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일체법은 부처님 법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여래께서는 이 법을 증득하셨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이 법은 모두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다 유위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無爲)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무슨 뜻을 진술하려 한 것인가?
모든 법은 진여로써 자성을 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만 부처님만이 깨달은 것이므로 모든 법은 곧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였다.
이 물질 등은 그 자체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저 모든 물질과 소리 등의 법은 다 이 법이 아니다.
이 법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 법을 성취하였으니, 이것은 곧 필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부의 비유]
장부의 비유는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신의 부처님을 가지고
장부(丈夫)에 비유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장애(障碍) 없이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며
모든 장소에 두루 가득하게 계시는 성품이기 때문이라네.
증득하신 몸[德體] 광대(廣大)하신 까닭에
또한 큰 몸이라 이름하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므로
그는 몸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한다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다.
‘두루 가득하다’고 말한 것은 두루 다닌다는 뜻이다. 모든 곳에 두루 하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으며, 증득한 몸이 크기 때문에 또한 큰 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두루 다닌다는 것은 곧 진여의 성품으로서 모든 법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성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곧
“그는 몸이 아닌 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고 설하셨느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무슨 뜻을 진술하기 위함인가?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은 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니, 실체의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한 것이다.
[보살이 없다]
‘만약 보살이 없다고 말한다면 정각(正覺)도 또한 없을 것이며,
깨달을 대상[所覺]도 역시 없을 것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에 들게 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도 엄숙하고 청정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보살 등이 일을 행하여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원적(圓寂)에 들게 하고, 또한 다시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려는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까닭에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아래의 글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계(法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유정(有情)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거나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속임이며 거짓이라 한다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속이는 것이며 거짓이니, 이것을 보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혹이 일어날 것이므로
“묘생이 만약 일체법은 성품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한다면”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일체법이 성품이 없다]
여기에서 “일체법이 성품이 없다”는 이와 같은 등의 글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보살과 중생이
모든 법엔 자성이 없음을
만약 그것을 알면 비록 성인이 아닐지라도
성인 또는 지혜로운 이라고 불리게 됨을 마땅히 알라.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이는 모든 법엔 아무런 성품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법에 성품이 없다’는 것은 곧 중생과 보살이 소유한 법에 의거한 것이니, 저들이 만약 능히 믿고 이해한다면 세간지(世間智)이거나 출세간지(出世間智)이거나 간에, 즉 이생(異生)이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모두 보살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문득 결정을 이루어 부속보살(覆俗菩薩:世諦菩薩)과 승의(勝義:出世諦)보살, 이 두 종류의 보살을 허락한 것이다. 이는 곧 저들에게 순종하기를 밝힌 것이므로 보살, 보살이라고 두 번 말한 것이다.
[여래는 증득한 바가 없다]
앞의 경문에서 말하기를
“여래는 나타난 바를 증득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 이치가 명백하여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저 성인이 전혀 본 것이 없겠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눈을 허락하여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록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니
부처님께선 다섯 가지 눈을 갖추셨기에
경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계신다네.
이것은 ‘왜 허망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비유를 들었을 뿐이다.
[중생의 마음은 유전한다]
“저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성품에서 그 마음이 유전(流轉)했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이와 같이 자세하게 말했으니,
이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말인가?
저의 허망한 견해 때문이 아니요 경계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니, 어떤 것이 곧 허망한 경계인가 하면 가지가지 허망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가지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여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지니고 있지 않고 항상 변천하므로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갖가지 인식작용이 있어서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각기 다른데 그런 까닭에 다시금 이런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인식작용이라고 이름하기에 마음이 유전(流轉)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다라(陀羅)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실상의 염처를 여읜 성품을 밝힌 것이다.
저 염처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염처를 지니는 법인데 그가 만일 이 염처가 없다면 곧 다라(陀羅) 남아라(喃阿羅) 아타라(痾陀羅)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이름에는 모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다 지닌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한 유주(流注)한다는 뜻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흘러 흩어지는 것이니,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항상 유전하는 인연을 밝힌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유전하여 허망한 성품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물었다.
무슨 까닭에 본경(本經)에서는 애초부터 범어(梵語)로 된 다라(陀羅)를 보류한 채 한자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거기에는 무슨 의취(意趣)가 있는가?
대답했다.
범본의 세 곳에는 모두 이 다라니가 있지만 그 뜻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지금 이 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만약 전적으로 범자(梵字)만을 따른다면 소리가 중국東土에 막히게 될 것이고, 만일 모두를 중국음唐音으로 번역한다면 그 뜻이 서역(西域)과 어긋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 썼던 범자의 의미가 그대로 잘 보전되어 전해지게 되었다고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이 안에서 지(持)자를 말한 것은 아마도 집지(執持)의 일을 기술한 것 같은데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송(頌)을 지은 무착(無着)보살의 뜻을 맞추고, 이를 주석한 세친(世親)보살의 마음을 맞춘 것이며, 이것을 잘못 기술하여 결코 손을 상하게 하게끔 하는 근심이 없게 하려고 한 것 같다.
만약 이것을 모두 유(流)자로만 번역했다면 지(持)자의 이치는 전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모두 지(持)자로만 번역했다면 유(流)자의 뜻은 진실로 끝내 나타지지 못한 채 아주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겸할 수 있게 번역해야 비로소 생각했던 것과 같이 되어 시원스러워질 것이다.
만약 유자로 번역하면 이치에는 꼭 맞아떨어질 것이나, 그러나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다라니의 뜻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곳이 이미 그러하다면 다른 곳이야 이를 유추해보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라니가 남아 있는 모든 범본이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 『반야경』은 이미 네다섯 번의 번역을 거쳤으므로 이를 찾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잘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미가 기이한 것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거듭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길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서쪽 나라의 성명(聲明)은 하나의 이름에 많은 일을 지목하고 있고 하나의 일에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다라(多羅)라는 한 마디의 말도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어 유(流)라는 뜻이 있고 지(持)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치가 지방 풍속의 다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인 듯하므로 옛것만을 굳게 믿어 융통성을 갖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옛 번역만 고집한다면 그 뜻이 소원하거나 지루하게 될 것이며 그 잘잘못에 대해서는 말해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등의 마음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와 미래의 성품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이란 곧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서 자성이 있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곧 허망한 인식작용의 성품이 인연한 바라서 3세의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복의 덩어리의 비유]
또 무슨 뜻으로 복의 덩어리에 비유하여 설하였는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 지혜 지녔기에
그 복은 곧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 복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듭 이 비유로써 설명하신 것이라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마음이 이미 흘러 변천한다면 이것은 속이고 거짓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니,
‘복의 덩어리가 있다는 것도 또한 모두 허망한 것일 텐데 이것이 이미 허망한 것이라면 어떻게 착한 법을 이룩하겠는가?’라는 깊은 의혹이 이미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일 것이기에
이를 결단하여 밝히기 위해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정말로 허망한 것’이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 덩어리의 실체는 곧 허망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정각의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것이 곧 그것(佛智慧)을 지닌 성품임을 밝혔는가?
경에 이르기를
“묘생아, 만약 이것이 복의 덩어리라면 여래께서는 곧 복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말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다섯 가지 취온(取蘊)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 바탕이 곧 허망한 것이다.
만약 이 복의 덩어리가 이 취온에서 생긴 것이라면 여래는 곧 이 복의 덩어리가 복의 덩어리의 성품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은 이치상으로 지혜를 지닌 곳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신, 여래의 상호]
‘만약 여래는 곧 색신 등이 모여 조작됨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여래께서는 여러 가지 좋은 상호가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라고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땅히 색신(色身)이 원만하고 상호가 구족(具足)한 것을 가지고 여래를 관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색신이라고 말한 것은 좋은 뜻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