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2월 11일 주일메세지 ubf
구원의 뿔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57~80 ubf
요절 / 누가복음 1:69
예전에 권투 경기가 중계되는 날에는 골목이 한산했습니다.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도 길거리가 한산했습니다. 요즘은 종합격투기가 인기가 높습니다. 프로레슬링의 비현실적인 쇼가 아니고 진짜로 꺾고 조르고 합니다. 권투처럼 주먹만 쓰지 않고 발도 쓰고 태클로 쓰러트리고 그 위에 달려들어서 파운딩이라며 더 때립니다. 종합격투기를 보면 싸움 잘하는 사람들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 가서 시비 붙지 말고,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ubf
싸움은 격투기와 같이 맨주먹으로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른 싸움도 많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죄와의 싸움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와의 싸움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죄와 싸워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에게 지고 사망에 집니다. 죄와 사망은 우리 인생을 이기고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죄에게 져서 죄가 시키는대로 죄가 이끄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다가 사망에게 삼켜지고 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ubf
죄에게 늘 지고 있으니 존재가 추합니다. 죄에게 져서 죄의 열매를 맺으니 고상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정죄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며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소모합니다. 우리 삶은 죄속에서 날이 가고 해가 갑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나아진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ubf
죄를 이기는 분, 죄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해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배우고자 합니다. 2016년 성탄에 우리의 심령이 찬양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ubf
1. 세례요한의 탄생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 사가랴는 성전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자신도 늙었고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다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신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이 부부에게 임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기적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ubf
58절을 보십시오. 이들 부부의 득남 소식은 이웃들과 친족들에게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시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열 명 이상 낳는다고 합니다. 유대사회에서 아이없이 지내온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대단히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좋은데 왜 아이가 없을까? 사람은 경외심 있고 기도 많이 하는데 왜 아이를 갖지 못할까? 이웃들은 이 부부를 불쌍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친족들은 집안에 이런 일이 있다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 해석할 수 없는 일, 소화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ubf
이런 가정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오래 기도하며 지낸 믿음의 가정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 오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사자 뿐 아니라 이웃과 친족에게도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ubf
사람들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깊고 큰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장 적절한 때에 해결해주셔서 우리 영혼의 기쁨이 솟아나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ubf
59~66절을 보십시오. 남자 아이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딸은 한달 이내에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지을 때, 사가랴 라고 짓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사가랴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제사장 다운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가랴jr가 전통과 관습적으로는 대세였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시대의 대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당시 제사장들은 잘 쓰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짓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누가복음 1장 13절의 가브리엘 천사의 방향대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의 태어남이 부모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1장 14절의 예언대로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이름 짓는 것과 그의 성장, 그의 많은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머니 배속에 생기기 전부터 특별한 사명의 사람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대성을 발휘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사람으로 택정하셨기 때문입니다. ubf
세례요한의 삶을 사람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매우 불행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편안한 잠자리에서 누워보지 못하였습니다.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밤에는 부들부들 떨리는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낮에는 찌는 더위와 갈증을 자주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죽을 때는 참수형 당하였습니다. 이런 삶을 어떻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생 고생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슬픈 인생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ubf
세례 요한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사명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침대에 한 번 누워보지 못하였어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겨웠지만 그는 생활의 고통과 삶의 고난에 상관없이 사명중심으로 살았습니다. ubf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들을 경험하며 살았고 현재도 여러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불의하고 세상 속에 서있는 내 생활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리로 눈이 갈 때가 있고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제와 함께 내 문제가 무겁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이제는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이 불의하든지 정의롭든지, 내 문제가 해결되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명중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 중심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불의해도 우리는 사명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에게 심각하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우리는 사명 중심이어야 합니다. ubf
사명 중심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대한 인생으로 복주십니다. 사명 중심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이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ubf
2. 구원의 뿔, 돋는 해
ubf
67절을 보십시오. 이름을 요한으로 하도록 순종하였을 때, 사가랴의 혀가 풀렸습니다.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하고 10개월을 지냈습니다. 열 달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많이 답답했겠습니다. 사가랴는 고통스러운 훈련기간이 끝났다는 개인 소회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ubf
6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혀가 풀리자마자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사가랴의 성탄은 찬송이었습니다. 사가랴는 찬송으로 성탄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사가랴의 찬송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은 매우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의 찬송은 “나도 아빠가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아빠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찬송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하였을 때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고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셨는데,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로 인하여 내 부그러움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ubf
엘리사벳의 찬송 제목이 개인적이었다면 사가랴의 찬송 제목은 개인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의 역사와 미래를 두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사가랴의 성탄 찬송을 자세히 배우면서 우리는 성탄의 은혜를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성탄 찬송은 구체적으로 어떠합니까? ubf
ubf
첫째,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신 것입니다. 속량은 노예거래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상태였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불만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로마의 유대통치는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유대교를 인정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법 입법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국내의 사건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환심과 인정을 받아 유대를 다스리는 헤롯과 그 아들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때는 대표단이 로마 황제에게 가서 분봉왕 교체를 요구하고 로마총독이 직접 통치해주기를 청원 하기도 했습니다. 그 청원이 받아 들여져서 헤롯의 아들 유대 분봉왕 아켈라우스는 폐위되어 골짜기로 추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과 유다가 파멸될 때까지 유대인들의 반란은 꼬리를 이어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어떤 당근을 제시한다고 하여도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정치 권력 아래 있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스룹바벨의 옛 성전이 퇴락했다며 거대하고 화려한 새 성전을 지어 주었다고 해도,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서 어지간한 문제들은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자신들은 이방인의 압제아래 시달리는 부끄러운 신세라고 여겼습니다. ubf
사가랴의 찬송은 이런 유대인들의 수치를 면하게 해주셨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은 정치이슈, 경제이슈, 사회적 이슈를 근거로 하지 않았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의 찬송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 해주셨다는 것이 첫번째 찬송제목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로부터의 속량입니다. 속량은 스스로 벗어나거나 해방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속량은 속신이라고도 하는데, 포로나 노예를 대가를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량물은 주로 금전이 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ubf
사가랴는 무자식 신세를 면하게 하신 것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죄에서 속량하심을 찬송하였습니다. 사가랴는 유다에서 로마군이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열심당원들의 끊임없는 불만과 반란이 잦아들지 않아 정치상황이 변함없이 불안하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량하시는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물질적으로 쪼들리더라도, 회사를 옮겨야 할지 모르는 불안정 상태에 있더라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가 아닙니까! 내가 애써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ubf
ubf
둘째,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 6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뿔은 힘입니다. 뿔은 능력입니다. 옛날 TV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 표범, 치이타가 아프리카 초원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그런 방송이 거짓과 날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최강은 코끼리입니다. 사자, 표범 그 어떤 고양이과 동물도 건강한 성체 코끼리는 건드리지 못합니다. 유튜브를 보니, 아프리카 물소들이 사자가 떼로 덤비는데도 덤벼드는 사자를 뿔에 걸어 공중으로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뿔은 능력입니다. 뿔은 힘입니다.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힘있는 구원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왜 뿔이 필요합니까? 까짓 죄가 뭐라고 너무 과도한 힘을 쓰는 것 아닙니까? ubf
우리를 사로잡은 죄는 매우 강합니다. 얼마나 강한지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 죄를 이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강합니다. 죄는 사람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의 죄에 여러번 빠졌습니다. 아내를 아내라고 말하지 않는 비열함에 빠졌습니다. 반복해서 빠졌습니다. 아들 이삭도 같은 두려움, 같은 비열함의 허물을 남겼습니다. 그 아들 야곱은 얼마나 욕심이 많았습니까! 속이고 속고 그의 인생은 잔머리와 다툼으로 범벅이 되어 흘러갔습니다. 위대한 모세도 결국 혈기를 부렸고, 흑인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가 누나와 형에게 지적질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다윗왕도 두려움에 빠져서 이스라엘 경내에 있지 않고 이방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왕이 되어서는 간음, 살인, 교만, 방임, 직무유기, 불공정, 직권남용의 죄에 빠졌습니다. 솔로몬은 수백명 아내를 두다가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고 나라는 분열되게 하였습니다. 엘리야도 고단하고 지쳐서 제발 나를 죽여달라며 쭈욱 뻗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건 왕이건 선지자건 그 어떤 위대한 인물도 일은 큰 일 하였을지 모르지만, 죄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30년, 40년 초인적인 금욕생활을 하고 수행정진하면 죄를 피할 수 있습니까? 현대 한국 최고 선승으로 존경받는 분도 고백하였습니다. '내 죄가 수지산과 같아서 내가 아골골짝으로 들어가는구나' 죄는 우리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속에서 태어나 죄가운데 살다가 죄의 대가인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죄가 그렇게 강하니 죄가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며 그냥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는 우리의 양심을 고통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파멸로 끌고 갑니다. 죄는 나의 영혼, 나의 인격, 나의 생활, 나의 삶을 더럽고 추하고 어둡고 부담스럽고 지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죄는 내곁에 있는 사람들, 나의 모든 관계까지 파괴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결국 죄의 삯은 사망이며 그 후에 둘째 사망이 있으니 불와 유황으로 영원히 타는 불못과 그 안에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는 죄로 인한 고통과 탄식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돈도 사랑도 세상의 그 어떤 법과 제도, 시스템, 문화, 예술, 학문도 사람도 나를 죄에서 건져 낼 수 없습니다. 영원하기를 원하는 우리 영혼이 죄 때문에 절대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는 10개월 말을 못하면서 대신 기도하였습니다. 10개월 동안 일체 말을 하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특히, 아들 세례 요한이 주님을 예비할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신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감격과 감사가 넘쳐 났습니다. 이제 메시야가 오신다! 사가랴는 이 놀라운 사실을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으니 흥분과 설레임을 가라앉여햐 했습니다. 한달 또 한달, 또 한달 열달동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더 집중해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사가랴가 섣불리 사람들에게 흥분하여 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더 열심히 바라보고 기도 하였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기쁨과 감사가 더하였습니다. ubf
“구원의 뿔” 열 달 동안 말없이 기도 해온 사가랴는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 찬송하였습니다. 이 뿔은 죄를 이기는 뿔입니다. 이 뿔은 죽음을 제압하는 뿔입니다. 유사이래 수많은 인간을 강력한 힘으로 지배해 온 죄와 사망은 구원의 뿔 예수님께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ubf
셋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70~73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집에 일으시키신 것,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이것은 모두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였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을 두고 이스라엘에게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물어보십니다. 계명을 지켜서 그리심산과 같이 푸르고 아름다운 축복의 나라가 되겠는가?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에발산과 같이 헐벗고 저주받은 나라가 되겠는가? 이스라엘은 대답합니다. 계명을 지키겠다고!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이 맹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시겠다고 한 것,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한 것을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ubf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ubf
이스라엘은 언약백성답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계명을 준행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약속을 지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덕을 보는 쪽은 이스라엘 입니다. 약속을 지켜서 그 혜택을 입어야 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상태, 예수님이 없는 우리의 실존을 설명하자면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설명이 됩니다. 우리는 원수의 손아래 압제를 받고 종신토록 사람과 세상 앞에서 추함과 불의함으로 두려워하며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움의 종노릇하였습니다. 반발심, 반항심, 절망, 허무, 원망, 불평, 낙심, 욕심, 탐욕, 거짓, 위선, 게으름, 안일, 정욕, 더러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의미하게 우리들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셔서 우리는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ubf
ubf
사가랴에게 있어서 성탄은 찬송입니다. 사가랴가 맞이하는 성탄은 찬송,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찬양,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뿔을 허락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ubf
76,77절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자기의 아들에 대해서도 '너는 자랑스런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축복하노니 잘 먹고 잘 살아라' 라는 식의 개인적인 감회는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아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선지자,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기초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ubf
사가랴는 요한의 존재 의미를 노년에 기도로 낳은 귀한 외아들임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한국 최초의 무슨 타이틀을 가진 분인데, 집안좋고 돈 많고 박사 학위도 가지신 분이 입만 열면, 너는 나를 안지 20년이 된 사람이고 누구는 나를 안지 10년이 된 사람, 내가 가장 신뢰하는 다섯 사람이 있는데 누구, 누구, 누구 뭐 이럽니다. 내 아들, 내 친구, 내 아는 사람, 내가 믿는 사람, 내가 정준 사람, 내가, 내가, 나, 나, 나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ubf
사가랴가 10개월 동안 입을 닫고 메시야를 주시겠다 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았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놀라운 사랑만이 가득하게 보였습니다. 아들의 위대성도 메시야 앞에서 쓰임받는 복! 그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는 사가랴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지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그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은혜만이 보였습니다. ubf
78,79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을 보내 주신다는 소식, 요한이 예수님의 앞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체험하였습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춥고 괴롭고 답답할 때,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올라 온 땅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음을 실제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해는 빛 자체는 아닙니다. 해가 떠오르며 빛이 비췰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만물은 에너지를 얻습니다. 제가 고교 생물시간에 배워서 빛이 식물의 광합성을 하게 해주고 식물과 동물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빛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줄은 알았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이번 2학기에도 광응용공학을 가르치느라 기본적인 광학을 조금 공부하였더니, 빛은 생태계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세계의 에너지의 근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의 속성은 예수님의 속성과 너무나 많은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계시하는 면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빛이야 말로 예수님을 계시하는 측면이 아주 많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 내듯이, 예수님께서 죄의 어두움,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 냅니다. 빛이 생명을 주듯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빛이 만물에 에너지를 공급하듯 예수님께서 자연 만물과 우리 인생에게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빛이 비췰 때, 우리가 안심하고 평안하게 다닐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평안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빛을 발하는 돋는 해 이십니다. ubf
오늘날 세상은 어둡습니다. 어두우니까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저렇게 많은 촛불을 켜겠지요. 촛불은 광화문 거리를 밝힐지 모르지만, 영혼을 밝히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생의 영혼의 어두움, 우리 내면에 자리한 죄와 죽음의 그림자를 밝힐 수 있는 빛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 만이 모든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참 빛 이십니다. 성탄은 크리스마 트리에 깜박이 등을 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에 켜야 하는 등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기등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모셔온 예수님 입니다. ubf
성탄에 대출이자 걱정은 좀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카드대금, 아이들 학교, 아이들 성적, 아이들 건강 고민 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학생들은 뭐하고 놀까, 뭐 먹고 놀까, 무슨 놀이 하며 놀까, 누구를 불러내서 놀까, 돈 얼마를 준비해서 놀까 생각을 내려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은 노는 날이 아닙니다. 돋는 해이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만나는 날입니다. ubf
ubf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이번 성탄에 구원의 뿔이시며 돋는 해 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성탄은 사가랴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허물과 죄악에 상관없이 구원의 뿔, 돋는 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 드리는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ubf
ubf
ubf
ubf
ubf
ubf
ubf
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