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고경 하권
[보시]
그때에 세존께서 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어떤 왕이 능히 보시를 행하면 그 나라에서 많은 복장(伏藏)이 나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 국왕이 가난하여 고생하는 중생에게 가지가지로 두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복장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가섭아, 큰 방편이 있는 보살은 널리 중생을 위하여 매우 심오한 법을 말하는 까닭에,
이 매우 심오하며 그릇된 법을 여의는 경전, 즉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에 상응하는 경을 얻으며,
다시 이와 같은 여래의 상주(常住)와 여래장(如來藏)의 경전을 얻는다.
가섭아, 저 울단월(鬱單越)에서는 자연(自然)의 음식을 대중이 함께 취하되 줄어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수명이 다 하도록 ‘내 것이란 생각[我所想]’과 ‘탐욕스런 마음[慳貪想]’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섭아, 이 염부제(閻浮提)의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이 매우 심오한 경전을 얻어, 쓰고 지니고 독송하여 그 뜻을 남김없이 통달[通利]하여 널리 남에게 말하여 주되,
끝내 싫증내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항상 자연스럽고 여의(如意)한 공양과, 깨달음[菩提]이 다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어 정해진 업보를 없앨 것이다.
[지계]
만일 계행을 지키는 비구가 계행 지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천신(天神)이 따라 모시고 공양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심오한 경전에 대하여 한 생각이라도 비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면 반드시 여래장과 여래상주(如來常住)를 얻으며, 항상 모든 부처님을 뵈옵고 가까이 하여 공양하게 될 것이다.
전륜성왕이 행차하는 곳에 7보가 항상 따르는 것처럼,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이러한 경전이 항상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또한 전륜성왕이 행차하는 곳에 7보가 따라오며 다른 곳에 머무르지 않고, 그 참되지 않은 보배는 다른 곳에 머무는 것처럼,
이와 같이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현재 머무는 곳에 이 경전이 다른 세계에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모두 모이고, 모든 요의(了義)가 아닌, 공(空)과 상응하는 경전은 다른 곳에 머물 것이다.
이와 같이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이르는 곳마다 이 경이 항상 따를 것이다.
전륜성왕이 행차하는 곳의 모든 중생은 왕을 따르며,
‘저 왕이 머무는 곳에 나도 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이 경전 또한 항상 따를 것이다.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올 때에 7보가 따라서 나오는 것처럼,
이와 같이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세간에 나오면 이 경전 또한 따라서 나타날 것이다.
전륜성왕이 자신이 소유하던 7보에서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왕은 그것을 찾아 반드시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는 것처럼,
이와 같이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은 이 경을 듣기 위하여 곳곳을 찾아다녀 경이 있는 곳에 이르려 할 것이다.
또한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오지 않을 때에는, 모든 작은 왕[小王]들이 전륜왕과 다투어 여러 왕들과 화합하여 각각 세상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방(諸方)에서 이 심오한 경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나머지 잡된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온갖 잡된 경을 말하니, 이른바 바르고 바르지 못한 잡경들이다.
저 모든 중생이 이렇게 따라서 배우니, 그들이 배울 때에 이 여래장ㆍ여래상주의 깊고 심오한 경전을 들으면, 마음에 의혹이 생겨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먹어, 그를 천시하고 비웃으며, 사랑하는 생각을 품지 않고 매도하고 모욕하여 참지 못하고,
‘이 문필(文筆)은 마군이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것이 법을 훼손한다’라고 이르며,
모두 버리고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서로 파괴하고 계행을 범하고 삿된 생각을 일으켜, 끝내 이 경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이 머무는 곳에 이 경이 따라서 머물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세간의 많은 중생이 대승의 경전을 보거나 들으면 비방할 마음을 먹고 두려운 생각을 갖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5탁악세(五濁惡世)에는 바른 법이 줄어들고 많은 중생이 대승법을 비방하니,
마치 일곱 집 마을에는 반드시 다이니(茶夷尼) 귀신이 있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일곱 사람 가운데 반드시 비방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가섭아, 비유하자면 같은 계행을 지니는 사람은 서로 만나면 반가워하는 것과 같다.
그들도 이와 같아서 각각 계행을 훼손하고, 설법하는 무리 가운데서 이 경을 들을 때 서로 돌아보고 놀리고 비웃으며,
‘무엇이 중생계이며, 무엇이 항상된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 얼굴을 서로 보며 ,
‘저 사람은 나의 벗이다’라고 생각하여,
더 더욱 서로 불쌍히 여길 것이다.
이와 같은 짓을 하면서 본성을 지켜 머무르거나 또한 본성을 지켜 떠나간다.
마치 어떤 바라문 장자의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악한 짓을 익혀, 부모가 훈계해도 고치지 않고, 집을 버리고 떠나 나쁜 친구를 따라 다니면서, 온갖 날짐승과 들짐승을 쫓는 것으로 오락을 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짓을 되풀이하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 같은 무리를 모아 함께 그릇된 법을 행하며 이것을 동행(同行)이라 여긴다.
이 경을 즐기지 않는 사람 또한 이와 같아서, 남들이 독송하고 설법하는 것을 보면 도리어 놀리며 비웃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에 중생들이 모두 게으르고, 계행 지니기를 느슨히 하여, 법에 들지 못하였으므로 저 모든 ‘동행’이 서로 서로 비방하기 때문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 참으로 나쁜 때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때를 당하여 위로하는 설법을 베푸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가섭아, 비유하자면 성읍(城邑)에서 가까운 밭이 사람과 코끼리와 말들에게 침범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때에 밭 주인이 한 사람을 시켜 감시하게 했는데 감시하는 사람이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다시 둘ㆍ셋ㆍ넷ㆍ다섯 혹은 열ㆍ스물ㆍ백 사람으로 늘릴 것이다.
지키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면 취하는 사람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때에 최후의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지켜보는 것은 일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좋은 방편을 써서 침해를 받지 않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여,
곧 밭의 모종[苗]을 뽑아 손수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밭의 모종이 온전하게 되었다.
가섭아, 만일 이와 같이 좋은 방편을 쓸 수 있다면 내가 멸도한 뒤에 능히 이 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끝내 저 악한 사람을 바로잡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두 어깨에다 수이산(須爾山)을 지고 백천 겁에 이를지언정, 저 악한 사람[惡人]들이 계를 범하고 법을 없애며 법을 비방하고 법을 더럽히는, 이와 같은 모든 악하고 법답지 못한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차라리 남에게 매여서 그의 종[僕使]이 될지언정, 저 악인들이 계를 범하고 법을 등지며 법을 멀리하고 법을 무너뜨리는, 이와 같은 모든 악하고 법답지 못한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차라리 정수리에 땅덩이와 큰 바다를 이고 백천 겁을 지날지언정, 저 악인들이 계를 범하고 법을 멸하며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헐뜯는, 이와 같은 모든 악하고 법답지 못한 음성을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차라리 항상 귀머거리ㆍ소경ㆍ반벙어리ㆍ온벙어리가 될지언정, 저 악인들이 청정한 계행을 훼손하고 이익을 위하여 출가하여 다른 이의 보시를 받는, 이와 같은 모든 악하고 법답지 못한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차라리 몸을 버리고 빨리 열반에 들지언정, 저 악인들이 청정한 계행과 법라(法螺) 소리 같은 행을 훼손하고 몸으로는 남의 뜻에 맞추려 자신의 뜻을 굽히는 행동을 하고 입으로는 허망한 것을 말하는, 이와 같은 모든 악하고 법답지 못한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궁극의 열반]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한 이것은 성문의 열반이요, 궁극의 열반이 아니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일 성문ㆍ연각의 열반에 든 것이요 궁극의 열반이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3승, 즉 성문승ㆍ연각승ㆍ대승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이미 열반에 드셨는데도 다시 열반에 든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성문은 성문의 열반으로써 열반에 드니 궁극적인 열반이 아니다.
벽지불은 벽지불의 열반으로 열반에 드니 또한 궁극적 열반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공덕을 얻은 지혜인 대승의 열반에 든 연후에야 궁극의 열반이며 다른 궁극의 열반이 없는 것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비유하자면 젖에서 낙(酪)이 나오고, 낙에서 생소(生酥)가 나오고 생소에서 숙소(熟酥)가 나오며, 숙소에서 제호(醍醐)가 나오는 것과 같다.
범부의 삿된 소견은 처음 나온 젖에 젖과 피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3귀의계(歸依戒)를 받은 사람은 마치 순수한 젖과 같다.
수신행(隨信行)들과 초발심(初發心) 보살이 해행지(解行地)에 머무는 것은 낙(酪)을 이룬 것과 같다.
7종의 학인(學人)과 7지주(地住)의 보살은 숙소와 같다.
그리고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제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