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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2권
5. 법문품(法門品)[1]
[보살영락의 8만 법문]
이때에 부처님께서 족성자와 족성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반드시 보살영락의 8만 법문을 설하겠노라.
어떤 것들이 8만인가?
이에 족성자여, 그 이름을 진신(盡信)이라고 하는 영락이 있는 경우가 있다.
여래가 이 법문을 얻으면 고통을 받는 지옥(地獄) 중생의 온갖 근심을 없게 하느니라.
다시 등자(等慈)영락이 있나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저 축생의 형상을 받은 자로 하여금 영원히 상해(傷害)함이 없게 하느니라.
다시 무망(無忘)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아귀의 무리로 하여금 굶주리고 목마른 생각이 영영 없게 하느니라.
다시 청정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미혹한 중생으로 하여금 그 지름길을 알게 하느니라.
다시 철청(徹聽)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들음이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조리 바른 가르침을 듣게 하느니라.
다시 자오(自寤)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이 삿되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검의(檢意)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중생을 가르쳐서 열 가지 선한 행을 행하게 하느니라.
다시 직신(直信)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삿된 소견의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소견에 편히 처하게 하느니라.
다시 홍서(弘誓)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겁수로써 멀다고 여기지 않느니라.
다시 초월(超越)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게으른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율(律)을 받들어 지니게 하느니라.
다시 무애(無恚)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화를 잘 내는 중생으로 하여금 인욕(忍辱)을 닦아 행하게 하느니라.
다시 용맹(勇猛)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게으른 중생으로 하여금 정진을 폐하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일의(一意)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어지러운 뜻을 가진 중생으로 하여금 선정을 이지러지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치연(熾然)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를 성취케 하느니라.
다시 견고(堅固)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도의 자취를 밟지 못한 이로 하여금 도의 자취를 세우게 하느니라.
다시 다문(多聞)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지혜가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잘 기억하여 잊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위의(威儀)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부끄럼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느니라.
다시 악로(惡露)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욕심에 집착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치 못한 것을 알게 하느니라.
다시 쾌락영락(快樂瓔珞)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화내는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느니라.
다시 보요(普曜)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등분(等分)의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일으키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형색변화(形色變化)영락이 있으니, 보살로서 이 영락을 얻은 이는 한량없는 형상과 빛깔의 변화를 보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모두 발하게 하느니라.
이것을 족성자여, 이런 영락이 8만 법문까지 이른다고 말하느니라.
보살도 다 궁구할 수 없으며, 나도 이제 간략하게 설해서 그 일을 다 말하지 못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백천 겁 동안 보살의 영락행을 다하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느니라.”
당시 무형(無形)이라는 이름의 보살이 있었는데 불퇴전의 경지에 서 있었다.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부처님 앞에서 꿇어앉아 합장한 채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별해서 일찍이 들은 바 없습니다.
여래의 변화는 다 궁구할 수 없지만, 그래도 능히 영락의 묘한 법을 연설하시었나이다.
여러 보살마하살 가운데 영락의 이름을 잡아 지니고 외우는 이는 모든 부처님의 옹호를 받습니다.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여래가 설하시는 법의 영락을 만나면 문득 여래의 법장(法藏)을 만나게 될 것이옵니다.”
[열 가지 걸림 없는 공덕]
이때에 부처님께서 사부대중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마음 한뜻으로 받아 지니고 외우면, 문득 열 가지 걸림 없는 공덕을 얻으리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허공장을 얻어 위의에 깊이 들어가고,
들은 것을 잘 기억하여 변재를 잃지 않고,
온갖 생각[念]이 허깨비 같고 화(化)함 같음을 관하여 요달하고,
심해탈(心解脫)에 노닐면서 또한 영원하다고 계교하지 않고,
항상 8법을 여의어서 시끄러운 데 처하지 않고,
듣자마자 기뻐하면서 마음에 두 소견이 없고,
공(空)의 무상을 알아서 또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능히 적멸정(寂滅定)의 뜻에 깊이 들어가며,
신족(神足)이 걸림이 없어 빠른 지혜를 얻으며,
법이 스스로 생겨남을 알아서 일어나고 멸함을 보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을 일러 선남자와 선여인이 갖춘 이라고 하느니라.”
이때 사리불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드러내고 부처님 앞에서 합장한 채 여쭈었다.
“예, 그러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모든 법은 본래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나이다.
형상 없는 법은 아라한과 벽지불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옵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일러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 가지 걸림 없는 공덕을 잡아 지녀 외우면 문득 도과(道果)를 이루어 열반문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까?
걸림 없음과 열반이 어째서 다른 법이겠습니까?
열반은 함이 없는 것이요, 걸림 없음은 집착이 없는 것이옵나이다.
여래는 현재 등정각에 이르셨는데, 어째서 걸림 없는 공덕으로 열반을 설하시나이까?
만일 중생으로 하여금 열 가지 걸림 없는 공덕을 얻게 한다면, 문득 열반을 이미 얻게 되나, 만일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이미 얻게 했다면 곧 열반은 열반이 아니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열 가지 걸림 없는 공덕을 얻은 것을 문득 열반이라고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물은 바대로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威神)이지 그대의 경계는 아니니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리불아. 열반은 색(色)이냐?”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열반은 색이 없느냐?”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열반은 색이면서 색이 없느냐?”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열반은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냐?”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걸림 없는 모든 법은 항상하기도 하고 항상하지 않기도 하며,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느냐?”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걸림 없는 모든 법에서 내지 열반에 이르기까지 색도 아니고 색 없음도 아니고,
색도 아니면서 색 없음도 아니기도 하며,
또한 나고 멸하고 단(斷)하고 착(着)함도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볼 수도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다시 열반의 이름을 말하느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열반은 이름이 없고, 안식(眼識)의 경계로 능히 볼 바가 아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사리불아, 너의 말처럼 안식의 경계로 능히 볼 바가 아니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식(識)은 형상이 있느냐?”
그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 형상(形相)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말대로 그 형상에 따르면 곧 식이 있느니라.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안식의 경계가 아니라고 말하느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유형상(有形相)에 따르면 이는 유위식(有爲識)이요,
무형상(無形相)에 따르면 이는 무위식(無爲識)입니다.
걸림 없음과 열반은 유위의 모습도 아니고 유위식도 아니요, 무위의 모습도 아니고 무위식도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걸림 없음과 열반은 유위의 모습도 아니고 유위식도 아니며, 무위의 모습도 아니고 무위식도 아니니라.
유위는 식이 있고 무위는 식이 없는데, 열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다시 식과는 다른 것인가?”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열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또한 식과 다르지도 않다.
모습[相]은 곧 모습이 아닌데, 어째서 열반에 따로 이름을 세웠느냐?
가령 열반에 따로 명호(名號)를 세웠다면, 그 형상에 따르는 즉시 식이 생긴다.
만일 열반에 따로 이름을 세우게 하지 않았다면, 무위의 모습에 따라 문득 무위식이 있느니라.
그렇다면 어째서 열반이라 말하느냐?
유위의 모습도 아니고 유위식도 아니요,
무위의 모습도 아니고 무위식도 아니요,
또한 식과 다르지도 않고, 다시 따로 명호를 세우지도 않는데,
지금 어째서 열반이라고 칭하느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열반은 열반이옵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째서 열반은 열반이라 하느냐?”
사리불이 여쭈었다.
“열반의 다함과 같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째서 열반의 다함과 같다고 하느냐?”
사리불이 여쭈었다.
“다하면서 다함없음과 같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도다. 사리불아, 네가 말한 바와 같으니라.
근본적으로 설한 걸림 없음과 열반은 유위의 모습도 아니고 유위식도 아니요,
무위의 모습도 아니고 무위식도 아니요,
또한 식과 다른 것도 아니요, 모습이 곧 모습 없음이라서 따로 이름을 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걸림 없음과 열반은 다하면서 다함없음과 같다고 말하느냐?”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의 경계에서 걸림 없음과 열반을 말한 것이 아니옵니다. 단지 걸림 없음과 열반은 다함이 없으면서 다함없음이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에게 비유를 들어 말해 주겠다. 지혜 있는 이는 비유를 통해 스스로 아느니라.
마치 어떤 사내[士夫]가 허공을 향해 쏘아 허공에서 허공을 맞히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적에 허공을 거닐려고 하다가 연못에 빠진 적이 있노라.
지금 허공을 보고 문득 쏘아서 원수를 갚았노라. 얼마나 유쾌한가, 나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이 사람의 뜻[志趣]은 틀림없는 것인가, 아닌가?”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가 허공을 쏘아 원수를 갚고자 함은 확실하여 허세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허공에서 허공을 쏘면 화살이 허공에 가서 붙느냐?”
대답하였다.
“붙지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허공에게 원수를 갚느냐?”
사리불이 여쭈었다.
“허공은 모습이 없으니, 갚음이 있는지 갚음이 없는지 보지 못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네가 말한 것처럼 허공은 갚음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걸림 없음과 열반도 또한 마찬가지니라. 유위의 모습에 있으면 유위식이 따르고,
무위의 모습에 있으면 무위식이 따르고,
이 모습에 있지도 않고 저 모습에 있지도 않으며,
또한 식의 있음도 아니고 식의 없음도 아니니,
이것을 걸림 없음과 열반은 식의 있음도 아니고 식의 없음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때에 5백 명 비구는 이 ‘허공의 다함없는 법’을 듣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과 발우를 거두어 가지고 길을 건너 떠나갔다.
왜냐하면 이 비구들은 허공에서 허공을 구함으로서 허공의 원수를 갚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음을 계교하여 물들고 집착하면서 허공을 일컬어 허공이 있다고 하였다.
가령 장래에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부처님들이 앞에 서서 법을 설할지라도, 이들 비구는 허공에서 허공에 물들어 결코 해탈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때에 자리에 있던 범부로서 믿음을 세워 무학(無學)을 배우는 사람은 아직 고(苦)를 다해 무위계(無爲界)에 이를 수 없었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을 이어받아 사부대중에게 말하였다.
“어떤가, 여러 어진 이[賢者]들이여, 그대들은 이 깊은 법을 분명히 알았는가?”
“그렇습니다. 어진 사리불이여, 번뇌를 영영 끊고 지을 바를 이미 끝냈나이다.”
“어떻게 번뇌를 다했는가?”
“뭇 지혜가 섞이지 않고, 지음[造]도 아니고 짓지 않음도 아닌 까닭에 번뇌[塵勞]를 다했나이다.”
“옳다, 족성자여, 번뇌의 밭[疇]은 중생의 뿌리이다. 중생 가운데서 위없는 도를 이루고 부처의 복전(福田)에서 일체지(一切智)를 청정하게 하느니라.”
“청정함 또한 청정함이 없는데, 어떻게 복전(福田)에서 일체지를 청정하게 하는가?”
“아직 도과(道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일체지에서 그 자취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였나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일체지를 청정하게 하는데, 전부 몇 품이나 있나이까?”
“보살이 일체지를 청정하게 하는 데는 세간법에 구애받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세간법에 구애받지 않음입니까?”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아서 뒤바뀐 소견을 품지 않는 것이니라.”
“보살의 영락은 어떻게 성취하나이까?”
“부처님의 도를 잃지 않으면 마지막에 이르러 성취하게 되고 보살의 영락을 잃지 않나니,
족성자여, 이것을 본행으로 말미암아 착한 염원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선지식을 의지하여 보살의 온갖 행의 영락을 성취하나이까?”
“온갖 중생에게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고 말하느니라.”
“어떠한 지혜를 써야 온갖 행의 영락을 성취하나이까?”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고, 다시 다른 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라.”
“어떻게 모든 여래를 받들어 섬기고 공양해서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나이까?”
“겁수(劫數)로써 기한을 삼지 말지니, 이를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말하느니라.”
“어떻게 여래의 처소에서 성현의 침묵으로 뭇 상념을 일으키지 않나이까?”
“차라리 몸과 목숨을 잃을지언정 계율은 훼손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8백의 근문(根門)을 분별하나이까?”
“마음을 굳게 지녀 계속해서 뜻을 지켜 잃지 않고, 근문(根門)의 충입에 있어서 생각을 쉬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여섯 가지 굳건한 법[六堅之法]을 갖추나이까?”
“실답지 못한 몸과 실답지 못한 목숨을 실다운 몸과 목숨으로 바꾸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무진장을 갖추나이까?”
“이미 보살의 무애영락(無礙瓔珞)을 얻으면, 문득 일곱 가지 재물의 다함없음을 갖추느니라.”
“어떻게 해야 세속의 욕심이 줄어들고, 만족할 줄 알게 됩니까?”
“뭇 지혜에서 서로 어기지 말아야 하니, 이것을 욕심이 적다고 말하느니라.”
“어떻게 해야 마음이 한가한 곳에 노닐면서 3유(有:界)에 물들지 않나이까?”
“삼계를 원하거나 구하지 말라.”
“어떻게 지혜를 써서 3세(世)의 근심을 없애나이까?”
“고통의 근본을 다하고 번뇌를 낳지 말라.”
“어떻게 해야 세 가지 고통의 법에 대한 상념이 없겠나이까?”
“고통과 즐거움을 분별하여 보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느니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받으면서도 받는 바가 없게 됩니까?”
“5음(陰)인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분명히 밝혀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법의 근본[法本]에 깊이 들어갑니까?”
“밖으로 6입(入)을 버리고 안으로 6진(塵)을 일으키지 말라.”
“어떻게 자신을 제도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제도하나이까?”
“갖가지 도를 분별하면서도 도과(道果)에 물들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인색함을 버리고 은혜롭게 보시하면서도 상념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온갖 중생에 대해 세 가지 걸림이 없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계를 지키며 훼손하지 않겠나이까?”
“처음 뜻을 발한 이후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법인(法忍)에 유순하여야 하느니라.”
“어떻게 해야 참음을 닦아서 성냄을 일으키지 않나이까?”
“마음을 조복하고 뜻을 거두어서 공(空)의 형상 없음을 생각하여라.”
“어떻게 보살이 마음을 써야 정진하면서 게으름을 일으키지 않겠나이까?”
“분별하고 사유하기를 불 끄듯이 하여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선정의 뜻을 이지러지게 하지 않고 시방에 노닐면서도 심의(心意)가 어긋나지 않나이까?”
“뜻이 평등해서 둘이 없어야 지혜를 잃지 않느니라.”
“어떻게 슬기의 눈으로 걸림 없이 널리 비추겠나이까?”
“일체 모든 법에서 형상을 보지 않느니라.”
“어떻게 해야 보살이 자등정(慈等定)에 들어가 중생을 거두면서도 제도함이 있음을 보지 않나이까?”
“중생 심(心)ㆍ의(意)ㆍ식(識)의 근본을 관(觀)하여 요달해야 하느니라.”
“어째서 보살은 제도 받지 못한 이들을 불쌍히 생각해서 슬프게 우나이까?”
“법상(法想)을 일으켜 높고 낮은 것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보살은 기쁜 마음을 끊지 않고서 무량정(無量定)에 드나이까?”
“행의 근본이 스스로 그러해서 나고 멸함을 보지 않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세 가지 삼매를 행하여 열반문에 이르나이까?”
“여래의 여덟 가지 도의 지름길을 버리지 않느니라.”
그때에 사리불이 무수한 방편으로써 여러 모인 이들에게 미묘한 법인 무애영락을 말하였다.
이때 1천2백 명의 비구가 믿는 마음이 견고해져서 불퇴전을 이루었으며,
다시 수없는 천인(天人)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의 뜻을 모두 발하였다.
당시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이 무정상(無頂相)이었다.
그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신기하고 아주 특별해서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가령 현자(賢者) 사리불이 설한 지혜의 경계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애착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화내는 온갖 법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께서 도의 가르침을 펼치는 걸 관하여 보니,
혹은 유(有)의 가르침을 설하면서 차츰 무위(無爲)에 이르기도 하며,
혹은 무(無)의 가르침을 설하여서 또한 무위에 이르기도 하며,
혹은 몸의 고통을 설하시어 싫어하고 근심함을 알게 하며,
혹은 식(識)의 상념을 없애서 본제(本際)를 여읨을 알게 하였나이다.
어떻게 해야 보살이 온갖 법에 널리 들어가서 낱낱이 분별하면서도 더하고 덜함을 일으키지 않나이까?
이제 들으니, 여래 신상(身相)의 법은 유위는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서 행을 바꾸지 못하고, 무위는 형상이 없어서 가히 측량할 수 없나이다.
이제 여래 영락의 근본을 듣고자 하오니, 오직 바라건대 해설하여 주옵소서.
유위의 색신은 얼마만큼의 영락이 있어야 스스로 장엄해 꾸미며,
무위의 색신은 얼마만큼의 영락이 있어야 스스로 장엄해 꾸미며,
유위의 무색신은 얼마만큼의 영락이 있어야 스스로 장엄하여 꾸미며,
무위의 무색신은 얼마만큼의 영락이 있어야 스스로 장엄하여 꾸미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