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불인연론 하권
8. 바라나 국왕 친군(親軍)이 깨쳐서 벽지불이 된 인연
세간에서 웃고 노는 쾌락
그리고 사랑스런 아(我)와 아소(我所)를
모두 다 놓아 버리고
마음과 뜻이 해탈을 얻어
모든 근이 다 적정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옛날 스승들로부터
이와 같은 일을 전해 들었다.
과거 바라나성에 친군(親軍)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두 부인을 마음으로 너무도 사랑하여 음행을 즐기고 집착하였으며, 늘 방일하게 취한 사람처럼 여색에 빠져 지냈으며, 또한 마치 향산(香山)의 제멋대로인 코끼리가 향기가 흘러나올 때마다 마리산(摩梨山)으로 들어가 음행을 마음껏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그때 두 부인은 서로를 질투하여 각자 기회를 엿보다가 한 부인이 곧 독약을 그의 심복에게 주었고 그 심복은 약을 가져다 다른 부인에게 먹였다. 그 부인은 약을 먹고 미칠 듯 답답해하며 누워서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곧 목숨을 마쳤다.
다른 부인은 그가 목숨을 마친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몹시 슬퍼하며 괴로운 척하고 스스로 그의 머리를 흩뜨리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온 궁중이 가엾이 여기면서 슬퍼하였다.
왕도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괴로워하였다.
부인의 좌우에 있던 직인(直人)은 걸치고 있던 영락(瓔珞)과 몸을 치장한 꾸미개들을 모두 떼어버리고 흙을 몸에 발랐으니, 근심의 독이 심장을 꿰뚫는 것이 마치 저 비둘기 떼가 매에게 쫓기는 것과 같고 금시조(金翅鳥)가 모든 용녀(龍女)들을 놀라게 하는 것과 같았다.
궁중의 채녀(采女)들도 죽음에 놀라워하는 것이 또한 그와 같았다.
그때 궁중은 묘지와 같았고, 또 검은 먼지가 광명을 가린 것처럼 모든 궁인(宮人)들이 근심에 싸인 것 또한 그와 같았다.
왕은 궁중 사람들이 이와 같이 근심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놀라면서 천관(天冠)과 영락과 몸에 걸쳤던 복식(服飾)을 모조리 땅에 버리고 시신(屍身) 곁으로 갔고, 모든 채녀들이 너무도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왕은 이것을 보고 나서는 더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다가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한창 더운 날에
아름다운 꽃이 볕에 시들듯
죽음이 찾아오면 사람의 형상이 소멸하여
얼굴빛이 검푸르게 변하는구나.
입술과 이는 먼지와 때에 더럽혀지고
눈은 꺼지고 콧날은 틀어지고
노래하고 춤추던 아름다운 자태
빳빳해져 목석(木石) 같구나.
예전에는 나로 하여금
최고의 즐거움이라며 애착하게 하던 것이
왜 갑자기 오늘은
나를 두렵게 할까?
싫구나, 삶과 죽음의 재앙이여
청정하지 못하고 지극히 더러우며
꿈처럼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고
또한 파초의 속과 같아
튼튼하고 충실한 모양 없으며
허깨비ㆍ물거품ㆍ아지랑이와 같고
잠깐 나타나는 것이 물결과 같나니
지혜로운 자라면 싫어할 바로다.
자세히 살필 줄 모르는 이는
좋아하고 집착하는 생각을 멋대로 일으키고
이 부정(不淨)한 것에 대해
몸이라는 생각을 멋대로 일으켜
답답하게도 지키고 집착하는 것이
마치 잠자는 사람과 같구나.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리 길지 않은 사이에 부인의 시신을 화장하고 장례를 마쳤다.
다른 부인은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좋은 음식을 미리 먹고는 거짓으로 몹시 슬퍼하고 괴로운 척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며 슬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허물이 드러나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수심이 맺혔고, 수심이 맺힌 탓에 음식이 소화되지 않아 곧 큰 병이 되었다.
왕은 그가 병이 난 것을 보고 갑절이나 더 슬퍼하고 괴로워하다가 곧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서
‘이와 같은 것이 모두 생사(生死)의 과환(過患)이로구나’ 하고,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여인이 사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처럼
누(累)를 끼치는 것도 지극히 많구나.
사람치고 그렇지 않은 자 없나니
사랑으로 인해 즐거움을 일으키다
도로 다시 큰 미움을 일으키네.
사랑은 괴로움의 근본
사랑이 모이는 때를 보면
이것이 무상(無常)한 줄 반드시 알아야 하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이
단정하고 한창인 나이였지만
하루아침에 죽음이 찾아왔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여기에 즐거움이 있겠는가?
지혜로운 자라면
은혜와 사랑이 합하여 모일 때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킬 자 누가 있을까?
늙고 병들고 죽는 우환이 두려우니
이 때문에 나는 영원히 여의리라.
이런 생각을 했을 때
곧 벽지불의 도를 얻었다.
그는 곧 왕자(王者)의 의복과 영락을 걸치고는 날아서 허공으로 올라가 허공에서 위와 같은 게송을 말하였고, 사문으로 변해 설산(雪山)의 여러 벽지불 처소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