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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론 상권
5. 말법시대의 믿음, 중생은 여러 부처님께 수행하고 공양하며 선근을 심었고, 상이 없으므로 복덕이 많다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 세상인 말법시대[末世]에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의 문장 구절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 세상인 말법시대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문장 구절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미래 세상인 말세에 어떤 보살마하살은 바른 법이 사라지려 할 때 계율을 지키고 복덕과 지혜를 닦기까지 하여 이 수다라 문장 구절에서 능히 신심(信心)을 내고서는 이것을 진실하다고 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보살마하살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ㆍ넷ㆍ다섯 부처님의 처소에서만 수행하고 공양한 것이 아니며,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ㆍ넷ㆍ다섯 부처님의 처소에서만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수행하고 공양하였으며,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수다라를 듣고 마침내 일념(一念)으로 청정한 신심을 낼 수 있었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이 모든 중생을 다 알며, 여래께서는 이 모든 중생을 다 보느니라.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에게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의 덩어리가 생겨나서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취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또한 나라는 모습[我相], 중생이라는 모습[衆生相], 남이라는 모습[人相], 오래 산다는 모습[壽者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에게는 법이라는 모습도 없고, 또한 법이 아니라는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들이 만약 법이라는 모습을 취하면 나니 남이니 중생이니 오래 사는 것이니 하는 것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이 보살에게 법이라는 모습이 있으면 곧 나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에 집착하게 될 것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뗏목에 비유하는 법문을 말씀하셨느니라.
옳은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論】
이 뜻은 무엇인가?
앞에서 바라밀에 의거하여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라고 말한 것은 원인의 깊은 이치를 설명한 것이고,
여래에 의거하여 유위(有爲)의 몸이 아니라고 한 것은 결과의 깊은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악한 세계 사람들은 신심(信心)을 내지 않을 터인데, 그들에게 어떻게 부질없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의심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이런 이치로 대답하신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에서부터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한 데까지의 뜻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원인과 결과의 심오한 이치를
저 악한 세상이 왔을 때에도 설하는 것은
진실이 있으므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요
보살이 세 가지 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덕: 덕(德)과 계율(戒律)과 지혜(智慧)를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 악한 세계가 왔을 때에도 보살은 지계(持戒)와 공덕(功德), 그리고 지혜(智慧)를 원만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또 게송으로 말한다.
과거에 계율을 닦았고
또한 모든 선근(善根)을 심었으므로
여러 부처님 처소에서 계율을 갖추었고
또한 공덕이 원만하다 말씀하셨네.
경에서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보살마하살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ㆍ넷ㆍ다섯 부처님의 처소에서만 수행하고 공양한 것이 아니며,
또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ㆍ넷ㆍ다섯 부처님의 처소에서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수행하고 공양하였으며,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경문에서는 과거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계율을 원만하게 갖추었고, 그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또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와 같은 차례로 저들은 지계(持戒)를 원만하게 갖추었고 공덕도 원만하게 갖추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또 게송으로 말한다.
저들은 오래 사는 것[壽者]과 법에 대하여
모습을 취하려는 마음 멀리 여의었으므로
또한 지혜롭다 말했지만, 그 모습은
여덟 가지에 의지하기에 여덟 가지 뜻이 다르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다시 반야의 뜻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뜻을 설명한 것인가?
저 보살은 오래 산다는 모습[壽者相]을 여의었고 법이라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대(對)하여 이런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게송에서
“여덟 가지 뜻에 의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네 가지 오래 산다는 모습[壽者相]에 의하여 네 가지 뜻이 있고,
네 가지 법이라는 모습에 의하여 네 가지 뜻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모습에 의지하여 여덟 가지 뜻의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
이 뜻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차별의 모습 계속하여 일어나는 실체
목숨[命]이 끊어지지 않을 때까지 머무르다가
다시 다른 세계에 나아가느니
이것이 나라는 모습에서 생기는 네 가지이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오래 산다는 모습의 뜻을 밝힌 것이다.
[此義云何? 明壽者相義故]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나라는 모습[我相]이요,
둘째는 중생이라는 모습[衆生相]이며,
셋째는 목숨이라는 모습[命相]이요,
넷째는 오래 산다는 모습[壽者相]이다.
‘나라는 모습’은 5음(蔭)의 차별상을 보고 하나하나의 음을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허망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는 모습이라고 부른다.
‘중생이라는 모습’은 몸이 상속(相續)하여 끊어지지 않음을 보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중생이라는 모습이라고 한다.
‘목숨이라는 모습’은 한결같이 명근(命根: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머무름에 보답하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목숨이라는 모습이라고 한다.
‘오래 산다는 모습’은 명근이 단멸(斷滅)되어 다시 6도(道)에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오래 산다는 모습이라고 한다.
[何者是四種? 一者我相; 二者衆生相; 三者命相; 四者壽者相.
我相者, 見五陰差別, 一一陰是我。如是妄取, 是名我相。
衆生相者, 見身相續不斷, 是名衆生相。
命相者, 一報命根不斷住故, 是名命相。
壽者相者, 命根斷滅復生六道, 是名壽者相.]
마치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다시 나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如經 “何以故? 須菩提! 是諸菩薩無復我相, 衆生相, 人相, 壽者相故]
무엇이 법(法)인가?
[云何及法?]
게송으로 말하리라.
일체 법은 공하여 아무 물질이 없으므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언사(言辭)에 의지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 법의 모습에는 네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법이라는 모습이요,
둘째는 법이 아니라는 모습이며,
셋째는 모습이요,
넷째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여기엔 또 어떤 뜻이 있는가?
취할 대상과 취하는 이의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법의 모습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아무 물질도 없기 때문에 저 법에는 나라는 것도 없지만 공(空)은 실제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법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저것은 공한 것이어서 아무 물질도 없으나 이것을 가지고 있느니 없느니 하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아무 모습이 없다고 말한 것이요,
말에 의지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또한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치인데 말로써 그 모습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덟 가지 차별된 뜻에 의하여 여덟 가지 모습을 여의게 되니, 이른바 남[人]이라는 모습과 법(法)이라는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경에서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법이라는 모습도 없고 또한 법이 아니라는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지혜만 있어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계를 지키는 공덕을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실상(實相)의 차별이 생기는 이치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어떻게 나타내 보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사람들은 신심에 의지하여
공경하므로 실상이 생겨난다.
설법한 소리를 듣고 바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설법을 통해서 이와 같이 취하기 때문이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저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공덕이 있어서 신심에 의지하여 공경하기 때문에 실상이 생겨난다. 이런 까닭에 저런 이치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문장 구절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마침내 일념으로 청정한 신심을 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만 반야만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들은 대로 뜻을 취하지 않고 제일의지(第一義智)만을 따르고 순종하며, 바른 말을 통해 이와 같이 취하기 때문에 실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설명한 까닭에 다음에
“수보리야,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마땅히 설법한 소리대로 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제일의의 지혜만을 따르고 순종하여 바른 설법에서 이와 같이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 보살은 설법을 듣고 이와 같이 수다라(修多羅)의 문장 구절에서 실상(實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경에 다시 말하기를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이 모든 중생을 다 알며, 여래께서는 이 중생을 다 보느니라” 같은 말을 하였는데,
이 글은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부처님께서 과보를 보신 것은 비지(比知) 때문이 아니요
원지(願智)의 힘 때문에 나타남을 보신 것이니
공양이나 공경을 구하는
그런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비지(比知): 색계와 무색계의 4제(諦)에 대한 진리를 관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지혜.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진리를 아는 지혜인 법지(法智)와 비슷하다 하여 유지(類智)라고도 한다.]
[원지(願智): 진실을 알고자 하는 서원을 일으켜 선정에 들어감으로써 모든 진리를 바로 깨달아 아는 지혜이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저 계율을 잘 지키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불ㆍ여래께서 그들의 과보를 보신 것이 비지(比智)로써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아셨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원지(願智)의 힘 때문에 나타남을 보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다시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고 말씀하셨는가?
만약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들은
‘여래께서 비지로써 아신 게 아닌가’ 하고 이와 같은 의심을 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만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고만 하면 충분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안다고 또 말씀하셨는가?
만약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여래께서 육안(肉眼) 등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할 것이기에, 이 두 가지 말씀을 한꺼번에 한 것이다.
“또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하자
게송에 말하기를
“공양과 공경 받기를 바라는 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글 뜻은 무엇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공양과 공경 받기를 원하여 스스로 계율을 지키는 등의 공덕을 찬탄하게 되리니,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하려고 한 것이며,
이 사람은 모든 불ㆍ여래께서 저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하는지 잘 알고 계시므로 스스로 안다고 말하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스스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서였다.
또 “이 모든 보살에게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의 덩어리가 생겨나,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취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생겨난다’는 것은 능히 그 원인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요,
‘취한다’는 것은 자기 몸의 과업[果]을 닦았다는 뜻이다.
또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들이 만약 법이라는 모습을 취하면 곧 나니, 남이니, 중생이니, 오래 사는 것이니 하는 것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다만 무명(無明)의 번뇌[使]만 있고 현행(現行)하는 큰 번뇌(煩惱)가 없을 때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견해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항상 뗏목에 비유하여 법문을 말씀하셨느니라.
마땅히 옳은 법도 버려야 하거늘 더구나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무슨 차례에 의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들은 법에 머물지 않고
법 가운데 증지(證智)만을 따르고 순종한다.
마치 사람들이 배나 뗏목을 버리듯이
법 가운데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수다라(修多羅) 등의 법 가운데에서 증지(證智)는 머무르지 않는 것임을 보인 것으로서 증지를 증득한 뒤에 법(法)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저 언덕에 이르면[到彼岸]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은 저 증지를 얻도록 하는 법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이니, 그 법에서 마땅히 취하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저 언덕에 이르기 전에는 뗏목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아래는 어떤 종류의 뜻을 말씀하셨는가?
다른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의문인가?
앞에서
“성취한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유위의 모습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으셨기에 부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왜 설법을 하시는 걸까?’
이러한 것이 다른 의혹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의혹을 끊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의심을 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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