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원생의 글쓰기를 위하여 쓴 글이다.
1. 주제 선택하기
내가 어떤 주제를 선택하고자 할 때, 관련된 연구들을 보면 연구되지 않은 주제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너무나 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가”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논문을 잘도 써 낸다. 논문을 쓰 본 경험이 적은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정말 신기할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논문의 주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논문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어떤 주제가 논문거리가 되고 안 되고는 그 주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학자들은 어떤 주제이든지 그것들이 논문거리가 되는지를 판단하고, 그것들을 논문거리로 만들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논문을 씀에 따라 커진다. 따라서 대개 논문을 많이 쓰는 사람이 논문을 더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어떤 주제의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관련된 더 많은 문제들이 보이기 되고, 그것들이 논문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곧 문제가 문제를 부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주제를 선택하고 그것을 논문거리로 삼아 논문을 쓰는 능력은 결국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능력이 아직까지 모자란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강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먼저 기초적 지식을 정확하게 익히고, 그러한 기초적 지식에 의거하여 어떤 현상들을 바라보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복잡한 지식들도 비교적 단순한 기초적 지식들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주제를 관찰하든지 간에 그러한 기초적 지식에 의거해야만 그 주제에 관한 논의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든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그 기초적 지식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학생들이 어떤 주제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기초적 지식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의 학문적 능력에 부합하는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도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에는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글의 흐름이 중요하다. 세세한 잘못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고치면 되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잘못들도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만 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면, 글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출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나의 주장에 대한 남의 비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하다. 남의 질문과 비판은 내 주장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중요한 잘못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나아가 나의 글의 논점을 객관적으로 더 잘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잘못된 질문은 없다. 설사 그 질문들이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고 있거나, 나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내가 논의하는 주제와 관련성이 거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그 질문들은 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어떤 질문을 받든지 간에, 그러한 질문들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대응하지 않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과 그것에 대답들을 글의 내용에 반영한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휠씬 더 나은 논문이 될 것이다.
3. 명확한 문제 제시
쟁점이 되는 예를 제시하면서 문제의 초점을 명시하고, 자신의 관점과 해결 방법을 서술해야 한다. 앞으로 나가려는 생각에 쫓겨 서둘지 말고,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써 나가야 한다.
논문은 서론과 본문의 앞부분에서 자신의 논점과 주장을 명확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남이 자신의 논문을 읽을 때, 연필을 들고 필자가 주장하는 바를 찾아 헤매게 해서는 안 된다. 논문은 수수께끼 풀이나 스무고개 놀이가 아니다.
논문 쓰기를 요리의 과정에 비유하자면, 먼저 요리의 재료와 조리 방법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내가 무슨 요리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라는 태도로 요리에 대한 정보를 간 보듯이 슬며시 흘려 놓고는, 한참 나중에 가서야 “나는 이런 요리를 만들었어!” 하면서 요리를 내어 놓는 그런 방식으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먼저 내가 만들 요리가 어떤 요리인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요리를 위해서는 어떤 재료와 어떤 요리 방법이 필요한지를 제시해아 한다. 그 다음에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 주여 주는 것이 순서다.
4. 글쓰기의 순서
가끔씩 논문을 쓰기 위해 공부한 내용의 순서대로 구성한 글들도 보인다. 그러나 공부한 순서대로 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공부한 것들은 그냥 논문의 재료일 뿐이며, 기껏해야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위한 초고일 뿐이다. 문제의 초점을 명확히 정리하고, 논문의 핵심적 내용이 잘 드러나고, 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재구성해야 한다.
논문은 서론과 본문과 결론의 순서대로 써 나가는 것이 아니다. 서론은 서론대로, 본론은 본론대로, 결론은 결론대로 순서와 관계없이 따로따로 써야 한다. 본론도 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면, 그 부분들도 순서와 관계없이 따로따로 써야 한다. 본문의 내용이 핵심으로, 본문의 내용이 달라지면, 서론과 결론도 자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론도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관련성이 깊은 문제들끼리 한 자리에서 묶어서 논의하고, 관련성이 아주 적은 문제들은 정리하여 재껴 두고 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조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 본론의 부분들도 순서를 새로 고치고 다시 써야 한다.
요컨대 결론보다는 논의의 과정을 중시하고, 간결한 문체로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여러 내용을 순서대로 작성하기보다, 병렬적 방식으로 작성한다.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일단 멈추고,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작성한다. 고치고, 나누고, 합치고, 버린다.
현재의 과제와 관련이 적거나 직접 관련이 없거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다른 기회로 미룬다. 그것은 다른 논문으로 해결하면 된다.
5. 앞선 연구를 검토할 때
앞선 연구를 검토하는 것은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가 올바로 제기되었는지를 확인하고, 나의 연구 성과를 앞선 연구들에서 제시하는 문제의 흐름 속에 어떤 위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남의 생각들에 묻혀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성이 깊은 문제들을 중심으로, 앞선 연구들을 충분히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의 흐름에서 볼 때, 내가 제시하는 주제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아군을 적으로 만들지 마라는 것이다. 적을 아군으로 만들고, 내 편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 주징이 적과 아군이 공유하는 문제의 큰 흐름 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적의 단점을 심하게 비판하다 보면, 작은 문제에 매몰되어 큰 흐름을 놓칠 수 있다.
그러니 문제의 큰 흐름 속에서 아군과 적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적은 내가 부정하고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적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의 주징에서 무엇이 모자라는지를 잘 살펴서 정리하고, 그것을 내가 채워서 해결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적을 대해야 한다. 그러면 적은 단순히 적이 아니라, 나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을 심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내 주장이 선명하게 잘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의 반감을 사게 되어 결국에는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 그런데 적을 내 동지로 만들면, 나는 적의 주장을 나의 주장과 관련하여 긴밀하게 검토하면서 내 논의가 더욱더 풍부하게 될 것이다. 적의 주장들에 대한 논의들이 결국 내 밥상을 풍성하게 차리는 데 싱싱하고 다양한 재료들이 된다는 것이다.
6.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주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에 반짝하고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기쁨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디어를 문젯거리로 만들고, 그것들을 다듬어 논문을 만드는 과정이 더 문제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 싶다가도 금방 그 해결 방법에 어떤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정말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망에 젖어 있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문젯거리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며, 그러한 문젯거리에 대한 생각들이 논문의 내용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망과 기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논문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게 되는 때가 온다. 그때는 그런 일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7. 논문 쓰기의 어려움
나는 논문에 다 써 놓았는데, 선생님들은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기가 찰 노릇이지 짜증도 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러나 글은 자기 생각을 남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달하지 못하면 그 글은 없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잘못 읽히는 글은 잘못 쓴 글이고, 잘못 쓴 글은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 먼저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야 한다. 물론 글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남의 처지에서 본다면, 생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논문은 학자들이 소통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논문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8. 학위논문의 의의
지금 눈 앞에 주어진 어떤 문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을 명확히 정리하고 해결하는 능력과 학술적 소통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학위논문은 학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석사학위논문은 작은 문이며, 박사학위논문은 큰 문이다. 학위논문을 쓰는 것은 더 큰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과정이다. 많은 문들이 앞에 놓여 있지만, 한 개의 문을 여는 열쇠를 얻으면. 모든 문이 열린다!
학위논문은 학자 면허증과 같은 것이다.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은 운전 면허증을 따는 과정과 비슷한 것이다.
학위논문을 쓰는 것은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정이다. (학위)논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눈앞의 문제를 전체 속에서 점검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