 갖추어 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체적으로 분별하여 보았으니,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리라.
선근이 끊어진 자[斷善根者]가 안근으로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염오와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니, 이를테면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선근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아직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안근으로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세 종류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만약 온갖 이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있으면서 이미 욕계의 탐을 떠났더라도 아직 초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욕계의 안근으로써 온갖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선과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退法者]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게 되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두 종류만을 갖출 뿐이니, 염오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그곳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지의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초정려의 탐을 떠났더라도 아직 제2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염오를 제외한 두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염오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부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제2정려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부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초정려지에서 일으키는 분별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설하는 바에 따른 이치를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리라.
이미 제2정려의 탐을 떠났을지라도 아직 제3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았거나, 이미 제3정려의 탐을 떠났을지라도 아직 제4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제4정려의 탐을 떠난 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모두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이생(異生)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이와 같이 제4정려 중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나아가 온갖 성자로서 5지(地)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마땅히 널리 논설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차별이 있다. 즉 온갖 성자로서 물러난 자이거나 물러나지 않은 자이거나 모두 상지의 염오를 소연으로 하여 분별하는 일이 없으니, 다른 지의 변행(遍行)이 모두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며, 견도(見道)의 공덕은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에 따라 ‘귀[耳根]가 소리[聲]를 듣는다’고 할 때의 식(識)과 분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14) 능식(能識)ㆍ소식(所識), 상(常)ㆍ무상(無常), 근(根)ㆍ비근(非根) 분별
‘견(見)’에 부수된 방론(傍論)을 이미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에 대해 분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18계는 오로지 6식 중의 몇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가?
[18계 중의] 몇 가지가 영원한 것[常]이며, 몇 가지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18계 중의] 몇 가지가 근(根)이며, 몇 가지가 비근(非根)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외계는 두 식(識)에 의해 인식되며
영원한 것은 법계인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는 바로 근(根)이며
아울러 내계의 열두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의 색(色) 등의 5계는 그 순서대로 안(眼) 등의 5식에 의해 각기 하나씩 인식되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된다. 이처럼 5계는 각기 6식 중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13계는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들은 5식신의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18계 가운데 어떠한 계도 그 전부가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로지 법계의 일부인 무위법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본다면, 무상한 것은 무위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계와 다른 여타의 [17]계이다.
18계 가운데 법계의 일부와 내적인 열두 가지 계(즉 6근과 6식)는 바로 근(根)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근이 아니다. 즉 5수근(受根)과 신(信) 등의 5근과 명근(命根)의 전부와, 3무루근 중의 일부는 법계에 포섭된다.53) 또한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명칭과 같은 계에 포섭되고, 여근과 남근은 바로 신계(身界)의 일부에 포섭되니, 뒤(본론 제5권)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의근은 7심계에 모두 포섭되며, 뒤의 세 가지(즉 3무루근을 말함)의 일부는 의계와 의식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뜻에 준하여 본다면, 그 밖의 나머지 색 등의 5계와 법계의 일부는 모두 그 자체 근이 아니다.
이 같은 22근(根)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ㆍ의근ㆍ여근(女根)ㆍ남근(男根)ㆍ명근(命根)ㆍ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계경에서는 이를 6처의 순서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신근 뒤에 의근을 설하고 있지만, 대법(對法,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은 뜻에 근거하여 명근 뒤에 비로소 의근을 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소연(無所緣)과 유소연의 순서에 따라 설하였기 때문이며, 그럴 경우 온갖 갈래[諸門]의 분별을 보다 쉽게 드러내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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