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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씀 / 갈라디아서 2:11~21
요절 / 갈라디아서 2:16a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모든 인생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감사제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받은 주의 종들에게 가장 크고 위대한 자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항상 간직하고 믿음으로 사는 주의 종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바울이 베드로를 견책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고넬료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깨끗케 하시고 받으신다는 것을 영접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편협한 유다이즘에서 벗어나 이방인 신자들과 교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여 예수님 영접한 이방인 형제들과 어울려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가 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왔다는 것인데, 유대 전통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밥 먹다가 자리를 떴습니다. 같이 밥 먹어 놓고 ‘나는 안 먹었다’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하자 다른 사람들도 ‘우리도 이방인들과 밥 안 먹었다’고 잡아뗐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온 후 유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이 꺼릴 것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도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인 형제들에 대해 우상숭배와 간음 등 몇 가지 제한 사항 외에는 다른 어떤 율법의 행위도 짐 지우지 않는다고 결의하였습니다(행15:14-21). 그런데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전통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온다고 하니까 갑자기 부담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삶에서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의 위선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준 것입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위선적 행동을 따라 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를 책망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 하느냐?"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한 형제라는 사실을 가지고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예수님의 순수 복음 진리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바울은 누구에게라도 예외 없이 당당하게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면 사도 베드로까지도 분명하게 책망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도 믿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까? 십자가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십자가 복음 외에 구원을 위하여 다른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는 율법은 십계명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자 십계명 외에 세부조항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토라’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토라’라고 하였습니다. 토라는 두 가지로 나눕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율법이고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 율법이어서 둘을 ‘토라 쉐비크라’, ‘토라 쉐비케투바’로 구분 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말씀 안에 명시된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을 ‘미츠보트’라 하는데, ‘미츠보트’는 다시 ‘타아바’와 ‘레아’로 나뉩니다. ‘타아바’는 긍정적 계명을 칭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계명입니다. 레아는 부정적 계명으로 하지 말라 하신 금지 계명입니다. 또한 미슈나가 있는데, 미슈나는 토라의 미츠보트들을 해석하고 구체화시킨 랍비들의 가르침입니다. 미슈나는 약 600개의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6:5에 있는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미츠보트’입니다. 미슈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명시한 것입니다. ‘미슈나’에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필요한 윤리적 원칙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미슈나’에 대한 주석이 탈무드입니다. 미슈나에 대한 랍비들의 토론과 논쟁을 기록한 것이 ‘게마라’인데, ‘게마라’에는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일일이 이름소개조차 복잡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토라’를 암송하였고, 토라 안에 있는 ‘미츠보트’들을 일일이 ‘열거하였고, ’미츠보트‘를 실생활에 적용하고자 ’미슈나‘를 기록하여 실생활에서 행하였는데, 그것을 상세하게 더 풀어서 ’탈무드‘로 내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많은 랍비들의 많은 의견, 세세한 내용들을 ’게마라‘로 내놓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미슈나‘에는 약 600개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고, ’탈무드‘에는 5만개의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의거하여 랍비들이 제정한 법률인 ’하라선‘에는 셀 수조차 없는 더 많은(200만 개)의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외 ’카슈루트‘, ’샤바트‘가 더 있습니다. 지금 열거 한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남긴 기록상의 숫자입니다. 더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돌아볼 때, 우리는 십계명 어긴 것도 많습니다. 유대인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수많은 세부조항을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나약하다는 결론을 얻게 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근사해 보였습니다. 넘볼 수 없는 고상함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그랬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체계적이고 치밀한 많은 규정을 담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지키지 못하는 많은 계율이었습니다. 만든 유대인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키지 못하면서 다 지키는 척 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 보지 않는 곳에서는 율법을 범하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는 율법을 자랑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오만해졌고 남몰래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달으면 심판의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답답하였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장 잘 알았습니다. 율법은 오만과 위선, 절망과 거짓을 열매로 맺을 뿐, 전혀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없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자랑은 속 빈 강정이요, 구원에 관해서는 겉으로 빚 좋은 개살구와 같았습니다. 구원의 확신, 구원의 기쁨, 영생에 대한 보장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뿐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만이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과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로써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율법주의자들이 문제제기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믿고 구원받았다 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다시 죄를 짓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어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죄 짓는 일이 많으니 문제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자 하였습니다. 믿음도 좋지만 율법도 필요하다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데에서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냐는 주장입니다. 신자들의 연약함을 근거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 믿는 믿음을 격하시키는 주장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무슨 이유가 되었든지 믿음의 길을 버리고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믿은 사람이 믿고 난 후에도 육신이 연약하여 범하는 죄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회개하면 됩니다. 믿은 사람이 연약하여 짓는 죄는 회개한 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받아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3절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기록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에는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11절에는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회개하고 성령의 힘으로 살면 되는 것을 가지고 연약한 신자들의 약점을 잡아 이전에 허물어 버린 율법의 집을 다시 세우는 것은 죄 짓는 것이 될 뿐이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자기가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은 후 나는 이제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 이제 사도 바울과 또 우리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자신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은 자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본격 살아가게 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 자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죄로 타락한 나는 죽고 내 안에 지금 사신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5절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완전히 죽고,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함께 연합하여 부활 새 생명을 얻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헛되게 하는 주장입니다. 믿음 외에 추가로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없는 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에 파고들어오는 유대 율법주의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 진리를 지키고자 기록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공격하였습니다. 장황하고 외견상 거룩해 보이는 율법의 권위와 전통을 들이대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폄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믿는 것 대신 율법과 행위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이라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는 것이 가장 귀하고 중요한 생명의 복음을 지키는 것임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굳게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유대 율법은 대단히 권위 있어 보였습니다. 랍비들은 대단히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율법을 체계화하였습니다. 토라를 기초로 미슈나, 탈무드, 게마라 같이 구전하는 법전을 만들었고 신앙과 윤리와 법률과 전통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체계가 없어 보이고 초라하며 부끄럽게 느껴지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는가? 죽는 것은 패배가 아닌가? 당시 로마인을 비롯한 많은 이방인들은 ‘십자가 복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요, 저주입니다. 큰 모욕과 저주인데 어째서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십자가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힘을 선이라 여기는 이방인에게는 부끄러운 것이 당시 세계에서의 보편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초로 볼 때,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교회에서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십자가를 꺼리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누가 나를 비판했다는 말이 들리면, 화가 납니다. 누가 나의 문제를 지적하면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죄 많은 나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상처까지 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고 생각해보면, 문제가 드러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죄를 내려놓고 이제 나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나가겠다는 일신의 계기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마음에 없으면 사람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왜 나더러 문제 있다고 하는가? 나는 원래 틀린 말은 안 하는 사람이야’ 주장합니다. 십자가 따로 생활하는 것 따로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생활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센터 개척기 어려움을 이야기 한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의 1/3 정도, 1/4 정도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생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길을 지나올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포인트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괴롭고 고통스럽고 화나고 참을 수 없는 긴 시간들을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가 우리센터의 자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의 자랑입니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다투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적인 상황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로 인하여 극복이 되며 지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인내할 수 있게 하였고 소망 가지게 하였으며 오히려 자기문제를 넘어 주의 양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은혜가 된 것입니다. 누가 나를 욕하면 기대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어떤 은혜의 세계로 이끌지 기대가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숨지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였습니까? 누가 나의 허물을 이야기 하였다면 예수님이 더욱 잘 생각나고 이후에는 은혜 받을 찬스가 온 것 아닙니까? 이제 나는 나의 문제를 시정할 것이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의지하는 나를 근거 없이 비난한 것이라면 비난 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므로 그런 문제는 화 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제 삶에서 의지하는 우리에게 괴로운 사람간의 문제는 오히려 기대로 바뀝니다. 손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큰 보상으로 바뀌어서 주어집니다.
우리 학생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받아들여 적용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학생회는 3, 4 학년 때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4학년 되면 고민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에 시달립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을 거듭합니다. 우리 학생회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잠시라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습니다. 끝까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죄 없으신 분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무슨 능력이든지 행할 수 있는 분이 고통과 수치와 모욕과 괴로움을 다 참고 감당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의 죄 값을 치루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그 죽음의 고통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지금 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미 나에게 있어왔습니다. 실감 하지 못하는 것이 불안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고 있고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나가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고 나가면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어떤 도전에서도 성령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없다 하며 복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비난하고 나를 비판하고 나를 적대시 하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내가 괴롭다 여기기보다 예수님 십자가를 믿고 잘 참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나가면 나는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좋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굳게 붙잡아야 할 나의 자랑이요 나의 의지라고 믿지 않는다면 성장도 열매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을 때,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사랑이 내안에 있어서 학생들의 장래문제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민거리조차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의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굳게 붙잡고 모든 산을 넘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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