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배경과 과정
1959년 1월25일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 성바오로 대성전에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 폐막 미사’를 봉헌한 후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수도원을 방문, 그곳에 있던 17명의 추기경에게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밝혔다. 금세기 가톨릭 교회의 최대 사건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요한 23세가 여러 번 확언한 것처럼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돌연한 영감에서 이루어졌다.
▲소집 배경과 준비과정
1950년대 세계 가톨릭 교회는 세계 공의회를 개최해야 할 만큼 위기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쟈크 마르탱, 프랑소와 모리악, 이브 콩가르, 에티엔느 질송, 칼 라너, 앙리 드 뤼박, 스킬레벡스 등과 같은 걸출한 가톨릭 지성들이 많았다. 또 미국 교회 경우만 해도 신자의 85%가 매주 미사에 참석했고, 그들 가운데 50%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성체를 할 만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또 신앙 교리를 특별히 명확히 해야 할 계기도, 교회에 위협을 줄 만한 새로운 이단도 없었다. 이처럼 당시 교회 상황은 전 세계 주교들을 모두 불러 공의회를 개최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세계 공의회를 소집했다. 요한 23세는 이번 공의회가 ‘교리상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목적 공의회’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요한 23세는 1960년 6월5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목적을 세가지로 제시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쇄신’과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Aggiornamento)’ 그리고 동방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등 ‘갈라진 그리스도교와의 일치’였다.
이 세가지 공의회 소집 목적은 요한 23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 영감은 바로 세상 복음화를 위한 교회 스스로의 노력, 즉 현대화의 노력이었다”고 신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요한 23세는 1961년 12월25일 사도헌장「인간의 구원」(Humanae Salutis)을 통해 1962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된다고 공포했고, 성직자들에게 공의회의 성공을 위해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촉구하고, 주교들에게 경건한 생활 자세를 갖추도록 조언했으며, 신자들에게 공의회가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께 간구하도록 요청했다.
▲진행과정
1962년 10월11일 요한 23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를 장엄하게 선포했다. 이날 개회식에는 표결권을 가진 2,540명의 공의회 교부들과 동방교회와 개신교 17개 교파에서 35명의 대표가 참관인으로 초대받아 참석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20차례의 세계 공의회에서는 모두 서구 출신 교부들이 참석했으나 이번 공의회에서는 서구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참석해 명실상부한 세계 공의회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전 세계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이날 개회식 연설을 통해 요한 23세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입장과 급진적인 입장 양 극단을 경계하면서 가톨릭 신자 사이의 일치, 가톨릭과 타 그리스도교 사이의 일치,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타종교간의 대화와 일치 등 세가지 차원에서의 일치를 강조했다.
요한 23세는 또 강론에서 “이 공의회의 빛에 비추어져 교회는 영적인 부를 더하고 새로운 힘을 굳세게 되어 어떤 것에도 동요함이 없이 미래를 응시하고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으로 믿는다.… 이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유산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수호하고 또 전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총회와 위원회, 공개회의로 구분돼 진행됐다. 총회는 제출된 초안에 대한 채택, 기각, 수정을 결정하며 사회는 교황이 임명한 10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의장단에서 맡았다. 총회 안건 표결은 참석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유효표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위원회는 초안을 작성하고 총회에서 부결된 초안을 수정하여 제출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총 4회기에 걸쳐 진행됐다.
제1회기(1962.10.11~1962.12.8)에서는 각 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한 후 ‘전례’ ‘계시의 원천’ ‘매스미디어’ ‘동방교회’에 관한 의안을 다루었지만 초안을 하나도 채택하지 못하고, 1962년 12월8일 휴회했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1회기 휴회 후 공의회의 성공적 폐막을 보지 못하고 1963년 6월3일 선종했다.
요한 23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6세는 1963년 9월29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1963.9.29~1963.12.4)를 재개했다. 바오로 6세는 총회에 평신도가 방청할 수 있도록 허가했고,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헌장)과「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반포했다.
제3회기(1964.9.14~1964.11.21)에서는 주교의 사목직무, 종교의 자유, 유다교와 비그리스도교, 하느님의 계시, 평신도사도직, 현대 사회 안에서의 교회, 사제,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바오로 6세는 이 회기에서「일치운동에 관한 교령」「동방교회에 관한 교령」「교회에 관한 교의헌장」(교회헌장)등 3개 문헌을 채택했다.
제4회기(1965.9.14~1965.12.7)에서는「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수도생활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사제양성에 관한 교령」「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계시헌장」「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이 반포됐다. 바오로 6세는 이 회기 중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교황이 지역 주교들의 자문을 얻기 위해 소집하는 ‘주교 대의원 회의’(시노드) 설립 의사를 밝혔고, 성직자들의 독신생활 규율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 등 모두 16개 문헌을 채택하고, 1965년 12월8일 교황 바오로 6세 주재로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대한 폐회식을 갖고 폐막됐다.
전례헌장의 기본 정신과 현대적 적용
특별기고 -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전례책임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이 나오기 전까지 만해도 신자들은 ‘전례’를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이거나, 아니면 주례자가 전례 예식 중에 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동작을 규정하고 지시하는 홍주(rubrica)의 총합이라고 알아들었다. 더 나아가 1917년 교회법전에서는 전례에 대한 법적 정의가 부여되어, 전례는 교회의 ‘공적 예배’만을 뜻하게 되었다 (1256조).
이러한 전례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한 문헌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결실인「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이다. 전례헌장은 공의회 교부들의 찬성 2147표와 반대 4표로 통과되어, 1963년 12월 4일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인준 반포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결실>
전례헌장의 구성과 내용은 보면 다음과 같다. 첫 장에서는 전례 개혁을 위한 근본 원칙을, 둘째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체성사를 언급한다. 셋째 장에서는 다른 6개 성사들과 준성사들을 말한 다음에, 시간전례(4장), 전례주년(5장), 전례 음악(6장)과 전례 예술(7장)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사실 전례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이해와 새로운 시각에 기초를 두고서 작성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와 연관된 교회에 대한 교회의 자기 이해에서 전례의 정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십자가상에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 가슴에서 성 교회의 오묘한 신비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5항).
우선 전례헌장은,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이다”고 전례에 관한 근본적인 정의를 말한다 (7항). 왜냐하면 미사성제와 성사들과 하느님의 말씀과 성무 (聖務)에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즉 미사를 거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며”, “누가 세례를 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고 밝힌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서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도 현존하신다. 전례헌장의 이 모든 확언은 전례 거행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전례헌장은,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지체에 의하여 수행되는 완전한 공적 예배”이고,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몸인 교회의 일”임을 천명한다(7항).
이 정의에서 강조된 것은 바로 교회의 역할이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직무의 능력 안에서 교회를 당신 자신에게 결합시키셨다.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누가 세례를 줄 때”,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전례 거행에서 교회가 수행하는 직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다. 또한 이 정의는 전례가 사적 예배가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예배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전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고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서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도 이와 같은 이름과 같은 높이를 차지할 수 없다”(7항)고 천명한다. 자연히 전례는 교회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일 수밖에 없다 (10항).
<머리와 지체의 공적 예배>
전례의 궁극적 목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동시에 거행하는 신자들의 성화(聖化)이다. 그런데 이것은 “감각할 수 있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고 실현된다 (7항). 표징들과 상징들은 전례에 성사적 차원을 언급한다.
전례 안에서 표징들과 상징들은 성사적 형태처럼 말로, 안수처럼 몸짓으로, 물과 빵과 포도주와 기름처럼 물질적 요소로 되어있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의회는 모든 신자들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촉구한다.
왜냐하면 능동적 참여는 “세례의 힘으로” 믿는 이들에게 권리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 (14항). 또한 “개개의 지체는 계급과 직책 및 실제 참여에 따라 각각 다른 모양으로 관여하지만” 전례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밖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26항).
더 나아가 공의회는 전례의 “경직된 획일성” (37항)에 반대하여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 (unitas substantialis)을 강조한다 (38항). 사실 전례는 예배를 거행하는 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환경에서 거행된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은 전례를 문화에 적응 또는 도입해야 될 필요성을 설명한다. 이를 위해 공의회는 라틴말 표준 전례서에 기초한 모국어로 된 전례서들을 지역 교회가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63b항). 이를 위해서는 전례에 관한 신학적, 역사적, 사목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 “건전한 전통을 보전하면서도 올바른 진보의 길을 열 수 있다” (23항).
전례헌장이 반포된 후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전례개혁이 수행되었다. 이 중에서 평신도의 능동적인 참여와 모국어를 사용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나는 한 이태리 부인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공의회가 끝나고 미사 전례 개혁이 이루어져 처음으로 이태리말로 미사를 참례할 때 저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변모>
그렇다, 이제 신자들은 하느님께 자신의 문화와 전통과 풍습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전례의 토착화라는 큰 숙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전례헌장의 정신과 전례에 관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 또한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례의 토착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토착화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끊임없는 예식의 발명밖에는 안될 것이고 끝내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토착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전례 거행의 주체이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더욱 잘 드러내고 동시에 교회가 나날이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변모하게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다운 신앙과 그분에 관한 살아있는 체험,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밑바탕에서 전례의 토착화는 우리 땅에서 자연스럽게 꽃피게 될 것이다.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
약력: 85년 수도원 입회, 대구가톨릭대학교 졸업 신학 석사, 93년 종신서원, 94년 사제서품, 교황청 설립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 전례학 석사,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전례 책임자이며 대구 가톨릭 대학 교리교육학과와 대구 가톨릭 신학원에서 전례학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