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말씀은 대궐에서 내려지고 옛 벗은 우정에서 보내는도다.
집을 감싼 산과 계곡 경치가 좋아 구름 두른 송백이 푸르디 푸르구나 .
나라의 은혜를 어찌 다 갚으리오 어느 날에나 대궐 뜰에 다시 돌아 갈고.

비석에 있는 詩의 拓本.

대감의 묘는 또 한번의 변화를 겪는다.
後孫들이 先祖의 묘가 네모난 방형(方形)이라 後孫의 發展이 없다고 생각하여 圓形으로 바꾼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비석을 올리는 중이다.
이것이 60년대 ~ 80년대의 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사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옛것을 되찾는 운동도 일어난다.
2006년도에 始興市에서는 李叔蕃 대감의 묘소를 옛처럼 복원하기에이른다.

옛 안내문.

새로 만들은 안내문.

입구에 있는 비석 뒷면.
이 비석은 1958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碑文은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것으로 문헌에 남아 있어서 다시 새겨 넣은 것이다.





부러진 목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原來 李叔蕃 대감은 文科에 及第한 분이므로 文官石만 서 있다.
朝鮮이 開國한 후 첫 번째 科擧에서 壯元으로 及第한 것이다.

석등(石燈 : 장명등)의 옥개석도 바뀌었다.
전의 것이 모양은 있지만 현대식이고 이것은 考證에 따라 바꾼것인듯하다.



하단의 구름문양이 선명하다.

새로 단장 된 묘소.
옆에 두른 돌이 새로운 돌이라 조금 모양이 어색하다.
혼유석(魂遊石)을 찾았다면 다른 돌도 그 근처에 있었을텐데,,,,,


뒤에서 본 모습.
돌이 새것이라 어색하지만 옛날 모양을 되찾아 다행이다.
"燃藜室記述"이나 "소문쇄록"(謏聞鎖錄)에는 李叔蕃대감이 咸陽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다르게 나와 있다.
世宗은 李叔蕃대감을 咸陽에서 불러 올려 "龍飛御天歌"를 만드는데 참여하게 한 후,
그를 한양 밖 가까운 곳에 와서 살게 함에 따라 李叔蕃대감은 경기도 安山에서 생활하였다.
<세종실록, 세종20년 9월 25일> <세종실록, 세종20년 12월 12일> 참조.
安山을 택하게 된 것은 대감의 처음 부임한 곳이 安山郡守였기 때문이리라.
다음해인 1440년 (세종22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떠나자
世宗은 관곽(棺槨)과 송진[松脂]과 종이 70권을 下賜하였다. <세종실록, 세종22년 3월 15일>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말년의 순조롭지 못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묘비(墓碑)는 1958년에야 건립되었는데,
묘비(墓碑)의 비문(碑文)은 강희맹(姜希孟)이 지어 놓은 것을 새겼다.
이숙번 대감이 "용비어천가"를 만들제 참여한것은 세종실록에도 나와 있지만
여러 野史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 있다.
‘遂得罪長流咸陽別墅 世宗命儒臣撰龍飛御天歌 以李叔蕃知太宗朝事馳馹召也’
마침내 죄를 얻어 멀리 함양 별서로 유배되었다.
세종이 유신들이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적에,
이숙번이 태종 때의 일을 잘 안다고 하여 급히 불렀다.
<용재총화, 권3>
‘時方撰龍飛歌 上問詳知先祖時事者 金墩卽擧李以對命召還京…’
그때 <용비가>를 찬하는데, 선왕조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을 물으니
김돈이 곧 이숙번을 서울로 불러들여 고사를 물어보게 하였다.
<소문쇄록, 상권>
‘遂得罪流咸陽 我英廟命撰龍飛御天歌 以李叔蕃知太宗時事命召參畢還送配所’
죄를 얻어 함양에 유배되었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찬하게 명하자 이숙번이 태종조의 일을 제일 잘 안다고 하여
부르고 끝난 후 바로 배소로 갔다.
<해동잡록 5>
‘…命儒臣撰龍飛御天歌世宗問詳知先朝時事者 墩卽擧公以對遂馳馹召之公以白衣詣闕…’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으려고 유신들에게 명하면서
선조 때의 일을 제일 자세히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므로
김돈이 곧 공(이숙번)을 천거하였더니, 드디어 역말로 달려서 불렀다.
공이 백의로 대궐에 들어왔는데…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 명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