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이 떠나던 날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쉴 때 하늘도 가만있지 않았다. 지난 8월27일 오후 3시15분.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멎었다. 그가 숨을 멎은 것처럼.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9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폐암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끝내 웃음을 거뒀다. 향년 62세.
‘고이 잠드소서. 가수 하춘화’. 경기도 일산 국립암센터 영안실에 차려진 그의 빈소 입구에 놓인 조화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죽음을 가족 못지않게 안타깝게 여기는 하춘화가 보낸 조화였다.
77년 11월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는 인근의 삼남극장에서 공연중이었다. 폭발사고로 인해 삼남극장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때 이주일은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불길이 치솟아오르는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하춘화를 업고 나와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료이자 벗으로 지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이주일은 그간의 행동이 말해주듯 60여년에 이르는 생의 궤적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폐암 말기임을 선고받고 생명을 갉아먹는 암세포와 처절하게 싸우면서도 자신의 과도한 흡연을 자책하며 금연운동에 나서던 모습은 온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정부는 그가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본명 정주일. 그는 80년 동양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을 통해 브라운관에 얼굴을 드러내면서 단 2주일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후 한국 코미디의 간판 스타로 떠올랐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주일’이란 예명은 방송 2주만에 떴다고 해서 붙여졌다. 숱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 그가 남긴 말들은 지금껏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어록으로 남아있다. ‘수지 Q’ 음악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춤추던 모습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그는 65년 샛별악극단의 사회자로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80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고통스러운 무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940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좌익테러를 당하는 등 가난하고 불운한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힘들게 10대를 보냈다. 오랜 친구인 축구인 박종환(한국여자축구연맹 회장)을 만난 것도 축구로 ‘뭔가 보여주고 싶어했던’ 춘천고 시절이었다.
61년 군에 입대, 군예대에 배속돼 처음으로 무대에 서며 희극배우 수업을 쌓은 그는 제대후 64년 서울로 올라와 약장수들의 쇼 MC를 맡으며 소위 말하는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유랑극단을 전전하던 이주일은 때로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때로는 연예인들의 엄격한 위계질서에 짓눌리며 무명의 설움을 삼켜야 했다.
그의 빈소가 차려진 국립암센터에는 코미디언·가수·영화배우 등 연예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고, 정치권에서도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남편을,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의 슬픔은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가 숨을 멎기 두 시간 전 개그맨 이봉원이 병문안을 왔을 때 이주일의 부인 제화자씨(64)는 “남편의 옷(수의)을 가지러 집에 가야겠다”며 급히 분당 집으로 향했다. 제씨가 병원으로 돌아와 막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담당의사는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두 딸과 함께 남편의 임종을 지켜본 제씨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계속) |
첫댓글 뭔가 보여준 이주일씨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아~~~~~못 생겨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