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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지지경 제3권
8) 역종성품(力種性品)
보살이 배워야 할 것[所學處]을 이미 설했으니 보살이 배우는 방법[學處]을 이제 설하겠다.
이러한 보살이 보살의 배울 것을 잘 배우고자 하면 일곱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다수신해(多修信解)요,
둘째는 구법(求法)이요,
셋째는 설법(說法)이요,
넷째는 법차법향(法次法向:법이 법을 이어 향해 나감)이요,
다섯째는 정교수(正敎授)요,
여섯째는 교계(敎誡)요,
일곱째는 섭방편신구의업(攝方便身口意業:방편으로 거두는 신구의의 업)이다.
어떤 것이 보살의 다수신해(多修信解)인가?
보살이 여덟 가지 알아야 할 곳에 대하여 깨끗한 믿음을 먼저 내고는 일심으로 결정되게 즐거이 바란 것을 성취하나니 이른바 첫째 삼보의 공덕으로서 불법승의 공덕이요,
둘째는 제불보살의 자재한 신력(神力)이니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셋째 진실된 진리[眞實之義]이니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넷째 갖가지 인(因)과, 다섯째 갖가지 과(果)이니 따르고 상응하여 뒤바뀌지 않고,
여섯째 득의(得意)와, 일곱째 득방편(得方便)이니, 감당해 참으면 얻음이 있고 방편을 얻으면 능히 의(義)를 얻는다.
여기서 의를 얻는다 함은 위없는 보리를 말하고,
방편을 얻는다 함은 모든 보살이 수학해야 할 길이니 이른바 신해(信解)이다.
여덟째 선설(善說)이니 이른바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수기(受記) 등 무량한 언교(言敎)를 미묘하게 잘 설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 여덟 가지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인연이 있어 이해하는 힘이 생기나니,
첫째는 해행(解行)을 많이 닦음이요, 둘째는 깊은 인내심으로 정진함이다.
보살의 구법(求法)에는 어떤 법을 구하는가[何法求], 어떻게 구하는가[云何求], 무슨 까닭에 구하는가[何故求]가 있다.
어떤 법을 구하는가?
보살장(菩薩藏)과 성문장(聲聞藏)과 외론(外論)과 세공업처지(世工業處智)이니 십이부경(十二部經)에서 방광부(方廣部)만이 보살장이고 나머지 십일부는 성문장이다.
외론이라 함은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나니, 인론(因論)과 성론(聲論)과 의방론(醫方論)이다.
세공업처지라 함은 갖가지 사업이니, 금사(金事)ㆍ철사(鐵事)ㆍ수사(水事) 등과 그 밖의 갖가지 명처(明處)에 속하는 것이다.
명처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명(內明)이요, 둘째는 인명(因明)이요, 셋째는 성명(聲明)이요, 넷째는 의방명(醫方明)이요, 다섯째는 공업명(工業明)이다.
이 다섯 가지 명처를 보살은 모두 구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론(內論:內明)이라 하니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올바른 인과의 법칙을 드러내어 보임이요,
둘째는 지은 업은 무너지지 않고 짓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다는 도리를 드러내어 보임이다.
인론(因論:因明)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능히 남의 주장을 꺾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가 자기의 주장을 펴는 것이다.
성론(聲論:聲明)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계(界)와 색(色)을 드러내어 보임이요
[계(界)와 색(色)은 성(聲)의 차별된 모습이니 평소에 말하기를 음(陰)과 계(界)는 형색의 근본이요, 성(聲)은 계가 된다 한 것과는 같지 않다. 계에는 갖가지 다른 성(聲)과 명(名)이 있어 색(色)을 표시하는데 이 두 가지 성이 모든 음성을 총괄한다. 음성론은 여기에서 더 널리 설명한다],
둘째는 선교방편의 말재주를 드러내어 보인다.
의방론(醫方論:醫方明)에도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병을 잘 아는 모습을 드러내어 보임이요,
둘째는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보임이요,
셋째는 이미 생긴 병을 제거하는 법을 드러내어 보임이요,
넷째는 이미 제거한 병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법을 드러내어 보임이다.
세공업처지(世工業處智)라 함은 세상의 갖가지 사업을 성취케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인가?
뒤바뀌지 않은 인(因)에 열 가지가 있으니
뒤바뀌지 않은 인은 모든 인(因)과 모든 번뇌와 모든 청정과 모든 무기(無)를 포섭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수설인(隨說因)이요, 둘째는 이유인(以有因)이요, 셋째는 종식인(種殖因)이요, 넷째는 섭인(攝因)이요, 다섯째는 생인(生因)이요, 여섯째는 장인(長因)이요, 일곱째는 자종인(自種因)이요, 여덟째는 공사인(共事因)이요, 아홉째는 상위인(相違因)이요, 열째는 불상위인(不相違因)이다.
저 모든 법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은 뒤에는 생각[想]이 있고 생각이 있은 뒤에는 말이 있나니, 이 모든 법에 대한 이름 생각ㆍ말을 합해서 수설인(隨說因)이라 한다.
사물이 있기 때문에 작용이 있는 것을 이유인(以有因)이라 하나니, 손이 있으므로 잡음[作]이 있고 발이 있으므로 다니고 몸이 있으므로 굽히거나 점이 있고 기갈(飢渴)이 있으므로 음식을 구하나니 이렇듯 무량무수한 일들을 이유인(以有因)이라 한다.
모든 종자를 심는 것을 종식인(種殖因)이라 하고, 물ㆍ흙ㆍ습기 등을 섭인(攝因)이라 하고 종자에서 싹이 나는 것을 생인(生因)이라 하고,
싹과 줄기가 이어지고 내지 성숙하는 것을 장인(長因)이라 하고, 갖가지 종자를 심어서 제각기 씨가 생기는 것을 자종인(自種因)이라 한다.
저 이유인ㆍ종식인ㆍ섭인ㆍ생인ㆍ장인ㆍ자종인 등 이 여섯 가지 인을 모두 묶어서 공사인(共事因)이라 하고
생장에 장애되는 것을 상위인이라 하고
장애되지 않는 것을 불상위인이라 한다.
저 상위인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상위(語相違)이니 사문ㆍ바라문들이 설한 경론이 앞뒤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요,
둘째는 소응상위(所應相違)이니 온갖 주장을 펼쳤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생상위(生相違)이니, 살아가는 연을 갖추지 못하여 생장에 장애를 받는 것이요,
첫째는 처상위(處相違)이니 밝음과 어두움,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이요,
다섯째는 원상위(怨相違)이니 독사와 쥐, 이리와 고양이, 고양이와 쥐의 관계처럼 벌레나 짐승이 서로 원수가 되어 미워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대치상위(對治相違)이니, 부정관(不淨觀)을 닦아 탐욕을 대치하고 자심(慈心)으로 성냄을 쉬고 비심(悲心)으로 해치려는 생각을 그치고 무루도품(無漏道品)으로 영원히 번뇌를 끊나니, 여기서는 생(生)과 상위(相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인을 설했는데 이 모두는 두 가지 인에 속한다.
첫째는 생인(生因)이요, 둘째는 방편인(方便因)이니,
모든 종자를 심어서 싹이 나는 것은 생인이요, 나머지 모든 인은 방편인이라 한다.
또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이다.
생인은 인연이요, 방편인은 증상연이요, 차제연과 연연은 심심수법(心心數法:心王과 心所)이니 전생의 심심수법이 길을 열고 거두어 받아들이고 그러한 반연으로 생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연(緣)은 섭인(攝因)에 속한다.
어떻게 이 십인(十因)으로 온갖 세간의 일을 내며, 어떻게 온갖 번뇌를 내며, 어떻게 온갖 청정함을 내는가?
갖가지 곡식들이 세간의 살림살이가 되는 이름[名]ㆍ생각[想]ㆍ말[言說], 즉 기장ㆍ피ㆍ벼ㆍ강냉이ㆍ참깨ㆍ콩ㆍ보리 등을 수설인(隨說因)이라 하나니, 예컨대 보리를 가지고 온다ㆍ가지고 간다ㆍ갖는다ㆍ준다 등 이러한 갖가지 말들과 그 밖의 모두가 이에 속한다.
주리고 목이 말라서 몸이 수척하기 때문에 덩어리 음식[搏食)을 찾나니, 이것은 이유인(以有因)이라 하고,
갖가지 종자를 심어 각각 제 박이 생기면 그 처음 심은 종자를 종식인(種植因)[처음에 종자를 심어 나중에 박과 줄기와 내지 성숙하기에 이르기까지를 종식인(種植因)이라 하고,
처음에 종자에서 싹을 내는 것을 생인(生因)이라 한다]이라 한다.
물과 흙을 윤택케 하여 싹이 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섭인(攝因)이요,
그 종자에서 꼭이 나는 것은 생인(生因)이요,
박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서로 상속하여 성숙하기에 이르면 이를 장인(長因)이라 하고
보리 종자에서는 보리싹만 생기고 다른 것은 나지 않고 다른 경우도 그러한 것이 자종인(自種因)이다.
저 모든 이유인에서 자종인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공사인(共事因)이라 하나니 모두가 화합해서 생기기 때문에 공사인이라 하고,
서리ㆍ우박 등의 재해가 일어나 일을 그르치면 상위인(相違因)이라 하고,
그러한 것들이 맞추어지지 않고 그르치지 않으면 불상위인(不相違因)이라 한다.
그밖의 온갖 세간사로 모두가 이들 십인(十因)에서 생긴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온갖 연기(緣起)의 이름ㆍ생각ㆍ말씀, 즉 무명ㆍ행ㆍ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생ㆍ노ㆍ병ㆍ사ㆍ우ㆍ비 고뇌는 번뇌의 수설인[煩惱隨說因]이라 하고 무명은 행의 연이 되고 내지 생은 노ㆍ사 등의 연이 되는 언어의 경계에 생각을 모아 맛들이고 집착하여 모두 유지(有支)가 생기는 것은 번뇌의 이유인[煩惱以有因]이라 한다.
무명 등의 법이 법의 종자로 나타나서 다음 생의 생ㆍ노ㆍ병ㆍ사를 내는 것을 종식인(種殖因)이라 한다.
선우(善友)를 가까이 하여 바른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익혀 무명 등이 생기면 이를 섭인(攝因)이라 하고,
각각의 종자에서 무명 등이 생기면 이를 생인(生因)이라 하고,
무명으로부터 내생의 몸[後有]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구하여 다음 생의 생ㆍ노ㆍ병ㆍ사에 이르면 이를 장인(長因)이라 하고,
갖가지 종자를 심되 모두가 무명으로부터 내생의 몸에 이르러 지옥ㆍ아귀ㆍ축생이나 혹은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나면 이를 번뇌자종인(煩惱自種因)이라 하고,
이유인(以有因)으로부터 자종인(自種因)에 이르기까지는 공사인(共事因)이라 하고,
어떤 종성(種性)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좋은 법을 설하시는 기회를 만나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좋은 법을 듣고 바른 기억으로 생각하여 법차법향(法次法向)으로 두 품을 청정케 하면 이를 번뇌상위인(煩惱相違因)이라 하고
위와 같은 인을 갖추지 못한 이는 불상위인(不相違因)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일러 십인(十因)이 온갖 번뇌를 낳는다 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모든 정법(淨法)과 멸진(滅盡)과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의 이름ㆍ생각ㆍ말을 정법수설인(淨法隨說因)이라 하나니,
염처(念處)와 정근(正勤)과 팔성도에 이르기까지의 무명의 멸함과 노ㆍ병ㆍ사에 이르기까지의 멸함의 이름ㆍ생각ㆍ말을 정법수설인(淨法隨說因)이라 한다.
무명 등이 있기 때문에 맑은 법 구하기를 좋아하고 맑은 법을 받아들이고 맑은 법이 생길 수 있으면 이를 이유인(以有因)이라 하고,
종성(種性)이 구족한 사람으로서 유여나 무여열반을 향하여 가장 먼저 행하는 이를 청정종식인(淸淨種殖因)이라 하고,
저 종성에 속하는 무루도품(無漏道品)의 종자는 모든 도품법(道品法)에 있어서 생인(生因)이라 하고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착한 법을 받아들이고, 바른 생각으로 닦아 모든 감관이 성숙해지면 이를 섭인(攝因)이라 하고,
저 종자가 도품법을 내어 무여열반에 향하면 이를 장인(長因)이라 한다.
성문종성은 성문승으로 반열반하고 연각종성은 연각승으로 반열반하고 대승종성은 무상대승으로 반열반하니, 이를 자종인(自種因)이라 하고,
이유인으로부터 자종인까지를 공사인(共事因)이라 하고,
종성을 갖추지 못했거나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거나 온갖 어려운 곳에 태어나거나, 선지식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착한 법을 듣지 못하거나, 바르게 생각하지 않거나 삿된 도를 익혀서 행하면 이를 정법상위인(淨法相違因)이라 하고
이 상위인(相違因)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상위인(不相違因)이라 한다.
모든 번뇌상위인(煩惱相違因)은 정법인(淨法因)이요,
정법상위인(淨法相違因)은 번뇌인(煩惱因)이다.
이것이 번뇌의 십인이며 청정의 십인이니 과거와 미래의 번뇌와 청정도 모두 이와 같아서 견줄 이도 없고 높을 이도 없다.
어떤 것이 과(果)인가?
간략히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과(報果)요, 둘째는 의과(依果)요, 셋째는 해탈과(解脫果)요, 넷째는 사부과(士夫果)요, 다섯째는 증상과(增上果)이다.
착하지 못한 법으로 악취의 과보를 받고 유루의 착한 법으로 선취의 과보를 받으면 이를 보과(報果)라 하며
착하지 못한 법을 익히고 착하지 못한 법에 머무르기를 좋아하여 착하지 못한 법을 늘어나게 하거나, 착한 법을 익히고 착한 법에 머무르기를 좋아하여 착한 법이 늘어나서 앞의 업과 비슷한 뒤의 과가 생기면 이를 의과(依果)라 한다.
팔정도로 모든 번뇌를 멸하면 이를 해탈과(解脫果)라 하겠지만
만일 세속에서 모든 번뇌를 멸하면 그는 완벽하게 범부의 경지를 여의지 못하나니 해탈과(解脫果)가 아니다.
현재의 법에서 세간의 갖가지 공교처(工巧處)의 업인 사부(士夫)의 일, 이른바 농사짓기ㆍ장사하기ㆍ벼슬살이ㆍ업무처리ㆍ글씨ㆍ그림ㆍ셈하기ㆍ점술 등에 의하여 제 각각의 과보가 생기면 이를 사부과(士夫果)라 한다.
안식(眼識)은 안근(眼根)의 증상과(增上果)요,
나아가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의 증상과요,
생리(生理)가 무너지지 않는 것은 명근(命根)의 증상과요,
모든 이십이근(根)이 각기 증상이 되어서 제각기 과보가 생기는 것은 모두가 증상과이니
이 이십이근의 증상(增上)은 섭사처(攝事處)에서 말했다.
이와 같이 보살은 부처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바른 인과를 안 뒤에 처비처지력(處非處知力)의 종성으로 하여금 차례차례 닦아 익혀 청정함이 증장케 하되 짓지 않거나 다르게 지어서는 성숙함이 없고 스스로 지은 업은 겁을 지나도 잃음이 없고 지은 것은 잃지 않고 짓지 않은 것은 받지 않게 한다.
부처님께서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 이와 같음을 보살이 여실히 알고는 자기의 업인 지력종성(智力種性)으로 차례차례 닦아 익혀 청정함이 증장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법 듣기를 구하는 것인가?
이 보살이 정성스럽고 공경스럽게 법을 잘 말하는 이와 법을 잘 이야기하는 이를 구하나니, 이러한 종류를 간략히 말하여 선설법주(善說法住) 근공경주(勤恭敬住)라 한다.
보살은 한 마디의 착한 법을 듣기 위해 험한 길, 이글거리는 땅덩이를 지나더라도 오히려 기뻐하면서 그 사이를 지나거늘 하물며 많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겠는가?
한 구절의 법을 듣기 위해서도 사랑하는 몸을 아끼지 않거늘 하물며 재산[資生]이겠는가?
한 번 설법을 들으면 좋아하고 공경하여 전에 좋아하고 공경하던 것보다 백ㆍ천ㆍ만배 내지 산수 비유로 견줄 수 없으리니, 이른바 좋은 설법을 들으면 마음에 싫증을 내지 않고 맑은 믿음을 더하여 그 몸이 부드럽고 마음이 곧고 소견이 곧고 공덕을 깊이 즐긴다.
설법하는 곳에 이르되 머뭇거리는 생각이 없고 공경하여 아만을 제거하며 바른 법을 구할 뿐 명리를 구하지 않으며, 자기와 남을 위하여 모든 선근을 닦을지언정 이양을 위하지 않고, 설법장에 가서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법을 들으며 어지럽지 않은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 함은 공고번뇌(貢高煩惱)와 경상번뇌(輕想煩惱)와 하상번뇌(下想煩惱)를 여의는 것이다.
일곱 가지 행으로 공고번뇌를 여의나니,
첫째는 때에 맞추어 들음[時聽]이요, 둘째는 즐기는 마음으로 받음[欲受]이요, 셋째는 힘차게 들음[頓聽]이요, 넷째는 공경히 들음[敬聽]이요, 다섯째는 장난치 않음[不戱]이요, 여섯째는 수순함이요, 일곱째는 허물을 구하지 않음이니
이들 일곱 가지 행으로 공고번뇌를 여읜다.
네 가지 행이 있어 경상번뇌를 여의나니,
첫째는 법을 공경함이요, 둘째는 설법하는 사람을 공경함이요, 셋째는 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음이요, 넷째는 설법하는 사람을 가벼이 여기지 않음이니,
이러한 네 가지 행으로 경상번뇌를 여읜다.
한 가지 행이 있어 하상번뇌를 여의나니,
이른바 바른 법을 듣되 법문 듣는 일을 스스로가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니,
이 한 가지 행으로 하상번뇌를 여읜다.
이러한 허물을 여의고서 정법을 듣는 것을 일러 보살이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고 한다.
어떤 것을 보살이 어지럽지 않은 마음으로 법을 듣는 것이라 하는가?
네 가지 행이 있으니,
첫째는 일심이요, 둘째는 곁에서 귀 기울여 들음[側聽]이요 셋째는 고요한 마음[定意]이요, 넷째는 한결같이 바른 법(正法) 듣기를 즐겨 한다.
이를 보살이 듣기를 구하는 법이라고 한다.
보살은 무슨 까닭에 법 듣기를 구하는가?
보살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구함은 법차법향(法次法向)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위한 때문이며, 남에게 널리 말해 주기 위한 때문이다.
보살이 인론(因論)을 구하는 것은 저들의 논의 허물을 알기 위한 까닭이며, 딴 주장을 항복시키기 위한 까닭이며, 불법을 믿지 않는 자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이미 믿음을 낸 이로 하여금 더욱 늘어나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보살이 성론(聲論)을 구하는 까닭은 중생들에게 널리 정법을 연설하여 사랑하고 즐기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말씀의 맛을 맑고 장엄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한 이치에 대하여 갖가지 말로 장엄하기 위한 까닭이다.
보살이 의방론(醫方論)을 구하는 까닭은 중생들의 갖가지 병을 덜어주기 위한 까닭이며 대중을 거두어 주기 위한 까닭이다.
보살이 세간의 공업처지(工業處智)를 구하는 까닭은 적은 방편으로 큰 재물을 얻어서 무량한 중생들은 이롭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다섯 가지의 명처(明處)를 구하는 까닭은 위없는 보리와 큰 지혜와 뭇 도구를 끝까지 원만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나 차례로 모든 법을 배우지 않고도, 장애 없는 지혜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일러 보살의 추구하는 것이라 하고 구하는 바와 같게 구함이라고 하고 구하는 목적이라 한다.
보살이 남에게 설법한다 함에는
무엇을 설하는가[何所說], 어떻게 설하는가[云何說], 무슨 까닭에 설하는가[何故說]가 있는데 저 소구법(所求法)과 같이 그렇게 법을 설하고 소구의(所求義)와 같이 그렇게 뜻을 설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인연 때문에 설하나니 첫째는 수순설(隨順說)이요, 둘째는 청정설(淸淨說)이다.
수순설이라 함은
여법한 위의에 머물러서 설하는 것이요, 여법하지 않게 설해서는 안 되니 병 없이 높은 자리에 앉은 이에게 설하지 말며, 머리를 덮은 자, 앞에 가는 자 등에게는 모두 설하지 말지니 수다라에 널리 설한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불보살들은 스스로가 법을 공경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깊은 공경을 일으켜 들은 뒤에 받들어 지니게 하되 경솔하거나 교만[輕慢]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설(一切說)과 일체 무간설(無間說)로써 법을 아끼지 않으며 사권(師惓:스승으로서의 태만)이 되지 않게 한다. 구절의 맛[句味]의 차례에 따라 설하고 차례에 따라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라 분별하고 설명한다.
이치의 이익됨과 법의 이익됨과 갖가지 이치의 이익됨으로써 보여 주어야 할 것은 보여주고 전해 주어야 할 것은 전해 주고 밝혀야 할 것은 밝히고 기뻐해야 할 것은 기뻐한다.
현지(現智)와 비지(非智)로써 스승에게 잘 듣고, 들은 대로 남에게 설해 줄지니 깊이 생각하지 않고 들음이 구족해져서 좋은 길[善趣]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어지럽게 말하지 않고 착하게 말할 것이며 깊거나 은밀하게 말하지 않고 사성제에 응해서 대중의 정도에 맞추어 널리 설해 주어야 한다.
이 열다섯 가지 보살은 두루 중생들을 위하고 수순하여 잘 말해서 일체를 이롭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보살이 자기에게 이롭지 않은 이에게는 인자한 마음에 머물러서 설해주고,
악취(惡趣)에 행하는 이에게는 편안한 마음에 머물러서 설해주고
괴롭거나 즐거운 중생들로서 방일하고 빈곤한 이에게는 안락케 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머물러서 설해주되
질투에 얽혀 스스로를 찬탄하고 남을 헐뜯지 말며 탐내는 마음으로 명리를 구하려 설법치 않는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를 보살의 청정한 설법이라 하나니,
앞뒤의 것을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때에 맞춤[時]요, 둘째 법을 중히 여김[頓]이요, 셋째는 차례요, 넷째는 상속이요, 다섯째는 인내하여 감당해 냄이요, 여섯째는 환희요, 일곱째는 의욕[欲]이요, 여덟째는 기쁨이요, 아홉째는 권함이요, 열째는 훼손하지 않음이요, 열한째는 이치에 상응함[應]이요, 열두째는 문자의 기록이요, 열셋째는 잡되지 않음이요, 열넷째는 법다움이요, 열다섯째는 대중을 따름[隨衆]이요, 열여섯째는 자심(慈心)이요, 열일곱째는 안심(安心)이요, 열여덟째는 애민심(哀愍心)이요, 열아홉째는 자신을 기리고 남을 헐뜯지 않음이요[不自譽毁人], 스무째는 명리에 기대지 않음이니,
이것이 보살이 남에게 설법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법차법향(法次法向)인가?
간략히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구하는 바와 같음[如所求]과 들은 법과 같음[如所攝法]과 신구의를 법에 따라 움직임[身口意隨轉]과 정사(正思)와 정수(正修)이다.
어떤 법은 세존께서 신구의로 짓지 말라고 제어하시고 또 어떤 법은 신구의로 지으라고 허락하셨거든 그는 신구의의 업으로 분명하게 여의고 분명하게 닦아 신구의가 법에 따라 움직이면
이를 법차법향(法次法向)이라 한다.
위에서 말한 바른 생각이라 함은
보살이 고요한 곳에 혼자 앉아서 들은 법과 같이 생각하고 헤아리고 관찰하고는 먼저 이와 같이 부사의한 곳에서 법을 생각해 따지는 허물을 여의고 근사(勤思)ㆍ상사(常思)ㆍ돈사(頓思)의 방편을 쉬지 않는 것이다.
또 보살이 바른 생각을 구족하고 구족하게 행하고는 수순하여 들어가고 버릴 것이 있음[有所捨]을 알고, 뜻에 의할지언정 맛에 의하지 않으며, 숨은 말씀[闇說]과 드러난 말씀[明說]을 여실히 안다.
먼저 들어가야 할 곳을 생각한다 함은 들어가는 이와 들어간 이가 자주자주 생각하는 것이요,
보살이 부사의처(不思義處)를 여의었다 함은 어리석은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따르지 않고 근사ㆍ상사ㆍ돈사하는 것이요,
구족이라 함은 정의를 알지 못하는 이는 알게 하고 이미 정의를 안 이는 잊지도 않고 잃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또 구족이라 함은 들어가거나 행함에 남의 힘에 의하지 않고 능히 구족하게 관찰하는 것이요,
버릴 것이 있다 함은 모든 법이 그의 경계가 아닌 줄 알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는 부처님이나 아실 바요 나의 경계가 아니라’하여 이렇듯이 비방치 않으므로 스스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보살이 뜻에 의할지언정 맛에 의하지 않는다 함은 여래의 은밀한 말씀을 잘 안다는 뜻이요,
숨은 말씀과 드러난 말씀을 잘 안다 함은 진실한 이치에 대하여 동요함이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바른 생각에 들어간 보살은 먼저는 법인(法忍)을 얻지 못했으나 이제 얻고, 이미 인(忍)을 얻은 이는 견고히 수순하여 수혜(修慧)에 들어가나니 이러한 여덟 가지는 보살의 바른 생각에 속한다.
법차법향(法次法向)을 닦는 데는 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止)요, 둘째는 관(觀)이요, 셋째는 지관을 수습함[修習止觀]이요, 넷째는 지관을 좋아함[樂止觀]이다.
지(止)라 함은 보살이 여덟 가지 정사(正思)를 바르고 진실되게 하여 말을 여읜 설법의 현실과 뜻에 따라 마음을 경계에 둘 때 온갖 허위(虛僞)와 경조(輕躁)와 억상(憶想)을 멀리 여의고 경계에서 해탈하여 마음을 안의 삼매상[三昧相]에 두고‥‥‥(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즉 일심이 되나니 이를 지라 한다.
관(觀)이라 함은 지(止)로써 훈수(勳修)한 기억과 생각으로 법상(法相)을 바르게 생각하고 기억하거나 선택하거나 또는 밝은 지혜이니 이를 관이라 한다.
수습지관(修習止觀)이라 함은 지관을 행하는 이의 항상 닦는 방편이나 활짝 닦는[頓修] 방편이니, 이를 수습지관이라 한다.
요수지관(樂修止觀)이라 함은 갖가지 지관의 법상에 마음을 두어 요동치 않으며 방편을 힘쓰지 않고도 능히 스스로 관찰하며 있는 곳에서마다 마음을 거두어 산란치 않는 것이니 이것을 요수지관이라 한다.
저 보살이 이러이러하게 수습지관하면 이러이러하게 요수지관하고,
이러하게 요수지관하면 이러이러하게 지관이 청정해지고,
이러이러하게 지관이 청정해지면 이러이러하게 몸과 마음과 호흡이 점점 늘어나고,
이러이러하게 관이 청정해지면 이러이러하게 지견이 증장하고,
이러이러하게 익혀 지혜를 닦는 이는 몸과 마음의 허물을 여의어서 알아야 할 모든 일에 지견(知見)이 청정해지나니,
지혜 닦는 온갖 업이 모두 이러한 네 가지 수혜(修慧)에서 생긴다.
어떤 것이 교수(敎授)하는 것인가?
간략히 말하면 여덟 가지 교수법이 있으니 이 삼마지에 의해 수행자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다른 보살이 가르칠 만한 이가 없으면 몸소 가르치되 모든 부처님들의 경우[法]와 같이 먼저 네 가지 구하는 일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 마음으로 구하는 자는 마음으로 구하는 줄을 알아야 하고,
둘째 뿌리로 구하는 자는 뿌리로 구하는 줄 알고,
셋째 희망으로 구하는 자는 희망으로 구하는 줄 알고,
넷째 번뇌[使]로 구하는 자는 번뇌로 구하는 줄 알고,
다섯째 그 알맞은 갖가지 제도하는 문[度門]에 따라 제도하며 해탈시키는 것이니 이른바 부정관(不淨觀)ㆍ자심관(慈心觀)ㆍ인연관(因緣觀)ㆍ계분별관(界分別觀)ㆍ안나반나(安那般那)의 생각이니 이들을 제도하는 문에 따라 제도하여 해탈시키는 것이라 한다.
여섯째 항상하다는 쪽에 집착하는 자를 대치하기 위하여 중도를 설해 주는 것이요,
일곱째 아주 없다는 쪽에 집착하는 자를 대치하기 위하여 중도를 설해 주는 것이요,
여덟째 짓지 않고 지었다는 증상만(增上慢)과 얻지 못하고 얻었다거나 접촉하지 못하고 접촉했다거나 증득했다는 증상만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교수법은 간략히 말하면 세 곳에 속하나니,
세 곳이라 함은
아직 마음이 머무르지 못한 이에게는 그로 하여금 반연 가운데 생각을 매어 두게 하는 것이요,
이미 마음이 머무른 이에게는 스스로의 정도에 맞는 바른 방편도를 설해 주고,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한 이에게는 버티고 중도에 머무르게 한다.
저 마음과 뿌리와 희망과 번뇌를 알고는 정도에 따라 해탈시키되 마음을 반연 가운데 머무르게 하고
단(斷)ㆍ상(常)의 대치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법을 설해 주어 마음을 머무른 자로 하여금 자기의 정도에 맞는 정방편도를 성취케 하고,
짓지 않고도 지었다 하는 증상만과 내지 증득하지 않고 증득했다고 하는 증상만 때문에 구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는 버리고 중도에 머무르게 한다.
이렇듯이 세 가지 일이 여덟 가지 교수법을 포섭하나니, 이들 보살들은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남을 가르치면 여덟 가지 힘의 종성(種性)이 청정하게 증장하나니
이른바 선정 해탈ㆍ삼매ㆍ정수의 지력(智力)과 모든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을 아는 지력과 갖가지 견해를 갖추는 지력과 갖가지 계(界)를 아는 지력과 일체지처도지력(一切至處道智力)과 숙명지력(宿命智力)과 생사지력(生死智力)과 누진지력(漏盡智力)이다.
어떤 것이 교계(敎誡)인가? 간략히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죄가 있는 행자는 제재하고
죄가 없는 행자는 허락하고
제재한 것과 허락해 준 것에 범함이 있는 자는 법답게 드러내어 제시해 주고,
자주자주 어기는 자는 굴복시켜서 기억하게 해 주어 흐리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아 순수하고 밝고 바르게 향하게 해 주고,
제재한 것과 허락해 준 진실한 공덕에 대하여 사랑하는 생각으로 칭찬하는 이는 더욱 기뻐하게 하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다섯 가지 즉 제재함ㆍ허락함ㆍ드러내어 줌ㆍ굴복시킴 기뻐함 등으로 가르치고 경계해 주는 교계(敎誡)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방편으로 거두는 신구의의 업인가?
간략히 보살의 네 가지 거두는 일[四攝事]이 곧 방편임을 말하겠다.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네 가지 거두는 일이 곧 방편이라 하셨다.
간략히 네 가지 방편을 설하여 중생을 조복시키고 중생을 거두어 준다면 견줄 이도 없고 높을 이도 없나니,
첫째는 수섭방편(隨攝方便)이요, 둘째는 섭방편(攝方便)이요, 셋째는 도방편(度方便)이요, 넷째는 수순방편(隨順方便)이다.
보살이 갖가지 재물로 보시하여 인연 따라 중생을 거두어 주기 때문에 믿고 따라 받들어 행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를 보시로 인연 따라 거두어 주는 방편[布施隨攝方便]이라 한다.
다음은 애어(愛語)를 행하여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여의어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두루 거두어 바른 법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을 애어로써 거두는 방편[愛語攝方便]이라 한다.
구족하게 거두어 드러내어 보인 뒤에 그 중생들로 하여금 착하지 못한 곳을 버리고 착한 곳을 깨우쳐 주어 거기에 길들여져서 즐겨 머물게 하면 이를 이로운 일을 하여 건네주는 방편[行利度方便]이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이 동사(同事)로 수순하여 중생을 건져 주면 조복되어 공경히 따르기 때문에 그대는 원래 신심도 계행도 보시도 다문도 없는데 어떻게 남을 가르치고 죄를 드러내 주어 기억케 하였는가?”라고 하지 않나니 이것이 보살의 동사의 이익에 수순하여 거두는 방편[同利隨順攝方便]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거두는 방편[四攝方便]의 총(總)과 별(別)을 모두 보살의 섭방편(攝方便)이라 하나니 신구의 등으로 중생을 거두어 조복시키고 성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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