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金氏의 始祖)
한국 제1위의 성씨 인구를 가진 김씨의 본관은 문헌상 623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이 중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본 미만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거의 모두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계와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계의 어느 한쪽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이 두 갈래로 대별된다.
김해김씨로 대표되는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가락국의 임금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이 수로왕 후손 가운데에는 김해김씨 외에 허씨(許氏) 및 인천이씨(仁川李氏)와 함창김씨(咸昌金氏) 등이 있고, 진주김씨(晋州金氏)·수원김씨(水原金氏)·영동김씨(永同金氏) 등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이 중 허씨는 수로왕의 두 아들에게 비(妃)인 허왕후의 성을 계승하게 한 것이므로 이성(異姓)이면서 혈족이 된다. 이 허씨의 후손인 기(奇)가 신라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부터 이씨로 사성(賜姓)을 받아 뒷날 인천에 관적(貫籍)하게 되어 인천이씨가 되었는데, ‘가락중앙종친회’에서는 이들 허씨와 인천이씨를 종친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동성동본이지만 이족(異族)인 김해김씨도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제7대손인 시흥(時興:金寧君)의 후손금녕김씨(金寧金氏)와 임진왜란 때 왜병 3,000명을 이끌고 항복,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된 왜장 사야가(沙也可:金忠善)의 후손이 그것이다. 금녕김씨는 처음에 김해김씨와 혼동되어 ‘선김(先金)’ ‘후김(後金)’이라 하다가 조선 고종 때 금녕김씨로 확정되었다.
경주김씨계의 원조인 김알지는 65년(신라 탈해이사금 9) 경주 계림(鷄林)의 소나무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왕이 ‘김’이라 지어 주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전하고 있는데, 신라 초기의 김씨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알지의 제7대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종(分宗)되고 《김씨대종사(金氏大宗史)》에도 266본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대략 50여 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헌강왕계(憲康王系)의 광산, 무열왕계(武烈王系)의 강릉, 신무왕계(神武王系)의 영동김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신라 마지막임금인 경순왕에게는 아들 9명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넷째 은열(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던 듯하며, 구안동(舊安東)·청풍(淸風)·금녕(金寧)·도강(道康)·전주·양근(楊根:益和)·영광·안산 등이 모두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밖의 경주김씨계로는 선산(善山)·의성·언양(彦陽)·울산·나주·상산(商山)·수원·안로(安老)·연안·순천(順天)·고령·양근 등을 들고 있다. 고로(古老)들은 흔히명문(名門)을 말할 때 ‘연이(延安李氏)·광김(光山金氏)·달서(達城徐氏)…’ 식으로 명문의 서열을 꼽아 많은 김씨 가운데서도 ‘광김’을 으뜸으로 꼽았는데,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는 안동김씨를비롯, 청풍·연안·경주 김씨 등 지난날 이름을 떨친 명문이 많이 있다. 김씨 중 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수를 보면 안동이 315명, 광산 265명, 경주 202명, 연안 163명, 김해 123명, 청풍 110명, 강릉 96명, 의성96명, 선산 60명, 상산 55명의 순이다.
또한 3정승 중 김씨는 52명으로 이씨의 68명 다음인데, 이 중 신안동(新安東)이 15명, 청풍이 8명, 연안·경주가 각 6명, 광산이 5명, 구안동 4명의 순이다. 또 명문의 척도로 삼았던 대제학(大提學:文衡)은 광산이 7명으로 전주·연안 이씨와 더불어 전체 씨족 중에서 수위를차지하고, 신안동 6명, 청풍 3명, 의성 1명이다. 61명의 김씨공신 중 구안동이 9명, 광산·청풍이 각 6명,김해·경주·연안이 각 4명이다.
조선 역대왕비 가운데는 경주·신안동이 각 3명, 청풍이 2명, 연안·광산이 각 1명으로 모두 10명이다. 대대손손 더없는 영예로 알았던 문묘(文廟)에 배향된 김씨는 광산김씨의 장생(長生)·집(集) 부자와 울산김씨의 인후(麟厚), 서흥김씨(瑞興金氏)의 굉필(宏弼) 등 4명이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94만 9642가구에 인구 544만 275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위였으며, 85년도 조사에서는 208만 852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21.7 %,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위를 차지하여 2위인 이씨보다 약 66만 가구나 많았다. 이 중 서울에 34만 가구, 부산·경남에 29만 3000가구, 대구·경북에 24만 7000가구, 광주·전남에 19만 9000가구의 순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김해김씨】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유신(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하는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관(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仇衡)의 증손으로, 그의 조부는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무력(武力)이고, 그의 부친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인이며 당대의이름난 장군인 서현(舒玄), 그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우항(宇杭)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한말 이후 김해김씨는 으뜸가는 성씨 인구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삼현파의 파조(派祖)인 관은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고, 그 5세손인 극일(克一)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차자(次子) 맹(孟)의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 등 세 아들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하였다.
이 밖에 이조참판·시문가(詩文家) 현성(玄成), 사군파 파조(派祖) 익경(益卿), 예조판서 조(), 고려의 좌시중(左侍中)보(普), 조선시대의 무장(武將) 경서(景瑞)·완(完), 학자로는 자정(自貞)·덕승(德承), 화가로는 홍도(弘道)·양기(良驥) 부자 등이 있다.
【경주김씨】 김해김씨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甫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파계가 복잡하지만,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파로는 은열공파(殷說公派)·태사공파(太師公派)·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영분공파(永芬公派)·호장공파(戶長公派)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역대에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은열공파와 태사공파로,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 파에서나왔다.
〈은열공파〉 파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넷째 왕자로 전하며, 중시조는 고려의 장군순응(順應)이다. 조선 전기의 좌찬성 균(d)은 중시조의 12대가 되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명원(命元), 판서 남중(南重), 숙종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주신(柱臣), 좌의정 사목(思穆), 판서·대제학 창희(昌熙), 고종 때의 유명한 총리대신 홍집(弘集) 등이 모두 순응의 후손이다.
〈태사공파〉 태사공 인관(仁琯)은 경순왕의 후손, 혹은 헌강왕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8대손자수(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자결로써 충절을 지켰고, 그의 8세손이며 조선시대의 황해도 관찰사인 홍욱(弘郁)의 자손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은열공파 명원의 자손과더불어 경주김씨의 2대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흥경(興慶), 예조판서 이주(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노경(魯敬), 서예가 정희(正喜), 판서 노응(魯應), 좌의정 도희(道喜), 영조의 국구(國舅)이며 어영대장을지낸 한고(漢考), 우의정 관주(觀柱)가 모두 홍욱의 후손이며, 또한 노론(老論)의 거두 유경(有慶)은 그의종증손이 된다.
〈판도판서공파〉 경순왕의 후손 장유(將有)를 파조로 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판서·제학 정(淨)이다.
〈호장공파〉 대표적 인물은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며 사학자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부식(富軾)이다.
【광산김씨】 신라 헌강왕의 셋째아들 흥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한국의 대표적인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컬어지는데,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시조의 15대손으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정(鼎)의 아들인 약채(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 3형제대에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광김’의 첫 정승(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과 영의정을 지낸 극성(克成)은 이들의 후손이며, 장생은 국광의 5대손이다.
그는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集)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槃)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구영언》을 낸 가인(歌人) 천택(天澤), 영의정 상복(相福), 우의정 희(喜), 이조판서상휴(相休)·기만(箕晩)·기은(箕殷), 대제학 만기(萬基)·만중(萬重)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진규(鎭圭)는 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양택(陽澤)은 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춘택(春澤),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는 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진구(鎭龜)의 후손이다.
【안동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김씨〉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방경(方慶)이다. ‘구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d)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흔(H)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 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 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구(九)가 있다.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안동’의 시조선평(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장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강릉김씨】 시조는 신라의 시중(侍中)·명주군왕(溟州郡王) 주원(周元)이다. 인물로는 3대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기(上琦), 인존(仁存)·고(沽) 형제, 인존의 아들 영윤(永胤)·영관(永寬) 형제, 조선시대의 예조판서 첨경(添慶), 판서 시환(始換)·시형(始炯)·시위(始)·상성(尙星), 판윤 시영(始煐), 우참찬노진(魯鎭), 영의정 상철(尙喆), 판서 화진(華鎭)·상중(尙重), 우참찬 계락(啓洛)·상집(尙集), 공신·판서기종(起宗), 서예가·목사 행(行), 40여 년 간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반(泮) 등이 있는데, 반의 후손을세칭 ‘강서김씨(江西金氏)’라고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릉김씨(江陵金氏)를 빛낸 사람은 생육신의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다.
【연안김씨】 고려 사문박사(四門博士) 섬한(暹漢)을 시조로 하고 있다.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조선시대에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163명을 냈다. 시조의 제5대손 도(濤)가 고려 밀직제학(密直提學), 그의 아들 자지(自知)·여지(汝知)·하(何)가 조선시대에 판서를 지냈고, 자지의 후손에서 영의정 전(詮)·근사(謹思), 대제학 감(勘), 영의정 안로(安老), 선조의 국구 제남(悌男), 부자 영의정 익(?·재찬(載瓚), 우의정 유연(有淵), 정란공신·판서 효성(孝誠) 등이 배출되었다.
【의성김씨】 경순왕의 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인 석(錫)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용비(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용필계에서 대제학·학자 안국(安國), 참판·학자정국(正國) 형제가 나왔고, 용비계에서 부제학 성일(誠一), 대사헌 우옹(宇) 등이 배출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인 근세 인물로는 학자 흥락(興洛), 독립운동가·유학자 창숙(昌淑) 등이 있다.
【선산김씨】 고려 공신·시중 선궁(宣弓)을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 시중 봉술(奉述), 삼사우윤 봉문(奉文)의 대 세계가 갈라져 봉술계에서 고려 말의 절신(節臣) 제(濟)·주(澍), 조선시대의 좌의정 응기(應箕), 동인(東人)의 영수 효원(孝元), 판서 이원(履元)·세렴(世廉) 등이 나왔다. 봉문계에서는 거유(巨儒) 숙자(淑滋), 판서·학자 종직(宗直)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 문과 60명을 배출하였다.
【청풍김씨】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은열(殷說)의 맏아들 정구(正矩)의 10대손이며 고려 말의 문하시중대유(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이 문중에서는 조선시대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을 냈다. 대표적 인물로는 성리학자·대사성 식(湜), 영의정 육(堉), 판서 좌명(佐明), 현종의 국구 우명(佑明), 우의정 석주(錫胄), 정종 국구·판서 시묵(時默), 판서 원식(元植)·경선(景善)·익문(益文), 우의정 구(構), 그의 아들 재로(在魯)와 손자 치인(致仁)의 부자 영의정, 좌의정 종수(鍾秀), 성리학자 종후(鍾厚), 대제학유(), 판서 취로(取魯), 좌의정 약로(若魯), 영의정 상로(尙魯), 판서 종정(鍾正)·동건(東健)·학성(學性)등이 배출되어 이름을 떨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