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Philippe, Duc d'Orleans(1793~1830)이라고도 함. 별칭은 시민왕.
1773. 10. 6 파리~1850. 8. 26 잉글랜드 서리 클레어몬트.
상층 부르주아지의 지지에 통치기반을 두었으나 신흥 산업계층의 충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는 샤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 조제프 드 부르봉 오를레앙과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팡티에브르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발루아 공작 작위를 받았지만 1785년 아버지가 오를레앙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샤르트르 공작이 되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귀족들 편에 섰고 1790년에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1792년 4월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북부 군단에 들어가 9월 중장으로 임관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상관인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사령관과 함께 오스트리아 군대로 도망갔다. 그는 스위스에 도피처를 마련하고 라이헤나우대학에서 가명을 쓰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793년 11월 아버지가 자코뱅 정부의 손에 처형당하자 그뒤를 이어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고 그뒤 2년 남짓 미국에서 살다가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800년초 영국에 도착한 그는 나폴레옹 반대세력을 끌어모으기란 전혀 가망없는 일임을 깨닫고 망명중이던 이름뿐인 프랑스 왕 루이 18세가 이끄는 직계 부르봉 왕가와 오를레앙 가문을 화해시켰다.
그는 잉글랜드의 트위크넘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1809년에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가서 나폴리 왕가와 손을 잡았다.
11월 25일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의 딸인 마리 아멜리에와 결혼했다. 루이 18세의 제1차 왕정복고(1814)가 이루어진 뒤 프랑스로 돌아와 망명 뒤에도 팔리지 않은 오를레앙 가문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았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잡자 영국으로 달아났다. 루이 18세의 제2차 왕정복고(1815. 7) 뒤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변함없는 지지자가 되었다.
1830년 샤를 10세가 억압적인 법령을 시행하려고 하자 곧 반란(7. 27~30)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집권을 노려온 루이 필리프에게 때가 온 것이다. 샤를 10세가 퇴위하기 이틀 전인 7월 31일의 법령에 따라 프랑스 의회는 그를 프랑스 왕국의 부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어서 8월 9일 그는 왕위를 수락했다.
루이 필리프를 권좌에 앉힌 7월혁명은 귀족 계급에 대한 상층 부르주아지의 승리였다.
이제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7세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왕 루이 필리프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다. 그는 극우 왕당파(정통파)와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보나파르트파를 포함)들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지키면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암살기도와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억압적인 수단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1830년대말에 이르러 그의 반대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거나 지하로 숨었다.
한편, 그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강화해 나갔다. 영국과 힘을 합쳐 네덜란드에게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국내에서는 하층 부르주아지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아 이미 그들을 격분시킨 가운데 1846년 농·공업의 침체가 닥치자 대중의 불만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프롤레타리아와 중간계급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퇴위해 잉글랜드의 서리로 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인물설명 엠파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