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산문 2 풍경 / 가스통 바쉴라르
평야는 멀어져 간다. 그것은 겹겹이 쌓인 평행선 아래로 지평선을 데려가 해체시켜 버리는 멀어짐의 운동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끝난다. 한 줄의 선, 하나의 그늘, 그리고 무(無)다. 저 멀리 더 이상 손질할 대지도 없다. 모든 것이 여기서 스러져 버린다. 그러나 이쪽에는 경작된 들판이 바둑판 무늬, 지주들에 의해 개간된 밭이랑, 그리고 구획, 경계, 밭두렁이라는 모든 토지의 탈취를 거부하는 경작지가 있다. 판화가는 경작자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울타리 안의 땅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는 도구의 합치를 즐긴다. 쟁기는 흙덩어리에 대한 끌이 아니겠는가. 들판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유화 작가라면 수확물의 색채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힘찬 잠두(蠶豆)의 붉은 장미빛의 이삭, 보리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한 유채화의 노란 색 따위로 전경(前景)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색채는 기분을 전환시키고 장식하며, 꽃을 피운다. 색채는 향기롭다. 하지만 색채 때문에 우리는 땅을 떠나 버린다. 색채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 색채는 의욕이라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
-가스통 바쉴라르,『풍경: 알베르 플로꽁의 판화에 대한 한 철학자의 노트』(이가림 옮김, 열화당, 1983)
몽상의 철학자 가스통 바쉴라르의『꿈꿀 권리』는 모네와 샤갈, 칠리다와 꼬르티, 마르쿠시스와 알베르 플로꽁 등에 관한 예술론이다. 이 책에는 바쉴라르의 특별한 감각과 사유, 시선과 문체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으며, 서두를 장식하는 모네론('睡蓮, 또는 여름 새벽의 놀라움')에서 이른 아침에 핀 수련을 보고 저자는 하나의 '산알'을 낳는다."밤새 수련은 어떤 알을 낳았는가?"가 그것.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알베르 플로꽁(Albert Flocon, 1909~1994)은 독일 출생의 프랑스 판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서 인간의 육체와 대지, 풍경을 우주적 명상과 기하학적 시각으로 해석한 판화작품으로 유명하다. 인용문은 그의 판화에 명상적 해설을 붙인 바쉴라르의 저서『풍경: 알베르 플로꽁의 판화에 대한 한 철학자의 노트』의 한 대목이다.
알베르 플로꽁의 (동)판화 세계는 일종의 세미화細微畵에 속한다. 이 세미화는“형이상학적 신선함을 얻기 위한 훈련”(바쉴라르,『공간의 시학』)으로서 의미가 있다. 세밀한 선묘線描가 특징인 라인 인그레이빙(line engraving: 조각 동판화)의 경우 뷰린(burin: 금속 조각용 끌)을 사용한다. 끌의 예술인 판화는 기본적으로 선(線,禪)의 미학이다. 선과 선의 연장인 판화 작업에서 끌은 작가의 눈과 정신으로서 매우 정교한 시선과 집중, 몰입을 요한다. 선線으로 선禪에 이르는 길이 판화 예술의 과정이라면, 바쉴라르의 판화론에서 맨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평야의 풍경이다.
풍경은 어떤 소멸이나 해체가 아니라멀어짐의 운동, 원초적인 운동 그 자체를 나타낸다. 운동은 근원적인 현실이며, 풍경은 열림을 지향한다. 풍경에는 살아야 할 지역을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힘이 있다. 그림의 생동감은 바로 이 살아있는 선, 역동적인 생명감과 용솟음치는 의지의 비약에 있다. 존재는 자신의 공허로부터 돌출-분출하는 것으로 찢음의 예술이다. 그림에서 넓게 펼쳐져 있는 평야를 보게 되면, 한쪽에 여성의 신체 일부가 클로우즈업 되어 있다. 대지모신이다. 모성과 생식력, 창조성, 또는 대지의 풍요를 함의하는 여신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노동과 사랑의 합일’이다. 평야에 드리워진 하나의 그늘에 생명의 땅이, 경작지가 있다. 빛과 그늘, 음양의 이치는 자연과 생명의 비밀로서, 무한한 것과 미세한 것의 기묘한 합체合體를 이룬다. 평야의 끝은 희다. 그것은 무無의 세계이자 홀황의 순간이다. 이 판화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인간과 공간, 선과 면, 빛과 그늘, 흑백의 대비에 있다. 플로꽁의 묘선描線이 힘의 운하를 말한다면, 바쉴라르의 묘사는 운명의 형식이다.
한편, 바쉴라르의「알베르 플로꽁의 끌에 관한 시론試論」("평면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이제 예리한 날刃, 일하는 사람의 날카로운 눈 밑에서 매일 아침 갈아서 시퍼렇게 된 날, 비스듬한 끌이 여기 있다.")은 끌의 시학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바쉴라르가 생각하는 판화가는 단순한 예술가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예언자를 말한다. 거기엔 순간의 에너지와 실재의 만남이 손끝에서 묻어 나온다. 끌과 눈의 접촉은 질량의 진실을 포함하며, 촉觸의 상상력은 첨단의 의식과 의지의 표상에 닿아 있다. 마침내 평야는 평화의 사상으로 변모하고, 이런 평화의 이미지와 현상에 대해 그는 '반죽의 코기토'로 명명한다. 반죽이 가장 훌륭한 실체이며 행복으로 가는 열쇠라면, 소리도 반죽처럼 코기토가 있다."나는 외친다. 나는 힘이다." 이 힘과 평화의 선언은 플로꽁에게도 발견된다. 바쉴라르가 보기에 판화가는 기하학적 운명을 지닌다. 판화 속에서 개개의 형태는 전체에 통합되며, 판화에 새겨진 형태들은 모두 기하학적 의지의 에너지가 있다. 알베르 플로꽁은 몽환 상태에 현실성을 부여한 기하학적, 투시화법적 판화가로서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많은 영감과 계시를 준다. (김상환)
첫댓글 풍경은 어떤 소멸이나 해체가 아니라 ㅡ멀어짐의 운동, 원초적인 운동 그 자체ㅡ를 나타낸다. 운동은 근원적인 현실이며, 풍경은 열림을 지향한다. 풍경에는 살아야 할 지역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힘이 있다. ㅡ 시와 그림이 하나의 원리이군요. 바쉴라르는 철학을 시로 승화시킨 분이죠. ㅡ알베르 플로꽁은 몽환 상태에 현실성을 부여한 기하학적, 투시화법적 판화가로서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많은 영감과 계시를 준다. (김상환) ㅡ참으로 시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