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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하나님을 봄
(마 5:8)
오늘 아침도 8복을 계속 이어서 제 여섯 번째 제6복을 함께 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섯 번째 복은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까?
그 복은 마음이 淸潔한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과 연관 지어서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다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건강이다, 형통함이다, 그리고 요셉처럼 총리가 되는 귀하게 되는 일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요 그런 오는 것들이 있을 때 복이라고 하는데, 이 보는 것이 복이라는 얘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시선을 드리는 것인데 시선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왜 복이 될까?
하나님과 봄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 성경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대표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하지 않습니까? 그 계약을 체결할 때에 시내산에 하나님이 불과 연기 가운데 강림하시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저 같아서도 달려 뛰어갔을 것이에요.
그때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21절).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그리고 21절부터 25절 사이에 보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나 제사장들도 함부로 날뛰어서 하나님을 보려고 했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라고 얘기해요. 출애굽기에는 복은커녕 무시무시한 죽임을 당하는 것인데. 그 차이가 뭐겠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상태로 보면 복이요, 마음이 不潔한 상태로 보면 죽임이라는 것이겠지요. 이 성경구절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 맞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을 마음이 불결한 상태로 자꾸 보려고 하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마음이 청경한 상태로 보게 되는 것은 복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보는 거 이전에 보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다는 거예요.
이거 아세요? 여러분? 보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다는 거 아세요?
사실 세상을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다 보고 사는 줄 알지만 실지로 보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실 때 「너희 눈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들이 그야말로 청결을 주장하며 살았던 사람들이고 청결을 아주 모델처럼 보여주며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정결예식을 잘 지켜가면서.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게 사람들 보기에 청결해 보이는, 정결예식이 그런 게 아닙니까? 행위의 청결.
그런데 주님께서 마음의 청결을 얘기하시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보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제대로 봄이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너무나도 뭐 세 살짜리 정도만 되면 다 아는 그런 단어를 사전을 한번 찾아봤어요. ‘본다’라는 게 뭔데 그 보는 것을 통해 복이 될 수도 있느냐? 본다고 하는 걸 찾아봤더니 여러분 그 뜻을 봤더니 굉장히 어렵더라구요.
첫 번째 두 번째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
쉽게 말하면 나무가 이렇게 있으면 나무를 본다는 것은 아, 나무가 지금 나로부터 한 100m 떨어진 곳에 있구나. 그런데 그 나무의 모양은 활엽수요 지금은 겨울이라서 낙엽이 다 떨어졌구나. 있다는 것과 그 형태나 특징을 우리가 깨닫는 거지요. 지각하는 겁니다. 이게 본다는 거예요.
두 번째 본다는 뜻은 뭐냐 하면 『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한다』
그러니까 아까 나무를 봤어요. 그런데 그 나무에 눈꽃이 피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 위에 눈이 쌓여서 눈꽃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그 눈 위로 화창한 겨울 햇살이 비치면서 반짝반짝하는 눈이 보석처럼 보이는 꽃들이 나무에 피어 있습니다. ‘야! 참 아름답구나.’ 감상한다는 것이에요.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게 본다는 뜻이에요.
본다는 뜻이 그거면 아니, 대상이 있다는 것과 그 대상의 형태나 특징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걸 보면서 마음이 즐긴다는 것, 그게 뭐가 어렵냐? 아! 어려워요.
이게 왜 어렵냐 하면 말입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은 제가 그 뜻을 가미합니다. 그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제 나름대로 좀 보충합니다.
본다는 것은 보는 내가 그 나무를 볼 때 나무가 나 사이에 다리는 놓는 겁니다. 길을 까는 겁니다. 마치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는 그 나무와 나 사이에 강물로 막혀 있듯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강남과 강북처럼 다리가 없을 때 강남과 강북이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다리도 없고 나룻배도 없다 그러면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나무를 바라보게 되면서 그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고 또 막혀 있던 산을 터널을 뚫어서 길을 깔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길이 생기고 다리가 생깁니다. 그게 뭐냐면 視線이에요.
눈길이 있으면 그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길이 생기고 다리가 생기면 오고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전을 찾아봤을 때 그 나무로부터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나무의 특징 - 잎이 다 떨어졌다. 그리고 눈꽃이 피었다. - 그 형태 그것이 다리를 통해 내게 옵니다. 그렇죠? 시선이라는 길을 통해 내게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 오는 것이 내 마음에 와서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을 때 ‘아! 아름답구나.’ 마음이 느끼는 거지요. 시선이라는 길과 시선이라는 다리를 통해서… 시선이 없어지면 안 옵니다. 안 오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본다는 것은 다리를 놓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外面한다는 말도 같은 뜻이에요. 외면, 외면이라는 것은 여러분 뭡니까? 깔려있던 길을 끊어낸다는 것이고 놓았던 다리를 무너뜨린다는 겁니다.
외면한다. 예를 들어서 요즘 구제역이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그게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지금 그러고 난리가 났는데 김대중 대통령 때도 구제역이 처음 발생했잖아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그래요. 모든 희생을 다 감수하고 막고 그리고 깜짝 놀랄 정도로 목축업을 하시는 그분들에게는 보상을 해라.
그래서 모든 군대가 동원되고 이래서 구제역으로 죽는 이 가축의 숫자가 3,000마리가 채 넘어가기 전에 막았다는 거예요.
지금은 벌써 70만 마리가 묻혔습니다. 그리고 묻힌 곳에서 그 짐승의 피 같은 것들이 흘러나온다는 거예요. 그 기사를 대할 때 우리 외면하게 돼요. 그런 동네 사는 분들의 그 끔찍한 상황을 마음으로부터 외면하게 돼요.
왜 그래요? 그 구제역으로 짐승이 묻힌 현장에 신문기사를 통해서 TV를 통해서 우리의 시선이 가니까 그 시선이 다리가 되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도저히 두고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외면을 한다는 것이에요.
골목길을 가다가 밤새 정말 술을 너무 많이 먹은 사람들이 토한 것을 보면 고개를 돌리게 되잖아요. 눈으로 시선이라는 길을 통해 오는 게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홱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게 ‘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눈먼 바리새인아!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본다는 게 쉽지가 않다는 거예요. 보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길을 갑니다. 겨울철인데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발견되었습니다. 희한합니다. 눈 속에 매화가 피듯이 꽃이 한 송이 발견되었어요. 눈은 나무에 얹혀서 눈꽃이 되지 않는 한 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 눈 속에 꽃이 피었어요. 그걸 보자 視線이 길을 깔고 그 꽃이 있다 꽃이 아름답다 라고 하는 그 꽃의 형태가 내 마음에 전달되지 마자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所有의 마음이 발동을 합니다. 그래서 시선이라는 다리를 따라서 그 꽃을 향하여 소유의 마음이 갑니다. 이제 오는 것이 중단되고 갑니다. 여기서 봄은 끝납니다. 시선이라는 다리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부터 가기 시작할 때 봄은 끝난다는 것이에요. 본다는 행위는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을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어령씨의 에세이 하나를 우리가 떠올려 봐요. 에세이 제목이 뭐냐 하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에세이의 주제는 시인들의 시각을 주제로 삼는 거예요. 어떤 시각이어야 하느냐.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통하여 시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인들이 도대체 어떤 시각이 되어야 하느냐?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분이 漁父四時詞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서 어부사시사가 4계절을 테마로 해서 각 계절마다 10수의 시조가 있잖아요?
그런데 봄에 관한 시조 중에 첫 번째 노래에 마지막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 마지막 구절이 뭐냐 하면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에 더욱 좋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에 더욱 좋다. 이 먼 빛이라고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분은 나름대로 표현을 한 것이에요. 먼 빛에 더욱 좋다…
봄이 왔습니다. 봄이 와서 이 앞에 강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는 햇볕이 내리 쬡니다. 배를 띄워라, 배를 띄워라. 그래서 배를 타고 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저쪽 강둑 너머에 보니까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멀리 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그 강둑에 온갖 꽃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시선과 숲을 마음속에 훌륭한 목재감을 얻기 위한 마음을 품고 손에 도끼를 들고 숲을 헤매는 나무꾼의 시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손에 호미와 곡괭이를 들고 약초를 캐려는 약초꾼의 시선을 이어령씨가 비교합니다.
나무꾼의 시선은 피가 돋쳤다는 것이에요. 숲을 거닐면서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를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마음속에 목재감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시선은 먼 빛에 더욱 좋다 라고 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보지 않고 이들은 찾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시선을 이어령씨는 ‘파괴의 시선’이라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용을 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들은 그 나무와 풀과 온갖 사물을 노려볼 것이다. 파괴가 시작되는 시선이다. 윤선도는 바로 이 노려보는 시선을 거부하고 물끄러미 보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꽃의 존재와 만날 수가 있었다.』
참, 이어령씨가 통찰력이 있어요. 그 뒤에 보면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아무 뜻 없이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숲속을 거니는 시인에게는 숲은 가지와 이파리와 뿌리까지도 가슴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비밀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이 멋있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멍청해 보이는 그 시인의 눈에 존재를 꿰뚫는 바늘보다 예리한 역설의 통찰력이 숨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아무 요구도 없이 바라보는 시선, 자기조차도 잊어버린 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멍청해 보이고 우두커니 보는 것 같지만 바늘보다 예리하게 꿰뚫는 통찰력으로 바라보는 숲은 보답한다는 겁니다. 보고만 있으면 숲의 비밀이 그대로 다 전달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청결이라는 말을 몰랐으니까 영적인 의미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말했으니까 물끄러미 바라본다고 표현한 것뿐이지요.
여러분! 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요.
나무꾼도 도끼를 들고 숲을 헤매며 나무를 봅니다마는 이들은 보는 게 아니에요. 봄이 멈춰진 겁니다. 그쪽으로부터 시선의 다리를 통해서 내게로 주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꽃을 보고 꽃을 꺾고 싶을 때 이 봄은 끝나는 겁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끝나는 것이에요.
본다는 것은 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시선을 통해 가게 되면 예를 들어 산이 참 멋있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이 내게로 시선의 다리를 통해 주어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감상하며 기뻐하며 아름다움에 도취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에서 별장이 떠오르면서 별장이 저 속에 지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생각이 그 시선을 통해서 내 마음이 가게 되면 본다는 것이 끝나 버리고 만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그 산에 불도저를 동원하고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그 산을 파괴하는 작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본다! 예수님을 본다!
우리는 주로 예수님의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뭘 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봅니다. 하나님이 그저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들어주신다는 마지못해서라도 들어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을 봅니다.
보자마자 꽃을 보고 그것을 꺾으려고 하는 자들처럼 이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시선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비밀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서 하나님을 사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탈취하고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봄이 끊어진다는 거예요. 이젠 더 이상 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의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때면 그것은 산에 별장을 지으려는 사람들처럼 손에 도끼를 들고 목재감을 찾으려는 나무꾼처럼 하나님은 내 손에 들려진 도끼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내 손에 들려진 도끼가 되는 것이고 내 마음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찾아 헤매는 삶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건 기독교도 아니고 이건 신앙도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주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흔히 하나님을 찾게 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그 시선을 통해서 주로 가는 게 뭐예요?
또 그 잘난 헌 복, 5복이에요. 5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보지 않아요. 하나님을 쥡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쥐듯이, 약초꾼이 곡괭이를 손에 쥐듯이 하나님을 쥡니다. 하나님을 안 봐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보면서 누려질 수 있는 복을 모델처럼 이야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 대한 얘기에요.
저는 기가 막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 현장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설교에 아브라함 얘기가 나오는데 그때 스테반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행7:2).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 ‘보여’라는 단어와 지금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볼 것이라는 이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시제가 다르고 형태가 다르지마는 같은 단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날 때 하나님을 보고 떠났다는 거예요. 많은 창세기의 해석서들이 이 스테반의 해석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을 보고 떠났다는 것이에요. 아브라함의 삶은 전체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삶이었던 것을 스테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깨닫고 아브라함을 봤던 거예요. 보는 삶이었습니다.
보는 삶이라는 게 무엇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을 보는 삶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마음에 자식을 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의 다리가 깔렸습니다.
그러면 뭐가 어떻게 상황이 진전됩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자식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바라보게 될 때 더 이상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쥡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쥐고 그리고 도끼로 목재감을 찍어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마음에 품은 자식을 내 소유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도끼로 쥐고 이용하고 사용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탈취하려고 합니다. 봄이 끝나 버렸어요.
그런데 스테반이 보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보는데 자식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단 한 군데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내 상황에 필요한 것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본 것이에요. 스테반은 이 점을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가만 보니까 아브라함이 자식을 구한 적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구해본 적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 복지의 개척을 비전으로 삼고 떠난 게 아니에요. 그냥 메소포타미아에 머물러 있었고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시선의 길을 통하여 시선의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옵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복지를 향하여 가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 한 번도 구해본 적이 없는 자식을 내가 주겠다고 얘기하십니다. 주겠다고 하시면 빨리 주실 것이지 25년이나 안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 하나님을 쥐고 자식을 얻어 보려고 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예요.
조카 롯과 땅을 가를 때도 이 사람은 마음속에 복된 기름진 윤택한 땅을 마음에 담아 본 적이 없어요. 아무것도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담고 있지 않았는데 문제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출발했는데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하나님 쪽에서 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 바라보니까 그냥 복의 근원이 된 거예요. 보고 있으니까…
야곱과 비교해보세요. 야곱은 5복을 쫓아간 자입니다. 그런데 일평생을 험악한 인생을 살게 돼요. 아브라함은 그냥 보고 있었어요. 보고 있었는데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 복지를 향해 가라, 네 후사를 주겠다…
"아, 하나님 아닙니다. 내 종 중에 최고 수장인 엘리에셀이 내 후사가 돼도 상관없습니다."
"아니다. 내가 자식을 주겠다."
"이미 낳은 이스마엘로 합시다."
"아니다. 내가 너에게 자식을 주겠다."
하나님을 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창세기 18장에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창세기 18장에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우리는 무슨 일 하나 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요번에는 내가 성공해야지…그리고 동쪽으로 가야 될지 서쪽으로 가야 될지 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철야기도 하고 금식기도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 번도 자기가 땅에서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을 얻고 싶다고 기도를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어령씨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여러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숲은 자신의 비밀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멍청해 보이는 그 시인의 눈에 존재를 꿰뚫는 바늘보다 예리한 역설의 통찰력이 숨이 있음을 잊지 마라.』
세상일에 대해서 멍청합니다. 아무것도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멍청한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얘기하시느냐?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에 품고 그렇게 뜻을 알려달라고 난리 난리를 쳐도 점점 더 기도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이것도 같고 저것도 같고,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거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거 같은데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일을 숨기겠느냐?」 이게 복이 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은 오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갔을 때 기근이 있었는데 애굽에 내려갔다. 결국은 마누라를 바로 왕에게 바쳐야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아들 주시겠다는 약속을 참지 못하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성급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내가 아닙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아브라함을 볼 때 출발부터 하나님을 보고 출발했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이 지점이 어느 지점인지 아십니까? 의인 욥이 그 많은 재물과 그 많은 자식과 그 사랑하는 아내와 친국들과 그 좋던 건강과 모든 것을 다 잃고 차라리 음부에 내려가 죽는 것이 낫다고 탄식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고통을 치른 뒤에 도달한 것이 「내가 이전에는 귀로만 듣던 여호와 주를 눈으로 보나이다」 한 지점이에요. 아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순례의 길을 출발한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겁니다. 그 지점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던 자가 왜 가나안 땅에 머물지 않고 내려갔는지, 왜 이스마엘을 낳게 됐는지 한번 다시 연구해보세요.
결론을 얘기하면 이 땅에서 그 마음속에 갖고 싶고 이루고 싶어서 품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스마엘도 낳게 되고 기근을 피해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게도 되는 겁니다. 스테반이 제시한 출발점을 통해서 다시 연구해보세요.
욥이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재산 때문에, 자식 때문에, 건강 때문에, 가정의 화목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았어요. 만약 그랬다면 다 없어지면 하나님을 버렸겠지요.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땐 귀로만 들었어요. 다 없어진 뒤에 내 마음에 품을 만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감격을 한 마디로 내가 이전에는 주를 귀로 듣기만 했더니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라는 이 한 마디에 감격 어린 고백을 위해서 욥기는 42장까지 그 끔찍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해나가는 겁니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보는 복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미 보면서 출발했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 속에 있는 모든 비밀을 하나님 스스로 다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바쁘십니다. 얘야! 이것도 줄게 이것도 줄게. 아브라함은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만 보면 되고 아브라함한테 가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 갖고 싶습니다. 저거 갖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는 것을 유지했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봄을 유지합니다. 내게서 가면 안 돼요. 시선의 길을 따라 내게서 가면 봄이 끊어집니다.
도심지에 살다가 바닷가에 나와도 탁 트인 바다를 보면서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천국에서의 신령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됩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이 그 시선의 다리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속에 왔을 때 이 사람이 산 아래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거기에 집도 있고 가정도 있고 동료 제자들도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걸 다 잊어버립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그 예수님의 모습이 내 시선의 다리를 통해서 시선의 길을 통해서 내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거에요. 돈 버는 일 아무것도 아니고, 밥 먹고 사는 일 아무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무슨 식민지로부터 나라를 구해내야 된다는 애국애족의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대단한 모든 것들을 아무것도 아니게 볼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비쳐지면 하나님 자체가 굉장한 것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삶에 대한 모든 당신의 계획과 비밀들을 그냥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에게 내가 할 일을 숨기겠느냐? 여러분이 홍길동이라면 내가 홍길동에게 내가 할 일을 숨기겠느냐?
어떤 사람?
우두커니 세상에 대해서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내가 할 일을 숨기겠느냐?
그리고 숨기지 않았더니 나타난 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복이다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뭘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품은 게 있어요. 세상의 5복을 품고 있습니다. 세상의 5복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니 이 바라봄이 봄이 아니라 시선의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탈취하려는 나무꾼의 손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도끼를 쥐려는 나무꾼의 손이 하나님을 향하여 갑니다.
쥐는 방법이 뭡니까?
꽉 쥐어라.
꽉 쥐는 방법이 뭡니까?
40일 금식기도, 다니엘 기도, 제목을 뚜렷이 정해놓고 기도해라. 구체적으로 기도해라... 아! 정말 Oh! my God이에요. 다 망가뜨렸어요.
이어령씨가 나무꾼의 시선을 숲을 파괴하는 시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게 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복의 근원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또 역시 또 하나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갖고 계시는 그 비밀을 다 부수어버립니다. 다 파괴해버립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마음에 품고 봄을 통하여 이젠 봄이 중단되어 버리고 내 쪽에서 가는 거예요.
본다는 거는 보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게 보는 겁니다. 우린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싶어 해요. 복을 받고 싶어 해요. 그런데 거꾸로 내가 먼저 지금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보고 있으면 올 텐데.
그런데 왜 못 봅니까?
이 세상에서 이것저것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아서 마음에 품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그렇게 비전이 원수라고 얘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겁니다. 내 인생의 비전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면 돼요. 마음에 품어버려요. 마음에 품어버리면 못 봐요.
왜? 안경에 마치 돼지고기 삼겹살 먹을 때 기름이 튀어 방울방울 맺혀있습니다. 잔잔하게 우무처럼 맺혀있어요. 그때 모르고 종이로 닦았다가는 기름이 번져버려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런 것처럼 내 마음이 이 세상 삼겹살 기름들이에요. 돼지고기 먹는 것처럼 지금 구워 먹는 거예요. 그걸 갖고 싶어가지고 마음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겁니다. 기름이 튀어서 마음이 완전히 불결해진 겁니다.
여러분, 청결이 뭐라구요?
제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해요. <놓여져야 할 것이 놓여야 할 곳에 놓여져 있는 것>이 청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청결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 가구고 뭐고 다 없애고 하얀 석회로 칠해버리면 청결한 건가요? 그게 아니에요. 놓여져야 할 것이 놓여져야 할 곳에 놓여져 있는 것이 청결입니다.
목욕탕 바닥에 새로 산 신간 서적이 떨어져 있어요. 청결이 아니에요. 책도 깨끗하고 목욕탕 바닥도 깨끗해도 두 개가 붙으면 불결이 됩니다. 금방 한 햅쌀밥 하얀 쌀밥이 있습니다. 밥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걸 화장실에 놔둡니다. 그러면 불결이 됩니다. 밥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깨끗합니다. 그런데 아주 사람 속에서 나오는 배설물이 더럽습니다. 그러나 변기에 놓여 있어서 내리고 변기에서 사라져 버리면 오물인데도 불구하고 변기에 놓여 있는 걸 불결하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놓여져야 할 것이 놓여져야 할 곳에 놓여져 있으면 청결이에요.
그런데 마음에는 뭐가 놓여져야 됩니까?
시선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 말고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놓여져서 안 되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자식이 들어오면 마음이 불결해지는 것이고 5복이 들어오면 불결해지는 것이고 아내와 남편이 들어오면 불결해지는 거예요. 내 인생의 노후가 들어오면 불결해지는 것이지요. 애인이 들어와도 불결해지는 겁니다. 애인이 불결한 게 아니고 마음이 불결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애인이 마음에 닿으면 마음이 불결해지고, 돈이 불결한 게 아닌데 돈이 마음에 닿으면 불결해지는 거예요. 돈도 오물이 되고 마음도 불결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뭘 하시려고 합니까?
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복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로 작정하시는 거예요.
내 마음에서 품어지고 있는 가정과 나라와 내 인생의 형통과 재물과 건강과 모든 것들이 마음에 품어지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그것을 십자가로 대체해버리라는 거예요. 다 대체해버리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대체해서 마음에서 몰아내라는 겁니다. 귀신을 쫓아내듯이 십자가로 드라큘라를 몰아내듯이 내 마음에 자식을 쫓아내고 돈을 쫓아내고 다 마음에서 쫓아내고 나면 하나님이 보여요.
내 욕심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고 다 보이고 오고 오고 오고 옵니다. 바다를 볼 때 바다의 풍경이 내 마음에 들어와 속을 탁 터놓듯이 하나님이 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할 일을 숨기겠느냐?
하나님을 보세요. 십자가로 내 마음 한복판에 심어서 어느 한순간도 십자가를 빼지 말고 있음을 통해서 내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 불결하게 하는 모든 세상의 5복들을 다 마음에서 몰아내요. 원하지 마세요. 다 몰아내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에요.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주님의 십자가로 마음을 청결케 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에 겨워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