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사론 상권
6. 부혁의 궤변에 대한 반론
6.0. 부혁의 9 가지 궤변
부혁이 말하기를,
“승니 가운데 60세 이하는 솎아 내어 백성으로 되돌리면, 병마(兵馬)는 강해지고 인구는 늘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사찰이 많고 승려가 많아, 경비의 손실이 막대하다. 이 같은 사찰을 외로운 노인이나 가난한 이나 집 없는 이나 의로운 선비에게 3만 호를 내어 주고, 주(州)마다 하나의 사찰만을 두어 초당(草堂)과 토탑(土塔)에 경전과 불상을 안치한 다음에, 오랑캐 스님 두 사람만을 파견하여 오랑캐의 법을 전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서역의 오랑캐는 오니(惡泥)에서 태어나 진흙 덩어리만을 섬기는데, 지금도 오히려 털에서 악취를 풍기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올빼미이며 도인(道人)은 여라(驢騾:평범한 사람)이고 사색(四色:四姓階級)이며 탐역(貪逆)의 악종이다. 부처도 서방에 태어났으니, 이는 중국의 바른 풍속이 아니라 요매(妖魅)의 사기(邪氣)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포희(庖犧) 이래로 29대 동안 부자와 군신간에 충의를 세우고 효도를 이루어 도를 지키고 덕을 실천하면서, 모두 신주(神州)에서 생장하여 화하(華夏)의 정기(正氣)를 얻었기에, 인민들이 모두 순박하였으니, 이는 당시 세상에 부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일어난 것이 진중(秦仲)에서부터 35세이니, 모두 6백38년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제왕에게 부처가 없으면 치적(治積)이 장대해지고 연조(年祚)가 늘어났으나, 부처가 있으면 정치가 가혹해지고 국조(國祚)가 짧아졌다. 포희씨 이래로 29대 동안 불법이 없었기에 임금은 성명(聖明)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워 국조가 유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불법이 있기 전에는 인민이 순박하고 부드러워서 세상에 찬탈(簒奪)과 반역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부처가 한나라 땅에 와서 해만 끼쳤지 이익 준 게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조(趙)나라 건무(建武) 때에 도인 장광(張光)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나라 무제 때에는 승려 유수광(劉秀光)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승니가 20여만 대중이나 되니, 이를 속히 폐지하거나 줄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6.1. 승니를 폐지하거나 줄이자
먼저 “승니를 폐지하거나 줄이자”는 궤변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형색(形色)은 살피기 쉬우나 옳고 그름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오랫동안 함께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혜원(慧遠)법사의 「답환현서(答桓玄書)」에는,
“경전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대체로 삼과(三科)가 있는데,
첫째는 선사(禪思)로써 미묘(微妙)를 섭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전(遺典)을 외우는 것이고,
셋째는 복업을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을 짓더라도 금계(禁戒)를 지키지 않기에 그 자취가 아련야(阿練若)가 아닌 이들도 있고, 또 경문을 많이 외워 끊임없이 읊조리더라도 의리(義理)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또 장로(長老)의 연배이면서 삼과(三科)가 깊지 않더라도 법을 본받으며 체성(體性)도 곧아서 큰 허물을 범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같이 따져 보더라도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릴지 실로 가려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에 따르면, 한 사람을 제도하여 출가시키는 것이 보탑(寶塔)을 범천(梵天)에 닿도록 이록하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어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토 이롭게 한다는 것이니, 자신을 깨끗이 하여야 삼보(三寶)를 주지(住持)할 수 있으며, 7세를 구제하는 다리를 놓아주고 국가를 이롭게 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죄를 지은 이는 국법에 따라 처벌되기에, 허물이 없는 이라야 나라를 위해 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6.2. 사찰을 민간에 내어 주고 초당에나 불상을 안치하자
“사찰을 민간에 내어 주고 초당에나 불상을 안치하자”는 궤변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포된 지 이미 5백여 년인데, 사찰과 승니가 대대로 이어왔습니다.
감탑(龕塔)과 당전(堂殿)은 모두 선대에 이룩해서 지금껏 경영되는 것이고, 방우(房宇)와 문랑(門廊)도 모두 신심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혹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신 양친의 왕생(往生)이나 혹 7세의 집안의 왕생을 위해서이며 장차 뛰어난 과보를 얻고자 현재의 복전에 심어 놓은 것으로, 모두가 저들의 기뻐하는 마음에서 조성된 것이지,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세금을 매겨 이룩한 것이 아닙니다.
『서(書)』에도 “공을 이루고 나면 이를 훼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자산(鄭子産)이 백여(伯予)의 사당을 허물지 않자, 공자도 어진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물며 부처님은 3세의 좋은 복전이시고 4생(生)의 부모이신데, 공양하며 잘 모시는 것이 가하지 이를 훼손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 법을 인왕(人王)에게 부촉하신 바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재차 생민(生民)을 이룩하여 불도(佛道)를 거듭 일으켰으니, 바로 여래의 대단월주(大檀越主)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한명제 영평(永平)의 덕화(德化)를 따르고 효문제(孝文帝) 개황(開皇)의 시절에 가까이하기를 권청드립니다.
6.3. 부처가 서방에 태어났기에
“서역의 오랑캐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며, 탐역의 악종이고, 부처가 서방에 태어났기에 요매의 사기”라는 궤변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사기』와 『역제왕검목록(歷帝王儉目錄)』 및 『도은거년기(陶隱居年紀)』 등에 따르면, 포희씨(庖犠氏)는 뱀의 몸에 사람 머리이고, 대정씨(大庭氏)는 사람 몸에 소의 머리이고, 여와씨(女媧氏)도 뱀의 몸에 사람 머리이고, 진중(秦仲)은 큰 새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우(夏禹)는 동이(東夷)에서 나왔고, 문왕은 서강(西羌)에서 태어났고, 간적(簡狄)은 제비 알을 삼켜서 태어났으며, 설백우(契伯禹)는 어미의 가슴과 등을 갈라 태어났고,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 의탁하였고, 원씨(元氏)의 위나라 임금도 이적(夷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응하여 명(命)을 밝혀서 진단(震旦)에 나와 때를 만났으니, 혹 남면(南面)하여 ‘고(孤)’라고 자칭하거나, 혹 임금으로써 만국에 임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태어난 곳이 외지고 형모가 추하더라도 각각 하늘의 위세를 머금고 성덕을 품었다고 할 것입니다.
노자도 목모(牧母)에 의탁하여 태어났으니, 그 자신도 하층의 범부인데, 어떻게 그 태어난 출생이 미천하다고 성인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공자는,
“군자가 머무는 곳이면 무슨 비루함이 있겠는가”하였으니 그 말이 미덥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가 있으면 존귀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높고 낮음으로 이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모나지 않게 응하고 근기에 따라 나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석가의 조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천대(千代)로 전륜왕(轉輪王)의 후손이면서 바로 찰리왕(刹利王)의 태자이십니다. 기약할 조짐이 있으면 다다르고, 물상(物象)이 감응(感應)하면 형체를 이뤘는데, 삼천세계의 중앙에 출현하시어 남염부제(南閻浮提)의 대국에 가르침을 내려 방책을 마련한 것도, 단지 중생의 이익만을 근본 삼기 때문입니다.
만약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에서 나왔거나 융족(戎族)과 노족(虜族)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씨족이 나쁘다 한다면, 태호(太昊)와 문명(文命)은 모두 성인이 아닐 것이고, 노자와 문왕도 스승으로 섬기기 부족할 터입니다.
『지리지(地理志)』 「서역전(西域傳)」에 따르면, 서쪽 오랑캐란 단지 총령(蔥嶺)의 동쪽에 있는 36개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부처님이 태어난 천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거짓되이 말하였다면, 그 죄가 얼마나 깊겠습니까?
만약 알지 못하고 함부로 떠든 것이라면, 죽은 다음에도 나무람이 있을 터입니다.
6.4. 포희 이래로 29대 동안
“포희 이래로 29대 동안 부자와 군신 간에 충의를 세우고 효도를 이루어 도를 지키고 덕을 실천하면서 화하(華夏)의 정기를 얻었다”는 궤변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기』나 『회남자(淮南子)』의 여러 서책에 따르면, 황제(黃帝)의 시절에 치우(蚩尤)가 있었는데, 머리가 구리로 된데다 이마가 쇠로 되었다 합니다. 온 천하에 난리를 일으켜 황제(黃帝)와 판천(阪泉)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마침내 황제가 제위(帝位)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치우가 명을 어기자, 다시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무려 52년간이나 걸렸습니다.
전욱(顓頊)의 시절에도 좌동정(左洞庭)에서 삼묘(三苗)를 주살하였습니다.
또 『팽려서(彭蠡書)』와 『급총서(汲塚書)』 및 『죽서(竹書)』에서는, 순(舜)이 요(堯)를 평양(平陽)에 가두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데, 지금도 요를 가두었다는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또 요는 단수(丹水)의 나루에서 유묘(有苗)와 전쟁을 벌였고, 요가 아홉 개의 해에 화살을 쏘니 그것이 까마귀 깃털처럼 떨어졌다고 합니다.
『초사(楚詞)』에서는
“열 개의 해가 연속하여 떠올라 쇠가 녹고 돌이 흘러내렸으며 대풍이 청구(靑丘)에 몰아쳤다. 동정에서 뱀을 처치하고 대택(大澤)에서 봉시(封豕)를 살육하고, 흉수(洶水)에서 구영(九癭)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상서(尙書)』에서는
“홍수가 하늘까지 이르러 산이 잠기고 구릉을 무너뜨렸기에 여민(黎民)이 굶주리고 백성들은 토굴에 숨었다”고 말합니다.
우(禹)의 시절이 되어서야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백곡자(柏谷子)가 관직에서 물러나 밭을 갈았으나, 삼묘(三苗)가 덕정(德政)을 닦지 않는다고 우가 이들을 멸망시켰습니다.
하(夏)나라 걸(桀)의 시절에 왼쪽에 하제(河濟)가 있고 오른쪽에 태화(太華)가 있었는데, 이궐(伊闕)은 그 남쪽에 있었고 양장(羊腸)은 그 북쪽에 있었으나 황도(皇圖)를 불사르고 용봉(龍逢)을 죽이는 데다, 성탕(成湯)을 가두고 말희(末嬉)에 현혹되어 정사(政事)를 어질게 돌보지 못했기에, 탕이 몰아내어 멸망시켰습니다.
탕의 시설에도 정벌은 아홉 차례였고 전쟁은 스물일곱 차례였으며, 7년 대한(大旱)에 하수(河水)와 낙수(洛水)가 흐름을 멈추고 쇠와 돌이 녹아 흘렀습니다.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토벌하는 데는 3년이나 걸렸고, 은나라의 주신(紂辛)은 달기(妲己)에 빠져서 10악(惡)으로 백성을 함부로 해치고 다섯 가지 가혹한 형벌을 남용하였는데, 현자의 가슴을 가르고 임부의 뱃가죽을 벗겨내었으며, 문왕을 가두고 기자(箕子)를 내쳤습니다.
주나라 무왕이 목야(牧野)에서 주 임금을 정벌하자, 그 피가 표저(漂杵)까지 흘렀는데, 녹대(鹿臺)에서 주살하면서 왕이 친히 쏘아 죽이고, 주신의 머리를 태백(太白)의 깃발에 매어 달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이를 그르다 하여 주나라 곡식조차 먹지 않습니다.
마침내 공자조차도
“무왕은 아름다움을 다했으나 선을 다하지는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무왕의 치세에는 삼감(三監)이 난을 일으켰고, 성왕(成王)의 나날에는 삼숙(三叔)이 뜬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선왕(宣王)이 6월에 출정하는 것을 『시경(詩經)』에서는
“흉노[獫狁]의 무리를 정벌하러 태원(太原) 땅에 이르니”라고 노래합니다. 「채미(採薇)」에서도 수역(戌役)에 보내진 것을 노래하면서 북쪽에는 흉노족의 어려움이 있고 서쪽에는 곤이(昆夷:오랑캐의 나라 이름)의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채파(採芭)」에서는 선왕의 남쪽 정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혁이 말하는 상대(上代)의 도(道)가 삼황(三皇)에서 삼왕(三王)의 시절이라면, 반드시 도를 지켜서 덕을 행하고 충의(忠義)를 간직하며 효도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으니 맑고 태평했을 터인데, 어째서 대대로 끊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그 해독이 백성에게 이르게 하여 무고한 재앙을 입게 하였습니까?
이리하여 요석(姚石)이 도리어 ‘영가(永嘉)의 치세’를 사모하게 된 것인데, 어떻게 위대한 ‘무위의 시절’이라 이름하겠습니까?
그릇된 견해로 한쪽만을 말하면서, 도대체 누구를 거짓되다 하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