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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보살경 제2권
[살인자와 부처님의 대화, 부처님의 신통]
이때 악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 사람을 해치고자 한 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낱낱의 모든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은 깨닫기 어렵고 지혜가 아주 적은 자는 다시 깊이 사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들은 자가 바로 증득하게 된다면
어떻게 신통력을 깨달아
그가 마땅히 능히
이들 모든 6도(度)와
보리를 돕는 법을 만족하겠습니까?
무엇을 부처님의 신통이라 말합니까?
어떠한 실체(實體)의 상(相)이 있고
그는 어떤 색에 머물러 있으며
어떤 것을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까?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나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 사람을 해친 자에게 답하여 말씀하셨다.
만약 스스로 깨달아 앎이 있으면
이미 스스로 중생은 없다.
일체법(一切法) 가운데의 지혜는
바로 부처님의 신통이니라.
중생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공법(空法) 안에서 가르치라.
이와 같이 중생을 가르치면
마땅히 부처님의 신통을 얻으리라.
중생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땅히 한 마음으로 널리 깨닫게 하라.
또한 마땅히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신통이니라.
소유한 모든 불찰(佛刹)은
곧 하나의 불찰임을 알거라.
양쪽이 모두 들어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신통이니라.
모든 법이 생겨나지 않음을 알고
능히 보리심(菩提心)을 내면
모든 중생은 한 번 나기 때문에
부처님의 신통이라 말하느니라.
참는 마음을 신통이라 하느니라.
참음의 법체(法體) 또한 다하면
일체법(一切法)에 들어
역시 머무를 곳이 없느니라.
그는 부처님의 신통에 머물며
일체의 법에 의심이 없느니라.
의혹이 없는 것이 무생(無生)의 법이다.
때문에 그는 수기(授記)를 얻느니라.
중생을 성숙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불찰(佛刹)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수행하며
마땅히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공(空)을 깨달아 아느니라.
일체를 가장 높이 하여
불법(佛法)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
중생을 성숙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소리와 신통과
글의 뜻까지를 능히 모두 밝혀
비밀스러운 가르침 속에서도
바로 피안으로 건널 수가 있느니라.
끝이 없어 가질 수도 없고
또한 남김없이 아는 자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부처님의 신통은
변제(邊際)가 없느니라.
만약 스스로 이를 깨달아 마치면
곧 이것이 뛰어난 보시이니라.
일체의 보시 가운데 으뜸이어서
다시는 나쁜 곳에 나지 않느니라.
능히 일체의 보시를 행하며
그가 항상 보시를 행할 때
분별하는 알음알이가 없으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느니라.
이와 같은 가르침을 깨달아 알기를 마치면
그는 모든 물건을 버리게 되느니라.
일체의 생(生) 가운데에서도
이런 까닭으로 일체를 버리느니라.
만약 이 법을 듣기를 마치고
능히 아상(我想)을 버리며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얻어 마치면
이를 최상의 보시라 하느니라.
듣기를 마치어 열뇌(熱惱)가 없고
몸과 마음이 고요함을 얻으면
이를 최상의 계라고 하느니라.
다시 이보다 뛰어난 자는 없느니라.
하나의 공법(空法) 가운데는
참음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이를 가장 뛰어난 인욕이라고 하느니라.
그 가운데 더할 나위 없는 자는
모든 법이 공한 것을 알아
겁내거나 나약한 마음이 없느니라.
이를 뛰어난 정진이라 하느니라.
그 가운데서 그르침이 없는 자는
공(空)에 있어서 항상 문란하지 않고
일체의 마음이 깨달음을 내느니라.
이는 곧 마음을 편안케 하는 선정(禪定)이니라.
오직 소리 가운데 시현(示現)하고
혹은 공(空)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고
일체지(一切智)는 생각함이 없어
수면(睡眠)과 무지(無知)를 떠나느니라.
이와 같은 지혜를 최상이라 하느니라.
이들 6도를 실천에 옮겨
이 가르침 안으로 들어가
만약 말 없는 가운데 행하는 말씀을 알면
그는 모든 제도할 것을 제도하여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으며
역시 핍박한 번뇌가 없느니라.
그는 곧 비른 법을 알며
공용(功用)이 없는 지혜는 정(定)이며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으며
역시 핍박함이 없느니라.
앎[知]이 없는 것이 적정(寂靜)이기 때문이니라.
보시로써 피안(彼岸)으로 건너느니라.
만약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으면
역시 핍박을 당하는 일도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가장 뛰어난 계(戒)이며
일체의 계율 가운데 으뜸이니라.
만약 사물을 파괴하지 않으면
옳지 못한 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니라.
이와 같이 의심이 없으면
다시는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욕은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유위(有爲)를 깨닫느니라.
이것이 바로 가장 뛰어난 인욕이니라.
일체의 투쟁을 끊고
항상 이 인욕을 닦고 가까이하며
낮과 밤으로 쉬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몸으로 깨달으면
마땅히 기뻐할 색[色:身]을 얻느니라.
항상 공(空)을 닦을 때
피로하고 지겹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으뜸가는 정진이니라.
일체의 게으름을 버린
이와 같은 그의 정진을
만약 능히 몸에 지니어 마치면
바로 으뜸가는 정진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일체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공법(空法)과 선정(禪定)과
적멸(寂滅)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것이 비로 최승(最勝)의 공이니라.
모든 각관(覺觀)을 멀리 떠나
그 가운데서 선정을 기뻐하는 사람
그는 온갖 번뇌를 버리고
이와 같이 몸에 지니기를 마치어
곧 경솔함과 수선스러움이 없느니라.
만약 내외(內外)의 법에 있어서
의지하고 집착함이 전혀 없으면
이것이 바로 가장 뛰어난 지혜이니라.
지혜는 능히 흩어짐이 없으며
마땅히 일체 법을 관찰하느니라.
만약 지처(智處)가 없으면
이와 같이 지니고 알기를 마치어
모든 세간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이 여실히 알고
항상 능히 일체에게 베풀되
또한 일체에게 베푸는 것도 없어
그에게는 취하는 바가 없느니라.
모든 법은 소유(所有)가 없느니라.
이것이 비로 모든 법체(法體)니라.
그가 접촉하고 마치는 것이 없으면
이름 하여 재물이 풍부한 자라 하느니라.
만약 능히 맑고 시원한 것을 생각하면
평등을 잘 닦아
모든 비겁하고 나약한 것이 없느니라.
의심을 끊고 넓고 남김없이 비추느니라.
맑고 깨끗하게 계(戒) 가운데 머물면
그에게는 뜨거운 번뇌가 없느니라.
만약 깨닫는 바가 없으면
그의 계는 유전(流轉)함이 없을 것이니라.
해탈은 허공과 같아
다시는 소견(所見)이 없느니라.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리니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나쁜 행동이 없으며
모든 법에 소견이 없느니라.
더할 나위 없는 도(道)를 구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니라.
번뇌처(煩惱處)에서 일어날 때에
그는 그의 몸을 보지 아니하고
그의 몸을 보지 않을 때
번뇌에 묶이는 곳도 없으며
해탈은 모두가 꿈과 같으니라.
다시 또 보는 바가 없고
그가 없어 역시 보지 않으면
이런 까닭으로 꿈과 같다고 이름 하느니라.
이와 같은 모든 언설(言說)과
유(有)와 무(無) 등의 차별과
소리와 각관(覺觀)의 분별은
공(空)과 같아 가질 수가 없느니라.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깨는 것과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와
어리석음과 허망(虛妄)의 분별은
이곳에 진실은 없으니
더욱 거울 속의 상(像)과 같으니라.
분별 때문에 그를 보지만
그에게는 소유가 없느니라.
색(色)과 체(體)는 실로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이 안으로 나를 헤아리면
대장부는 얼을 수 없느니라.
안은 이미 소유가 없고
바깥 또한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여여(如如)의 가르침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공(空)이라고 말하느니라.
만약 능히 공을 알면
그는 마땅히 적멸(寂滅)을 깨닫느니라.
색은 인연을 쫓아 나오고
그 색은 실체(實體)가 없느니라.
만약 인연이 그에게 없으면
그도 없고 인연도 없느니라.
인연이 없는 까닭에 나지 않는 것이니라.
본성(本性)은 공하여 고요하며
가짐도 없고 또한 버림[捨]도 없느니라.
버림[棄]도 없으며 역시 같음[似]도 없느니라.
만약 이 두 가지가 없는 것을 깨달으면
일체의 근기(根機)를 능히 참을 수 있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참을 수 있으면
그는 마땅히 속히 부처를 이룰 것이니라.
나는 이와 같이 알아
연등불(燃燈佛)을 뵐 수 있었고,
뒤에 나는 ‘그대는 뒤에 마땅히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記]를 받았느니라.
만약 어떤 선남자(善男子)가
또는 선여자(善女子)로서
이와 같은 것을 깨닫는다면
또한 마땅히 어렵지 않을 것이니라.
만약 어떤 선여인이
여자 몸에서 바뀌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몸을 알아야 하느니라.
곧 구족하게 원하는 바를 얻고
얼굴도 좋고 매우 단정하여
보는 사람에게 기쁨을 일으킬 것이니라.
장부(丈夫) 부가라(富伽羅)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깨달아 알아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듣고 지니는 데다 능히 생각하여
지혜로운 장부라 불릴 것이니라.
중생을 위하여 의심의 그물을 끊어버리기에
만약 많은 중생들이 있어서
의심하고 현혹되어 뜻을 정하지 못하고
지혜만 구하려고 한하면
그는 능히 의혹을 끊어야 할 것이니라.
만약 바르지 못한 도(道)에 머물러 있으면
그로 하여금 올바른 길에 머물게 해야 하느니라.
유명(幽冥)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그를 위해 밝게 빛[照明]을 뿌리고
소유하여 생(生)을 받는 곳마다
일체 모든 곳에서 광명을 얻을 것이고
중생을 위해 사랑하고 즐거워하리라.
이 가르침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수명(壽命)도 능히 길고 멀게 되어
모든 근기를 모두 갖추어서
항상 훌륭한 집안에 태어나
권속들이 늘 수순(隨順)할 것이니라.
어떠한 곳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이익을 이룰 것이고,
남아 있는 중생들까지도 모두 함께
보리의 세상에 머물게 할 것이니라.
만약 이러한 법을 들으면
능히 속히 스스로 깨달음을 보게 되고.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항상 공경하고 봉사(奉事)할 것이니라.
마땅히 항상 복전(福田)을 짓고
일체의 보시를 받을 만해서
항상 착한 장부가 될 것이니라.
세간(世間)의 지제(支提)가 되어
모든 부처님의 앞에 머물고
모든 훌륭한 보시에 있어서
무상(無上)하신 세존의 주변에서
그들은 시주(施主)가 될 것이고
모든 세간을 항복시켜
마땅히 복전을 지을 것이니라.
만약 이와 같이 법을 들으면
능히 부지런히 수행하여 속히 깨달아야 할 것이니라.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수다라(修多羅)의 말씀이니라.
이와 같이 보리를 깨달아
여여(如如)하여 분별이 없으리니
이것이 교법(敎法)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니라.
마땅히 보리의 행을 실천하여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많은 때에
이 교법(敎法)을 듣기 때문에
만약 인천(人天) 가운데에서
온갖 과보를 받고자 하면
능히 이 법을 듣고
마땅히 부지런히 수행하여 속히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는 능히 항복함이 없으며
모든 중생들을 조절하고 다스려서
나머지 모든 중생들에게도
그는 항상 위엄과 덕망이 있을 것이며,
그의 지혜는 이익을 잘 얻어
수명도 잘 얻고
부처님의 출세(出世)하시는 때에 놓일 것이니라.
능히 이 가르침을 듣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부처님의 법이
그는 부사의(不思議)함을 알 것이며
이 때문에 그는 성문(聲聞)이 될 것이니라.
또 승가(僧伽)의 공덕을 얻어
일체의 법에서 벗어날 것이며
또한 안으로 자신까지 버려
마땅히 수다라를 들을 것이니라.
듣기를 마치면 마땅히 깨달아야 하느니라.
이 법은 말해지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곳에서 말해지는 바가 없다고 해도
이와 같은 모든 법은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이 말해지느니라.
‘취하지도 않고 또 버리지도 않으며
또한 얻거나 잃는 것도 없으며
지니고 올 곳도 없어
이 법에는 머무는 곳이 없다.’
계셨던 과거의 부처님께서는
그 분은 이와 같이 설법하시느니라.
‘만약 장차 올 부처님이 있으면
그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온 누리 시방 세계에 있어서
현재의 양족존(兩足尊)이신
그 분이 말씀하시는 교법은
또한 이와 같이 둘이 없으며,
만약 중생이 있기 때문에
능히 이 법을 말하는 사람은
마땅히 내가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마땅히 깨달아 알아야 하느니라.
이 법을 깨닫지 않고서는
장차 열반을 얻더라도
끝내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마땅히 보리에 머물지 못할 것이니라.
이는 그가 모두 구족해야 할 것이며
이는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지견(知見)이니라.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법은
지니고 있는 견처(見處)와는 반대이니라.
중생계(衆生界)는 [원하는] 때를 구해서
출현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이 모든 법을 깨달으면
진실한 체(體)는 비고 고요하며[空寂]
모든 법은 실(實)이 없으며
모든 법 또한 있음이 없을 것이니라.
만약 법상(法想)이 없으면
일체가 고요하고 고요하여
피차(彼此)를 여실이 알면
모든 법에 얻을 곳이 없으며
지니고 있거나 물을 곳이 없고
지니고 있거나 말할 곳도 없느니라.
그때 저 마하살(摩訶薩)을
무소유(無所有)라 이름 붙이니라.
그리하여 그는 여래(如來)를 생각하며
또 사람 가운데 으뜸인 이에게 묻느니라.
말씀하기는 이와 같은 법은
불 수 없지만 말씀을 하시니
누가 능히 이와 같이 깨닫는가?’
깨달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이처럼 수없이 많은 하늘과
모든 사부대중은
열 손가락을 모아 합장하고서
뜻을 고요히 하여 경건하게 듣고 들으며
그는 듣고 나서 기뻐하며 경하하지만,
그러나 얻는 바는 없느니라.
무지(無智)와 득처(得處)에서
많은 중생은 이 뜻에 머물고,
만약 아직도 알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욕망과 쾌락을 일으킬 것이니
부지런히 정진할 뜻을 내어
마땅히 듣고 깨달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참 뜻을 들으면
참다운 지혜는 분별이 없어
내 몸과 같아져 그만 못한 일은 없을 것이니라.
진여(眞如)는 또 이와 같이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묘법(妙法)을 듣고
큰 신통력을 보게 되면
모두가 기쁜 뜻을 내어
마땅히 으뜸가는 보리를 얻느니라.
수많은 천만(千萬) 가지 하늘과
백 나유타(那由他)는
이미 깨달아 스스로 깨달아 알았느니라.’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이
지금 이 무리 가운데서 나에게
지니고 있는 법에 대해 묻는 사람은
백천(百千)의 곱절이 될 것이고,
이미 진실한 법을 만나 깨달아
모두가 이미 다함께 회합할 것이니라.
옛날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 계신 곳에서
이미 듣고 이 법을 깨달았느니라.
그는 듣고서 이제 만나 깨달았으며
그는 이에 마땅히 부처를 이룰 것이니라.
지금 내가 있는 것과 같이
마땅히 이와 같이 법을 말하며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을 것이니라.
이렇게 사람을 살해하고자 하는 자는
지난 날 태어난 곳에서
이미 이와 같이 법을 듣고
옛날의 그곳에서 있지 않았던 것을
그는 지금 들을 수 있게 되었느니라.
무소유(無所有)의 해석은
이미 부처님의 신통력 안에 들었느니라.
지금 들은 뜻을 알아
이들 대중을 보고
바로 자신을 싫어하여
스스로 최하류(最下類)임을 보고
부처님의 신통력을 아는 까닭에
또다시 믿음에 깊이 들어가
불가사의(不可思議) 등은
그가 들어가자마자 곧 얻으리니,
비법(非法)과 비비법(非非法)은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신통력이니라.
모든 세간의 더할 나위 없는 것은
무분별(無分別)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 마쳐
얻지 못할 곳이 없는 곳이 없어
이 날카로운 근기를 가진 사람을 해치느니라.
듣는 바와 같이 듣기를 마치고 나면
날카로운 근기가 나를 향하여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체(法體)는
중생의 마음이 완고하고 우둔하며
어리석음의 그물로 덮여 있어
아무리 많은 때에 듣는다고 해도
부처님의 신통력을 알지 못하느니라.
나는 그 옛날 이미 부처님을 보았고
사람 가운데 으뜸이 되어
이 큰 신통력을 깨달았으며
뒤에 수기(授記)를 얻어
과거의 84아승기겁(阿僧祇劫) 가운데
나는 환하게 부처님께 등불을 밝혔느니라.
그리하여 유위법(有爲法)을 알았고
그럼으로써 소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덮인 속에서 얻은 바가 되어
아상(我想)에 집착하였고
온갖 번뇌에 현혹되었고
부처님의 신통력을 깨닫지 못하였느니라.
집착함으로 해서
생사(生死) 가운데 흐르고 돌아서
거듭 변제(邊際)를 얻지 못하였노라.’
스스로 나머지를 깨닫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깨닫지 아니하면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그도 또한 많은 때에 집착하느니라.
이러한 모든 보살들은
빨리 보리를 깨닫고자 하고
고요한 부처님의 신통력을 속히 깨닫고자 하여
마땅히 원각(圓覺)에 들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다스리기 어려워서
이름 하여 사람을 해치는 자라 하니
도리어 지혜와 근기가 날카로워질 것이니
이 때문에 그는 얻기가 어렵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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