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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칠신묘가 노량진에? 삶의 인생 길 한세상 뜬구름 잡고 희희낙락 말게 무엇이 한 세상에 욕심은 담고 가려는가? 사람 아 사람 아 하루를 살더라도 믿음과 사랑 신뢰로 살아야지 상대를 음해 비방해서 자신에게 얻은 삶은 무엇인가?
갈수록 침체되어 가는 사회 현실 사기와 도둑들이 돈 앞에 살수하는 웃지 못 할 참혹한 사회 어느 넘이 이렇게 만들어 가던가? 돈과 권력 앞에 우정도 사랑도 믿음도 진실도 없는 세상 쥔 자는 쥔 자대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자아를 상실한 삶에 허망함이 묵무 무 하늘이 원망 스럽다.
괴로움 삶 쌀쌀한 바람에 쇠주 한잔에 신문지 이불삼아 땅 바닥 구들장 삼아 살아 가는 신선이여 잘 사나 못 사나 잉태는 한 곳이듯이 이리가나 저리가나 모로 가나 북망산청도 한 곳 나오고 들어가는 삶 그 삶이 인생길이든가 보네
한 세상의 삶에 음모와 술수 아첨과 가식을 외면 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움 노력한 만큼 행복한 삶 사세.. 좋은 글 응용 사칠신 묘 *이글 접하시는 분께 사칠신 묘에 대한 내력을 바로 아시려면 아래내용을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씨조선의 한 후손은 조선왕조 책을 읽다 가 책을 벽에 다 후리 처 던지고 고 그 뒤부터 조선의 역사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말기 왕씨와 조선 초기 이씨부터 왕권 싸움에 음해 음모와 죽이고 또 죽인 혈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권 싸움의 역사이다.
1,조선의 역사는 건국 태조이성계1392~ 미지막 왕 27대 순종이척1910년에 518년간의 역사다. @왕위를 제일 장수한 왕은 21대 영조52년, 숙종46년, 고종44년, 중종38년이며 @왕위를 짧게 한 왕은 예종1년,정종2년 문종2년 이다. @왕으로 자녀의 순위는 20명이상 1위3대태종이 12남17녀로29명, 2위9대성종이 16남12녀로28명 3위14대선조 14남11녀로25명 4위2대정종이 15남8녀로23명 5위4대세종이 18남4녀로22명이디 @자손이 없어든 왕은 단종 6대단종, 12대인종, 20대경종, 27대순종 @무남독녀는 24대헌종,25대철종 이다.
이어지는 사육신과 생육신을 십이신이라 불러온 역사는 세종은 아버지가 기틀을 잡아 놓은 탄탄대로에서 성군소리를 들어가면서 32년의 재위로 집현전을 통해 궁궐에서는 인재들이 넘쳐 흐렸고 그리하여 한글을 만들었고 김종서와 같은 명장으로 북방정책이 개척 되었고 나라의 운우는 절정에 넘쳤다 거기다 적장자인 손자까지 왕위에 올을 것을 만들어 놓고 세종대왕은 승하 하였다. 재위32년18남4녀
이러한 시기에 문종이 정세를 이어받아서니 그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세종3년에 세자 책봉되어 30여년 동안 문종은 세자자리를 지키며 5년간 대리청정으로 왕의 정치 연습까지 하고 왕위에 오른다.
세종의 장자 문종은 왕의 자리를 예비 연습끼지 해서 왕권을 이어 받는다. 왕복은 타고 났지만 건강은 이어 받지 못 했다. 건강과 처복은 없었다. 첫 번째 왕후은 자질 부족으로 김씨가 폐출되었고 두 번째는 동성애로 행실이 나빠 봉씨가 폐위되었으며 세 번째 현덕왕후권씨는 후궁으로 들어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홍위(단종)를 낳자 산후병으로 요절한다. 이분이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안동 권씨다. 단종을 낳자 칠 안에 죽자 세종대왕(이도)의 후궁 헤빈양(청주)씨 할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헤빈양씨 할머니는 어머니 역할을 다하여 키워 왔다 세종대왕이 승하할 때 왕을 모신 여인들은 궁에서 쫓기어 나와야만 했는데 장차 왕이 되실 단종홍위를 키워왔기에 궁에 남게 되었다. 1452/5문종(이향)은 왕위에 오른 지 2년3개월 만에 승하 하였다,
2.공신들의 천국 길. 문종이 승하하자 단종(홍위)의 나이 12세(만11세) 부모형제도 없는 외로운 왕의 길에 오른다. 그러나 할아버지 대 부터 심어 놓은 김종서(순천김) 황보인, 남지, 정분은 세종대왕 대에부터 연결된 인맥이며 부모같은 외삼촌 권자신과 세종대왕 후긍 헤빈양씨 할머니 있었다. 박평년은 혜빈양씨와 사돈 간이니 이들 또한 우호 세력 이었다. 세종대왕 대에 심어놓은 집현전 학자들 까지 단종의 사람이니! 그러타면 단종의 세력은 어떻게 보면 기반을 다져놓은 세력에 탄탄대로 이였다 이 탄탄한 세력구도에 단종을 버티고 있던 주추 돌 하나가 무너진다. 바로 세종대왕의2째 아들 단종의 삼촌(숙부) 수양대군은 김종서 세력이 커지는 것에 눈이 뒤집혔을까. 1453년계유년 단종이 왕위 오른1년5개월 만 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문종이 승하 하기 전 어린단종을 유탁 했던 삼상 중 김종서 집을 불시에 습격해 김종서와 두 아들은 죽인다. 김종서의 셋째아들은 그 자리에 없어 목숨을 구제했고. 김종서를 철태로 죽인 후 수양은 김종서가 이징옥과 모반하였기에 위급사항으로 창졸하였다. 거짓으로 단종에게 고 하였고 또한 단종의 명이라 속여 재상과 중신들을 밤늦게 소집하여 미리 계획된 살생부 되로 황보인,조극관,한성, 이양등은 궐문 밖에서 죽였고 이조판서급 인 유처공,이명면,조변,원구,김연,민신,등은 집으로 찿아 가면서 암살한다, 이경유는 참(목을뱀)하고 조수량,안완경,한송,지정,이석정등은 안평대군과 황보인,김종서와 한패가 되어 왕위를 창탈하려 했다면서 강화도로 귀양을 보낸 후 사사로 죽인다. 김종서,황보인, 정승등은 저자거리에 장대로 목을 매 달았고,금성대군,화의군 영,혜빈양씨, 한남군 어, 영풍군 전, 등 세종의 후궁소생들 모두 귀양을보낸다. 계유년 일어난 일로 계유정변,계유정난,계유반역이라 불여 온다.
수양은 반대파들을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 하였고 김종서 황보인목을 저작거리에 걸었으며 수양은 의정부사와 이조 병조 판서내외병마 도통사등 겸직을 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자기 집권세력을 앉힌다.
수양대군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기를 찬양하는 글을 짓게 유도하였으며 김종서 일파를 제거한 후 37명을 정난공신으로 임명하였다. 한명회,성삼문,권람,홍윤성,신숙주,정인지,강희명.한계희,강순,한계순,정창손, 최향,서수,이백손,황수선,조득림,한백륜,박원형,정현조,이부, 이준,심회,이복, 이극증,박중선,홍응,박지번,정인지,,조석문,,노사신,강곤,조득림,신승선,권감, 구치관, 양성치등이다. @삽혈동명 수양은 공신들과 산짐승의 피를 입에 바르는 삽혈의식을 가졌단 한다.
계유구대타는 김종서가 습격 당하던 날 김종서를 제거하기위해 망설이고 있을 때 수양부인 정희왕후윤씨는 수양대군,(이유)의 갑옷을 입혀주면서 꼭 성(成)리하여 성군이 될 것이라고 말 했다 하며, 단종을 상왕으로 체면상 창덕궁에 모시는 일과 영월청령포의 유배지로 보내고 사사로 죽일때도 깊숙이 관여 하였다한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집현전의 학자들과 육신에 오른 인물 중에서도 성삼문등 김종서가 커지는 세력에 그의 죽음을 속으로 웃는 자들도 있었기에 성공 할 수 있었다 본다.
1455/6월 수양대군(이유)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른 어린조카를 공포의 분위기로 숙부에게 부탁(사양) 하는 것처럼 왕위를 강탈당한다. 권력 앞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부모형제도 추잡하고 치사하고 비열하고 무섭다. 단종의 주요측근인 혜빈양씨,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을 귀양 보내면서 단종은 허울조은 상왕으로 창덕궁에 옮겨왔고 수양(이유)은 경복궁으로 제7대왕으로 오르게 된다.
수양의 세력은 왕위를 쟁탈한 구대타의 공신들은 똘똘 뭉쳐 권력과 부를 축제하였고 홍윤성 2등공신은 자기 집 앞 냇가에 말을 씻는다고 사람과 말을 죽여도 살인죄를 벌하지 않는 공신천국 이였다. 공신들의 거만함을 하늘을 찔러서 대놓고 세조가 공신들을 꾸짖으면 세조에게 "피의군주 가 되신 저하가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아니 됩니다. 을 자주 했다고 한다. 뒤에서 일을 꾸미는 세조정희왕후윤씨와 한 명회, 신숙주, 정인지 권람 이었다. 세조는 악몽과 공신들의 공포와 문둥병이란 병마에 시달리며 권력만큼 악의 소리를 수양인 세조가 안으면서 말년에는 힘없는 군주로 14년간재위 하고 51세로 생을 다한다.
3,단종과 신들의 비극 단종의 충신들 중에 세조가 어린조카자리를 강탈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익공신들이 권력과 부를 독식하는 정난공신세상이었다. 김종서를 제거 할 때만 해도 김종서의 커지는 세력에 세조 수양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단종을 보호보다 위협으로 천명을 거역하는 명분도 원칙도 없었으니. 공신은 천국 백성은 지옥 이였다.
이 부당함을 보고 박평년과 이개선생의 시발점으로 단종복위운동이 최초로 시작 된다. 1456년6/1일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 환영 행사 때 거사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회장의 장소가 협소하여 운검행사도 취소 되면서 세조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고 세조의 처단계획은 수포로 돌아 돌아 간다. 하늘은 세조를 돋았을까? 이미 거사일이 누설되어 세조와 한명회가 알고 있을까? 결국은 거사일이 취소되고 연기 할것을 결정하게 되자 이때 병력 지휘를 맡은 도진무(都鎭撫) 김 문기선생께 거사연기는 아니 된다면서 세조를 처단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성삼문의 강력한 만류로 후일 세조가 농사장려 행사 때 하기로 하면서 거사 일을 연기 하였다. 동의록에 의하면 거사당시 같이 참여 했던 겁쟁이 김질은 자가 장인 정창손(세조때 영의정)에게 흘리게 되어 세조 귀에 들어가게 되어 2차 단종복위 거사는 행하기전에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 부터 또 한 번 궁궐에서 피비린내 나는 단종의 충신들은 전멸하게 된다.
4,사육신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문신 남효온南孝溫 선생께 지은 추강집의 육신 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입으로 민간에 전해내려 왔던 이야기를 담아 만들어 놓은 조선전기의 역사 설화이다. 추강집의 육신전은? 인물 기록으로 묽어 놓은 전고대방(강효석)은 육신전(六臣傳) 소설, 남효온의 육신전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고 육신전의 원본은 없다. 유홍이 쓴 육신전은 또 한 내용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가 각기 다르니 이들이 저술한 내용이 얼마나 신비성을 가질까? 1454 단종2년에 태어난 남효온이 훗날 성인이 된 그가 어떻게 똑바른 눈으로 그 당시를 기술 할 수 있었으며 육신 전을 쓰며 김문기 선생과 유응부를 바뀌어 기록하는 실수까지 더함으로써 희대의 충신을 역사의 뒷면으로 묻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남효온 누구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단종재임2년에 태어난 문신 남효온은 조선의 문신이며 초야을 떠돌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왕조의 허물을 불신하고 불교배척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明行錄〉 〈귀신론>〈육신전〉 등이며 〈육신전〉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300년후정조2년에 복관 작 되어 신위는 고양 문봉서원(文峰書院)·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영월 창절사(彰節祠)·의령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남효온선생은 유생원시절에 과거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어 과거에 등급 하고도 벼슬에 뜻을 가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특별 한 문신이긴 분명하다. 조선 한 시대의 문신으로 그의 업적을 친송 할 부분도 많다.
남효온생생의 쓴 육신전은 어디서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모를 일이냐 누구의 손으로 육신전과 조선세조실록의 정조실록의 내용과 다르게 전해 내려왔는지 감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5,사육신에 오를 수 있는 신하는! 세조의 재위기간 중에 세조유신(신하)로서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한 자로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翰林)또는 집현전(集賢殿)학사로 정4품이상의 고위직분으로 명망 있는 여섯 분을 세조가 괴심반역자로 지명한자들이다. *무신은 육신에 오를 수 없다 @허후(허주의아들)계유정난 성공의 자축연 행사자리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었고 삼상들을 죽여 저작거리에 목을 내어 건 일에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여 귀양을 보내어 죽었다. .세조실록= 허후선생을 이루어말 하기를 허후가 살아 있었다면 육신이 사칠신로 되었을 것이었다는 당시 세조의 말 이였다
死六臣 사육신 조선왕조신록(김박이성유류하) 김문기=문과급제 후 한림학사 출신 공조판서 형조참판, 3군부 도진무 박평년=문과급제 및 중시 급제 후 집현전학사 출신인 전 형조판서 성삼문=문과 및 중시금제 후 집현전학사 좌부승지 이개 =문과 및 중시합격 후 집현전학사 집현전 부제학 류성원=문과 및 중시금제 후 집현전학사 사헌부집의 하위지=문과 및 중시급제한 집현전학사 예조참판 @허후=문과급제후 중시문과급제 사관 세조당시 의정부좌참찬 @성승=지중추원사(장군) @유응부=동지중추원사(장군)
#생육신이란 세조의 찬위를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안니 함)의 원칙에 따라 두문불출 또는 방랑생활을 하면서 초야에 묻혀버린 단종(재위기간1452~1455)의 충신 중에 살아 절개를 지킨 여섯 분을 생육신이라 불러 오고 있다.
김시습(金時習:1435~95)·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1420~89)·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1454~92) 권절(權節) : 남효온 대신 생육신에 꼽히기도 한다.
@권절은 어릴 적부터 힘이 세고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남이 장군과 더불어 많이 알여 진 인물이다. 세종29년에 친시문과급제로 등용되어 단종 즉위때에 교리로 지냈으며 세조가 그의 성품과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 여긴 세조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귀머거리의 행세와 조금부족한 사람처럼 거짓 행세를 하면서 생을 다한다. 그는 죽어 무덤 앞에 숙종대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이다.
@사육신과 함께 사생육신(死生六臣), 혹은 십이신(十二臣)으로도 부른다.
. 6,세조실록 영인본 공개 사육신에 대한 결론을 위해 조선실록 영인본을 공개 함에 따라 1977년 서울시로부터 누가 사육신인 가를 9월22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영인본 내용 세조2년 6월초2일경자조 김질의 밀고로 여러분이 조사를 받았지만 김문기,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다섯 분의 국문결과와 류성원선생의 자살한 사실만 기록 되어 있다
세조2년6월초 병오조 6월초8일 단종복위에 참여한 100여명을 처형한 마무리 내용과 처형된 성삼문 하위지 이개 김문기 4인과 옥사한 박팽년과 황선보 두분 중 박팽년을 그리고 자위한 류성원과 허조 두분중 류성원을 여섯 분만 개인 활동사항을 열기하여 기록 되어 있고 김문기 외 다섯분 국문기록내용은 세조의 사람들인데 세조를 떠난 동기를 물어 기술한 내용과 김문기선생의 국문기록에는 성삼문과 박팽년 두분에게 김문기선생이 군 동원을 맡은 단종 복위운동에 중추역할의 분담을 정하여 맡았다는 기록이다.
6월초9일 정미조 사면령교서(赦免令敎書) 김문기의 우익(보좌역또는 하수인)은 유신의 장수 인 성승 ,유응부, 박쟁(朴崝), 송석동은 거사하려 하였다고 기재 되어 있다. 김문기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류성원 6신과 3운검 성승 박정 유응부이다는 기록이다.
추강 남효온의 육신 내용의 오류 위헌 내용 전고대방에서 6신을 6장으로 기록되어 세상에 알리게 된다. 전고대방=조선 말기의 학자 강효석(姜斅錫)이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각종의 참고자료를 수집하여 편찬, 간행한 책(1924년) 김문기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류성원 인 6신을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 인 6장으로 썼고 박쟁(朴崝),삼승 유응부 3운검을 박중림 삼승 박정으로 썼으며 이개선생은 집현전부제학정3품인데 교리로 정5품으로 썼고 정3품관인집의 인 류성원을 정4품관인 서예로 썼고 성승장군은 세조가 단종자리를 찬탈할시 있지도 않은 벼슬인 도총관이라 썼고 성삼문은 세조가 왕위 찬탈당시 동부승지 이였는데 우승지로 썼고 박평년은 단종때에 충청감사로 나가있었는데 세조즉위에 충청감사로 기록되어 전해왔다 또한 옥사하였는데 형장에서 죽었다는 오류도 많았다.
여기서 김문기선생을 유응부로 기재되는 오류내역은 유응부는 김문기선생의 우익(보좌)이였다. 세조실록에 6신중에 불복한 사람은 김 문기선생 뿐인데 유응부로 유응부가 재상을 지낸 일도 없는데 재상으로 (김문기의 양력) 유응부가 함길도절제사를 지낸 일이 없는데 함길도절제사로 (김문기의 양력) 유응부가 사육신이 아닌 사육신으로 (김문기 사육신) 위 조선실록을 영인본으로 공개됨에 따라 1977년 서울시로부터 누가 사육신인 가를9월22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1, 세조2년6월6일 갑진 조에 팔도관찰사 절제사 처치사에게 내린 선유문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류성원,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유응부,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 윤영손, 박기년 ,박대년이 반역을 음모 하였다라고 17인이 기록되어 있음.
2, 세조2년6월8일병오일조에 병자관련자로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사 효수3일캐 한 사실과 주모자의 활동상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건대 그들 중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여섯 분만이 육신만에 들고 있으며 김문기가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 할 때 군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 3, 숙모전서무배형위차에 국혼관계자를 제한 병자정난관원으로는 김문기의 위차가 수위임 이상1,2,3항의 사료에 전거하여 판단하건대 충의 공김문기를 현창하여야 된다고 사단함 첨기, 조선왕조 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정사이고 추강집은 전문한 바를 사찬한 것임을 밝힘 동년 12월2일 서울시의 재조회에 대하여 김문기선생의 가묘를 육신묘역에 모시고 기왕 있던 유응부 장군의 묘는 그대로 두라고 결정함
7,노량진 묘소에는 노량진묘소에는 성삼문, 박평년, 이개, 유응부 넷 분만 묻혀 있었으나 1977년 사육신 묘역을 성화 서업 때 김문기,하위지,류성원 세분의 가묘를 추가하여 모시게 되었다.
1977년 국가 역사 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르면 김문기의 양력과 국문기록을 영인본 공개로 함으로 유응부와 잘 못 기재되었음을 밝힘 국사편찬위원회
그리하여 노량진 묘소에 사칠신 신위 묘소가 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결정된 사항을 인정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 창에는 사육신에 대한 수많은 자기 주장의 글들이 검정도 되지 않은 체 자기의 기록이 옳은 양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으로 오름에 대한 불신의 내용이 블로그 공간을 가득 매우고 있다. 아래내용은 세조실록과 정조실록이 사육신에 대한 기록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단종이 234년만에 임금복원 된다. 강원영월땅에 노산군으로 승하한지 234년만에 1691년숙종17년에 단종께 임금으로 복원된다. 1778년 3월 3일 정조가 고 판서 김상성(金尙星)에게 문헌(文憲)을, 고 판서 김문기 (金文起)에게 충의(忠毅)를, 고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문헌(文憲)을, 순화군(順和君) 이보(李보)에게 희민(僖敏)을,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에게 효희 (孝僖)를, 해안군(海安君) 이억(李億)에게 정의(靖毅)를 증시(贈諡)하였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8,세조의 실록과 정조의 실록의 비교 세조실록을 상고(詳考)하지 않은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은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며 육신전(六臣傳)은 소설, 남효온의 육신전과 유홍이 쓴 육신전의 내용이 다르다 정조가 전교하기를 “안평대군·금성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 다섯 대군,군 왕자인 5종영 (五宗英)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인 4의척(四懿戚) · 김종서·황보 인·정분 인 3상신(三相臣) 이양(李穰)·조극관·민신 인 3중신 (三重臣) · 성승(成勝)·박쟁(朴崝) 인 양 운검(兩 雲劒) 및 6신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하였다.
&배단식에 오를 충신을 의논 한 중신들 헌납 유악주(兪岳柱), 좌의정(左議政) 유언호(兪彦鎬), 규장각(奎章閣)의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유한녕(兪漢寧),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장령 남혜관(南惠寬) 이 정단(正壇),별단(別壇)에 배식(配食)할 충신을 의논하여 정조에게 아뢰었다.
정단(正壇)에 배식(配食)한 32인 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도진무(都鎭撫)이며 량 운검(兩 雲劒)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유사수(兪思守)가 연좌되어 죽었다는 세조실록에 기사가 없으므로 정조조 별단(別壇)에 연좌되어 죽은 유사수 (兪思守)를 배식(配食)하였다는 정조실록 기사는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다.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지중추원사 성승을 도총관으로 도진무 김문기를 이조 판서, 3중신(三重臣)으로 대군(大君), 군(君)인 왕자(王子)가 아닌 이양을 5종영(五宗英)에 추가하여 6종영으로 날조하였으나 이양은 왕자가 아니므로 종영(宗英)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위의 내용은 세조신록과 정조 신록의 배식단(配食壇)이 다르다는 부분이 밝혀짐에 따라 누군가가 잘 못 기록한 것이다 본다. 거짓 한두 줄로 만으로도 수많은 진실을 무너뜨릴 수 있다.
유응부 장군분은 분명 단종의 충신이자 한 시대의 피해자다. 또한 남효온 선생같은 분은 생육신이라 불러야 할만한 인물이긴 분명하다.
고대의 사료가 어디서 어떻게 잘 못 되어 전해 왔는지 우리 서로가 피해자가 아닌가? 누가 조선초기의 역사를 왜곡하여 전해 왔으며
우리가 남의 잘못을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잘못 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면 문제가 많이 따른다. 역사 교육,책,사이버 공간에 많은 내용들이다.
우리고대와 근대의 역사는 미궁과 억울하게 왜곡 되어 전해 내려오는 일들이 한두 가지겠습니다까? 단종의 충신 신하들은 역적으로 취급되었으나 성종 대에 이르러 재 평과 되었고 숙종 대에 단종 복위복신들은 관직이 회복되었고 민절(愍節)이란 사액(賜額)이 내려져 노량진 묘소이레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에 제향을 모시게 하였습니다.
김 문기(백촌)선생은 숙종때 후손들은 신원을 상소 하여 1731년영조7년에 신원복관작하셨고 1778년정조2년에 충의시호를 받다
事君盡節曰忠 사군진절왈충 자기몸도 위태로운데 임금을 위함의 충 剛以能斷曰毅 강이긍단왈의 강력한 결단력과 능이 삶을 끊는 의 충의의 시호이다.
1791년정조15년에 영월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1802년(순조 2)에 김천 섬계서원에 봉안된 이래, 나주 화암서원, 옥천 호계서원, 안의 화림사, 진주 도동서원, 공주 육당서원, 은진 갈산사, 강령 충렬사, 안산 오충사, 장흥 충렬사, 부여 왕의영당, 수원 오정각, 김천 경의당, 거창 오례서원,달성 금회영각, 공주 동학사 숙모전, 경주나산사( 나산서원), 무주 가일사, 의성 덕양서원, 진안 구산서원, 양주 삼충단, 노량영당 등에 위패가 봉안되어 모셔오고 있습니다.
557여년의 지난 오늘 논문은 베끼어 쓰지 않고 역사는 영인본같아야 하며 나의 문중 자랑보다 남의 문중을 존경 해야......
위 내용은 인터넷 검색 창의 백과사전과 전고대방, 동의 록 나산서원 홍보자료등 참고로 올린 글입니다. 여기서 바르게 밝히자는 우리의 후손들은 전혀 생 트집으로 아무런 근거 없이 선조에대한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 실록에 세조실록과 정조의 실록이 다르다는 이야기고 김문기선생과 유응부장군의 양력기록이 잘 못 되어 바뀌어 알여 진 것이다.
55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서로 만족할 만큼 결정되기는 어려운 일이나 사육신에 오르면 어떠하고 사육신이 아니면 어떤 고 그 당시 단종을 위해 죽었던 충신이 어디 여섯 신하뿐인가? 수없이 많은 충신들이 억울하게 죽어 이름 없이 역사 속으로 묻혀버린 신하는 얼마나 많을 고?
지금 왔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면 후대에는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불가 하였어는 아니 된다. 300여년 후 기록한 정조실록의 내용이 세조실록과 다르다는 아래내용을 참고 하시면 알 것이다.
인터넷 사이버공간에 자기의 생각과 어느 일부분만 보고 검정도 받지 않은 채 책임도 없는 내용들이 난무 한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했습니다. 저 역시 이글을 쓰면서 심히 조심이 됩니다.
역사는 승자가 만들어 놓은 기록 이라 했던가? 세조실록을 그 당대 사관이 기록 한 것이 설득력이 있지 않은 가! 어떻게 보면 이씨왕조의 권력싸움에 우리들의 선조께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5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글을 올리게 됨은 우리의 후손들이 이글을 접하게 된다면 수많은 자료를 보고 어떻게 생각 할까?
지금 사육신과 사칠신의 사이버공간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글들이 김문기선생에 대한 모독과 음해하는 글이 난무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 결정도 인정 못 하고 무작정 우기고 보자는 것인 지, 서로 냉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 문기선생의 후손들은 고뇌와 다른 문중간 많은 분쟁을 가져 오게 하였으며 지금도 노량진 묘소에는 서로 자기주장의 싸움에 끝이 없으며 댓글에는 서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섬 짓한 욕설로 공포심을 가진다. 감사 합니다.
참고 자료 글
환형(차열형) 전근대 시대에 죄인의 머리와 사지를 수레에 묶어 신체를 좌우로 찢는 형벌 거열형 죄인을 소등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해 죽이는 형벌 참형(참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목을 자르는 형벌 능이 처참형 죄인을 죽을 때까지 살점을 베어 내어 죽이는 형벌
공신과 군주 숙주나물 공신 업보 당신(세조)이 다 감수하고 압구정(壓鷗亭) 정자는 무법자 회로 하고 권력에 눈 귀 어두우니 명분도 원칙도 무(無)였으니 웃고 있는 신(臣)들 언제 당신 목 조일 지 모르는 일 만 백성 애끓는 저주의 소리 귀전에 아롱거리고 밤이면 원한의 퇴휘(槌揮)소리 잠은 언제 이룰 고
.죽여 또 죽여 충(忠) 입귀 다 막아 놓고 천지에 못할 짓 다 했었으니 님 위에 바친 수(壽) 오백년이 지난들 뜻과 정신과 운기가 같아도 원칙과 명분이 무(無)였는데 그 누가 행 하여도 천명거역 함 이니 만백성은 당신(세조)이야기뿐인데 모두 님(단종) 백성 일세 필자 김정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반역죄인들 가족을 공신들의 노비로 삼았고 신숙주는 단종의 정순왕후 송씨를 여종으로 삼겠다고 고하니 그 때 세조는 눈을 감고 아무련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다. 퇴휘=철퇴휘두러는 녹두 나물은 변질이 잘되는 나물로 신숙주를 비교 후대에 녹두 나물이 숙주나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궁궐과 맞먹는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이며 누를 압자와 갈매기구자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상징을 비꼬아 해설하는 말 김종서는 세조 일파의 기습으로 철퇴에 맞아 목숨을 읽는다
@졍희 왕후 윤씨는 원래 세조의 배필은 윤번의 딸 정희왕후윤씨 언니였는데 혼담이 오가면서 혼담자리에 그의 언니와 동생이 같이 배석 하였는데 11살 계집이 나이에 비에 영덕하고 당돌하여 감찰각시가 철없이 하는 소리를 잘 못 판단하여 어진언니의 품행을 못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부터 남의 자리를 꿰어 차는 운명일 지도 모른다.
@세조 장자 아들이 죽는날 세조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꿈에 현덕왕후권씨(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 두어라”고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자(東宮世子)가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 왔다. 그 때문에 형수의 묘소인 소릉(昭陵)을 파헤치는 변고까지 있었다 한다.
@한명회와 이씨 조선 세조의 세력구도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윤씨(파평윤씨)와 한명회(청주한씨)는 세조의 핵심 측근에 일인자다 거기다 세종대왕시절 뛰어난 학문을 갖춘 신숙주는 한명회와 사돈사이다. 한명회의 집안은 할아버지이신 한상질은 1392년7월 조선이 건국되자 예문관 학사로 주문사로 자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란 국호를 승인 받아 이듬해 돌아 왔으며 작은 아버지이신 한상경은 개국공신이었다. 한명회는 어릴 적 부모를 읽어서나 한씨 가문의 비중을 안고 중앙무대에 오을 수 있었다. 또한 한명회의 집안에 한확의 누님은 명나라의 태종 영락 제1후궁 명나라와 국혼을 맺었다. 한씨 집안은 중앙권력계도에 위상이 됨으로 이를 활용하게 되어 세조장자이장과 한명회의 일가인 한확의 막내딸과 혼인을 하게 되었으나 세조3년에 아들이 20세 나이에 갑자기 죽자 며느리(한확의딸)를 사가로 내 친다.
한명회의 6촌동생인 한계미는 세조의 왕후인 정희왕후윤씨의 언니와 혼인 하여 방계사돈간이 된다.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황과 한명회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된다. 정희윤씨왕후와는 방계사돈에서 직접사돈사이가 되게 된다. 세자빈으로 책봉 된 한명회 딸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듬해 왕실의 전통적인 원손대성대군을 낳는다. 그러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한씨는 슬프게도 산후병으로 요절한다. 그후 정순왕후가 낳은 대군 마저 3살이되어 죽고 만다. 한명회와 세조와 정희왕후의 권력구도에 승승장구였지만 어떻게 보면 단종의어머니 현덕왕후권씨의 저주 때문에 이란 인간적인 떠도는 소문에 뒤가 풀리지 않는 삶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위한 한명회는 자기 딸이 죽은 6년 후 그 자리에 한확의 10촌벌 되는 한백 윤의 딸을 해양대군의 차빈으로 맞이하게 한다 한 백윤은 어질고 검소하며 인품이 뛰어났어나 정치에는 뜻이 없었던 사람 한명회의 속내는 정치적 야심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뿐이 아니다 한명회는 자기의 막내딸과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에게 시집보낸다. 이 여인이 조선왕조9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이다.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는 결탁의 집권에 조선왕조에 권력을 위한 국혼관계는 후대에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할런지? 국혼장악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 장악을 유지하기위한 방편인 혼인 관계인 것이었다. @아버지이신 세종(이도)께 수양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경계를 많이 하셨지요. 유명스님이 세조의 관상을 보고 할아버지(방원)와 꼭 빼닮아다 하였니. 세종이 어딜 요? 성품이라고 남기고 사라졌다 (이방원은 역모 상)
@조선왕조실록에 제일 먼저 성삼문선생에게 문초하게 되자 김질에게 알여주었던 정도인, 박팽연,이개,하위지 류성원과 모의 했다고 말하자 세조는 만족하지 않고 주리를 더 틀게 하자 유응부,박정이라고 말 하였고. 다음은 하위지선생을 불러들여 문초 하였으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반복하였고 다음은 이개선생을 문초 하였는데 하위지와 같은 대답으로 나는 모르는 일이오 란 대답뿐이였다 한다. 이들은 하옥 되었다.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된 사실을 알고 이휘가 자수하여 박팽연, 이개,하위지,류성원과 술 마실 때 정삼문이 말 하드라고 하고는 박중림(박팽년의아버지)박정도 알고 있다고 고 했다. 박팽년의 문초에는 성삼문,하위지, 류성원, 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영손, 이휘및 자기아버지(박중림)라고 말 하고 운검을 하고 세조를 죽이려는 방법까지 불었다. 여기서 김문기선생의 고문당시 살 점을 볏겨 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 잘 여는 신에게나 물어 보라면서 수양(세조)을 꾸짔어며, 문초에 동지들이 단종에게 칼을 받은 것까지 말 하자 김문기선생은 백면서생과는 속내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맞구나 하면서 문초에 불복 했다 한다. 백면서생 [白面書生힌백,얼굴면,책서,날생] 글만 읽고 세상에 대한 실제 경험은 없는 사람, 강인하지 못하고 나약한 문신.
조선왕조실록의 진실 고문의 문초에 모두 복 했어나 김 문기만이 불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두 대의 수레에 매어 사지를 찧는 죽음으로 轘刑(환형)되었다 한다 1456년6월(불의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절로 56세의 나이로 아들 현석(연병제현감동)과 의를 다하고 순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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