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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7章 旺 澄 面
연천군 2읍, 8개 면의 하나이다,
이 면은 본래 마전군의 지역으로, 마전군 내의 북쪽이 되므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동막(東幕)·중동(中洞)·애동(艾洞)·징파(澄波)·노동(蘆洞)·무등(無等)의 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기존의 6개 리를 동막·중동·애동·노동·징파·무등·외곡(外谷)·유림장(楡林場) 등 8개 리로 개편하였고,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강동면(江東面) 지역의 고잔(高棧)·기곡(基谷)·산점(山店) 등 3개 리를 기곡(基谷)·기석(基石)·산점(山店)· 고왕(高旺)·고잔상(高棧上)·중·하의 7개 동리로 개편하고 강동면을 강신면(江新面)이라 개칭하여 마전군에 편입하였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북면의 8개 리를 무등(無等)·북삼(北三)·노동(蘆洞)·동중(東中)의 4개 리로, 강신면의 7개 리를 기곡(基谷)·고왕(高旺)·고잔상(高棧上)·고잔하(高棧下) 4개 리로 축소 병합하였고,
연천군 서면(西面) 지역이었던 계명(鷄鳴)·군영(軍營)·영정(永貞)·안월(安月)·소포(少浦)·야전(野前)의 6개 리를 강서(江西)· 강내(江內) 2개 리로 개편하여 편입하였으며, 마전군 서면 지역이었던 작동리(鵲洞里)를 편입하여 왕징면에서 가장 높은 산인 고왕산(高旺山)의 "旺"자와 북삼리 징파도(澄波渡)의 "澄"자를 따서 왕징면이라 하여 총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왕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일부 지역에 민간인 입주가 되었고,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 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과거 연천군 서남면(西南面) 지역이었던 귀존(貴存)·가천(佳川)·냉정(冷井)·고장(古莊)·오탄(伍炭)·장학(獐鶴)·솔현(率賢)·석둔(席屯)의 8개 리와 장단군 강상면(江上面)의 임강(臨江)·마성(馬城)·구화(九化)·자하(紫霞)·갈운(葛雲)·덕적(德積)·솔랑(率浪)의 7개 리를 편입하여 26개 리를 관할하고 있으나,
현재 무등·동중·노동·북삼 4개 리에만 민간인 입주가 되어 있고, 강서·강내·작동 등 3개 리는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며, 그 외 18개 리는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완충지대 및 북한 지역에 속해 있다.
면의 동쪽으로는 군남면, 남쪽은 미산면과 백학면, 서쪽은 휴전선, 북쪽은 중면 과 휴전선에 닿아 있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왕징면 무등리 8 - 2
(1994년 통계연보 기준)
+--------+-------+-------------------+------------+-----------------------+
| | | 인구수(명) | | 리 수 |
| 면 적 |가구수 +------+-----+------+ 인구밀도 +-----+-----+-----+-----+
| | | 계 | 남 | 여 | |법정 |행정 |자연 | 반 |
| (Km ) | | | | | (인/1km ) | | |마을 | |
+--------+-------+------+-----+------+------------+-----+-----+-----+-----+
| | | | | | | | | | |
| 105,91 | 478 |1,680 | 859 | 821 | 15,9 | 25 | 4 | 8 | 24 |
| | | | | | | | | | |
+--------+-------+------+-----+------+------------+-----+-----+-----+-----+
1. 무등리(無等里)
본래 마전군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무등실'이란 골짜기가 있어 무등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림장리(楡林場里)를 병합하여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민간인 입주가 되어 지금은 왕징면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8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화이트교(無等橋) : 무등리와 군남면 진상리를 연결해 주는 임진강 다리. 6·25 당시 전곡을 탈환하고 개성 방향으로 진격하던 U.N군이 이 곳 임진강에 당도해 보니 인력과 장비가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 도하작전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당시 미군 공병대대에 있던 화이트(White) 소령이 급조형태의 나무다리를 놓아 '화이트교'라 칭한 것이 지금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당시의 다리형태는 통나무교각에 나무판자를 깐 좁은 교폭이었으나, 1970년 현재 잠수교 형태의 콘크리트다리로 개축하였다.
이 다리의 특징은 여름우기 때 임진강이 크게 범람하면 북한측에서 다리를 유실시킬 목적으로 큰 통나무 등을 떠내려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리 교각 앞에 철구조물을 세웠고, 다리가 물속에 잠길 때면 물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하여 난간을 세우지 않았다.
최근에 이 다리 남쪽에 큰 다리인 임진교(臨津橋)가 새로 건립되어 있다.
2 스무스장거리(楡林場, 楡林洞, 楡淵津) : 화이트교 서쪽에 있는 큰 마을. 예전 마전군 때 임진강옆 강언덕에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인 스무나무숲이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지명은 느릅나무와 연관이 되어 있는데, 화이트교 위에 있는 큰 소(沼)를 '스무소(楡淵)'라 하였고, 진상리로 건너다니던 뱃터거리를 '스무소나루(楡淵 津)', 스무소 위에 있는 임진강여울을 '스무여울(楡灘)'이라, 옛 마전의 여러 지리지에는 적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마전군 때에는 3·8일이 되면 큰 장이 형성되어 '스무스장거리(楡林市)'라고도 불리웠으며, 지산팔경(芝山八景 = 마전팔경) 중 하나로도 꼽혔던 곳이기도하다.
3 수작골 : 스무스장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4 매봉(덜봉. 牛井里山城. 89,5m) : 무등리와 우정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우정리편 참고)
5 대자봉 : 수작골 서쪽, 우정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6 사정동(射亭洞) : 대자봉 북쪽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임진강 옆 장대봉 산성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사들이 평소에 궁술을 연마하던 활터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술청거리 : 사정동 서쪽에 있었던 주막거리. 예전 마전군 때 유촌리에서 여우고개를 넘어 이 곳으로 넘어 다니던 대로 옆에 큰 주막집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이 곳이 농경지로 변해 있다.
8 용상수(龍床水) : 대자봉 서쪽에 있는 고래실 논.
9 여우고개 : 무등리와 미산면 유촌리 경계에 있는 고개. (미산면 유촌리 "구네미고개". "여우고개" 참고)
10 잣나무골(栢村洞, 祠堂洞) : 무등실 남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이 골짜기 안에 잣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공주 이씨의 사당인 흥원사가 있다 하여 '사당말'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6·25 전에는 공주 이씨의 사패지가 되어 190여 가구가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큰 집성촌을 이루었다.
11 흥원사(興原祠) : 잣나무골에 있는 조선개국 3등 공신 흥원군 이 부(李敷)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12 닭밭(鷄田洞) : 흥원사 동쪽에 있던 마을. 이 곳의 지형이 풍수지리설로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刑)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3 안터(內垈) : 무등실 서쪽 안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14 무등실(舞登谷) : 흥원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무등리에 500여년 간 집성을 이루고 사는 ≪공주이씨족보≫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골짜기 안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공주 이씨가 집집마다 키우던 소를 낮이면 우정리의 소못개벌판으로 내 몰아 방목을 하고, 저녁이면 목동들이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소를 몰고 마을로 돌아온다 하여 춤출 '무(舞)'자와 오를 '등(登)'자를 써 무등리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무등'의 원뜻은 지금 통용되고 있는 한자표시인 '無等' 또는 '舞登'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임진강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전국적으로 '무등'이란 땅이름을 가진 곳은 이 곳 외에도 수 없이 나타나는데 지정학적으로 '큰 강 옆의 저지대가 되어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자주 침수가 되면서 물이 들판을 이루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곳 '무등'의 어원은 '물의 들판'이라는 뜻의 뿌리 말인 '물들'이 아래와 같이 ㄹ이 탈락하고 전음되면서 실제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한자지명의 '無等'으로 굳어버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물(水) + 들(坪) = 물들 > 무들 > 무등(無等) 또는 무드리
15 양지켠(陽地洞) : 흥원사 북쪽, 무등실 입구에 있던 마을. 하루 종일 볕이 잘드는 양지바른 곳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16 성안동(城內洞) : 무등리 장대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무등리 산성의 서쪽,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도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토기·와편·석재들이 지표에서 많이 수습된다.
17 하느고개 : 무등실에서 넘바위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고개에서 한(恨)이 맺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8 창골(倉谷) : 넘바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제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 무등리 지역이 삼국 영토분쟁의 국경지대였을 때 이 골짜기 안에 무기를 보관하던 병기창이 있던 곳이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도 그 창고가 있던 자리에는 와편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19 소경동 : 창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장님효자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0 차돌백이고개 : 소경동에서 노동리로 넘어 가는 고개. (노동리편 참고)
21 고성산(高城山. 高城山 烽邃址) : 무등리 가장 북쪽, 북삼리와 경계에 있는 산. (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22 가마소 : 고성산 동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고성산에서 이 소 방향으로 뻗어있는 산부리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라 하며, 이 소 옆의 강변은 '말밑개'라고도 한다.
23 황두깨 : 고성산 동쪽, 임진강 옆에 있던 마을. 황소머리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개성 왕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24 넘바위(廣岩洞) : 창골 서쪽에 있는 마을. 넓은바위가 있다 하여 '너른바위' 마을로 불리웠으나, 넘바위로 어휘가 변했다 한다. 현재 한산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25 농바위 : 용궁정소 서쪽에 있는 농모양의 바위.
26 용궁정(龍宮井, 龍宮亭) : 농바위 옆,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沼). 연천 군자산 정상에 있던 우물에서 홍두깨를 담그면 이 소 위로 떠올랐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27 샛말(間村) : 넘바위 남쪽에 있는 마을. 스무스와 넘바위마을의 중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전주 최씨가 모여 살았다 하여 '최촌말'로 불리웠고 '가골'이라는 다른 명칭으로도 쓰인다.
28 무등리 산성(無等里山城, 將臺峰) : 스무스 북쪽, 산 정상에 있는 고구려 산성터.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29 조개못 : 스무스마을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큰 못으로, 민물조개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에 이 곳으로 토사가 많이 유입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매몰되어 있다.
30 도깨비여울 : 조개못 옆에 있는 임진강 여울. 도깨비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이 근 호(67) 왕징면 무등리
이 완 수(58) 4반
2. 노동리(蘆洞里)
본래 마전군 북면의 지역으로, 목은 이 색(李穡)의 5대 손이며, 청주목사를 역임한 이명은(李命垠)이 지금의 노동리에 정착했을 때 갈대가 무성히 우거져 있어 '갈울(蘆洞)'이라 이름지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왕징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광대터 : 장승모탱이 서쪽에 있는 예전에 광대가 살았다는 터.
2 노동리 태봉(蘆洞里 胎峰) : 광대터 서쪽, 골짜기 안에 있는 작은 봉우리.예전에 왕실에서 태(胎)를 봉했다 하나,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3 상아밭 : 웃골 아래에 있는 밭.
4 웃골 : 상아밭 서쪽, 두리산에 딸린 골짜기. 개룽지들의 위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5 뒷골 : 웃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6 개룽지 : 장승모탱이 북쪽에 있는 들판.
7 개룽지개울 : 개룽지에서 미산면 유촌리로 내려가는 개울.
8 봇논 : 벌말 옆에 있는, 개룽지개울의 봇물로 관개하는 논.
9 벌말(坪村) : 나복골 서쪽, 벌판에 있던 마을.
10 황새봉고개 : 능안에서 뒷골로 넘어 가는 고개. 지형이 황새처럼 생겼다 한다.
11 능안(陵內) : 청주목사 이명은 묘와 그 후손들의 큰 묘가 있는 골짜기가 되어 묘를 릉에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목은 이 색영당(牧隱 李穡影堂) :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13 새울(間谷) : 능안과 원수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4 관설당 허 후 묘(觀雪堂 許厚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5 두리산(分石山. 184m) : 노동리와 동중리, 미산면 유촌리·백석리 경계에 있는 산. (백석리편 참고)
16 원수골 : 두리산 북쪽에 딸린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곳으로 피난했다 한다.
17 옥골(玉洞) : 새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노동리에서 가장 위에 있다 하여 '웃골' 로 불리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옥골'로 어휘가 변하였다 한다. 6·25 전에는 예안 이씨 5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18 가마봉(釜峰. 148m) : 옥골 뒤에 있는 봉우리. 가마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노동리·북삼리·동중리의 경계가 된다.
19 너리절(절터골) : 가마봉 밑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광음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절에 대한 자료가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현재 밭으로 경작되는 절터에는 이 절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남아 있다.
20 학수우물 : 갈울 안에 있는 우물. '학수'라는 사람이 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1 평나무밭 : 학수우물 위에 있는 밭. 옛날에 큰 팽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2 갈울(蘆洞) : 나복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노동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23 장구말 : 갈울 안에 있던 마을. 지형이 장구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살포장 : 장구말 뒤에 있는 산. 능선 위로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솔포를 친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예전에는(시대미상) 이 곳에 봉수대가 있어 북쪽의 고왕산, 남쪽의 금굴산 봉수대와 연결되었다 한다.
25 안갈울(內蘆洞) : 갈울 안에 있던 큰 마을 6·25 전에는 한산 이씨가 50호 살았던 곳이다.
26 장학골 : 내로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27 차돌백이고개 : 장학골에서 무등리로 넘어가는 고개. 흰 차돌이 많이 박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8 도란논(= 도랍논) : 장학골 앞에 있는 논. 모양이 동그랗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9 승지골 : 갈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30 새능개울 : 갈울에서 개룽지개울로 합쳐지는 실개천.
31 나복골(螺伏洞 = 나부골) : 승지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의 지형이 우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후 노동리가 수복되면서 갈울에 살았던 한산 이씨들이 이 곳에 새로 입주하여 현재 노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32 자개논 : 나복골 앞에 있는 논. 자갈이 많다 하여 '자갈논'이라 했던 것이 '자개논'으로 어휘가 변하였다 한다.
33 재팟골 : 나복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34 우렁산(134m) : 재팟골 동쪽, 무등리와 경계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의 형상이 우렁이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서쪽에 있는 두리산의 황새봉이 먹이 형국인 이 우렁산을 늘 쪼아 먹으려는 형세이나, 개룽지개울이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 되어 먹지 못한다 한다.
6·25 전에는 매년 음력 9월이면 이 산 정상에 있던 산제당에서 산제를 올렸다 한다.
35 작은장재울(- 長在洞) : 우렁산 남쪽에 있던 마을로, 큰장재울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36 큰장재울(-長在洞) : 작은장재울 위에 있던 마을. 이 곳의 한자 이름인 '長在' 는 원래의 뜻과는 무관한 내용이 한자지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우리말에 어떤 종류의 물건들이 부피가 굵지 못하여 가늘고 작다는 뜻의 '잘다' 가 관형형으로 굳은 말인 '잔'에 산(山)의 순 우리말인 '자'가 합쳐지며 지어진 이름으로, 아래와 같은 음의 변화를 거치며 오늘의 장재울로 불리우게 된 곳이다.
잔(小) + 자(山) + 울(谷, 洞) = 잔자울 > 잔재울 > 장재울(長在洞)
그러므로, 노동리 장재울은 우렁산 자락이 둘러 감싸고 있는 '작은 산골짜기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 '큰 부자가 살았다 하여...... 라는 전설과는 전혀 무관한 산과 관련된 땅이름이다. 6·25 전에는 공주 이씨가 13가구 살았던 곳이다.
37 장승모탱이 : 재팟골과 장재울 사이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이 홍 구(82) 왕징면 노동리 148번지
이 형 구(56) 2반
3. 동중리(東中里)
본래 마전군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동막리(東幕里)와 중동리(中洞里)를 병합하여 동막과 중동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 동중리라 하여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5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샛자리 : 송구터 남쪽에 있는 논. 피아골과 도둑모루의 사이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 피아골 : 샛자리 남쪽, 두리산에 딸린 골짜기. 옛날에 피밭(稷田)이 있어 '피밭골'로 불리워지던 곳이 '밭'의 자음 'ㅂ'이 잘 빠져나가 모음으로 변하는 현상 때문에 아래와 같은 변화를 거쳐 피아골로 전음된 땅이름이다.
피밭골 > 피왈골 > 피앗골 > 피아골
3 두리산(分石山. 184m) : 동중리·노동리와 미산면 백석리·유촌리 경계에 있는 산. (백석리편 참고)
4 치라채(= 시라재) : 피아골에서 백석리의 분석골로 넘어 가는 고개. (백석리편 참고)
5 중군고개(中軍峴) : 장재울 동쪽에 있는 고개. 백석리의 분석골과 통한다.
6 독쟁이고개 : 장재울에서 백석리의 가정골과 독쟁이로 넘어 다니던 고개.
7 탁고개 : 장재울에서 미산면 광동리의 뫼치골로 넘어 가는 고개.
8 장재울(長者洞 = 장재물) : 월촌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 골짜기 안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가을에 깨를 수확하여 쌓아 놓은 것이 현재 동중리 마을에서 보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 오나, 실제 장재울이 담고 있는 뜻은 '작은 산이 둘러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잔자울'이 변한 것이다. (노동리 "장재울" 참고)
9 안산(案山) : 배미골 동쪽에 있는 산. 향촌말에 있는 자로당 정희성(自老堂 鄭希聖) 묘의 안(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무터골(無基洞) : 안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물(水)'의 옛말인 '믄'이 음이 변하면서 '물이 흔한 골짜기'라는 원래의 뜻이 소리 그대로 음차되면서 한자의 '無基洞'이 된 곳이다.
믄(水)의 골짜기 > 묻의골 > 무대골 > 무태골 > 무터골
11 며겨울고개 : 배미골에서 백학면 석장리의 며겨울로 넘어가는 고개. 현재 동중리와 백학 간의 버스노선이 된다.
12 배미골(夜未洞) : 용호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은 예전부터 물이 흔한 관계로 논이 많은 곳이 되어 논의 단위인 한 배미, 두 배미에서 뜻을 따와 배미골이라 했던 것이 아래와 같은 전음과정을 거치면서 엉뚱하게도 한자의 '夜未'가 된 곳이다.
배미 < 바미(밤이) = 밤(夜) + 미(未) > 야미(夜未)
또한 이 곳은 고려시대 때에 마을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그 때 쓰였다는 자라우물이 남아 있고, 1973년 8월 5일에는 이 골짜기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학계에 많은 관심을 일으킨 바 있다. (출토유물은 문화유적·유물편 "중요발견 매장문화재" 참고)
13 달아몽지비냥(= 목달은비냥) : 향촌말 서쪽, 자가산에 있는 벼랑.
14 자가산 : 달아몽지비냥이 있는 조그만 산.
15 건너동막(越東幕) : 향촌말 서쪽에 있던 마을. 샛동막의 건너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6 동중리사지(東中里寺址, 절터) : 자가산 서쪽에 있는 절터. 지금은 절터 전체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원래 건물지가 있던 곳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축대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으나 이미 오래 전에 멸실된 상태이다. 건물지를 중심으로 약 50여평 넓이에서 와편, 토기·자기편들을 쉽게 수습할 수 있으나, 많은 양은 아니며 출토 유물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중기에 경영되었던 사찰로 추정될 뿐 문헌에 상세하지 않아 사명(寺名) 및 연혁은 미상이다.
17 용호산(龍虎山) : 배미골 북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 호랑이 형상이라 한다.
18 덜봉(222m) : 용호산 북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산(山)을 일컫는 우리의 옛말인 '달'이 '덜'에 가깝게 발음되면서 봉(峰)과 합쳐져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19 달고지고개(月串峴) : 빼울과 가는골에서 백학면 달고지로 넘어 다니던 두 고개의 같은 이름.
20 산빼울 : 덜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21 빼울(= 빼우리) : 산빼울 아래에 있는 넓은 골짜기. 이 곳은 원래 차고 깨끗한 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로 전해 오고 있으나, 원래는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받'이 음이 변한 '배'가 발음 습관에 따라 경음화되어 '빼' 로 발음되면서 골짜기의 뜻인 '울'과 합하여 '산골짜기 안' 또는 '산골짜기 마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엉뚱하게도 우물에 연관시켜 해석되어지고 있는 곳 이다. (장남면 원당리 "배골" 참고)
22 샛동막(間東幕) : 자가산 북쪽에 있던 마을. 동막골과 건너동막의 사이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3 향촌말(香木村) : 자로당 정희성 묘의 아래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해주 정씨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24 벌모퉁이 : 향촌말과 월촌말 사이에 있는 산 모퉁이.
25 큰배미 : 장재울 북쪽에 있는 여덟마지기가 되는 큰 논.
26 월촌말(越村, 건너말) : 큰배미 북쪽에 있는 마을. 향촌말의 건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7 당재고개 : 중간말에서 도둑모루로 넘어 다니는 고개.
28 중간말 : 월촌말과 동막골 사이에 있는 마을. 6·25 이후 이 곳이 수복되면서 새로 큰 부락이 형성되어 지금은 동막골·월촌말·중간말이 모두 합쳐져 동중리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29 동막골(東幕洞) : 중간말 위에 있는 마을. 돌(石)이 많은 골짜기가 되어 '돌막골' 이라 불리워졌던 곳이 '돌'이 '동'으로 쉽게 음이 변하는 자음동화현상에 의하여 아무 의미없는 한자의 '東幕'으로 음차 된 곳이다.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3가구 살았는데 200년 전에 이 곳에 정착한 뒤로는 3가구 이상 늘지 않는 곳이라 하 며, 현재는 한 집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건너동막, 샛동막 등의 마을 지명이 나왔다.
30 쉰냥짜리논 : 동막골 앞에 있는 논.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있던 집터를 쉰 냥(50兩)에 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1 덕밭재 : 동막골에서 신성골로 넘어가는 고개.
32 샛골(間洞, 新垈) : 동막골 서쪽, 샛동막과 동막골 사이에 있던 마을.
33 가는골(細谷洞) : 동막골 서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청주 경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34 샛가는골(間細谷洞) : 가는골 안에 있던 작은 마을.
35 중골 : 샛가는골 위에 있는 골짜기.
36 잔바닷골고개 : 가는골에서 강서리로 넘어 가는 고개.
37 신성골 : 세곡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38 매봉(162m) : 동막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매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한다.
39 장승고개 : 덕절이에서 강서리의 군영장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강서리편 참고)
40 덕절이(德寺洞) : 매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덕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전해 오고 있으나, 덕사에 대한 내용이 문헌에 전해 오지 않고 절터 또한 확인되지 않아 한자지명 그대로 지명을 풀이 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곳의 어원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아래와 같은 본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앞음절 '덕(德)'은 여진족의 말로 '비탈', '언덕', '고원'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북부지방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 산지지명에 많이 나타나는데 신서면 마전리의 천덕산(天德山)도 그 한 예이다. 또한 뒤음절 '절(寺)'은 '들(坪)'을 뜻하는 폭넓은 의미의 고어 ' '이 사투리 발음에서는 '덜'로 쉽게 변하는데, 이 '덜'은 다시 구개음화 현상에 의해 '절'로 옮겨져 전국의 여러 지명에 정착
되어 한자의 '절(寺, 切, 節)'과 같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름을 낳은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 덕절이는 실제 있었는지에 관하여 확실치 않은 '德寺'라는 절과는 거리가 먼, 단순히 '들이 있는 산골짜기 마을' 또는 '산골짜기 안의 들'이라는 뜻을 가진 곳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1,000석 지기의 큰 부자가 살았다 한다.
41 솔정자고개(松亭峴) : 중골에서 북삼리의 쑥골로 넘어 다니는 고개. 이 곳에 큰 왕소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의 유래가 되는 소나무는 6· 25 때 없어지고 지금은 이 고개에 소로만 나 있다.
42 가마봉(釜峰. 148m) : 중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가마와 닮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동중리·노동리·북삼리의 경계가 된다.
43 중골(中洞里, 中方洞) : 가마봉 서쪽에 있던 마을.
44 양해논 : 중골에 있는 논.
45 송구터 : 중골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진천 송씨가 20여호 살았던 곳이다.
46 도둑모루 : 송구터 서쪽, 산 모퉁이에 있던 마을. '돋은(불쑥 튀어나온) 산모퉁이' 의 뜻으로, '도드모루'가 '도두모루;로 되었다가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47 뒷간뒷자리 : 도둑모루 앞에 있는 논. 거름을 주지 않아도 매년 풍작이 되는 비옥한 논이 되어 뒷간에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8 당재(堂峴) : 도둑모루 동남쪽에 있던 큰 오리나무 고목. 해마다 무인들이 당굿을 올렸다 하여 당나무라고 불리웠으나, 6·25로 이 나무는 없어진 상태이다.
49 동중다리 : 당재 안쪽, 하천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예전에 돌징검다리가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미산면 백석리의 분석골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 제 보 자 : 정 해 원(61) 왕징면 동중리
정 계 현(56)
4. 북삼리(北三里)
본래 마전군 북면의 징파리(澄波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외곡리(外谷里)·애동리(艾洞里) 등, 마전군 북쪽에 있는 3개 동리를 병합했다 하여 북삼리라 이름지어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민통선 지역에 놓여 있어 일부 지역에만 민간인이 입주해 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8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고성산(高城山) : 넘바위고개 동쪽, 무등리와 경계에 있는 산. (무등리편 참고)
2 넘바위고개(廣岩峴) : 방축골에서 무등리의 넘바위 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
3 방축골 : 고성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방죽이 있었다 한다.
4 방아다리 : 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방아간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살포장 : 쑥골 남쪽, 노동리와 경계에 있는 산.(노동리편 참고)
6 가마봉(釜峰. 148m) : 북삼리·노동리·동중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노동리편 참고)
7 솔경자고개(松亭峴) : 북삼리에서 동중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동중리편 참고)
8 능골(陵谷) : 가마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릉이 있었다 한다.
9 쑥골(艾洞) : 살포장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쑥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안골 : 쑥골 동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11 검은동굴 : 방축골 북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청주 한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으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2 가루니 : 방축골 북쪽, 홍산이고개 쪽으로 있는 골짜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전까지 홍산이고개 정상을 기준으로 하여 연천현과 마전군의 경계가 나뉘어 진다 하여 '가른다'의 뜻인 '갈'에서 뜻을 취해 붙여진 '경계가 갈라지는 곳'이란 뜻을 가진 곳으로, '갈'이 '가루니'로 연철된 땅이름이다.
13 홍산이고개 : 북삼리에서 강서리로 넘어 가는 고개. 현재 32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14 선챙이(船艙) : 예전에 쑥골과 검은동굴 마을에서 이용했던 임진강 포구 이름. 1925년 대홍수 때 임진강이 크게 범람하면서 이 곳이 모두 쓸려내려가 폐허가 되어 버렸다 한다.
15 벙바위( 巖) : 징파나루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큰 바위. 예전에 부엉이가 많이 서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괭이바위' 로도 불리워지는데 이 바위에 얽힌 자세한 유래는 아래와 같다.
옛날 풍수지리에 능통한 한 도승이 하루는 이 곳을 지나다가 임진강옆에 있는 이 바위를 자세히 보니 고양이형국을 하고 있고, 임진강 건너 맞은 편에는 쥐가 앉아 있는 형상의 산이 있는데, 마침 이 산에는 이씨의 조상 묘가 있었다 한다. 길을 가던 도승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고양이 앞에 쥐는 기를 펴지 못하는 법이라, 이씨집안에는 벼슬을 할 수 없을 것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세히 알아보니, 과연 이씨 집안에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없고 가세마저 점점 기울어 가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한다.
그 길로 이 도승은 이씨 집을 찾아가 자세한 연유를 설명하고 한 가지 묘안을 일러주었는데 다름아닌, 고양이의 눈에 해당하는 벙바위 윗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준다면 억눌려 있는 쥐산의 기운이 피어 이씨 가문이 금시 발복하게 될 것이니 11년 동안만 매년 새거적을 덮어 줄 것을 당부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한다.
도승의 이야기를 들은 이씨 집안에서는 그 방법대로 거적을 씌우니 3년 안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는 포도대장이 나왔다 한다. 그러나,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지위에 올라 게을러진 이대장은 날이 갈수록 성격이 포악하고 거칠어져 사람을 의자삼아 앉았으며, 그 권력을 빙자하여 사람의 목숨마져 경시하여 죽이는 등의 행동으로, 주위의 노여움과 원한이 차츰 쌓여 갔고 도승이 일러준 비방마져 지키지 않아 3년 동안만 거적을 씌웠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자 거적이 모두 헐고 썩어 없어지게 되었다 한다.
그 때 마침, 우연하게도 이 대장의 방자한 행동이 임금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는 극형에 처해 졌고 잠시 뜬 구름처럼 영화를 누렸던 이씨 집안도 예전 형편으로 몰락하였는데, 이에 화가 난 이씨 집안에서는 이 고양이바위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 하여 바위를 부수니 깨진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천둥번개가 때려 그 일족 모두가 화를 당했다고 하며, 지금도 이 바위에는 그 때의 붉은핏자국이 남아 있어 이 바위색이 붉다고 한다.
16 징파나루(澄波渡, 屯田渡) : 현재 북삼리와 삼거리를 이어주는 북삼교 가설 전에 있던 임진강의 큰 나루터. 다산 정약용의 ≪대동수경 권8≫에 의하면 "이 곳의 강물은 강바닥의 자갈이 훤하게 비칠 정도로 물 빛깔이 맑다 하여 징파강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澄波渡水色澄淸故名...,)라고 이곳의 유래를 적고 있다.
그러나, ≪高麗史 五行志≫에 의하면 "고려 우왕 11년(1385년) 징파강에 누렇게 흐린 물이 3일 동안 흘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멸망의 징조를 미리 예견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또한 이 곳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한양과 함경도를 연결해 주는 대로(大路 = 驛路)가 이 나루로 연결되었었고, 북삼리 마을에는 둔밭(屯田)이 있었다 하여 '둔밭나루'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곳을 소재로 하여 아래와 같은 2편의 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 배중부(裵仲孚)의 징파도 시
澄波江水浸苔巖 징파 강물에 이끼낀 바위 잠겼는데
細雨斜風送客帆 비낀 바람 가랑비 속에 객선은 멀어져 가네.
隔岸漁村知有酒 강 건너 언덕 고기잡는 마을에 술 있는 걸
알았으니
興來猶家典春衫 흥이 나면 봄옷 맡기기 알맞겠네.
□ 안 축(安軸)의 징파도 시
古渡舟如葉 오래된 나루터에 배는 잎새 만한데
天寒波更澄 날씨 추우니 물은 더욱 맑구나.
崩崖懸醜石 무너진 비탈엔 기이한 돌 달려 있고
斷岸積層氷 끊어진 언덕엔 층층이 얼음 쌓였네.
狼鳥近堪 낭조는 가까워 쓸만하고
遊魚深莫 노는 고기는 깊어서 그믈로 떠낼 수 없구나.
師敢輕賤 사공을 감히 업신여길 소냐
手有濟人能 그 손(手)은 사람 건너 주는 능력 있네
17 북삼리느티나무 : 징파나루터 언덕에 있는 수령 약 300년의 큰 느티나무. 전설에 의하면 휴암 백인걸의 후손 백이규(白以圭)가 심었다 한다.
18 징파도 암각문(澄波渡 巖刻文) : 문화유적·유물편 "암각문" 참고.
19 달버듬지산 : 징파도 북쪽에 있는 언덕. 예전에 달맞이를 했던 곳이라 한다.
20 둔밭(屯田) : 징파도 부근에 있는 마을. 고려∼조선시대 때에 군졸, 서리(胥吏), 평민, 관노비(官奴婢)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여 경작케 하고 여기서 나오는 수확물을 지방관청의 경비 및 군량과 기타 국가경비에 쓰도록 한 전답인 둔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1 북삼리 마애석불입상(北三里 磨崖石佛立像) : 문화유적·유물편 "불상" 참고.
22 박대울(朴垈洞) : 둔밭 서쪽에 있는 골짜기. 죽산 박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3 원고개 : 둔밭에서 외울로 넘어 가는 고개.
24 이씨터 : 외울 남쪽에 있던 마을. 옛날에 이씨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25 둔밭고개(屯田峴) : 이씨터에서 강내리의 진겨울로 넘어다니던 고개.
26 쇠고개(牛峴) : 안터에서 강내리로 넘어 가는 고개로, 북삼리와 강내리의 사이에 있다 하여 사이의 뜻인 '새'가 지방사투리에서 '쇠'로 쉽게 음이 변하는 현상(특히 경기북부 지방에 많이 나타난다.)으로 보아 원애 '새고개(間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나, '소(牛)'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 오기도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살림이 넉넉한 기와집에 홀아비와 성장한 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실성을 하여 자기 딸을 보고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하자, 그 딸은 실성한 아버지에게 한가지 청하기를 머리를 헤쳐 풀고 소와 같은 모습으로 이 고개를 내려오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한다. 실성한 아버지는 그 즉시 이 고개로 올라와 머리를 헤쳐 풀고 소의 흉내와 함께 '움메 움메'소리를 내면서 내려와 보니 딸이 자결을 했다 하여 그 뒤 부터 이 고개를 '쇠고개'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27 쪽박골고개 : 외울에서 강내리 쪽박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28 매봉(124m) : 외울 남쪽, 강내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매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원래 산(山)의 뜻인 '뫼'가 '매'로 발음되면서 하늘을 날아 다니는 '매(鷹)'로 풀이 되고 있는 산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29 대정에밭 : 쇠고개 아래에 있는 밭.
30 안터(內垈) : 쇠고개 아래,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청도 김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31 열녀문거리(烈女門巨里) : 안터 마을에 있던 청도 김씨 교생(校生) 김 택(金澤) 의 처인 성주 이씨의 열녀문으로, ≪마전읍지≫에 의하면 "이씨는 부군 김 택이 죽은 뒤 3년 상을 마치는 날에 극약을 마셔 절개 있는 죽음을 했다 하여 조선 경종 4 년(1724) 3월, 이 곳에 이씨의 열녀문이 세워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열녀문은 6·25 때 아깝게도 전소되었다.
32 외울(外谷) : 둔밭마을 북쪽, 이씨터와 안터 골짜기의 이름. 옛 마전군 북면 지역에서 가장 밖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33 시내기자리 : 외울 중앙에 있는 논. 옛날에 '시내기'라는 아가씨가 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4 용못 : 시내기자리 아래에 있는 깊은 못.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서 용이 등천했다 한다.
35 북삼리 선사유물 산포지(北三里 先史遺物 散布地)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 제 보 자 : 김 용 호(79) 왕징면 북삼리
5. 강서리(江西里)
본래 연천현(漣川縣) 서면(西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계명리(鷄鳴里)·군영리(軍營里)·영정리(永貞里)를 병합하여 임진강의 서쪽이 되므로 강서리라 하여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직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3년 동안의 6·25가 끝난 그 다음 해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고 출입영농만 가능한 하나의 법정리이다.
1 하오고개 : 와말 동쪽에 있는 강서리에서 강내리의 능말로 넘어가는 고개.
2 활터거리 : 하오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3 홍산이고개 : 강서리와 북삼리 사이에 있는 고개.
4 정가터골 : 홍산이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막골 : 영정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6 새터골(新垈谷) : 막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에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골짜기이다.
7 독정골 : 새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8 아랫터골 : 독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윗터골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9 윗터골 : 아랫터골 위에 있는 골짜기.
10 덕절이 : 군영장거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동중리의 덕절이(德寺洞)와 연결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동중리의 덕절이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골짜기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장승고개 : 덕절이에서 동중리 덕사동(德寺洞)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예전에 어떤 사람이 처갓집을 다녀오다, 이 고갯마루에 있는 장승옆에서 장모가 싸준 닭고기를 배불리 먹고난 후 그 닭뼈를 한 군데 모아 놓고 종이에 "계골장군(鷄骨將軍)"이라 써서 그 옆에 놓았는데, 그 후 이 곳에 호랑이와 도깨비가 자주 나타나 사람의 통행이 어렵게 되자 그 사람이 다시 치워버렸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12 잔바닷골고개 : 군영장거리에서 동중리 가는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13 잔바닷골등 : 잔바닷골고개 옆에 있는 산등.
14 갑상골(甲上洞) : 안터 남쪽에 있는 마을. '가장자리'의 뜻인 옛말의 '가(邊)'가 발음상 '갑' 또는 '각'이 되면서 '산(山)'과 '골(谷)'이 합하여 '가장자리의 산골짜기'라는 뜻의 '갑산골'이 되었으나, 차츰 '갑상골'로 음이 변하여 아무 연관이 없는 한자의 '甲上洞'으로 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15 성주골 : 끄드르미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6 안끄드르미 : 끄드르미 안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7 새말고개 : 끄드르미에서 작동리 새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18 끄드르미 : 이 곳은 예전 연천현에서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발음 그대로를 음차한 '휴인동(携引洞)'으로 씌어지는 곳이다.
19 산제당산(山祭堂山. 208m) : 끄드르미 마을 북쪽에 있는 산. 6·25 전까지도 끄드르미 마을에서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고왕리·작동리와 경계가 된다.
20 달구지 : 산제당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보광고개 동쪽에서 이 골짜기 쪽으로 뻗어나온 산 자락이 새의 부리와 같은 형태라 하여 이러한 지형을 지칭하는 '곶(串)'과 산의 옛말인 '달'이 합하여 '달곶(山串)'이 되었던 것이 지금의 달구지로 음이 연철되어 굳어진 땅이름이다. (백학면 석장리의 "달고지" 참고)
21 말고개 : 달구지에서 고왕리로 넘어다니던 고개. 이 고개의 유래는 '말(馬)'과는 거리가 먼 '크다(大)'는 뜻으로 씌었던 우리 고어인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예전 장단과 연천의 사이에 있는 '큰 고개'라는 의미로 보여진다. 현재 남방한계선이 이 곳을 지나 간다.
22 보광고개(寶光峴 = 달구지고개) : 달구지에서 고잔하리 보광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옛날에 소가 끄는 달구지가 이 곳을 많이 다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달고 있으나, 본래의 뜻은 '달구지(山串)'에 연유한 지명이다.
23 돌모루(回村) : 달구지 동쪽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산부리 끝에 있는 모퉁이가 되어 이 곳을 지나가자면 굽어서 돌아가야 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안터(內垈) : 돌모루 남쪽에 있던 마을.
25 새터(間垈) : 안터 동쪽, 윗장거리와 돌모루 사이에 있던 마을.
26 닥채 : 새터 남쪽에 있던 집터.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닥나무를 가공하여 한지를 만들었던 곳이다,
27 웃장거리 : 방축골 입구에 있던 마을. 군영장거리의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8 닭이울(鷄鳴里) : 방축골 안에 있던 마을 이름. 이 곳은 원래 닭과 관련이 없는 '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천읍 상리의 "닭운이" 참고)
29 방축골(防築谷) : 웃장거리에서 문자수고개까지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농사에 쓰기 위하여 물을 가두어 놓는 방죽이 있던 곳이다.
30 고릉동(古陵洞) : 계명리 위에 있던 마을. 이 골짜기 안에 큰 고분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지금은 이 고분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31 강서리 돈대(江西里 墩臺)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32 문좌실고개(文座峙 = 문좌수고개) : 고릉동에서 고잔하리 문좌수골짜기로 넘어가는 고개.
33 삼봉(三峰. 258m) : 고능동 북쪽, 고잔하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정상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4 미수 허 목 묘(眉 許穆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35 좌찬성 허 자 묘(左贊成 許磁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36 군영장거리(軍營場巨里, 軍營里) : 은거당터 서쪽에 있었던 옛 왕징면의 소재지 마을. 조선 후기 연천현감을 역임했던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靑泉集.四≫에 실려 있는「觀許相國恩居堂園記」에는 "이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한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으로 이 곳 마을 사람들은 군영이라 부른다"...... (원문 : -- 村以高麗太祖駐兵處俗呼軍營 -- )라고 이 곳의 유래를 적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연천현의 서면, 행정구역이 개편된 일제 강점기 때에는 왕징면의 행정, 교육, 치안의 중심지었고 연천·삭녕·장단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이 모여 들어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6·25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이 일대 모두가 농경지로 변해 있다.
37 보통학교자리(普通學校 -) : 미수 허 목 묘 앞에 있던 일제 강점기 때의 보통학교(초등학교) 터.
38 강서리 선사유물 산포지(江西里 先史遺物 散布址)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39 은거당터(恩居堂址) : 군영리에 있었던 숙종 임금이 하사한 미수 허 목의 고택(古宅).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40 녹봉(鹿峰) : 은거당터 뒤에 있는 산. 미수 허 목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낼 때 이 산에 사슴이 많이 내려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1 매지울(梅谷洞) : 녹봉 북쪽에 있던 마을. '웃매지울', '아랫매지울'로 나뉘는 이곳은 산(山)의 고어인 '뫼'나 '메'가 '매'로 소리빌기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어원은 '꼭대기'란 뜻의 고어인 '말'이 '매'로 전음되고 말 > 몰 > 모리 > 모이 > 뫼 > 매 '울'과 합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매개모음 '이'가 '지'로 변하는 현상에 의해 '매지울'이 되었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기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발음 그대로의 '梅谷洞'이 된 곳일 뿐, 매화나무와는 관련이 없는 단순히 '산 마을' 또는 '산골 마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42 할미당골 : 은거당터 동쪽, 영정동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늙은할미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웃당골'과 '아랫당골' 로 나뉜다.
43 산제당산(山祭堂山) : 영정동 뒤에 있는 산. 매년, 이 산 정상에 있는 부채모양의 큰 소나무 아래에서 소를 제물로 하여 산제를 올렸다 한다.
44 영정골(永貞洞) : 은거당터 동쪽에 있던 마을. 이 곳의 지형이 마을 뒤에 있는 산세에 의해 동서로 길고 곧게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輿地圖書≫에는 "營殿里"로도 표기되어 있다.
45 월계천(月溪川) : 달구지에서 발원하여 강서리 중앙을 지나 강내리의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긴 개울로, 단순히 '산골짜기를 흐르는 개울'의 뜻인 '달개울(山川)'을 한자로 옮겨 쓰면서 '월계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46 기와말(瓦村) : 하오고개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기와집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7 대터(大垈) : 기와말 옆에 있던 마을.
48 비냥당골 : 벌말 남쪽, 벼랑이 있는 골짜기.
49 흔두터 : 여시울 남쪽에 있는 골짜기.
50 강가마터 : 흔두터 옆에 있는 골짜기.
51 분투골(盆土洞) : 오방터 서쪽에 있던 마을. 지형이 항아리 같이 입구가 좁고 안이 넓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오방터와 이 마을은 함열 남궁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52 작은분투골 : 오방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분투골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53 오방터(五方垈) : 분투골 동쪽에 있던 마을로,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54 골말(谷村) : 오방터와 여시울 사이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
55 칼바위 : 여시울 골짜기 안에 있는 큰 바위. 그 모양이 칼날처럼 서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6 금바위 : 칼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
57 여시울(六士洞) : 오방터 동쪽에 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여섯명의 선비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전의 이씨와 제주 고 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58 부군나무(府君 --) : 여시울 앞에 신성시하여 보호했던 큰 물푸레나무. 이 나무는 6·25 때 없어졌다.
59 벌말(野村) : 여시울 동쪽, 벌판에 있던 마을.
60 씩시골 : 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61 백고개 : 기와말 북쪽, 강내리와 경계에 있는 고개.
* 제 보 자 : 허 화(90) 전곡읍 은대2리
허 식(62)
허 행 준(60) 연천읍 상1리 4반
고 병 훈(58) 전곡읍 은대3리
6. 강내리(江內里)
본래 연천현(漣川縣)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안월리(安月里)·소포리(小浦里)·야전리(野前里)를 병합하여 임진강의 안쪽이 되므로 강내리라 하여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고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다.
1 불당골(佛堂谷) : 매봉 동쪽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절터에는 6·25 전까지도 석조미륵불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매봉(124m) : 강내리와 북삼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북삼리편 참고)
3 가마소 : 매봉 동쪽, 월계천에 있는 가마솥처럼 생긴 소(沼).
4 오리물 : 가마소 위쪽에 있는 큰 소(沼). 오리들이 많이 놀던 곳이라 한다.
5 쪽박골 : 매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작거나 좁은 것을 뜻하는 옛말인 '죡'과 산(山)의 옛말 '받'이 음이 변한 '박'에 골(谷)이 합하여 '좁은 산 골짜기'라는 뜻의'죡받골'로 불리워지던 것이 '쬡박골'로 음이 변한 땅이름이다.
6 쇠고개 : 강내리와 북삼리 외울 사이에 있는 고개. (북삼리편 참고)
7 둔밭고개 : 강내리에서 북삼리 둔밭마을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8 진겨울 : 둔밭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항상 습기가 많아 땅이 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 안드래(安月里) : 진겨울 옆에 있는 골짜기. 강서리에 펼쳐져 있는 군내들의 안(內)에 있다 하여 '안(內)'과 '들(坪)'의 옛말인 '달'이 합하여 '안달'이 되어 발음 그대로 음차한 한자이름 '安月'을 써 왔으나, '달'이 개음절로 쉽게 변하는 특성에 따라 '드래'로 음이 변하여 지금의 '안드래'가 된 땅이름이다.
10 하오고개 : 능말에서 강서리로 넘어 가는 고개.
11 백고개 : 능말에서 강서리 여시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12 군내들 : 백고개 동쪽에 있는 강내리의 넓은 들 이름.
13 키장골 : 능말 서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옛날에 키를 만들던 수공업자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4 능말(陵洞) : 강석덕 묘 아래에 있었던 마을. 진주 강씨의 큰 묘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강회백의 후손인 진주 강씨가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15 지돈녕부사 강석덕 묘(知敦寧府事 姜碩德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6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 묘(東北面都巡問使 姜淮伯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7 절골 : 능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던 곳에는 축대, 기와조각 등이 있었으나, 최근에 농지로 개간되어 그 터가 멸실된 상태이며, 사명(寺名) 및 연혁 또한 미상이다.
18 큰장학골 : 절골 위에 있는 골짜기.
19 망재(望峴山. 142m) : 강회백 묘 북쪽에 있는 산. 예전에 망을 보았던 곳이라 전해 온다.
20 왕대터들 : 능말 동쪽, 월계천 주위에 있는 들판.
21 월계천(月溪川) : 강서리에서 발원하여 강내리의 중앙을 지나 임진강에 합류하는 긴 하천. (강서리편 참고)
22 포수터 : 망재 동쪽에 딸린 조그만 골짜기. 옛날에 산짐승이 많아 포수들이 사냥을 했던 곳이라 한다.
23 동오리골 : 포수터 위에 있는 골짜기.
24 동이점골 : 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한다.
25 동이점고개 : 안골에서 임진강가의 동이점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26 안골(內洞) : 왕대터들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이천 서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
27 아치골 : 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안골 마을이 자리했던 큰 골짜기에 비하여 작다 하여 '작은'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 '아(앝)'의 주격형 '앝이'가 명사 본형으로 굳어져 '아지'가 된 것이 차츰 '아치'로 음이 변하면서 '작은 골짜기'라는 뜻의'아치골'이 된 땅이름이다.
28 마방(馬房) : 안골, 능말, 들앞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었던 작은 마을로, 행인과 말들이 쉬어 가던 주막집이 있던 곳이다.
29 옥골 : 아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30 들앞(野前洞) : 마방 동쪽에 있던 마을. 왕대터들의 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1 등마루 : 여묵 남쪽, 임진강 변에 있는 긴 산등으로, 지금은 군부대 사격장으로 변해 있다.
32 축동(築 = 동묘재곁) : 여묵마을 바깥, 임진강변으로 있었던 큰 소나무, 잣나무 고목으로 이루어진 수구막이. 축동나무는 6·25 때 모두 없어졌다. (축동 : 청산면 백의리 축동 참고)
33 여묵 : 들앞 동쪽, 임진강 옆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의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다.
34 가장골 : 여묵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강서리 내에서 가장자리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5 웅연석문(熊淵石文) : 임진강 괴미소의 옆에 있는 천연석문.(문화유적·유물편 "암각문" 참고)
36 배골 : 가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의 뜻으로도 씌었던 고어 '받'이 '배'로 변한 곳으로,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장남면 원당리 "배골" 참고)
37 두리봉(112m) : 가장골 서쪽에 있는 산.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8 장군이(將軍里, 小浦里) : 두리봉 북쪽, 임진강변에 있던 마을. 이 곳에서 중면 삼곶리로 건너다니던 임진강나루인 장군이나루(將軍渡 = 將軍灘)가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옛 지리지에 의하면 이 곳이 '작은개(小浦)'로도 기록되어 있다.
39 뇌울 : 장군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40 동이점 : 망재 북쪽, 임진강변에 있는 골짜기.
* 제 보 자 : 강 대 덕(79) 연천읍 차탄3리
이 기 욱(62) 상1리 14반
7. 고왕리(高旺里)
본래 장단도호부 강동면(江東面)의 기곡리(基谷里)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강동면이 마전군으로 편입되면서 강신면(江新面)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고왕산(高旺山)에서 이름을 따 고왕동이 하나의 법정리인 고왕리가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석리(基石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군사분계선을 포함한 남방한계선의 안에 위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말고개 : 고왕리와 강서리 사이에 있는 고개. '고왕리고개'로도 불리웠으며, 예전 이 고개에 도둑이 많았다 한다. (강서리편 참고)
2 산제당산(山祭堂山. 208m) : 강서리편 참고.
3 망대봉(望臺峰) : 산제당산 서쪽, 작동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작동리편 참고)
4 가마골고개 : 고왕리에서 작동리의 가마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5 새고개 : 고왕리 청들에서 기곡리의 산점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두 마을의 사이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 청들 : 비사리골 남쪽에 있는 들.
7 윗골 : 청들 서쪽에 있는 골짜기. 아랫골과 상대되는 이름이다.
8 바위절골고개(巖寺峴) : 아랫골에서 기곡리 바위절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9 안산(案山. 159m) : 바위절골고개 서쪽에 있는 산. 북쪽에 있는 윤씨 묘의 안(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아랫골 : 안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11 돌박재 : 아랫골 북쪽, 넓은 산등성이에 있는 밭. 돌이 많이 박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장승거리 : 기곡리와 깊은골, 고왕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이름. 예전에 장승이 있었다 한다.
13 드링곁골짜기 : 장승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깊은골에서 내려오는 개울(도랑)의 옆에 있는 골짜기가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4 욕왕손이골 : 깊은골 입구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왕손(王孫)을 욕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5 깊은골(深谷洞) : 욕왕손이골 북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16 나븐돌고개 : 만석동 북쪽에 있는 고개. 고잔상리와 경계가 된다.(고잔상리 참고)
17 만석동(萬石洞) : 나븐돌고개 남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고왕산 서쪽 산록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하늘아래 첫 동네'로도 불리웠고, 6·25 전에는 단양 우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
18 능골(陵谷) : 만석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릉과 같은 큰 묘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9 오작골 : 돌박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
20 양유골(楊柳谷) : 오작골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1 은골(銀谷) : 윗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금과 은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은광이 번창했고, 6·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22 비사리골 : 은골 동쪽, 만석동으로 넘어 가는 곳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단양 우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23 큰고왕산(高旺洞) : 비사리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고왕산 남쪽에 딸린 큰 마을 로,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집성을 이루었다.
24 작은고왕산 :고왕산 남쪽에 있던 마을. '샛고왕산'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며, 6· 25 전에는 해평 윤씨가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25 고왕산(高旺山, 高陽山, 烽火山, 말무덤산, 355m) : 고왕리·고잔상리·고잔하리에 걸쳐 있는 왕징면에서 가장 높은 산. 옛 장단의 지리지에는 "高陽山"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의 의미는 '王'자 들어가 있는 산이름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뜻인 '높음' 또는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왕산의 경우에는 임진강 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장단 지역의 구릉지대에 외따로 높이 솟아 있어 예부 터 이 산을 신성하고 거룩한 존재로 숭배했던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는 산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 정상에 천자(天子)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내고 투장(偸葬)을 했으나, 그 즉시 심하게 가뭄이 들고 주변 마을에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 이 행위를 금기시 하였다 한다.
또한 예전에는 이 산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하였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이 산의 혈을 끊기위해 일본인들이 무쇠말을 묻었다 하여 '말무덤'산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어렸을 때 이 곳으로 소풍을 갔던 제보자들의 증언으로는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는 산 정상에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26 윗고왕산 : 말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27 보광고개(寶光峴) : 윗고왕산에서 고잔하리 보광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28 달구지고개 : 보광고개 동쪽에 있는 고개. 강서리의 달구지로 통한다.
* 제 보 자 : 윤 성 중(82) 연천읍 차탄2리
8. 기곡리(基谷里)
본래 장단도호부의 강동면(江東面)지역으로, '터골' 또는 '터일'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기곡리(基谷里)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강동면이 마전군으로 편입되면서 강신면(江新面)으로 개칭되었고, 기곡리는 기곡(基谷)·기석(基石) 2개 리로 분할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신면이 연천군 왕징면으로 편입되면서 기곡리·기석리·산점리(山店里)를 병합하여 기곡리라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그 다음 해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군사분계선이 중앙에 놓여 있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는 완충지대에 속해 있다.
1 소학동(巢鶴洞) : 국사봉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 국사봉(國師峰. 두리봉. 156,7m) : 소학동 서쪽, 임강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보인다 하여 두리봉으로도 불리웠으나, 국사봉에 대한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3 버들말 : 국사봉 북쪽에 있던 마을. 큰 버드나무 고목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서낭당 : 버들말 입구에 있던 서낭당. 6·25 전까지도 2기의 목장승이 서 있던 곳이다.
5 밧터일(外基谷) : 서낭당 북쪽에 있었던 마을. 안터일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6 안터일(內基谷, 터골) : 밧터일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7 잣골 : 안산 서쪽에 있던 마을. 조씨의 집성촌이었다 한다.
8 안산(案山. 159m) : 서낭당 동쪽, 고왕리와 경계에 있는 산. 고왕리에 있는 윤씨 묘의 안(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9 동산모루 : 잣골과 바위절골 중간 지점에 있는 산 모퉁이.
10 바위절골(巖寺洞) : 안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 밑에 절이 있었으나, 절 이름은 전해 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무인(巫人)들이 이 절터에 굿당을 지었다 한다.
11 동산말고개 : 바위절골에서 산점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12 산점리(山店里) : 동산말고개 아래에 있었던 마을.
13 쇠지기등 : 안산 남쪽에 있는 산.
14 마골 : 쇠지기등 서쪽에 있는 골짜기. 멧돼지, 늑대 등의 산짐승이 많았다 한다.
15 대경들 : 쇠지기등 남쪽에 있는 들판.
16 도찌네미 : 대경들에서 백학면 나부리의 내오촌으로 넘어 가는 고개. 내오촌 마을에 큰 대장간이 있어 대장간의 방언인 '도찌'와 넘는다는 말인 '네미'가 합쳐져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17 쑥구말 : 도찌네미 북쪽에 있던 작은 마을. 골짜기 안에 쑥 들어가 마을이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18 절터골 : 쑥구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강점기 때에는 초가(草家) 형태의 절 건물에 3명의 비구니가 있었다 하나, 절이름 및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19 안미재(內美齋) : 산점리 남쪽에 있던 마을. 산고개(山峴)라는 뜻의 '뫼재'의 '뫼'가 '미'로 발음이 쉽게 변하는 현상에 의해 '미재'로 불리워지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겨쓰면서 그대로 소리빌기를 하여 '美齋'가 된 이름으로, 이 고개를 기준으로 하여 안미재, 바깥미재로 나뉘어 진다. 6·25 전에는 여주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20 바깥미재 : 안미재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진주 정씨와 조주 석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21 안산 : 바깥미재 마을과 푸묵골 사이에 있는 조그만 산. 적성현감을 지낸 정 옥(鄭沃)의 묘가 있다 한다.
22 서오개 : 안산 동쪽, 푸묵골 안에 있는 골짜기.
23 푸묵골 : 안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푹 들어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4 승지골 : 푸묵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25 세고개 : 승지골 동쪽, 작동리와 경계에 있는 고개. 작동리·기곡리, 백학면의 나부리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지형으로 살펴보면 작동리와 기곡리의 사이에 나 있어 원래는 '샛고개(間峴)'일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26 매봉재(175m) : 세고개 남쪽, 기곡리와 작동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풍수지리설로는 매의 형국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담고 있으나, 원래의 의미는 산의 다른 말인 '뫼'가 '매'로 음이 변하면서 같은 뜻의 봉(峰)과 재(峴)가 뒤에 합쳐져 불리워지고 있는 산이름이다.
* 제 보 자 : 정 병 덕(82) 신서면 도신4리 5반
9. 작동리 (鵲洞里)
본래 마전군 서면의 지역으로, 까치와 닮은 형상의 산이 있으므로 '까치울' 또는 '작동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다.
1 차일봉(遮日峰. 152m) : 작동리와 백학면 석장리·백령리의 경계에 있는 산.(석장리편 참고)
2 돌모루(石隅里) : 차일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 산부리 끝을 돌아가는 모퉁이에 마을이 위치하여 '돌모루(回隅)'라 불리웠던 곳이 '돌(回)'이 엉뚱하게도 한자의 '돌(石)'로 음차되면서 '石隅里'로 오기된 곳이다.
3 곰장골 : 돌모루 서쪽에 있는 골짜기.
4 진고개 : 곰장골에서 백학면 백령리로 넘어가는 고개.(백령리편 참고)
5 대식동(大食洞 = 큰밥골) : 오리안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골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밖에 있는 골짜기가 된다 하여 '큰밖골'로 불리웠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밖(外)'을 '밥(食)'으로 잘못표기한 땅이름이다. (백학면 백령리 "밥재" 참고)
6 장승고개(長丞峴 = 장승개) : 오리안봉 서쪽에 있는 고개.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 느즌목이 : 대식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나부리 내오촌으로 넘어 가는 매봉재와 장승고개 사이의 고개가 목이 낮게 늘어져 있다 하여 '낮은목이'로 불리워지던 것이 '느즌'으로 음이 변한 이름이다.
8 까치산(鵲山) : 매봉재 동쪽에 있는 산. 이 산의 모양이 까치와 같은 형국이라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작동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9 새골 : 까치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10 까치울(鵲洞) : 까치산 북서쪽에 있던 큰 마을. 6·25 전에는 상산 김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11 충신이골 : 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12 매봉재(175m) : 까치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꿩사냥을 할 때 이 곳에서 매를 날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 오지만 실제 뜻은 단순히 산의 다른말 '뫼'와 봉우리가 합쳐져 지어진 이름일 뿐이다. (기곡리 "매봉재" 참고)
13 세고개 : 매봉재 북쪽에 있는 고개. (기곡리 "세고개" 참고)
14 쌍소나무백이고개 : 까치울에서 기곡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정상에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 소나무 옆에 서낭당도 있었다 한다.
15 독길 : 까치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의 지형이 돼지형국이라 한다.
16 농박골 : 독길과 가마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17 가마골(釜谷洞) : 까치울 북쪽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은 '크다'는 뜻의 고어인 '감'과 '골'이 합하여 '큰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6·25 전에는 임천 조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다. (연천읍 부곡리 "가마골" 참고)
18 고왕산고개 : 가마골에서 고왕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19 절고개 : 가마골에서 망운리로 넘어 가는 고개.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 오지 않는다.
20 한개울 : 까치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21 오리안봉(五里案峰) : 까치산 동쪽에 있는 동그랗고 조그만 봉우리. 가마골에 있는 사헌부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 묘의 안산(案山)이 되는데, 그 거리가 5리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2 알맹이고개 : 돌모루 북쪽에 있는 고개.
23 검은골 : 망운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24 까치울고개 : 검은골에서 까치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25 망운리(望雲里) : 알맹이고개 북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26 잠바둑골 : 망운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잔바닷골'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27 가마골고개 : 윗새말에서 가마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8 윗새말 : 망대봉 서쪽에 있던 마을. 작동리 새말의 위에 위치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9 망대봉(望臺峰) : 작동리 새말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망을 보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고왕리와 경계가 된다.
30 고왕산고개 : 망대봉과 산제당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고왕리로 통한다.
31 산제당산(山祭堂山. 208m) : 작동리·고왕리·강서리 경계에 있는 산. (강서리편 참고)
32 새말고개(新村峴) : 작동리 새말과 강서리 끄드르미 사이에 있는 고개.
33 새말(新村) : 망대봉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34 해장골 : 새말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다.
35 풍년골 : 해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36 막은쟁이고개(= 망건이고개) : 해장골 아래에 있는 고개. 백학면 석장리와 통한다. (석장리편 참고)
37 달고지고개(月串峴) : 망운리에서 석장리의 달고지로 넘어 다니던 고개.
38 팔매나무골 :망운리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9 배나무골 : 팔매나무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 제 보 자 : 최 한 진(78) 백학면 석장리
10. 고잔상리(高棧上里)
본래 장단도호부 강동면(江東面)의 곶잔리(串棧里)라 하였으나, 조선조 말에 와서 고잔리(高棧里)로 개명하였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강동면 전지역이 마전군으로 편입되면서 강신면(江新面)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고잔리가 상·중·하 3개 리로 분할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연천군 왕징면으로 편입되면서 고잔상·하의 2개 리로 다시 개편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고잔상·하 전지역이 군사분계선을 끼고 있는 완충지대가 되어 지금은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다.
※ 高棧과 串棧의 어원에 대하여
우리의 땅이름 가운데 '곶(串)'이 들어간 곳이 수없이 많은데 특히 바다를 끼고 있는 복잡한 해안선 그리고, 큰 강과 인접해 있는 곳에 많이 나타나며 깊은 산 골짜기에서도 더러 나타난다.
'곶'은 땅의 한 끝부분이 어느 한편으로 불쑥 입처럼 뻗어 나간 곳을 뜻하는데, 고잔리의 경우에는 마량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자락이 고잔리 중앙에서 임진강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일명 '줄바위등'이라 함) 형태의 '곶'이 위치하여 이 곳을 기준할 때 그 안쪽에 마을이 있어 '곶(串) + 안(內)'으로 지명이 통용 되어오다, 차츰 '곶안'이 '고잔'으로 발음되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음차된 한자지명의 '高棧'으로 굳어진 예이다.
1 범바위골 : 줄바위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골짜기 안에 있는 크고 넓은 바위 위에 범이 자주 나와 노닐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고왕산(高旺山·高陽山·말무덤산. 355m) : 고왕리편 참고.
3 약물터 : 고왕산 북쪽, 윗산뒤 골짜기 안에 있는 약수. 많은 양의 물이 암벽 사이를 폭포처럼 떨어져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전설에 따라 물맞이를 했던 곳이었으며, 한발이 심할 때면 기우제도 지냈다 한다.
4 윗산뒤 : 산뒤 동쪽, 산뒤마을 위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3가구가 살았다.
5 안터(內垈) : 산뒤와 윗산뒤 사이에 있던 마을.
6. 등너머 : 산뒤 서쪽, 등 너머에 있던 마을.
7 산뒤(山後洞) : 안터 서쪽에 있었던 마을. 고왕산의 뒤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진주 강씨가 네 집 살았다 한다.
7 등너머 : 산뒤 서쪽, 등 너머에 있던 마을.
8 나븐돌고개 : 고잔상리에서 고왕리의 깊은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고갯마루에 6명이 앉을 만한 푸른빛깔의 넓은 돌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9 쇠재(金尺洞) : 나븐골고개 서북쪽에 있었던 마을. 원래의 의미는 '사이'라는 뜻의 '새'와 고개의 다른 이름인 '재'가 합쳐지며 '고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으나, '새'가 '쇠(金)'로, '재'가 '자(尺)'로 발음이 옮겨지며 엉뚱하게도 한자식 땅이름으로 된 곳이다.
10 한드루 : 쇠재 북쪽에 있던 마을. 산골짜기 안에 비교적 넓고 큰 들이 있다 하여 '큰(大)'의 고어인 '한'과 '들(坪)'이 연철된 '드루'가 합쳐져 붙여진 이름이다. 6 ·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11 백석동(白石洞) : 마량산 서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12 마량산(馬良山, 미량산. 315m) : 고잔상리와 고장리 경계에 있는 높고 뾰족한 모양의 산.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이 고왕산이 되려다 아깝게 밀려 나왔다 하여 '밀린 산'으로 불리워지다 차츰 어휘가 변하여 미량산으로 되었다고 하나, 이는 글자 그대로를 추측하여 풀이한 것일 뿐, '마량'의 어근을 분석해 보면 아래와 같은 본래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량산의 첫 음절은 '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말'은 원래 '위(上)','높음', '신성함', '처음' 등의 뜻을 지녔던 것으로, 지금에 '머리', '마루' 등도 그 뿌리를 '말'에 두고 있다. 또한 이 '말'은 다시 '마리','마루','마라' 등으로 연철되어 지명에 많이 쓰이고 있어 마량산도 역시 '말'이 마라 > 마랑 > 마량으로 연철되어 '높고 신성한 산'이라는 뜻의 '마량산'이 된 것일 뿐, 한자지명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산이름이다.
13 막터골고개 : 미래이에서 고장리의 막터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14 백산(白山) : 고잔상리·고잔하리·고장리의 경계에 있는 산. 옛날에 백씨의 소유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5 미래이 : 줄바위등 북쪽, 마량산에 딸린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 새말(新村) : 미래이골짜기 입구에 있던 마을. 안동 권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17 개미역골 : 도툰영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개미골'로도 불리워진다.
18 도툰영 : 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19 줄바위등 : 고잔상리 중앙에서 고잔하리 쪽으로 뻗은 긴 산등. 이 곳은 고잔리의 유래가 되는 '곶'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으로, 고잔하리의 감투봉까지 내려 오는 산등성이 위에 큰 바위들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까지 이 곳에 살았던 제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산등에 한글로 '고소득'이라 글씨가 새겨진 바 위가 있었다 한다.
* 제 보 자 : 이 재 윤(80) 전곡읍 전곡5리 13반
이 중 휘(74) 전곡3리 7반
임 동 혁(64) 연천읍 상1리 1반
11. 고잔하리(高棧下里)
* 연혁은 고잔상리와 같다.
1 돌세비고개 : 돌세비에서 강서리 여시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2 돌세비 : 장경대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강 언덕. 돌이 많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곳 돌세비의 '세비'는 '큰 강의 옆'이라는 뜻을 가진 '섶'의 어휘 변 화이다.
3 장사바위 : 돌세비 서쪽에 있는 바위. 아주 옛날 장사가 이 바위 위에서 놀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그 모양이 큰 돌 위에 판석(板石) 모양의 자연석이 올려져 있는데, 그 바위 윗면에는 장사의 발자욱이 남아 있다 한다.
4 산재고개 : 응달말 동쪽에 있는 고개. '산(山)'과 고개를 뜻하는 '재(峴)'가 합하여 '산재'로 불리워졌던 것이 뒤에 다시 '고개'가 더해 지며 지어진 이름이다.
5 된재고개 : 응달말 남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매우 가파르고 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강서리의 매지울로 통한다.
6 된밭 : 응달말 남쪽에 있는 밭.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응달말 : 장경대 서쪽, 음지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여흥 민씨가 집성을 이루었었다.
8 당골 : 송촌말 동쪽, 작은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 진천 송씨가 많이 살았다.
9 삼봉(三峰. 238m) : 응달말 남쪽, 강서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정상 부분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문좌수(文座峙. 문좌실. 문좌치) : 삼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11 송촌말(宋村) : 문좌수골짜기 입구에 있었던 마을. 진천 송씨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원주골 : 송촌말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3 천나다리 : 중고잔 서쪽에 있는 징검다리. 6·25 전에는 이 곳이 고잔리의 중심이 되는 사거리가 되어 주막집이 있었다 한다.
14 가마소 : 천나다리 위에 있는 큰 소(沼). 이 곳은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메기가 많이 살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에서 장사가 태어 났는데 마을에서 역적이 태어 났다 하여 그 아이를 죽여버리자 장사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용마(龍馬)가 이 소에 빠져 죽었다 한다.
15 굴우물(窟井洞) : 가마소 남쪽에 있던 마을. 고무래봉 밑에 좋은 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물레방아가 있던 곳이다.
16 정봉(丁峰) : 굴우물 뒤에 있는 봉우리. 고무래와 닮은 모양이다.
17 생골 : 굴우물 남쪽에 있는 골짜기.
18 지막말(紙幕村) : 생골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19 보괭이(寶光洞) : 지막말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20 자개울 : 보광동 안에 있는 골짜기.
21 고왕산(高旺山·高陽山·말무덤산. 355m) : 고왕리편 참고.
22 절터골 : 지막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제보자들의 설문자료에 의하면 보광동의 유래가 되는 보광사(寶光寺) 터로 추측이 되는 곳으로, 6·25 전까지도 축대가 남아 있었고 소량의 와편이 지표에 있었다 한다.
23 양지말(陽村) : 굴우물 건너에 있던 양지바른 마을.
24 감투봉(128m) : 양지말 서쪽에 있는 봉우리. 고잔상리의 줄바위등에서 내려온 능선 끝에 있으며, 정상이 감투와 같은 모습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5 소반쟁이밭 : 감투봉 북쪽에 있는 큰 밭. 골짜기 안이 자그마한 소반(小盤)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6 백산(白山) : 소반쟁이 위에 있는 산. 예전에 백씨의 소유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고잔상리·고잔하리의 경계가 된다.
27 요골 : 소반쟁이밭 동쪽에 있는 골짜기.
28 허뫼기 : 횟돌다리 북쪽에 있는 큰 밭. 밭 가운데에는 크고 넙적한 장사바위가 있는데 그 표면에는 장사의 발자욱이 뚜렷히 남아 있다 한다.
29 횟돌다리 : 양지말 북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횟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0 좁은골 : 퉁퉁말 위에 있는 좁고 가는 골짜기. 예전에 아이가 죽으면 이 곳에 묻었다 한다.
31 퉁퉁말(弓弓洞, 崔村) : 굴우물 북쪽에 있었던 마을. 이 부근의 땅을 세게 디디면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이 '쿵쿵' 또는 '퉁퉁' 소리가 울린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경주 최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았다 하여 '최촌말'이라고도 불리웠다.
32 꽹과리밭 : 옻나무골 아래에 있는 고잔하리에서 가장 좋은 밭.
33 옻나무골 : 괭과리밭이 있는 골짜기. 옻나무가 많았다 한다.
34 장치지골 : 옻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35 수루네미고개(車踰峴) : 장치지골 북쪽, 고장리의 고양대로 넘어 다니던 고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고개로 수레가 많이 넘어 다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하나, 원래는 '수레(車)'와 관계가 없는 '산의 정상을 넘는 고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루'의 어원은 의뜸의 뜻으로 씌었던 우리 고어인 ' '에 원뿌리를 두고 있는데 ' '이 술 > 수리 > 수루 = 수레로 발음이 바뀌면서 넘는다는 뜻의 '네미' 와 합쳐져 '수루네미'가 된 파생 지명이다.
36 매봉재 : 수루네미고개 동쪽, 고장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37 원터골(=원투골) : 중고잔 북쪽에 있는 골짜기.
38 중고잔(中高棧) : 송촌말 북쪽에 있던 마을. 고잔하리의 중앙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단양 우씨가 11대 째 집성을 이루고 살아 '우촌말(禹 村)'이라고도 불리웠던 곳이다.
39 수무능 : 중고잔 동쪽에 있는 골짜기.
40 수무능들 : 고잔하리 중앙에 있는 넓은 들판.
41 주부터 : 도장골 입구에 있는 터로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6·25 전에는 물레방아가 있던 곳이다.
42 도장골 : 주부터 위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은 '산 안의 골짜기'라는 뜻의 '돋안골' 이 변하여 굳어진 이름이다. (군남면 왕림리 "도장골" 참고)
43 박씨터 : 도장골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박씨가 살았던 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4 평풍바위(長景石壁) : 장경대마을 북쪽, 임진강변에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30m 높이의 긴 석벽. 박씨터 골짜기 입구에서 장경대까지 약 500m 길이를 평풍처럼 펼쳐져 있는 이 석벽의 북쪽 끝으로는 '벼락바위'가 있고, 남쪽 끝인 장경대 마을 뒤편에는 큰 바위가 누에처럼 돌출해 있다 하여 '누에머리'라 불리웠다 한다.
45 양지말(陽村) : 응달말 북쪽, 양지바른 곳에 위치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의 이씨가 14대 째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46 장경대(長景臺) : 장경석벽 남쪽에 있었던 마을. 8·15 광복 전까지도 포구가 형성되어 서해안에서 임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이 곳에서 생산되는 곡물, 땔나무 등과 물물교환을 했던 명소였다. 또한 중면 횡산리의 벌말로 건너 다니던 장경대나루터에는 주막집이 있어 여행객들의 쉼터로 이용되었던 활기찬 강촌이었으나,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다.
47 모래둔치 : 장경대 남쪽, 임진강변에 퇴적되어 있는 큰 모래 언덕.
* 제 보 자 : 이 재 윤(80) 전곡읍 전곡5리 13반
최 근(77) 연천읍 상리
이 광 연(74)
이 중 휘(74) 전곡읍 전곡3리 7반
이 기 선(59) 은대3리
첫댓글나의 원적인 왕징면 강내리 이기에 자세히 보려해도 뭐가 뭔지통 모르겠네요(강회백묘)바로 옆이 우리집 터 자리인데 난 기역도 없구 거기 딱 한번 들어가봤어요 어릴적엔 그리도 높던 우리 조상님의 산소가 엄청 낮어졌어요우린 큰 산소라구 부름니다 우리 어머님의 고향도 그쪽인디이씨거던요 아직도 우리 외촌내 가족님 들은 그쪽에 땅을 갖이고 계시던데요 아무튼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가물거리는 골골짝의 이름을 하나하나기억을 더듬어찾아봅니다 빼올 당재 동막골 정겨운 내고향... 가보고싶다
ㅎㅎ 방대한 자료 올리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제보하신 이근호 지회장님의 연세가 지금은 80이 넘으셨는데...
나는 왕징면 고잔하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용규 입니다. 현재는 경기도민회 부회장으로 2010년도부터 여러했동안 경기인지에 경기지역의 역사인물을 집필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만에 고향엘 온듯 추억어린 엣날 어린시절의불럿던 고향의 각 고장의 소지명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감사합니다.....星軒 李鎔奎.
나의 어렸을 때 생각이 남니다.
내고항의옛지명들지금도그곳에사는듯한기분은무얼까요잘보았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