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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7
♣비명碑銘
해현노화상은 불문의 모범이십니다.
경참법회를 하지 않으셨고,
재물과 이익을 멀리 여의셨습니다.
(주) 경참법회 : 죽은 이를 위해 경전을 독송하며 참회하고 예배하여 복을 빌어주거나 천도해주는 법회.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셨으며,
사부대중이 다 존경하고 우러러 흠모하였습니다.
성실하게 염불하셨으며,
도는 평상에 있으셨습니다.
정토대경 《무량수경》은 모든 부처님의 밀장이며,
한 마디 “아미타불” 명호는 매우 깊고 미묘한 선입니다.
112세의 고령으로, 연로하지만 기운은 더욱 왕성하셨습니다.(한국연세 114세)
오직 승가가 승가를 찬탄해야 불법 문중이 흥성합니다.
보현의 행원을 널리 펴시고, 법을 나타내 장애를 여의셨습니다.
부처님의 혜명을 이으셨으니, 공덕이 한량이 없습니다.
자재하게 왕생하시어, 이미 자비의 배를 갈아 타셨습니다.
(賢公和尚, 佛門榜樣. 不事經懺, 遠離利養. 嚴持戒律, 四眾欽仰. 老實念佛, 道在平常. 淨土大經, 諸佛密藏. 一句彌陀, 甚深妙禪. 百一十二, 老當益壯. 唯僧讚僧, 法門興旺. 弘普賢願, 表法離障. 續佛慧命, 功德無量. 自在往生, 倒駕慈航.)
(주) 도가자항 倒駕慈航 : 수행의 목적은 바로 삼계를 벗어나고 인간세상의 고해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영원한 해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속히 이 인간세상의 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다시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러나 불보살께서는 자비하시어 비록 자신이 수행하여 성취하셨을지라도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안락한 정토에서 도리어 고난의 인간세상으로 돌아와 모태에 들어가 사람으로 태어난 후에 출가하여 법사가 되어 경전을 강설하고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비유하면 자신이 고해를 건넜지만 다시 돌아와 고난의 사람이 고해를 벗어나도록 돕고자 하기 때문에, 불보살의 이러한 행위를 “도가자항倒駕慈航”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 등은 모두 고불古佛이 자비의 배를 갈아타시고 이 인간 세상에 와서 고난을 구제하는 것이다. 간혹 고승대덕을 찬탄할 때, 또한 “도가자항倒駕慈航”을 가지고 형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미 정과正果를 증득한 성인이 다시 육도로 돌아와 사람들을 고해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을 가리킨다. “도가倒駕”는 그는 과지果地에 있으면서 대원大願에 따라 응당 있어야 하는 극락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고해 속으로 와서 “자항慈航(자비로운 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승가가 승가를 찬탄해야 불법이 흥성합니다(승찬승). 내용이 들어있는 책을 들고 계십니다. 이 책을 보시고 자진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처음 청하시고, 가사를 입으신 후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자재열반하셨습니다.
♣만련挽聯
48대원, 한 권의 대경(《무량수경》), 한 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로 극락에 왕생하셨습니다.
112세 동안 오로지 정법을 펴고, 오로지 정법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이 사바에 돌아오셨습니다.
(四十八願, 一部大經, 一句佛號, 往生極樂; 百十二歲, 專弘正法, 專護正法, 重返娑婆.)
해현노화상은 왕생하시기 20일 전에 사원 안의 제자 몇 사람에게 이르시길, “나는 올해를 넘기지 않을게다.”(我過不去這個年了)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모두 그럴 리가 없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스승께서는 대단히 건강하셨고, 결코 조금도 평소와 다른 것이 없어 보였으며, 가신다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어찌 그렇게 쉽게 곧 바로 가실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지 며칠이 지난 후, 노화상은 동백현桐柏縣 평씨진平氏鎭에 있는 고봉사孤峰寺에 가서 자신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옛 벗인 “철각승鐵腳僧” 연강演强법사를 문안하러 가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노화상은 자신과 함께 간 왕춘생 호법거사의 손을 이끌면서 말씀하시길, “난 머지않아 곧 갈 거네. 부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갈 것이네.”(我很快要走了, 老佛爺喊我去了.)라고 하셨습니다. 왕춘생노거사는 스승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듣고 싶지 않아 즉시 말씀을 막았으며, 노화상께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고봉사를 떠난 후, 노화상은 또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해준 사원과 일찍이 상주하면서 수행한 적이 있었던 사원들을 각각 한 차례 들러 보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이후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以後我不再來了.)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스승의 몸이 여전히 건강하신 것을 보고는 노화상의 말씀을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노화상은 왕생하시던 하루 전날 오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사원 문 앞에 있는 채소밭을 갈아 엎으셨으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내내 계속해서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노화상께 이제 그만하고 쉬실 것을 권하자, 말씀하시길, “이 일을 다 마치고나면, 이후로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네.”(幹完了, 以後就不再幹了.)라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길, “마음속에 보리가 있는데, 어찌 구태여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부처님 다리를 붙들려 하느냐? 스스로 속세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자연히 극락이 마음에 있다.”(胸有菩提, 何必臨時抱佛腳? 身無俗念, 自然極樂在心頭.)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노화상께서 왕생하신 후 자신들에게 하셨던 말씀들을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고서야 이미 왕생하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미리 아셨으며, 그래서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신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노화상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실 때, 어떤 한 대덕이 왕생하시기 전에 미리 노화상을 위해 일생의 전기를 정리하라고 일깨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께서 언제나 늘 건강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내일來日이 여전히 길며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 탓에 오늘 이미 지나간 일을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인지법사와 인함법사의 인솔 아래, 저희 못난 제자 몇 사람은 심혈을 기울여 노화상께서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 찾아가 탐방하였으며, 학인들을 독려하기 위해 노화상의 일생 동안의 연보年譜 중 중요한 내용들을 발췌하였습니다.
노화상의 속성은 문文씨이고, 이름은 천현川賢이며, 자는 청선清選이십니다. 선조는 예남豫南 당하현唐河縣 소배사진少拜寺鎭에 사셨습니다. 노화상은 청나라 말 광서 26년(1900년) 8월에 태어나셨습니다. 부모와 조부모께서는 모두 독실한 불제자이셨으며,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힘쓰는 전통을 이어 받았으며, 선행을 즐겨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마을에서 큰 선인(大善人)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현공은 태어나면서 난세를 만나, 《시경》과 《예기》 등 고대문헌을 깊이 공부할 수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다만 어머니를 따라 소식素食과 염불을 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스승은 타고난 천성이 순박하고, 숙세에 닦은 선근이 깊고 두터웠으므로, 어린 나이에 이미 “효행”으로 마을에 이름이 났었습니다. 성현은 대다수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불우한 처지를 만나고, 영웅은 반드시 고난을 받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현공은 12살 때, 그의 부친은 호북성 수주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다가 도적떼들이 불을 질러 민가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즉시 바로 물을 길어 불을 껐으며, 이로 인해 그 도적떼들에게 잔인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며칠 후 도적의 난을 피해 도망쳤던 사람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때, 참으로 놀랄만한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단지 시신 하나가 꼿꼿하게 커다란 나무를 꽉 끌어안은 채 서 있고, 굶주린 개떼들이 땅에 빙 둘러 앉아 그 시신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굶주린 개떼들이 죽은 사람의 몸뚱이를 서로 다투어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서 여러 사람이 다함께 굶주린 개떼들을 쫓아내려고 그 앞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굶주린 개떼들은 몽둥이로 매를 맞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죽어도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이 개떼들이 원래 선량한 사람을 위해 그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할진대, 사람이 어찌 이를 보고 차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본 사람은 이로 인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태평성세의 개가 될지언정, 전쟁이 있는 어지러운 세상의 사람이 되지 않겠다.”(寧爲太平犬, 不做亂世人.)는 속담이 있습니다. 현공은 형제가 다섯 분이며,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어머니가 겪으신 고초는 차마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18세 때에 현공은 허벅지에 옹창癰瘡이 나서 살이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사방팔방을 돌아다니시며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았지만, 병의 증세가 너무 심각하여 손을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스승은 인과를 깊이 믿었으므로, 탄식하며 “아무리 좋은 묘약도 업으로 인해 얻은 병은 고치기가 어렵다.”(妙藥難醫冤業病)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마침내 의약으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포기하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심으로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성스러운 명호를 칭념하였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스승의 고치기 어려운 이 옹창이 아무런 약을 쓰지 않았는데 저절로 싹 다 나았습니다. 스승은 이 일로 인해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진실하고, 확실하여 거짓말이 없으며, 또한 관세음보살은 “모든 고통과 액난을 제도하신다.”(度一切苦厄)는 말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더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이 생사의 대겁大劫을 겪은 이 일은 현공으로 하여금 윤회의 길은 험하고, 생사의 일이 중대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어, 마침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민국 9년(1920년), 현공은 나이 20세 때 마음을 굳게 먹고 뜻을 정해 어머니께 절하고 작별인사를 하고서 동백산桐柏山 태백정太白頂 운대사雲臺寺의 전계傳戒노화상께 귀의하였습니다. 전계노화상은 친히 현공의 머리를 깎아주어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법명은 “해현海賢”이라 지어주고, 자字는 “성성性誠”이라 지어주셨습니다. 그 후 현공은 23세 때 호북성 영보사榮寶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전계노화상은 본래 임제종 백운白雲선사(송나라 때 고승) 계파系派의 일대一代 대덕이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공에게 앉아서 참선할 것을 가르친 적이 없으시며, 또한 경전강설과 설법을 가르치시지도 않으셨으며, 오직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六字洪名만을 전하셨으며, 늘 언제나 계속해서 끊임없이 칭념할 것만을 부촉하였을 뿐이셨습니다.
민국 25년(1936년), 현공의 나이 36세 때, 여러 해 동안 헤어져서 살았던 큰 형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현공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의 생활형편이 너무나 지나치게 어렵고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현공은 어쩔 수 없이 큰형을 동백산에 간소하게 안장하였습니다. 현공은 왕생하시기 하루 전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거사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날 현공은 그 거사에게 꿈에 큰 형이 찾아 와서 천도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가 안장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는 말을 들려주셨습니다. 현공의 이처럼 형제의 정이 깊고 혈육의 의리가 돈독함은 바라보고 있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속이 따뜻해지게 하십니다.
현공의 두 분 형님과 동생이 잇달아 계속해서 세상을 떠난 후, 노모의 연세가 이미 고령이 되었어도 곁에서 봉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노화상은 그 즉시 어머니를 산으로 모셔와 보살피셨습니다. 1956년 음력 8월, 현공의 노모께서 별안간 느닷없이 고향 옛집으로 돌아가 사시고자 한다는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그러자 현공이 간곡하게 가시지 말 것을 한사코 권하였지만, 끝내는 만류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노모를 모시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생산대生産隊의 채지菜地에 있는 세 칸짜리 초가집에서 잠시 머물러 사셨습니다. 그 이듬 해(1957년) 초가을 어느 날 저녁에 노모는 손수 만두를 빚어서 드신 후 저녁에 문 맞은편에 있는 바깥채에서 주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바깥채에는 모기가 너무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노모께서 말씀하시길, “그래도 어째든 내가 방안에서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정오에 88세의 노모는 자재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의 생활여건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현공은 어머니를 위해 3일 동안 염불하신 후, 얇은 널빤지로 된 관에 노모를 간소하게 안장할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은 언제나 현공의 마음에 걸려 어머니의 한없는 깊은 은혜에 그지없이 송구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8년이 지난 후, 현공은 어머니를 위해 묘를 이장하고 묘비를 세우고자 발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하였던 일이었겠습니까? 묘혈墓穴을 파서 열어본 결과, 뜻밖에도 관속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안에는 단지 관을 박을 때 썼던 큰 못 몇 개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주) 생산대 : 중국사회주의 농업경제 가운데의 일종의 조직형식을 가리킨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과거 세상․현재 세상․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의 정업淨業의 정인正因입니다. 이에 연지蓮池대사께서는 “부모가 속세를 떠나야 자식의 도가 비로소 성취된다.”(父母離塵垢, 子道方成就.)고 강설하셨습니다. 현공의 어머니는 보살이 응화應化하심이 마치 달마대사가 짚신 한 짝을 어깨에 걸고 계셨던 것처럼 유희신통遊戲神通하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우리들 범부의 경지로는 당연히 감히 망령되이 단정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현공의 지극히 순수하고 진실하신 효심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오체투지하게 하기에 충분하시며,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러러 흠모하기에 충분하십니다!
(주) 정인正因 :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이 닦은 세 가지 정업(즉 三福)을 가리킨다.
(주) 연지대사 : 1535~1615년. 정토종 제8대 조사.
(주) 부모님을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면, 오직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여 아미타불에게 의지하여 금생에 극락왕생함을 살아 있을 때 성취해야 비로소 부모님께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갚을 수 있다.(유소운거사)
현공은 일찍이 동백산의 도화동桃花洞, 운대사雲臺寺, 탑원사塔院寺에 상주하시면서 14곳의 황폐한 산을 개간하신 적이 있고, 또 사람들을 도와 11곳의 도량을 세우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외에도 종문宗門의 고승이신 해묵海墨법사(자는 大黑), 해원海圓법사(자는 性空), 체광體光법사(법명은 印玄)와 탑원사에서 초막집을 짓고 함께 수행하신 적이 있습니다.(대략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해묵법사는 대대로 학문하는 가문의 출신으로, 일찍이 황포군교黃埔軍校의 학생이셨으며, 경전의 교의敎義를 궁구하기를 좋아하셨고, 경전강설을 대단히 잘 하셨습니다. 1968년 음력 9월 23일, 폐관閉關하고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셨으며, 마침내 왕생할 때가 이르렀음을 미리 아시고는 가부좌를 하시고서 원적하셨습니다.
해원법사는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셨으며, 평생 《능엄경》을 수지 독송하셨고, 선종禪宗과 정종淨宗을 둘 다 닦았으며, 일찍이 북경 영광사靈光寺에서 불아사리탑佛牙舍利塔을 21년 동안 수호하였던 적이 있으십니다. 기묘년 음력 12월 26일(2000년 2월 1일)에 96세의 고령인 해원법사는 편안하게 원적하셨으며, 다비를 마친 후 거의 2천 개에 가까운 오색이 영롱한 사리를 거두어 얻었습니다.
체광법사는 근성이 비범하셨으며, 일찍이 허운虛雲노화상, 원영圓瑛법사, 래과來果선사 등 여러 대덕고승들을 친근한 적이 있으시며, 특히 허운노화상의 지극한 찬탄을 받으셨습니다. 갑신년 음력 12월 15일(2005년 1월 24일)에 단정하게 앉아 원적하셨으며, 허운노화상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고 공인받고 있습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텅 빔에 이르렀을 때 이익을 받을 수 있고, 일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면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心至虛時能受益, 事非經過不知難.)고 하셨습니다. 현공은 항상 이 지난 일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세 분 법사들께서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신 공부를 있는 힘을 다해 찬탄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현공의 자신을 낮추시고 남을 높이시는 한없이 넓으신 도량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은 사원에 와서 경서를 불사르고 불상을 훼손시키고 승려들을 강압적으로 환속할 것을 핍박하였습니다.
(주:문화대혁명: 공산화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에 "종교는 아편"이라는 이름으로 종교탄압이 극심하였음 )
일체 모든 법(현상)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나며, 또한 인연으로 인해 없어집니다. 중생의 공업共業으로 인해 생겨나고, 역사의 조류로 인해 발생한 일은 설사 보살이 세상에 감응하실지라도, 그저 공연히 큰 소리로 외칠 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현공은 산 아래 마을에서 생산대 대장으로 배치를 받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염불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현공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염불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 절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현공은 저녁에 몰래 절하셨습니다. 큰솥의 밥 안에 매운 냄새나 비린내가 나는 오신채나 고기가 들어있을 때에는 현공은 솥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푸성귀를 드셨습니다. 이처럼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더욱 훌륭하신 점은 현공은 언제나 줄곧 대중을 위해 승보의 형상을 나타내 보이신 점입니다.
현공의 인품은 진실하고 순후하고 선량하시며, 사람들을 대할 때 늘 온화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현공 곁에 가까이 가기를 원하였으며, 현공을 친근하게 “문제공文齋公”이라 불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제자들이 현공께 당시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결연하게 환속을 원하지 않으셨느냐고 여쭈었을 때, 글을 전혀 배워본 적이 없으신 이 어르신께서 오히려 입을 열어 하늘과 땅을 뒤덮을 만한(蓋天蓋地) 말씀을 몇 마디 하셨습니다. “불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이 부처임을 알아야 하고, 수행은 반드시 계율로서 스승을 삼아야 하네. 출가했다가 다시 환속하는 것은 꽃을 피우지 못한 것만도 못한 일이야.” (學道當知心是佛, 修行應以戒為師. 出家再返家, 不如不開花.)
(주) 蓋天蓋地 : 불교술어로, 천지를 뒤덮는다는 뜻이다. 또는 “보천보지普天普地”라고도 말한다. 자신의 의기意氣가 가득 차 넘쳐 우주에 충만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문화대혁명시기에 홍위병이 전계화상의 사리탑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영골(靈骨: 사리)이 보이지 않아 몹시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현공은 나중에 현공이 탑 아래의 청석판青石板 밑에서 전계화상의 영골을 찾고는 마음속으로 전계노화상께서 과연 진실로 평범하지 않으시며, 확실히 천지를 통찰하는 뛰어난 지혜가 있으심을 찬탄하였습니다. 그래서 현공은 전계화상의 영골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잘 보존해 두었다가 문화혁명이 끝난 후 여러 동문同門 학인들과 함께 새로 탑을 세워 전계화상의 영골을 봉안하셨습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났음을 선포하자, 래불사의 많은 호법거사들은 그 당시 현공이 계시던 탑원사에 가서 래불사로 오시어 정법正法을 주지하고 도량을 회복할 것을 청하기로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전란과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익대사께서 연지대사를 찬탄하실 때 말씀하신 “단지 몸 둘 곳을 튼실하게 하기만을 꾀할 뿐, 어찌 구태여 문과 뜰을 보기 좋게 꾸밀 필요가 있으랴!”(只圖腳底著實, 何必門庭好看!)라고 하신 뜻을 현공은 깊이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대전大殿 세 칸과 서쪽 곁채의 나한전 세 칸을 세웠으며, 받들어 모신 성상聖像은 모두 진흙으로 빚은 것입니다.
(주) 우익대사 : 1599~1655년. 정토종 제9대 조사
(주) 연지대사 : 1535~1615년. 정토종 제8대 조사
1991년, 해경법사는 원적하시어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을 성취하셨습니다. 2005년, 이미 105세의 고령이 되신 현공은 해경법사에게 금신金身으로 장엄하게 해주기 위해 멀리 광주에 가셨다가 그때 우연히 티베트의 제11대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 판첸라마)와 만나셨습니다. 이 젊은 법왕자法王子는 현공을 마치 살아 계신 부처님처럼 받드셨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현공을 청해 함께 점심 공양을 하고 또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셨습니다. 당시에 어떤 한 서법가가 현공께서 10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이 건강하시고 정신이 맑으신 모습을 보고는 특별히 어르신께 양생의 비결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르신께서는 이는 모두 계율을 엄격하고 지키고, 성실하게 염불한 공덕으로 얻은 이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서법가는 정성을 다해 이마가 땅에 닿도록 구부려 절을 하였으며, 현공께서는 마치 조주趙州선사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신 것 같다고 찬탄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그 자리에서 즉시 붓을 휘둘러 양만리楊萬里가 지은 시 《영국詠菊》을 인용하여 현공을 찬탄하였습니다.
(주) 조주선사 : 778~897년.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종 승려
(주) 양만리 : 1127~1206년. 남송시대의 유명한 문학가이며 시인
천지의 만물은 본래 모두가 제각기 타고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物性從來各一家)
어느 것이 한랭하고 메마른 때를 탐하고, 좋은 시절인 따스한 봄빛을 싫어하겠는가? (誰貪寒瘦厭年華?)
국화가 스스로 바람 불고 서리 내리는 땅을 선택한 것이지, (菊花自擇風霜國)
봄 햇살이 국화를 외면한 것은 아니라네. (不是春光外菊花)
현공은 일찍이 래불사 산문 입구에 “칠점반화”(七點半花: 일곱 시 반에 피는 꽃)라고 이름 하는 기이한 꽃을 심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 꽃은 오직 저녁 7시 반부터 8시 반 사이에만 꽃이 활짝 핍니다. 2010년 가을에 현공은 제자 몇 분을 데리고 앉아서 이 꽃이 피는 사랑스런 광경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인지법사가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동영상을 보면 여전히 마치 어제의 일과 같아 향기롭고 따스함을 더욱 더 느끼게 해줍니다.
(주: 칠점반화 : 저녁 7시 반쯤이 되면 달맞이꽃처럼 생긴 칠점반화는 갑자기 봉오리가 확 벌어져 핍니다. 맨눈으로 꽃이 갑자기 움직이며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https://youtu.be/EZpxcdVAZrI
칠점반화(일곱시 반꽃) 가 피는 것을 보시려면 40분 26초부터 보시면 됩니다.
타임랩스(time laps) 필림이 아니고 그냥 실시간으로 찍은 필림입니다.
인광印光대사께서는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염불하라”고 하시며 강설하시길, “염불해야 숙세에 지은 업을 없앨 수 있으며, 정성을 다해야 범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 3대아승지겁 동안 복덕과 지혜를 닦을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 글자에 의지해야 삼계육도를 벗어날 수 있다.”(念佛方能消宿業, 竭誠自可轉凡心. 不用三祇修福慧, 但憑六字出乾坤.)고 하셨습니다. 꽃은 감정이 없는 무정물無情物인 초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에게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거늘, 하물며 성현이신 불보살님들께서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응당 더욱 더 신심을 견고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범음梵音은 청정하니, 어찌 속이는 거짓된 말씀이 있겠습니까? 아미타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며, 절대로 공허한 원이 없으십니다!
(주) 인광대사 : 1861~1940년. 정토종 제13대 조사
현공은 항상 제자들에게 훈계하며 말씀하시길, “좋은 화상이 되고 싶으면, 우선 먼저 좋은 아녀자가 되라.”(要做好和尚, 先做好婆娘.)고 하셨습니다. 2012년 3월, 원명사 주지이신 인영법사가 현공을 모시고 원명사에 가서 잠시 지내시게 하셨을 때, 공경의 뜻으로 노화상께 승복 한 벌을 마련해드렸습니다. 노화상께서는 승복을 입어보시고는 길이가 좀 길다는 느낌이 들자, 그 자리에서 바로 자신이 손수 바늘귀에 실을 꿰어서 순식간에 금방 승복의 가장자리를 감쳐서 올리셨습니다. 이러한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그때 마침 절에 와서 예불하던 한 거사가 동영상으로 찍었으며, 이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하고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영사집의 이 부분까지 읽고서 놀라 감탄하는 것 이외에, 마음속으로 또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문에는 “입속으로 바늘을 던져서 과연 구마라십처럼 경전을 번역할 수 있으면 한 치의 금도 녹이기가 쉽지만, 밥을 먹고 가서 미륵의 불룩 나온 큰 배를 본받지 않는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시키기가 어렵다.”(投起針來, 果能羅什譯經, 寸金易化; 吃了飯去, 不學彌勒大肚, 滴水難消.)라는 대련의 글귀가 있습니다. 현공처럼 할 수 있는 이가 천 년에 몇 사람이나 견줄 수 있겠습니까?
(주) 投起針來 :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구마라십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황제가 강제로 그에게 많은 궁녀들을 아내로 삼으라고 핍박하자, 그를 본떠서 그대로 따라서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는 이렇게 하면 불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집회 때 한 동이의 바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삼켰는데, 그 바늘이 다시 털구멍 속에서 뿜어 나왔다. 그렇게 한 후,
대사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면 나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 감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규칙을 따르고 법에 의거하여 수지修持하였다고 한다.
2012년 중추절 전날 밤, 남양의 거사 몇 사람이 래불사에 현공을 뵈러 왔습니다. 그때 현공은 순간 갑자기 동심童心이 크게 발동하여 기어코 사원의 감나무 위에 올라가 감을 따서 사람들에게 먹이고자 하셨습니다.(112세로 입적하시기 넉달전) 당시에 모두가 이 장면을 보고서 감탄해 마지 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 장면을 세심한 거사 한 분이 카메라를 들고서 사람들을 위해 그지없이 아름다운 이 영상자료를 촬영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믿지 못할 것이며, 이 진정한 절묘絶妙함은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나라 때 선문禪門의 고승이신 조주화상은 80세의 고령에 행각을 함으로 인해 천고千古의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한 마디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만을 칭념하신 우리의 이 인적이 드문 황량한 암자의 노승과 비교하면, 아마도 조주선사 자신조차도 틀림없이 자신이 현공만 못하다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六字洪名의 미묘하여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움을 여기에서 또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2012년 중추절이 지난 후, 남양거사가 예의를 갖추어 현공께 남양의 염불당에 오셔서 잠시 지내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시에 몇 분의 거사들이 노화상과 담소를 나눈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거사들이 현공께 “염불할 때 어떤 경계가 있으셨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노화상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입을 다무시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증국번曾國藩이 쓴 대련에 보면, “천지신명이 기대어 의지하는 것은 장차 덕에 있을 것이니, 솥의 경중은 물어서는 안 된다.”(神所憑依, 將在德矣; 鼎之輕重, 未可問焉.)라고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불문佛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은 종문宗門은 경계를 말하는 것을 꺼리고, 교하敎下는 공부功夫를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원영圓瑛법사 역시 일찍이 제자들을 일깨우신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으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좋아하여 오히려 자신의 진짜 머리를 잃어버리고서 밖을 향해 찾는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원래 부처이니, 단지 밖을 향해 찾던 눈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본심을 관조하여 곧 바로 그 자리에서 승당할 뿐이다.” (道不遠人, 切忌認影迷頭向外尋覓; 心原是佛, 但向迴光返照直下承當.) 현공은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르셨으니, 이미 미타의 집 문밖의 손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중국번 : 1811~1872년. 청나라 때 정치가이자 학자.
(주) 이는 천지신명은 장차 덕이 있는 사람 중에서 통치할 사람을 선택할 것이니, 지금은 천하를 빼앗는 것을 아직은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리킨다.
(주) 원영법사 : 1878~1953년. 근대 불교의 대덕
(주) 자신의 그림자 : 망상妄想을 비유
(주) 진짜 머리 : 진성眞性을 비유
“진정한 앎은 몸소 실천하는 데에서 나오며, 현묘한 이치는 몸소 실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眞知出實踐, 妙理貴躬行)고 하였습니다. 현공은 비록 글자를 알지 못하셨을지라도, 그러나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면 오히려 언제나 현묘한 말씀이 마치 구슬이 꿰어져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듣는 이들이 왕왕 뜻밖의 말씀에 크게 감동하였고, 그 놀라움과 기쁨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2012년 음력 8월 어느 날, 현공께서 한창 장작을 패고 계실 때, 외지에서 온 거사 몇 분이 래불사에 염불하러 왔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서 정중하게 절을 한 후, 노화상께 자비하신 마음을 베풀어 법문을 해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노화상은 여전히 그대로 앉아서 장작을 패시면서 말씀하시길, “무슨 해줄 만한 법문은 없으며, 열심히 염불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마음이 전일하지 못함을 두려워할 뿐이요.”(沒啥可開示的, 好好念佛! 世上無難事, 只怕心不專.)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노화상의 말씀을 들은 후, 노화상을 위해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너무나 훌륭하신 말씀이라 외쳤습니다. 노화상은 어조에 무게를 두고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셨습니다. “진실로 어려운 일이란 없습니다!”(眞沒有難事啊!)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어느 곳에서 왔는지를 물으셨으며, 그들이 대답하자 노화상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곳은 작은 절인지라, 먹는 것은 맛없는 쓴 음식뿐이고, 입는 것은 다 떨어져 기운 옷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이상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고통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제가 나무라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미 온 이상 이곳의 계율을 지키셔야 합니다. 어디를 가거나 간 그곳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俺這是小廟, 吃的是苦的, 穿的是補的. 你們來這兒要能受苦, 能受苦才能了苦. 你不來, 我不怪, 來了就要守我戒. 走到哪裏要守哪裏規矩.) 어르신의 평범하신 이러한 말씀들을 이 세상에서는 지금껏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거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를 불렀으며, 깊은 감동으로 마음속이 전율하였습니다. ……
《논어》의 〈학이〉편에는 공자의 제자인 단목재가 스승인 공자는 “온화(溫), 선량(良), 공손(恭), 검소(儉), 겸양(讓)”의 다섯 가지 미덕을 가지고 계시다고 찬탄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현공이 자재하게 왕생하실 수 있었던 원인을 총결할 때, 현공의 일생의 품행品行과 도의道義를 자세히 관찰하면 바로 공자가 가지고 계셨던 이 다섯 가지 미덕을 현공 역시 똑같이 원만하게 구족하고 계셨음을 발견하였습니다.
현공의 성품은 온화하며 화를 내신 적을 본 사람이 없으며, 진실로 “모든 일을 웃어넘기시고 사람들에 대해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신 분”(凡事付之一笑, 於人無所不容)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녀노소, 승가와 속가를 막론하고, 현공을 가까이 한 사람들 중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 현인이 말씀하시길, “마음속의 성냄의 불을 꺼버리고, 다 탄 심지를 잘라 내어 부처님 앞의 등불을 밝혀라.”(滅卻心頭火, 剔起佛前燈.)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응당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불문에 들어가는 대 전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공은 일생 동안 자애하신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셨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인연과 본분을 따라 일찍이 대중들로 하여금 조금의 번뇌도 일어나게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어르신은 여러 차례 제자들을 훈계하며 말씀하시길, “차라리 오신채를 먹은 입으로 염불할지언정, 소식素食을 한 입으로 사람을 욕해서는 안 된다.”(寧可葷口念佛, 不可素口罵人.)고 하셨습니다. 주안사 선생의 시에서 말하길, “인仁은 오상五常 중의 첫 번째 자리에 열거되고, 자비는 모든 덕 중의 첫 번째 자리에 거한다. 위대하구나! 유․불․도 세 가르침의 도리가 입은 다르지만 선설宣說하는 것은 똑같다.”(仁列五常首, 慈居萬德先. 皇哉三教論, 異口若同宣.)고 하였습니다. 본래 이러한 점이 바로 성현과 범부가 서로 구별되는 곳입니다!
(주) 오상 五常 :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주) 《安士全書‧萬善先資》에 보인다.
현공은 일생 동안 정중하고 예의가 바르셨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예불하실 때 방석을 깔고서 절을 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일찍이 현공이 어느 누구도 비방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 아미타불! 《역경》에 이르길, “공경하고 신중하면 무너지지 않는다.”(敬愼不敗也.)고 하였습니다. 인광대사께서 “성誠”과 “경敬” 이 두 글자가 빠르고 신속하게 성취하는 유일한 지름길이라 인가하셨으니, 우리는 응당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현공이 평생 동안 행하신 근면과 검소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남겨주신 인상이 특히 깊습니다. 현공은 항상 말씀하시길, “채소를 다듬을 때 푸른 잎을 떼어내어 버리지 않은 것은 《황제내경》을 읽는 것보다 낫다.”(擇菜不丟青, 勝似念黃經.)고 하셨습니다. 노화상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그때까지도 저희 범부는 현공의 말씀 속의 미묘한 곳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자세히 음미하니, 홀연히 석가세존께서 임종할 때 남기신 가르침인 “고통을 스승으로 삼고, 계율로서 스승을 삼으라.”(以苦爲師, 以戒爲師)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으며, 또한 백장百丈선사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고 하신 법어法語가 생각났습니다. 이로 인해 노자老子가 무엇 때문에 일찍이 스스로 자신은 세 가지 법보法寶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자애이고, 둘째는 검소이고, 셋째는 천하 사람의 앞에 거하지 않는 것이다.”(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라고 말씀하였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 옛날 현인의 대련에 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시게나. 몇 사람이나 밥이 쌀로 지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사자좌 위의 부처님을 보시게나. 또한 밭이 마음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네.”(試問世間人, 有幾個知道飯是米煮? 請看座上佛, 亦不過認識田自心來.)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거늘, 어찌 “검소(儉)”란 이 글자를 감히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주) 황제내경 : 중국에 현존하는 의학 이론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
(주) 백장선사 : 726~814년. 중국 선종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며, 당나라 때의 선종 고승이다. 마조 도일선사의 법사이며, 선종총림청규를 만들었다.
(주) 三曰不敢爲天下先《도덕경》67장에 보인다.
현공의 오랜 친구이신 “무쇠 다리 승려”(鐵腳僧) 연강법사가 현공에 대해 말씀하시길, “현공은 틀림없이 불보살이 응화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그분이 이 한 평생 동안 어떤 사람과 무엇을 얻기 위해 말다툼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賢公絕對是佛菩薩到世間來應化的, 人家這一輩子, 我沒有聽說過他和哪個人爲爭啥東西起過爭吵.) 고 하셨습니다. 세존께서 일찍이 한 구절 말씀으로 너무나도 대단한 천기天機를 설파하시길, “일체 법은 ‘나’가 없나니, 인욕에서 성취할 수 있다.”(一切法無我, 得成於忍.)고 하셨습니다.
2008년 가을에 현공은 래불사를 인지법사에게 부촉하실 때 거듭 신신당부하며 말씀하시길, “절이 없는 것은 두렵지 않으며, 단지 도가 없을까 두려울 뿐이다. 귀가 멀지 않고 눈이 멀지 않으면 절 주지가 될 자격이 없다.”(不怕沒廟, 就怕沒道. 不聾不瞎, 不配當家.)고 하셨습니다. 옛날 대덕이 말씀하시길, “솜씨가 크게 서투른 것을 길러야 비로소 솜씨가 교묘하게 되며, 진정한 어리석음을 배워야 비로소 현명함을 안다.”(養成大拙方爲巧, 學到眞愚始知賢.)고 하였습니다. 이는 현공에게 완전히 부합되는 말씀입니다. 정공노법사는 현공을 “연지해회의 성현”(海會聖賢)이라고 찬탄하셨는데, 이 찬사는 확실히 현공의 실제적인 행에 부합되는 이름입니다. ……
우익대사께서 《논어》를 주해할 때 이르길, “도를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만약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도를 듣기를 구하는 일을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不楣者, 如何死得? 若知死不可免, 如何不急求楣?)라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또한 경전 속에서 항상 “사람의 몸은 얻기가 어렵고, 불법은 듣기가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聞.)고 탄식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운 것에 대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형용하셨습니다. 하나는 “맹구부목盲龜浮木”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다 밑에 사는 한쪽 눈이 먼 거북이는 100년마다 겨우 한 번 헤엄쳐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 숨을 한 번 내쉽니다. 그때 마침 해면 위에 널빤지 하나가 떠 있었는데, 널빤지 중간에 둥근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눈먼 거북이는 쑥 내밀고 있던 머리를 때마침 물위에 떠 있는 널빤지의 둥근 구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 이처럼 사람의 몸 얻기 어려운 것은 바로 눈먼 거북이가 해면 위에 떠 있는 널빤지의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이 어렵습니다.
경전에는 또 “수미천침須彌穿針”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수미산 정상에서 실 한 가닥을 늘어뜨리면 산기슭 아래에서 손에 자수바늘 하나를 잡고서 그 실을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게 똑바로 바늘구멍을 뚫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얻기가 어려운데, 어려운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7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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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이책을 구입할 수 있나요?
이 책은 각정정보살님께서 몇년동안 온 성심을모아 몇분의 번역가를 모시고 절차탁마하여 공들여 번역불사를 하신뒤 아무런 댓가없이 무상법보시해주신 보기드문 책입니다.
이책은 아직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이내용을 복사해서 읽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뜻모아 출판해서 보살님같이 법을 실천하고자 본받으려는 마음으로 책을 필요로하는 분께 법보시해야겠지요.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가르쳐주세요.
@돌아오는 길 감사합니다
책으로 출판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