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덜《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 홍 재 숙
지금 바로 오늘, 대한민국의 정의는 살아있는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 이라는 말이 ‘적폐, 원조적폐’ 라는 사나운 말로 회자되고 있는 요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함의하는바가 대단히 크다.
2010년 한국사회에 정의正義 신드롬을 불러일으켜 60만 권 넘게 팔린 정치철학 서적은 우리 사회의 지성들에게 많은 성찰을 안겨주었다. 27세에 하버드대학교 최연소 교수가 된 마이클 샌덜은 정치철학 강의를 36년간이나 진행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20여 년 넘게 최고의 명 강의 교수로 뽑힌 인물이다.
센델 교수의 수업 방식은 따분한 철학 강의를 총체적인 영상 자료를 동원하면서 풀어나간다. 먼저 대형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 앞에 등장해서 화면 가득 그 시간 그 주제에 맞는 영상을 띄운다. 이때 주제를 논의할 화두를 제시하며 토론을 이끌 학생들을 여러 명 지목하는데 사실은 철저하게 기획하고 연출한 수업진행표에 따른 것이다. 무작위로 뽑은 것처럼 부르는 학생들의 이름도 다음 주제를 미리주고 찬 반 의견을 이메일로 받은 뒤 이중에서 선발해서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샌델 교수의 수업방식은 현장감과 함께 모두를 집중시키며 교수와 학생이 정치철학을 함께 고민하는 진지한 수업 분위기를 낳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하는 방법론이다. 주제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찬성 의견이나 반대 의견을 끄집어내어 서로 토론하고 반론을 제시하면서 바람직하게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게 한다. 학생들은 센델 교수의 수업을 통해서 딱딱한 이론 수업이 아닌 현실에서 제기되는 민감한 이슈와 주제를 관통하는 정의를 바라보게 된다. 토론을 통해 자신의 고정된 생각을 되돌아보거나 생각이 다른 타자를 수용하는 관용정신을 배운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서로의 주장이 양극화 되어 둘로 쪼개진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흑과 백으로 양분화 되어 자기 생각만 옳고 타인의 생각에는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잠시 멈춰 서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의견을 듣는 훈련이 필요한 그들이다.
지금 바로 오늘도 일어나는 <대한민국 국가 현안> 문제에 대해 정부, 국회, 사법부는 ‘정의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땀 흘린 만큼 대접받고 반칙이 허용되지 않는 ‘공정 사회’ ‘공동 선’을 가치로 삼아야한다. 나의 졸시 ‘피자 한 판’ 도 이러한 세속을 꼬집었다.
피자 한 판
피자 판을 들여다보면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 이치가 한 눈에 보인다
양파, 피망, 양송이
불고기, 햄, 치즈가
차별 없이 어우러져
색을 맞춘 것도 그렇고
각각의 맛이 버무려져
누구나 좋아하는
새 맛이 되는 것도 그렇다
손바닥 만 한 땅에서
너와 나를 구별하고
네 편 내 편 편을 갈라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색깔론도 버무려진다면
기막힌 한 호흡의 절창일 테다
이 책에서 나의 눈길을 끈 대목은 ‘철로를 이탈한 전차’ 논쟁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열차가 브레이크 고장이 나서 기관사는 결정을 해야 하는 기로에 처한다. 직진하면 선로에서 작업 중인 인부 다섯 명이 죽고, 레버를 당기면 다른 쪽 선로에서 홀로 일하는 인부가 죽는다.
센델 교수는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도덕적인 딜레마를 묻는다. 그러면서 예로 제라미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인 공리주의와 우리 모두 각자가 지닌 도덕률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칸트의 자유주의, 두 관점을 이야기 한다.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나의 저울추는 벤담의 공리주의로 살짝 기울어졌지만 이 딜레마 역시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선택해야하는 기관사의 선택이다.
이런 사례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 센델 교수가 독자들에게 던진 화두를 동아일보 박용경 경제부차장이 -어느 철도 하청 근로자의 죽음 - 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내용을 요약하면 ‘경주 지진으로 어수선했던 2016년 10월13일 새벽, 경북 김천 구미역 인근 KTX 선로에서 보수작업을 위해 선로에 들어선 코레일 하청회사 2명이 지진으로 지연 운행된 KTX열차에 치여 숨을 거뒀다. 캄캄한 새벽 철로에서 일어난 참담한 사고였다. 이 일은 잇단 여진과 수많은 사건 사고 속에 묻혀 졌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게 엄중하게 ‘정의’를 묻는 사건이다. 사고 열흘 후 경찰조사로 밝혀진 사실은 숨진 직원 2명은 가로 2.5m 세로 3m의 작업용 수레(트롤리)를 먼저 선로 밖으로 밀어내느라 시간을 지체하다 변을 당했다고 밝혔다. 만약에 수레를 밀어내지 않고 세월호 선장처럼 나 먼저 살겠다고 내뺐다면 승객 300명이 탄 KTX 열차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불 보듯 확실하다. 직원 2명은 목숨을 던져 승객의 생명을 구한 의인이다.
사회는 의로운 죽음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서로 책임을 밀기에 바빴다. 하청회사 측은 코레일 측의 진입 허가를 받고 선로에 들어갔다고 하고 코레일 측은 진입을 허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어느 쪽이 선로 진입을 명령했든, 시키는 대로 캄캄한 선로에 들어섰던 현장 근로자는 잘못이 없다. 절체절명의 순간 수레부터 밀어냈던 의로운 희생정신 즉 정의가 발현된 것이다. 샌델 교수가 질문했던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가 이 사건에 해당된다. 목숨을 던져서 수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구했다.
관리 책임이 있는 코레일이 책임 공방부터 벌이니 무책 임하다. 숨진 이들이 든든한 노조의 지원을 받는 코레일 정규 직이면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까. 정의에 준하여 합당한 대우를, 의인으로 추대되었기를 바래본다.
노동계 현실은 비슷한 일을 해도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원청회사, 하청회사로 신분과 소속이 갈리면 대우가 크게 달라진다. 1, 2, 3차 협력 회사로 갈수록 급여와 처우가 곤두박질치는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이다.
2015년 기준 시간당 임금으로 대기업 정규직 100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중소기업 정규직은 49.7,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5.0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취업하라고 권할 수 있을까? 대기업과 노조의 협력, 정부의 강력한 정책 없이는 ‘갑’과 ‘을’로 갈린 노동 시장 이중 구조의 공고한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청년들은 백수라는 이름표에도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되려고 청춘을 소비한다.
센델 교수가 제기한 -철로를 이탈한 전차-를 확장해보면 곧 도래할 ‘무인 자동차의 딜레마’ 가 적용된다. 무인 자동차 연구자에게 ‘탑승자와 보행자 중 누구를 구하게끔 프로그래밍 하느냐’ 는 매우 어려운 윤리적인 문제이다.
매사츠공대에서 400명에게 “무인 자동차는 탑승자 1명과 보행자 10명중 누구의 생명을 구해야 할까? ”를 설문 조사한 결과 대부분 공리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탑승자 1명이 가족이라면?” 하는 질문에는 그렇게 프로그래밍한 무인 자동차에 가족을 태우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 사례로 보아 인간의 속성은 이타주의 보다는 이기주의 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편적으로 개인의 행복이 만족해야 사회를 돌아보고 선을 베풀 마음이 생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문제 제기한《정의란 무엇인가》는 현실 문제를 통해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해결이 요원하지만 ‘정의’라는 담론을 끄집어내어 서로 이야기 하고 토론한다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