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 김상욱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매양 같은 해가 떠오르지만, 우리는 이즈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가만 나아갈 길을 가늠하기도 하는 법이다. <어린이와 문학>의 필자나 독자, 운영진들도 이 잡지를 앞에 두고 한 번쯤은 지나온 또 나아갈 길을 가만 생각해 보고 있을 터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때로는 운영자로, 필자로, 독자로 매체를 건사하고 채우고 끌어안는 일을 몇 해 동안 거듭해 온 다음에야 어찌 생각이 없으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린이와 문학> 또한 잡지인 다음에야 여러 매체들 사이에서 <어린이와 문학>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빛깔이다. 작가를 지망하는 예비 작가들과의 관계가 그 어떤 매체보다 돈독한 것은 분명하다. 다양한 소모임들을 통해, 쉼 없이 정진하는 이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음은 오롯한 보람이다. 또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도 기특하다. 여전히 출판사들의 광고 없이는 운영이 힘든 지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해를 달마다 책을 발간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모두 이 잡지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이 한 줌씩 한 줌씩 모아 이루어낸 당찬 일이다. 더욱이 그런 만큼 이 매체는 누구의 소유로 결코 귀속되지 않는 공공성을 자연스레 획득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어린이문학의 공공영역인 셈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모든 특성들만으로 매체의 정당성이 저절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어린이와 문학>이 문학을 푯대로 내 걸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잡지의 근간은 여기에 게재되는 좋은 작품이다. 알찬 동시, 동화, 비평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가는 매체의 본원적인 역할이다. 작가론, 작품론 등에서 실증적인 자료로서 거론되는 것을 넘어, 그 모두를 포괄하는 문학사는 이 잡지에 게재된 작품들 중 어떤 작품들을, 얼마나 깊은 애정으로 쓰다듬을 것인지 궁금하다. 식민지시대 동요의 시대에 이어 또 한 번 새로운 동시의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그에 걸맞은 빛나는 표정을 아로새기고 있는 작품을 몇 편이나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이야기의 문법을 창출하고 새로운 시야로 우리네 어린이들의 삶의 방향을 앞질러 열어주는, 이야기의 힘이 솟아나는 작품들은 또 몇 편이나 쌓여 있는지. 작품의 뒤에서 명료하게 그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고 앞질러 작품의 가야 할 길을 환하게 비춰 보이는 비평은 또 얼마나 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 현재로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좋은 작품이 땅 속에서 분수가 샘솟듯 제 홀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역사는 그저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쌓이고 쌓인 것들을 안고 또 딛고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처럼 스스로를 세울 뿐이다. 지나치게 조급하여 당장 성과를 내어놓으라는 요구만큼이나 문학을 모르는 치들의 언설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꿈조차 낮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지금의 현실은 진실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사실조차 왜곡하고 뒤트는, 지극히 반문학적인 작태들이 버젓이 횡행하는 즈음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만큼 어린이문학이 가야 할 길이 명료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현실 속에 은폐된 진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이라면, 어린이문학은 현실의 진실과 함께 삶의 진실 또한 동시에 끌어안는 일이기에 그만큼 더 명료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어린이문학의 황금시대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허덕이고 고통스러운데 어찌 어린이문학만이 시대와 단절된 채, 호황을 누릴 수 있으랴. 자본과 권력만이 시시덕거리는 시대에 어찌 문학이 덩달아 호사를 구가할 수 있으랴. 오히려 함께 고통을 지고 가는, 어쩌면 더 많은 고통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 이 잡지의 둘레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의 몫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어린이문학의 본질인 희망 또한 견고하게 그러쥐고 있어야 할 것이다. 시인 백석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듯,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앞질러 구체화하는 그 굳고 정한 작품을 생각하는 시간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