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장진론 하권
[관행(觀行)을 닦는 것]
유복(遊履)하는 것을 작용이라 이름한다. 유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작용하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행해(行解)가 없고 생기가 없는 것이 무분별혜의 뜻이다. 작용의 모습이 없는 것으로서 행을 삼기 때문이다. 즉, 작용하는 것이 없는 것을 행이라 한다. 이것은 곧 앞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얻은 결과와 같은 것을 생략하여 말한 것이다.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이와 같이 지혜로써 무분별을 행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 없이 행하니, 행이 곧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일체의 소연과 작의(作意)를 멀리 여의고 일체 법에서 모두 머무는 것이 없으니, 마치 허공과 같다.
일체의 변계소집과 분별을 버리어 담박하고 적연(寂然)하여 멸정(滅定)에 들어 모든 법성을 관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불가사의하고 요별할 수 없다.
무이(無二)ㆍ무장(無藏)ㆍ무상(無相)ㆍ무견(無見)으로서 표시할 수 없다.
무생ㆍ무멸하여 생기가 다하여 담박하고 적연하여 차별이 있지 않고 무상(無相)ㆍ무영(無影)하여 모든 티끌을 여의어 일체 각혜언어(覺慧言語)의 경계의 도를 초월한다.
이와 같이 관해도 보는 것이 없다. 보는 것 없이 본다. 보는 것이 곧 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묘한 견해에 포함되기 때문에 능히 바른 헤아릴 수 없는 복취(福聚)를 증장하여 능히 치우침이 없는 미묘한 낙과(樂果)에 감응하고 청정한 한 맛으로서 능히 다른 괴로움을 소멸하여 약수왕(藥樹王)과 같이 일체를 바르게 구원하는 요익(饒益)을 얻는다.
[8정도]
이와 같이 바르게 여래의 법신을 관하면 일제법의 유무(有無)의 모습을 보지 않기에 이름하여 정견(正見)이라 한다.
일체 변계소집과 허망분별을 그치므로 정사유(正思惟)라고 이름한다.
일체법을 증득하여 모든 희론을 떠나 일체 언어가 고요하게 다 그치므로 정어(正語)라고 한다.
일체법은 작용하는 속성이 없어 원인이 되는 몸ㆍ언어ㆍ생각의 세 가지 업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정업(正業)이라 한다.
일에 증감이 없으며 법성에 증감이 다 영원히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정명(正命)이라 한다.
일체법으로써 두 발기(發起)하는 것이 없고 조작하는 것이 있지 않는 용맹방편(勇猛方便)을 정정진(正精進)이라 이름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 궁극적으로 경성(境性)의 유무를 증득하지 않고 기억이 있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정념(正念)이라 한다.
일체종(一切種)에 대해 일체 법을 취하지 않고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정정(正定)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바로 관하여 능히 이와 같은 팔정도[八支聖道]를 닦는다. 이 뜻은 보살장(菩薩藏)의 곳곳에서 자세히 선설(宣說)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면 다만 능히 팔정도를 닦을 수 있다.
[6바라밀]
또한 육바라밀을 간략히 설한다. 이것은 원만하여 비록 다른 행을 하지 않아도 성불할 수 있다.
그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일체 종상(一切種相)을 버리고 또한 일체 번뇌를 버리는 것을 이름하며 보시바라밀다[施波羅蜜多]라고 한다.
일체 소연과 작의(作意)가 그치어 얻는 것이 없으면 이를 이름하여 지계바라밀다[戒波羅蜜多]라고 한다.
모든 소연에 대해 참아내면 이것을 이름하여 인욕바라밀다[忍波羅蜜多]라고 이름한다.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일체행을 여의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精進)바라밀다라고 한다.
일체 작의(作意)는 다 현행(現行)하지 않아 모두 작용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려(靜慮)바라밀다라 한다.
일체법에 대해 희론을 일으키지 않고 두 모습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般若)바라밀나라 한다.
이 뜻은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 등의 여리 곳에서 자세히 선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미묘한 머묾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문이 있다.
수많은 경전에서 세존께서 자세히 말씀하셨다.
“큰 뜻에는 이익이 있고 요익이 많으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여실하게 알아야 하며, 방일을 떠나 꾸준히 닦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