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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3권
2. 십대봉불편(十代奉佛篇) ①[1]
유생(儒生)이 말하였다.
“믿는 마음이 점차 나고 삿된 고집이 조금은 돌아섭니다.”
그리고는 또 물었다.
“중국에서 임금으로서 불교를 받들고 지극히 믿어서 오랠수록 더욱 돈독하며 복을 받은 자를 징험(徵驗)할 수 있습니까? 들어보고자 합니다.”
보살[開士]이 깨우쳐 말하였다.
“목에 신령스런 햇빛이 내리고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낙양(洛陽)에 들어오고서 마음을 돌려 부처님의 법을 받든 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10대의 임금과 3공(公)과 재보(宰輔)와 유교를 통달하고 널리 아는 자로서 불교를 공경하여 믿는 자들을 일러 주겠다.
[서진의 황제]
진(晋)나라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
[용안(龍顔)이 기이하고 크며 성명(盛明)한 이로서 운수를 고쳤고 크게 부처님의 일을 키워서 가람(伽藍)을 널리 세웠다.]
진나라 혜제(惠帝)
[마음을 미묘한 도에 돌리고 뜻을 현묘한 종(宗)에 계합하여 이에 낙양의 흥성사(興盛寺)를 짓고 1백 스님들께 공양하였다.]
진나라 민제(敏帝)
[독실한 뜻이 신명(神明)의 마음을 움직여 신의(神儀)를 멀리 내리고 이어서 장안(長安)에 통령사(通靈寺)와 백마사(白馬寺) 두 절을 지었다.]
위에 말한 것은 서진(西晋) 시대로서 두 서울에 절이 모두 1백80개이고 경을 번역한 사람이 13인이며 그 부수가 73부이고 승니가 3천7백여 명이었다.
[동진의 황제]
진나라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대동(大同)을 법하여軌 양자강 왼쪽을 중흥하여 와관사(瓦官寺)와 용궁사(龍宮寺) 두 절을 짓고 단양(丹陽)과 건업(建業)에서 1천 스님들을 득도(得度)시켰다.]
진나라 숙종(肅宗) 명황제(明皇帝)
[총명하고 성스러워 현묘한 것을 보고 재를 베풀어 복을 일으켰으며 황흥사(皇興寺)와 도량사(道場寺) 두 절을 지었고 의학(義學)에 이름 난 1백 스님을 모았다.]
진나라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지극한 뜻이 명통(冥通)하고 성스러운 덕이 멀리 감동하였으며 중흥사(中興寺)와 녹야사(鹿野寺) 두 절을 지었고 경을 번역하는 의학들 1천 스님을 모았다.]
진나라 효애황제(孝哀皇帝)
[시신(侍臣)들께 묻고서 미묘한 이치에 마음을 돌려서 아름다운 손님들이 간절히 대하고 크게 용의 빛을 열었다.]
진나라 태종(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
[어질고 너그러우며 온함(溫含)하고 성인을 지음이 흠명(欽明)하였다. 불상을 만들고 재를 베풀며 스님들을 득도시키고 절을 세웠으며 장간(長干)의 옛 탑에 나무로 부도(浮圖)를 세우니 장려(壯麗)하고 특수하게 달랐다.]
진나라 열종(烈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을 받들고 지념(志念)이 명부(冥符)하였다.
사자국(師子國)의 임금이 불상을 멀리 보내와 붉은 뜻을 표하였다.
흠앙하여 사문 담마최(曇摩最)를 보내왔고 옥으로 만든 불상을 보내서 붉은 정성을 표하였다.
의해(義解)하는 스님을 불렀으며 황태사(皇泰寺)를 지었고 이어서 옛 집을 희사(喜捨)하여 본기사(本起寺)를 지었다.]
진나라 안황제(安皇帝)
[부처님 법을 독실하게 믿어 게으르지 않았으며 복흥사(福興寺)와 황업사(皇業寺)를 일으키고 아육왕(阿育王)의 탑에 대석사(大石寺)를 세웠다.]
위에 말한 것은 동진(東晋)시대이니 1백4년 동안 절을 지은 것이 1천7백68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7인이며 번역된 부수가 2백63부이다. 그리고 득도시킨 승니가 2만 4천 사람이었다.
[송나라의 황제들]
송(宋)나라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
[계성(啓聖)으로 원(元)을 세워서 순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였다.
입으로 범본(梵本)을 외우고 손으로 계경(戒經)을 썼으며 영근사(靈根寺)와 법왕사(法王寺)의 두 절을 짓고 두루 학문을 섭렵했던 현명하고 거룩한 1천 스님을 모셨다.]
송나라 태종(太宗) 명황제(明皇帝)
[지극한 다스림이 극히 창성하였다.
입으로 『반야경(般若經)』을 외우며 한 길 여덟 자의 금상(金像)을 조성하려 하여 네 차례나 하여도 주성(鑄成)하지 못하였기에 고쳐서 한 길 넉 자로 하였더니 곧 원만하게 장엄이 성취되었기에 다시 한 길 여덟 자로 하였다.
또한 의해(義解)하는 스님들을 공양하는 재를 하였다. 이에 사리를 감득하고 홍보중사(弘普中寺)를 지어서 이름난 스님들을 불러들였다.]
송나라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재를 받들어 살생을 하지 않고 정성된 마음으로 도를 사모하였다.
하상지(河尙之)의 바른 대답으로 부처님의 계율을 종으로 삼았기에 앉아서 태평을 이루는 것이 임금의 뜻과 같았다.
구나발마(求那鉢摩)를 흠앙하여 큰 법 일으키기를 힘썼다. 선운사(禪雲寺)를 지어서 항상 1천 스님들께 공양하였다.]
위는 송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1천9백13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3인이며 번역된 불경이 2백10부이다.
이름난 스님과 지혜 있는 선비가 성하기 벼와 삼[麻]과 같고, 보찰(寶刹)과 금륜(金輪)이 성하기 대나무나 갈대와 같아서 불교가 융성하고 독실하게 믿는 자가 배나 많았다. 승니는 3만 6천 사람이었다.
[제나라의 황제들]
제(齊)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
[손으로 『법화경(法華經)』을 쓰고 입으로 『반야경(般若經)』을 외웠다.
4월 8일이면 항상 금상(金像)을 주조하고 7월 15일이면 절에 나가 우란분(盂蘭盆)의 재를 보냈으며 3백 명의 이름 있는 스님에게 공양하였다.
척기사(陟屺寺)와 정관사(正觀寺) 두 절을 세웠다.]
제나라 세조(世祖) 무(武)황제
[초현사(招賢寺)와 유현사(遊玄寺)의 두 절을 지었고 의학들을 모아 경을 번역하니 3백 명의 스님이 모였다.
3교(敎)의 격(格)을 헤아려서 4년마다 고시(考試)를 치게 하였다.]
제나라 고종(高宗) 명(明)황제
[모든 경을 쓰고 1천 분의 금상을 지었으며 입으로는 항상 『반야경』을 외우고 항상 『법화경』을 전(轉)하였다.
귀의사(歸依寺)를 지어서 참선 익히는 스님을 불렀으며 몸에 항상 여섯 가지의 재를 가지고 열 가지의 착함을 힘써 닦았다.]
위는 제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2천15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16인이요 번역된 부수가 72부며 승니는 모두 3만 2천5백 사람이었다.
[양나라의 황제들]
양(梁)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
[성도(性度)가 크고 거룩하며 풍감(風鑒)이 명랑하고 빼어났다.
칠각지(七覺地)에 마음을 노닐고 여덟 가지의 참선에 생각을 모았다.
5시론(時論)을 제정하고 사방에 펼쳤다.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 등 다섯 절을 지었으며 중운전(重雲殿)에 강하는 대중 1천 스님들을 모았고 나라 안에 널리 6재(齋)를 가지게 하니 백성들이 다 여덟 가지의 계를 받았다.]
양나라 태종(太宗) 간문(簡文)황제
[천자(天姿)가 높고 밝았으며 풍신(風神)이 초매(超邁)하였다. 마음을 미묘한 법에 맡겨 현묘한 장소(章疏)를 두루 보았다.
자경사(資敬寺)와 보은사(報恩寺) 두 절을 지었으며 피를 찔러내서 『반야경』 10부를 손수 썼다.
태후(太后)의 휘일(諱日)이면 먹지 아니하고 재를 지냈으며 『법집기(法集記)』 2백 여권과 『법보연벽(法寶連璧)』 5백여 편을 지었다.]
양나라 중종(中宗) 효원(孝元)
[성인을 체험하여 능함이 많으며 미묘한 데 들어가서 신령스럽게 깨달았다.
천거사(天居寺)와 천궁사(天宮寺)의 두 절을 짓고서 이름 높고 행이 높은 1천 스님들을 불렀다.
스스로 『법화경』을 강하였고 매양 『성실론(成實論)』을 풀었다.]
위는 양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2천8백46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42인이요 번역된 부수가 2백38부이며 승니가 8만 2천7백 사람이었다.
양나라 효명(孝明)황제
[문명(文明)하게 정치에 있으면서 대보(大寶)를 중흥시켜 다시 양나라 사직(社稷)을 부활시키고 백성들에게 빛을 주었다.
형주(荊州)에서 천황사(天皇寺)와 척기사(陟屺寺)와 대명사(大明寺)와 보광사(寶光寺)와 사망사(四望寺) 등의 절을 지었다.]
위는 후량(後梁)의 두 임금으로서 다스림이 강릉(江陵)에 있기 35년인데 절을 지은 것이 1백8개이다.
산중의 절로는 청계사(靑溪寺)와 녹계사(鹿溪寺)와 복선사(覆船寺)와 용산사(龍山寺)와 비산사(菲山寺) 등이 있다.
모든 불사(佛事)가 장엄하고 화려하며 당우(堂宇)가 기묘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보는 이가 곧 발심을 하고 문득 돌아감을 잊었다. 승니는 3천2백 사람이었다.]
[진나라의 황제들]
진(陳)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
보력(寶曆)을 응하여서 군림(君臨)하시고 회창(會昌)에 나아가서 사목(司牧)하시었다. 몸의 길이가 8척(尺)이고 수염의 길이가 3척이며 머리털은 귀를 덮었고 손을 드리우면 무릎을 넘었다. 큰 원력(願力)으로써 여러 중생들을 편하게 제도하였고 큰 장엄(莊嚴)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깎아 제거하였다.
패읍(沛邑)을 길이 말하여서 땅의 은덕을 갚으려 생각하였으며 원하건대 초도(譙都)로 하여금 아름다운 경사를 같이하려 하였다.
영정(永定) 2년에 양주(楊州)에서 동안사(東安寺)를 지었으며 다시 집과 나라를 위하고 이에 여러 중생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양주 도읍의 치하(治下)에서 흥황사(興皇寺)와 천거사(天居寺) 등의 네 개의 사찰을 지었다. 모두 두공[栱]에 수 놓고 기둥[楹]에 아로새겼으며 망루에 문체를 하고 벽에 분을 칠하였으며 세 개의 섬돌이 엄숙하여 구르는 듯하고 1천 기둥이 빛나서 영롱하며 긴 표찰(表札)은 강구(康衢)에 벌려 있고 높은 문은 치도(馳道)에 임하였으니 미음(美音)의 정사(精舍)도 이를 짝할 수가 없고 선덕(善德)의 인사(仁祠)라 해도 어찌 이에 비기겠는가?
일체경(一切經)과 12부(部)의 경전을 베껴 썼으며 금과 구리로 등신상(等身像) 1백만 구(軀)를 조성하고 승니 7천 인을 득도시켰으며 옛 절을 수리한 것이 32였다.]
진나라 세조(世祖) 문(文)황제
삼보(三寶)를 도와 융성하게 5승(乘)을 크게 교화하니 무성한 은택이 자비로운 구름에 비기고 큰 밝음이 지혜의 해에 비겨서 아름다운 칭찬이 사해(四海)에 나타나고 어진 마음이 삼령(三靈)에 통하였다. 작두(勺斗)에 근심이 없고 전쟁이 거두어졌다.
옛 절을 수리한 것이 60였고 일체경 50장(藏)을 베껴 쓰고 승니 3천 인을 득도시켰다.
진나라 고종(高宗) 효선(孝宣)황제
옥판(玉版)을 잡아 중휘(中麾)를 인도하고 금륜(金輪)을 타고 상국(上國)을 지적하였다. 땅은 단(旦:周公)과 석(奭:召公)과 같이 많이 소유하였고 책임이 기형(機衡)을 총괄하였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크게 저축함을 생각하였으니 강토가 일이 없고 천하가 다 편하였다. 양주의 금중리(禁中里)에 태황사(太皇寺)를 지었다.
그러나 끝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기에 뜻이 장릉(章陵)에 간절하여서 시흥(始興) 소열왕(昭烈王)과 효(孝) 태비(太妃)를 위하여 태황사에 7급(級)의 나무 부도(浮圖)를 조성하니 금반(金盤)이 요령(曜靈)과 더불어 색채를 비기고 주륜(珠輪)이 합벽(合璧)과 더불어 빛남을 다투었다.
또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처럼 선양(禪讓)하고 저(邸)를 대신하여 집을 이어서 복전(福田)을 심으려고 숭황사(崇皇寺)를 조성하였다.
태건(太建) 2년에 거듭 시흥 소열왕과 효 태비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미치고자 하여 영찰(靈刹)을 받들어 건립하니 높이가 15장(丈)이고, 그 아래에 부처님의 손톱을 모시니 길이가 2촌(寸)이요 너비가 1촌이었다. 보배의 감실(龕室)을 꾸며서 보배의 상자에 간직하니 어떤 때는 광명이 5색(色)을 날리고 광염(光焰)이 한 길이나 일어나는 등 신통 변화가 다함이 없어서 보는 자들이 더욱 공경하였다.
금과 구리 등으로 불상 2만 구를 조성하고 옛 불상을 수리한 것이 1백30만구이고,
일체경 12장(藏)을 베껴 쓰고 옛 절을 수리하고 보수한 것이 50개이며 승니 1만 명을 득도시켰다.
위는 진나라 시대의 다섯 임금으로서 모두 34년 동안이었다.
절은 1천2백32개로서 국가에서 새로 지은 절이 17개이고 백관(百官)들이 조성한 것이 68개이며, 성 안의 큰 절이 3백여 개였다.
『여지도(輿地圖)』에 이르기를
‘옛날에 수도에는 7백여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후경(侯景)이 난을 일으켜 이 절들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진나라가 크게 통일되어 백성들이 다스려질 때에 조성하였기에 기와를 연하고 기둥이 맞닿아서 임금의 집과 즐비하여 표찰과 탑이 서로 바라보아 수도에 별처럼 늘어서 있었다고 하며, 경을 베껴 쓰고 불상을 조성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한다.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스님께 공양하고 보시를 하며 방생(放生)을 하여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열 가지의 착함을 크게 펴서 4민(民)들을 등용한 것은 이루 다 일컬을 수가 없다.
승니 3만 2천 명을 득도시켰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세 사람이며 부수가 11부였다.
이는 5대(代)의 임금들이 불교[玄宗]를 진실하게 믿고 불사(佛事)를 널리 폈으며 절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고 이름있는 스님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진(晋)나라 세조(世祖)가 와서 집안을 소생시켰으며 진나라 중종(中宗)이 부유하기로는 양자강 남쪽을 차지하였으며, 명제(明帝)가 보배스러운 운을 이었고, 효(孝)무제가 덕의 바람을 빛나게 열었으며,
[송나라의 고조와 태조]
송(宋)나라 고조(高祖)는 근심이 조금 풀렸으나 임금의 거둥이 아직도 막혔기에 2년 동안 험한 길을 걸으며 네 번이나 전쟁을 하여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서렸고 만기(萬機)를 옷깃 안에 총괄하였다.
그러면서도 단나(檀那)의 소임을 게을리 하지 않아 항상 불법을 보호하는 마음을 가져서 대승을 높여 중하게 여기고 불상을 첨앙하였으며 용궁에서 나온 화엄경을 읽고 외워 성스러움을 키우기에 싫증내지 않았고 맑은 음성이 그치지 않았다.
송나라 태조는 이 날로 씀을 운반하여 천하가 태평하기를 펴서 매양 그물을 푸는 어짐을 일으켰고 결승(結繩)의 정치로 돌아오기를 생각하였다.
제(齊)나라 고조(高祖)는 진(眞)과 가(假)의 현묘(玄妙)함을 통찰(洞察)하고 유교와 묵교(墨敎)의 청화(菁華)를 다하여 상선(上善)을 닦고 하무(下武)를 빛내서 높였으며,
[양나라의 고조]
양나라 고조(高祖)는 유덕(有德)의 앞자취를 지나고 유마힐 거사의 성스러운 궤도(軌道)를 밟아서 지유(地維)가 이미 찢어진 것을 기우고 천망(天網)의 무너진 것을 떨쳤다.
새벽에 옷을 입고 앉아서 아침이 될 때까지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아니하고 돈독히 아름다운 인륜(人倫)을 모았다.
영취산(靈鷲山)의 심오한 경전과 계원(雞園)의 은밀한 뜻에 이르고 2제(諦)와 5승(乘)의 뜻과 3장(藏)과 9부(部)의 글에 이르러서는 붉은 수염[赤髭]이 자세히 하지 못한 것과 푸른 눈[靑目]이 종래 풀지 못하던 것을 아울러 얻어서 글은 거듭 봄이 없고 뜻은 두 번 생각함이 없었다.
그래서 주공과 공자의 속된 꾀를 더럽게 여기시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이름과 이치를 기롱하였다. 그러니 능히 선유(先儒)들로 하여금 체(體)를 해석하게 하고 족히 당시의 선비들로 하여금 복응(伏膺)하게 하였다. 호정(戶庭)에 들어간 이가 드무니 뉘라서 담장 안과 방안을 엿보겠는가?
홀로 성스럽게 봄을 열어서 멀리 하늘의 뜻을 발하였으니 큰 지혜가 한가롭고 한가로워서 밖으로 여덟 가지의 규칙을 정제하였고 언제나 근신하는 마음으로 안으로 네 가지의 거둥을 여미었다. 적현(赤縣)에 임하여서 자비가 넘쳤고 현호(玄扈)에 부치어서 큰 서원에 맞았다. 은택이 유정천(有頂天)에까지 두루하였고 도가 무은(無垠)에 미치었으며 신령스럽게 아름다운 상서에 응하니 조부(兆符)가 먼저 나타났다.
너그럽고 어질고 덕스럽고 효도한 것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으나 미처 전해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을 간략하게나마 거두어서 금간(金簡)에 편집하고 여러 보인(寶印)에 간직하여서 구슬 장막으로써 덮고 옥(玉)의 상자에 받들었으니 연꽃의 대(臺)가 네 기둥에 묘하게 피었고 사자의 자리가 아홉 급(級)에 일어났다. 이는 바로 연초(軟草)의 손님으로 살가죽에 써서 종이를 대신한 것이며, 또한 중향(衆香)의 손님이 피를 뿌려서 티끌을 적신 격이다.
『양기(梁記)』에
‘무제(武帝)가 재위 49년 동안 매양 정음(庭蔭)으로써 일찍이 기울여서 항상 정법에 감득하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사해(四海)를 가진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나 망극한 은혜를 펼 수 없다. 그러기에 불교의 경전에 마음을 둔다≻ 하였다.
여덟 부(部)의 『반야경』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의 어머니로서 능히 죄의 장애를 제거하고 번뇌를 잘 씻어준다고 하여 여러 경전을 채집하여 몸소 주를 달고 해석하여서 법륜(法輪)을 항상 이어서 재(齋)와 강(講)이 끊기지 아니하며 이 뛰어난 복을 의뢰하여 효도의 마음을 펴려고 희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주 2대의 선황을 대신하여 오체투지로써 명우(冥祐)를 빌었으니 매양 오체투지하는 때마다 땅이 진동하였다. 그래서 종산(鍾山)에 애경사(愛敬寺)를 일으키고 청계(靑溪)에 지도사(智度寺)를 일으켰으며,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喜捨)하여 광택사(光宅寺)를 지었다.
보통(普通) 8년에 이르러서 다시 동태사(同泰寺)를 조성하였으니 전각(殿閣)과 누대(樓臺)가 화려하고 방사(房舍)와 낭무(廊廡)의 채색으로 꾸민 것이 구름의 아홉 층을 얕볼 만하였고 위(魏)나라의 영녕사(永寧寺)보다 화려하였다.
또한 궁 안에 지경전(至敬殿)과 경양대(景陽臺)를 세우고 일곱 묘실(廟室)을 일으키고서 다달이 다시 정찬(淨饌)을 베풀며 매양 종묘(宗廟)의 증상(蒸嘗)에 미쳐서는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측근을 시켜 은근히 교대할 생각을 가졌으며 비록 억조(億兆)가 은성하게 힘썼어도 책을 손에 거두지 아니하고 안팎으로 펴보며 밤에서 새벽까지 이르렀다.
『통사(通史)』와 『서원(書苑)』과 『경률이상(經律異相)』과 『삼교의류(三敎義類)』와 『오전문언(五典文言)』들 수천여 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옥시(獄市)에까지 은혜를 흘려서 자비와 용서를 많이 행하였으며, 그 죄가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도 얼굴빛을 고치며 오래오래 본 뒤에 붓을 내렸고, 간사함을 살피고 송사(訟事)를 들었을 적에 분명하기 신을 통한 듯하였으며 스스로 향연(享宴)이 아니면 음악을 허락하지 않았고 후궁들이 모실 적에도 다 비단을 입지 아니하고 내전(內殿)의 잠자리도 옷과 이불이 다 소복(素服)의 베와 이불이어서 풀자리와 풀신과 칡수건이었다.
천감(天鑒) 년 이후로는 입맛을 모두 끊어서 날마다 한 끼만 먹었으며 먹는 것은 채소에 그쳤다. 그리고 촉(蜀)에서 바치는 고구마의 싹도 향기롭고 맛있는 것이 고기와 같다고 의심하여서 다시 칙령을 내려 금하였으니 옛부터 제왕(帝王)으로서는 능히 따를 자가 없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임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