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권방편경 하권
4. 가호품[3]
[여인이 부처님을 만나다]
이때 수보리는 음식을 준 뒤 편안한 곳에서 고요히 앉았다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나 부처님의 처소에 가서 발아래에 머리를 숙여 절한 뒤, 물어야 할 법을 갖추어서 그 여인과 더불어 이야기한 것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여인은 깨달음을 갖춘 자이니 보살에게 예를 올려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마음 바탕이 민첩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녀(轉女)라고 하는 보살이 있었는데, 이 순권방편(順權方便)을 펴서 중생을 교화시켰다.
마갈국(摩竭國)에 있는 모든 큰 수레에 각각 백천 곡(斛)의 겨자를 얻어 가득 채운다 해도 오히려 헤아려서 그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으나
전녀인신(轉女人身)이 순권방편을 즐겨하여 권함으로써 사바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발심하게 한 수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천상과 인간에 태어나게 한 것이 한정할 수가 없다.”
이때 그 여인은 5백 여인과 함께 부처님의 처소로 향했다.
권속에 둘러싸여 나열대성(羅閱大城)을 떠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이르러 부처님의 처소로 향하니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여인이 오는 것을 보시고 현자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5백 여인이 함께 오는 것을 보고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들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5백 여인이 권속에 둘러싸여 나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때 현자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인을 영접하며 합장하여 예배를 올렸다.
여인은 앞에서 부처님의 발에 예배를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서 한쪽에 가서 머물렀다.
[현성(賢聖)]
이때 사리불(舍利弗)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인자께서는 어떠한 현성(賢聖)의 법을 획득했기에 현성의 뜻이 아닌 처신으로 도리어 여인을 영접하여 예배드리며 귀의합니까?”
이때 여인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현자의 뜻이 나아가는 바는 무엇입니까?
누가 세상의 성현이고, 누가 성현이 아니라서 그와 같이 뜻이 없는 말을 하십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누이께서는 세상의 성현과 성현이 아님을 아십니까?”
그 여인이 대답했다.
“나는 성(聖)과 성 아님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어떻게 아십니까?”
그 여인이 대답했다.
“오직 사리불이여, 성현의 교훈을 끊어 없애지 않고 불ㆍ법ㆍ성중을 어기거나 잃지 않으면 이를 일러 현성(賢聖)이라 합니다.
인자하고 온화하며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현성이 아님을 수행하여 해탈시키는 것을 일러 현성이라고 합니다.
또 사리불이여, 만약 어떤 여인이 온갖 보배로 몸을 장엄하게 장식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진기(珍琦)로 몸을 장식하여, 거기에 향을 스며들게 하고 여러 향을 바르고 이런 모든 의복으로써 다섯 가지 즐거움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즐기면서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버리거나 어기지 않으면 이것이 지극한 현성입니다.
이는 성문의 8유무(維務)나 선정의 8적(寂)의 문을 뛰어넘으며, 모든 아라한이 항상 적정에 머무는 것보다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인자를 위하여 비유할 것이니 마땅히 그 뜻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수정(水精)을 유리그릇에 붙이고 명월주(明月珠)를 나무 그릇에 붙여 놓았다면, 어느 것이 빼어나겠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명월주를 나무 그릇에 붙인 것보다 수정을 유리그릇에 붙인 것이 빼어납니다.”
그 여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만약 여인이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스스로를 즐기며 일체의 보배로 그 몸을 장엄하여 마음을 일체지에 세우는 것이
지극한 현성으로서 나한의 8유무(維務)와 선정으로 적정(寂靜)에 머무는 것보다 뛰어납니다.”
[대승]
사리불이 여인에게 물었다.
“누이여, 어째서 뜻을 대승(大乘)에 세우지 않습니까?”
그 여인이 대답했다.
“그 대승이라는 것은 머물거나 서 있음도 없고, 또한 물러나거나 돌아옴도 없습니다.”
다시 물었다.
“가령 대승이란 것이 머물거나 서 있음도 없고, 또한 물러나거나 돌아옴도 없다면 어떻게 배운다는 것입니까?”
그 여인이 대답했다.
“오직 사리불이여, 무명(無明) 내지 도(道)를 구함에 다함이 없는 대승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승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다함이 없다는 것은 무명과 노(老)ㆍ병(病)ㆍ사(死)가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법에는 생겨남도 없고 또한 사라짐도 없습니다.
태어남이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로 돌아갑니다.
생겨남이 없다면 소멸도 없습니다.
오직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깨닫는다면 12연기는 다시 소멸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때 사리불이 여인에게 물었다.
“모든 천상과 세상 사람이 모두 누이에게 머리를 땅에 대고 예배하는데, 하물며 지금 수보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장엄과 변재]
이때 사리불이 앞에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금이나 과거에도 사람과 닮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여인은 영락으로 그 몸을 장엄해서 변재(辯才)와 성달(聖達)의 높고 높음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대답했다.
“오직 사리불이여, 이러한 영락으로 장엄하고 꾸며서 변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물었다.
“무슨 변재입니까?”
여인이 대답했다.
“보살은 여덟 가지 영락으로 장엄합니다.
이 영락으로 몸을 장엄하면 마음의 깨끗함이 허공과 같습니다.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걸림이 없는 바르고 진정한 변재를 성취하게 됩니다.
무엇을 여덟 가지라고 하는가?
개사(開士)의 행을 닦아 도심(道心)을 버리지 않는 보살 장엄과
뜻은 대승을 생각하고 소절(小節)에 두지 않는 건립(建立) 장엄,
마음을 중생과 평등하게 가지는 무해(無害) 장엄,
정진하여 널리 듣는 무염(無厭) 장엄과
들은 법대로 능히 봉행하면 이에 이것이 보살의 몸에 장엄하는 것이고,
깊고 묘한 법을 밝혀서 모든 연기를 깨달으면 그 몸에 장엄하는 것이며,
중생의 근기를 깨닫는 것이 보살 장엄이며,
부처님께서 세우신 보살 장엄으로 보살을 교화하여 이러한 장엄으로 방편을 행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여덟 가지 일의 장엄입니다.
보살은 여기에 머물러서 걸림 없는 변재를 얻고 어둡게 가려진 5취(趣)를 교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