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비바사론 하권
3. 분별심소법품(分別心所法品)[1]
[심소법(心所法)]
【문】이미 하나의 주체와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행상(行相)이 전전하는 것이 마치 환상의 일과 같아 포악하게 날뛰는 코끼리나 말처럼 극히 다스리기 어렵다. 탐욕 등의 차별의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심소법의 모습을 듣고자 한다.
어떤 것들을 심소법이라 하며, 어떻게 차별이 있음을 알겠는가?
【답】느낌 등을 심소법이라고 이름한다.
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에 따로 본체를 가짐을 안다.
가령 부처님께서
“눈과 색의 두 가지 조건은 안식을 발생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있고, 촉과 함께 수(受)ㆍ상(想)ㆍ사(思)가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셨다.
살타벌저계경(薩他筏底戒經) 가운데에서 말씀하셨다.
“또한 사유가 있다. 모든 심소법은 마을에 의지하여 일어나 마음에 속박된다.”
또한 사리자(舍利子)가 구지라(俱胝羅)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상상과 생각을 마음의 작용[意行]이라고 하는가?”
구지라가 말하였다.
“이 두 가지 심소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마음에 속박된다.”
이와 같은 한없는 계경 등으로 말미암아 심소법이 따로 본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심소법이 만약 따로 본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 선근의 식주(識住), 모든 식념주(食念住), 모든 온(蘊)과 6근ㆍ6경ㆍ7각지ㆍ8정도와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법 및 유지(有支) 등이 계경에서 마땅히 감소했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대지법(大地法) 등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씀하신 법문은 감소하지 않았고, 대지법 등도 잘 건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법이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소법은 마음과 상응한다]
【문】어떻게 심소법은 마음과 상응함을 알 수 있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보는 것이 근본이 되고, 믿음ㆍ지혜의 증득과 상응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심소법이 상응의 뜻이 있음을 안다.
【문】‘상응’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답】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論)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응이 란 말은 평등의 뜻이다.”
【문】마음이 일어나는 지위에 심소법이 많이 있기도 하고, 마음이 발생할 때에 심소법이 적게 있기도 하다.
어찌하여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하는가?
【답】본체의 평등함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느낌과 한 가지 상상이 있다면 평등한 상응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마음 가운데는 한 가지의 느낌과 한 가지 상상만이 있다.
생각 등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말한다.
또한 평등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게 운전(運轉)하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마치 수레의 여러 부분과 같기 때문에 상응이라 이름한다.
또한 같은 시간, 같은 인식 주체[所依], 같은 행상, 같은 인식대상, 같은 결과, 같은 평등한 흐름, 같은 이숙(累熟)이 상응의 뜻이다.
이는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수ㆍ상ㆍ사 등을 말한다.
【문】무슨 까닭에 수를 먼저 말하고, 상 등을 먼저 말하지 않는가?
【답】행상이 거칠기 때문이다.
수가 비록 장애가 없고, 공간에 머물지 않으나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색처럼 먼저 시설(施設)하였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나는 지금 손이 아프고, 발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상ㆍ사ㆍ촉 등은 이와 같은 일이 없다.
[수(受), 느낌]
무엇을 수라고 하는가?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한다.
받아들임이 있음으로써 받아들이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즉, 이는 인식대상인 대상을 받아 느낀다는 뜻이다.
이것에는 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로운 느낌[苦受]ㆍ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만약 능히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기르게 하고 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즐거운 느낌이라 말한다.
만약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감소하게 하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괴로운 느낌이라 말한다.
이 두 가지와 서로 어긋나고 평등한 것도 아니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도 아닌 것을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이 느낌에서 탐욕과 수면(隨眠)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하기 때문에, 이를 즐거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성냄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괴로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어리석음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비록 어리석음과 수면이 모든 느낌에서 두 가지 연들로 하여금 따라 증가하게 하지만,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자신의 힘으로 전환하여 대부분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함께 한다.
나머지는 명료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흔쾌한 것[可意]과 흔쾌하지 않은 것[不可意]으로써 대상을 받아들이고 버림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세 가지 받아들이는 성질을 세운다.
이런 까닭에 다만 세 가지 종류의 느낌만을 말하지만, 실제로 느낌의 성질은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즐거운 느낌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실제 없다고 하기도 한다.
[즐거운 느낌은 없다고 말하는 연유]
【문】그들은 어떤 연으로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없다고 말하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즐거운 느낌을 관(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있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즐거움이 바로 고통임을 관하게 하였겠는가?
또한 계경에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마땅히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생각의 뒤바뀜, 마음의 뒤바뀜, 견해의 뒤바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유루의 느낌은 고제(苦諦)에 포섭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포섭된다는 것은 이것의 자성(自性)이 포섭되는 것이고,
실제로 즐거운 느낌이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느낌)은 괴로움이 자성이다.
어찌하여 이것이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실제 즐거운 느낌이 없다.
또한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습을 핍박하는 것을 괴로움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어서 모습을 핍박한다.
어찌하여 모든 유루의 느낌이 다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관하여 나타나기[現觀] 때문이다.
모든 유루가 다 괴로움이라고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관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은 말하였다.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있다.”
경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대명(大名)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색이 오로지 고통이고 즐거움이 아니라면 즐거움이 따르지 않으니, 유정은 모든 색에 마땅히 탐닉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계경에서
“즐거움과 함께 기쁨과 함께 4성제(聖諦)에 대해서 나는 관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즐거운 느낌이 생겨날 때, 즐거움에 머물 때, 즐거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
모든 괴로운 느낌이 생겨날 때, 괴로움에 머물 때, 괴로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고 말한다.
[반박하는 논설에 대하여]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괴로움과 같이 한 가지 종류의 설명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마땅히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고,
마땅히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경안(輕安)이 없어야 하리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기쁨이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다[輕安]”고 말한다.
만약 가볍고 편안함이 없다면 마땅히 즐거움도 없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전전하여 마땅히 열반도 없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순서대로의 원인도 없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논사들은 이것에 대해서 뜻을 구하여 반박하는 의미의 말을 한다.
“설사 뛰어난 경지[十地] 가운데 비록 기쁨이 없어도 몸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증거로 제시한 말은 결정적이지 않다.”
그들이 반박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뛰어난 경지 가운데는 모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