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능엄경에서는 아난을 통하여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추궁해 나갑니다. 마등가라는 음녀에 홀려 부처님의 능엄신주로 구제되어 앞에 엎드린 아난에게 부처님은 ‘마음이 어디 있는가’라는 주제를 설정 이를 설해 가는 것입니다.
아난은 먼저 ‘마음은 몸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아난과의 질의응답을 계속하시면서, 신령스런 마음이 일체를 밝게 아는 것이므로, 만약 밝게 아는 마음이 실제로 몸 안에 있다면 먼저 몸 안에 있는 심장 간장 등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실제로 밝게 보고 알아야 할 것인데, 몸 안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밖을 안다고 할 것이냐는 반론을 통하여,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이를 파하십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아난은 다시 마음이 밖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중생들이 몸 안은 보지 못하고 몸 밖만 보는 것은 마치 등불� 방 밖에 있어서 방 안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 그 이치가 명백하다� 자신있게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아난에게 저 한 사람이 밥을 먹을 때에 다른 여러 사람도 함께 배부를 수 있겠느냐고 묻고, “만약 깨닫고 아는 마음이 실재로 몸 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이 서로 떨어져서 자연히 서로 관계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면 바로 마음이 아는 바를 몸은 알지 못해야 하고, 아는 것이 몸에 있다면 마음은 알지 못해야 할 것인데 눈이 볼 때에 마음도 함께 분별하니 이와 같이 서로 안다면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다시 두 번째로 파(破)하십니다.
아난은 다시 마음이 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몸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몸과 마음이 서로 알아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 또렷하게 아는 마음이 안은 알지 못하면서 능히 밖은 볼 수 있으니, 그렇다면 눈 뒤에 숨어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리를 가져다가 양쪽 눈에 대면 비록 유리가 가려졌다 하더라도 지장이 없이 그 눈이 보는 대로 바로 분별하니, 깨닫고 능히 알고 하는 마음이 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눈 뿌리에 있기 때문이고, 분명하게 밖을 보는데 지장이 없는 것은 마음이 눈 뿌리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눈 뿌리 안에 숨어있는 것이 마치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저 유리를 눈에 댄 사람이 마땅히 유리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산과 강을 볼 때에 먼저 유리를 볼 것이고,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산과 강을 볼 때에 어찌 눈을 보지 못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만약 눈을 본다면 눈이 바로 똑 같이 대상경계가 되어 눈을 따라 본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고, 만약 눈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눈 뿌리에 숨어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눈 뿌리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유리를 댄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세 번째로 이를 파(破)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시 아난은, 그렇다면 중생의 몸이 오장·육부(臟·腑)는 몸 안에 있고 눈코 등 구멍은 몸밖에 있으니, 마음이 장·부(臟·腑)에 있으면 바로 어둡고, 구멍에 있으면 바로 밝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부처님을 마주하여 눈을 뜨고 밝음을 보는 것은 밖을 본다고 하고, 눈을 감고 어두움을 보는 것은 안을 본다고 한다면 마음이 몸 안에도 있고 몸 밖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눈을 감고 어두운 것을 볼 때에 그 어두운 경계가 눈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면 어두움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이 된다고 할 것이며, 만약 어두움이 눈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본다고 하는 말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만약 안으로 대하는 것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눈을 감고 본 어두움이 몸 안이라고 한다면 눈을 뜨고 밝음을 볼 때에는 어찌하여 얼굴을 보지 못하느냐는 다시 묻는 것입니다.
만약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안을 대한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고, 얼굴을 보는 것이 만약 성립된다면 이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과 눈 뿌리가 곧 허공에 있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안에 있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허공에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몸이 아닐 것인데, 그것이 스스로의 몸이라고 고집한다면 바로 지금 너의 얼굴을 보고 있는 여래까지도 응당 너의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허공에 있는 너의 눈은 보고 안다고 하더라도 너의 몸은 알지 못해야 할 것인데, 굳이 몸과 눈 둘이 다 같이 안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두 개의 앎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바로 너의 한 몸이 응당 두 부처를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은 안을 보는 것’이고 ‘밝음을 보는 것은 밖을 본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난은 다시,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갖가지 법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긴다는 부처님 말씀을 들어 안과 밖에 있는 것 같다고 다시 대답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만약 네가 손으로 네 몸을 찌를 때 아픈 것을 아는 마음이 안에서 나오겠느냐 밖에서 들어오겠느냐고 되묻고, 만약 안에서 나온 것이라면 몸 속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하고, 만약 밖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먼저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이 안과 밖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아난이, 보는 것은 눈이 하는 일이고, 마음은 아는 것이지 눈이 아니므로, 본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부처님께서는 만약 눈만이 능히 보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도 아직 눈은 있으니 물건을 볼 수 있어야하고, 만약 물건을 본다면 어찌 죽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시어 아난의 반론을 다시 부정합니다.
아난이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마땅히 중간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그 중간이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추궁하시고, 만약 몸 주변에 있다면 중간이 아닐 것이고, 만약 딴 곳에 있다면 어딘지 표시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표시할 곳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일정하게 정해진 곳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로서 어떤 사람이 푯대로서 표시하여 중간을 삼았을 때에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될 것이고,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될 것이니, 표시자체가 이미 어지러워 의미가 없고 마음도 역시 따라서 어지러워지니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아난의 주장을 부정하십니다.
아난은 다시 중간이란 것은 그러한 두 가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눈과 색 경계’가 연(緣)이 되어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이어서 눈은 분별이 있으나 색 경계(色塵)는 앎이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식(識)이 그 중간에서 생기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곳이 바로 마음이 있는 곳이 될 것이라고 다시 주장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마음이 눈 뿌리와 경계(塵)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마음의 바탕(體)은 양쪽에 아울러 있어야 하는데, 색 경계(물질)는 눈(체)처럼 분별(知)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서로 맞서게 되어 둘로 갈라설 것이니 중간이란 있을 수 없고, 양쪽에 아울러 있지 않다면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곧 체의 성품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마음이 중간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다시 부정하십니다.
그러자 아난은 마침내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본성은 이미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곳에도 있는 데가 없어서 일체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이름 하여 마음으로 삼는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들어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면 되겠다’는 뜻을 부처님께 아룁니다.
부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일체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현상이 있는 것에 대한 것이냐 없는 것에 대한 것이냐고 되묻고, 이미 없는 것에 대환 집착이라면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이 본래부터 없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만일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이미 있다는 것을 분별하였으니 집착하지 않는다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아난과의 질문을 통하여 참 마음의 소재를 추궁해 가는 것입니다. 아난은 대답을 통하여, ① 몸 안에 있다. ② 몸 밖에 있다. ③ 눈뿌리에 있다. ④ 몸의 안과 밖에 함께 있다. ⑤ 몸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⑥ 중간에 있다. ⑦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마음인 것 같다는 등 일곱 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대답 모두를 부정하십니다. 부처님은 진심(眞心)의 소재를 묻는 것인데, 아난은 상황 따라 변하는 망심(妄心)을 진심(眞心)으로 알고 대답하니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연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승기신론연구회장 전 종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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